일본 군국주의가전면적으로 중국을 침략한 1930~40년대 중화민족은 생사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바로 이 백척간두의 위급한 시기에 빈번하게 내란을 일으켰던 중국 공산당은 “1할은 항일하고 2할은 대처하며 7할은 발전하자”(모택동)라고 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중국 국민당은 “지역은 동서남북을 나누지 않고 사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며 다 함께 항일하자”(장개석)라고 했다.
국민당은 자신이 말한 그대로 시행했고 전면적으로 항일했다. 평지에서나 산에서나, 황하 양안이거나 장강 유역에서, 도시 중심에서나 심지어 미얀마 전쟁터에서도 국민당군國軍은 목숨 걸고 싸우느라 큰 희생을 치렀다.
국민당군이 일본군과 격렬한 혈투를 벌일 무렵 중공은 그 사이에서 유격전을 펼쳐 어부지리를 얻고 무장을 확대하고 기반을 약탈했다. 중공은 주요병력을 국민당군을 전력을 소모시키는데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침략군, 왕정위 괴뢰정부(일본 침략군이 상해에 설립한 괴뢰정부), 만주 괴뢰정부(일본 침략군이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를 내세워 만든 허수아비 정부)와 암암리에 결탁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협조하면서 함께 국민당군에 대처하고 와해시키려했다(모택동은 반한년(潘漢年)과 양범(楊帆) 등을 일본과 연계하고, 괴뢰정부와 연계하는 특사로 임명했다).
항전 기간에 국민당군은 22번의 대형전투와 약 4만 번의 소형 전투를 치렀으며 1000여 차례의 중요 전투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고급 장교만 200여 명에 달하고 희생된 군인은 300여만 명에 달한다. 중공군대가 내세울만한 것은 ‘평형관平型關전투’(임표가 지휘하고 국민당군과 합작)과 ‘백단대전百團大戰(팽덕회가 지휘)’ 단 두 차례 전투뿐이었다.
그러나 겨우 두 번 작은 전투들을 치렀지만 모택동은 “아군의 병력을 여지없이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까지 끌어들였다”며 책임자를 호되게 비난하고 반대했다.
팽덕회彭德懷는 일찍이 모택동의 박해를 받을 때 비분에 겨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일본놈들을 물리친 것도죄가 된단 말인가?”
공산당은 일본의 중국 침략을 빌미로 세력을 키웠고(중공군 200만 명으로 팽창) 국민당은 혼신의 힘을 다해 항일하느라 쇠약해졌다(국민당군 400만 명으로 감소). 일본에 대한 항전이 시작된 이후 국민당군은 긴 방어선을 보위하느라 또 수많은 항구, 다리, 중심 도시들을 지키기 위해 큰 책임을 감당해야 했고 병력이 급속히 분산되었다.
그러나 중공군대는 오히려 고밀도로 결집해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고” “전술적으로 많은 인원으로 적은 인원을 치는” 계략을 썼다. 이렇게 국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마침내 국민정부를 뒤엎고 중국 역사상 가장 잔혹한 독재통치를 시작했다. 중국군은 중공에 패한 것이 아니라 일본 침략자 및 중공과 소련에게 공동 패배한 것이다.
1944년과 1966년, 일본군과 중공은 항일전쟁 시기 전사한 장병들을 기념하는 ‘남악南岳충렬사’를 의도적으로 훼손했다. 중공은 1992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조품을 다시 만들었다. 1972년 모택동은 일본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일본측의 사과를 요구하기는커녕 “당신들이 오지 않았다면(일본군의 침략) 우리의 오늘(중공의 집권)이 없었을 것이다”라며 직접적으로 사의를 표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다시피 중공과 일본은 일찍이 서로 의기가 투합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중공은 교과서에 ‘항일을 이끌었다’며 역사를 왜곡했지만 피와 땀으로 쓴 역사적 사실을 몇 글자로 날조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항일 전쟁을 이끈 것은 중국 국민당이었고 대일 호국 전쟁을 오히려 방해하고 이용한 것이 바로 중국 공산당이다. 바른 것과 사악한 것, 충신과 간신을 명확히 분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