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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9-03 20:09
[기타] 자금성과 경복궁의 비교
 글쓴이 : 방각
조회 : 6,342  

명.청의 정궁 자금성과 조선의 정궁 경복궁의 비교는 단골소재이긴 한데
굳이 이런 글로 비교하지 않아도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궁이 더 큰 규모를 가진 궁이란건 다 알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왜 그렇게 뻔한 사실을 계속 호도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자금성이 더 큽니다. 그리고 더 잘 건축되었습니다.

면적도 더 넓고 높이도 더 높고 건물 하나하나의 규모도 더 웅장하고 더 화려합니다.

당연한 겁니다. 두 건축물에 동원된 인원이나 건축기간이나 들인 노력과 자금이나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국력의 차이만큼 두 궁성도 차이가 납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금방 그 차이를 느낄것을 뭘 그렇게 부정하려고 몸부림을 치는지. 그냥 두 건물 있는 그대로 보면 됩니다.

그냥 간단히 두 궁성의 정전인 태화전과 근정전을 비교해 봅시다.

태화전 동서 60m 남북 33m 높이 35m
근정전 동서 30m 남북 21m 높이 25m

web_2038805174_23b2817e.jpg

web_2038805174_1c518ddf.jpg
경복궁 VS 자금성.jpga.jpg

애초 두 궁성은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왜 비교를 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그냥 자금성은 자금성이고 경복궁은 경복궁일 뿐입니다.
그냥 그렇게 있는그대로 보면 될 것을 무슨 조선의 5대궁궐의 면적을 다 합치면 자금성보다 넓으니 어쩌느니 하는 그런 어그로를 끄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청의 4대궁궐인 자금성,이화원,원명원,피서산장 중에 자금성이 가장 작습니다.
오직 정치를 위한 정궁이니까요. 황제의 휴식공간인 이화원.원명원,피서산장은 더 어마어마합니다. 이화원의 그 거대한 곤명호가 사람들을 동원하여 만든 인공호수라니 말 다한거죠. 거기서 파낸 흙을 쌓아서 만든게 바로 만수산이고...솔직히 조선이 흉내낼 수 없는 스케일입니다.

그냥 자금성은 자금성이고 경복궁은 경복궁일 뿐입니다.
쓸데없이 두 궁성을 비교하는 뻘짓은 그만합시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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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잡스 15-09-03 21:17
   
명.청의 정궁 자금성과 조선의 정궁 경복궁의 비교는 단골소재이긴 한데
굳이 이런 글로 비교하지 않아도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궁이 더 큰 규모를 가진 궁이란건 다 알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ㅋㅋ

방각> 딱보니 급조 아디 하나 만들어 물타기하군.

자금성이고 경복궁이고 다 각자 의미있는 건물인건 두말이 필요 없고 말은 바로 하고

바로 알아야.  굳이 애써 모르는 척 바로 아래에 상세히 올려줘도 무시하려고 하나 본데

아래부터 3번을 언급하지만

자금성(紫禁城)의 성(城)은 임금과 일가족 그리고 이들을 보필하는 이들이 생활하는

궁(宫)들과 행정 업무등을 할 수 있는 시설을 포함하여 해자와 방어시설등을 거닐고 있는

일종의 내성(內城)을 의미하며 자금성안에는 건청궁(乾清宫), 곤녕궁(坤寧宮), 어화원

및 양쪽으로 동륙궁(东六宫), 서륙궁(西六宫), 자녕궁 등이 다 들어가 있는 구조.

이에 반해 한양도성은 조선 도성의 외성으로 내성은 따로 두지 않는 대신에

내성(內城)의 공간인 조선 5궁이 들어가 있다는 말. 즉 자금성으로 치면 내성안에 경복

궁은 하나의 건축물과 공간이지 애초에 성(城)과 성안에 들어가는 분자인 궁(宮)으로

비교해서 더 크니 어쩌고 이해하는 자체가 무지.(그리고 무슨 조선은 궁 건물을 크게

짓을 역량이 안되어 고려시대 이전보다 작게 지은줄 아시남? 유교적 예례에 따라

조화를 맞춰 이전시대보다 나름 검박하게 지은 것이지. 그리고 지금의 모습도

임진왜란 시절 불타기 전의 초기 궁궐 건물 모습과는 다름.)

그리고 실제 조선의 정궁은 경복궁이 아니라 비슷한 면적의 창덕궁이였고 직접 가보면

알겠지만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로 대비등 어른들을 모시는

공간이며 경희궁과 경운궁 역시 잽이 파괴하기 전에는

본래 홍교로 연계되어 있는 구조로 근거리에 경복궁과 배치된 구조.



조선 내성(內城)(경복궁 +창덕궁 +경희궁+창경궁+경운궁)

43만㎡+ 43만㎡+ 23만㎡ +21만㎡+6만㎡ (아래 단위는 생략)
=136만㎡

자금성(내성(內城)) 면적
72만㎡


조선 내성(內城: 조선5궁)>>자금성(내성(內城)
     
환쟁이토벌 15-09-06 11:56
   
한양도성은 북경고성과 비교해야맞지 ㅋㅋ
북경고성도 내성 외성이 있어요 ㅋㅋ 억지도 가지가지 ㅋㅋ
          
굿잡스 15-09-06 12:51
   
???

환쟁이>  닉값한다고 이전부터 물타기 어그로형에 난독증은 여전하구만.

지금 뭔 한양도성과 자금성 비교임?? 한심해서리.

한양도성안에 내성에 해당하는 조선 5궁과 내성의 자금성 비교 면적이지.

(하여튼 보면 이전부터 풀어서 올려주는 한글도 제대로 이해못하는 대뇌 자폭수준하군. 쯧)
               
환쟁이토벌 15-09-06 18:13
   
중국도 북경 안에만 궁궐이 여러개인데 너무 한쪽으로 유리한방식으로 편향된 비교같습니다만??ㅋㅋ  비교해더라도 자금성이랑 경복궁이랑 비교하는게 맞지 5개를 합친거랑 비교해야한다니 너무 억지스럽고 보기 민망할정도네요ㅜ

고구려까지 갈필요도없고요 이양반아 그냥 구글어스로 둘다 검색해서 비교해보세요
                    
굿잡스 15-09-06 22:17
   
중국도 북경 안에만 궁궐이 여러개인데 너무 한쪽으로 유리한방식으로 편향된 비교같습니다만??ㅋㅋ>??? ㅋㅋ 참나.

환쟁이> 그냥 헛소리 할려면 본인 일기장에.

위에는 무슨 북경 고성과 한양도성 어쩌고 이야기 쳐하더만 하다 안되니

무슨 북경안에만 궁궐이 여러개?? 이건 뭔 자폭질도 한두번에 바로 아래에도

장문으로 그리고 위에도 친절하게 내성과 외성 그리고 내성격의

자금성 안에 여러 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놓았구만 뭔 알지도 못하면서

내내 헛소리질 하시남? 아님 번역기 돌린다고 한글 독해가 안되남?

북경 고성안에 자금성안에 여러 궁궐 말고 뭐가 있다는 말임?? 이건 뭔

내성이 뭔지 외성이 뭔지 개념 자체도 없고

풀이해서 올려줘도 번역기 돌리는지 내내

헛소리 쳐하면서 물어 보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 인간이 뭔 아는척 연씬 어쩌고.

전형적 어그로의 표상하군.


저위에 방각이라는 사람이 별장 개념의 이화원.원명원,피서산장같은 행궁(行

宮)가지고 이제는 쳐떠들면서 무식 자폭질에 히죽거리남? 참나.

지금 자금성같은 내성안의 정궁이나 이궁 개념과 행궁 개념도 다시 말해줘

야 하는 한심한 어그로 하군.


위에 다른 댓글에서 한 설명 올려놓았지만

최소한 자금성은 그나마 인정하는게 서토 소위 한족이라는 명시기 영락제가

만들었던걸 이민정복왕조 만주족이 들어가서 살게 된 거니 그렇다고 치더라

도 이화원은 신라계황제와 (후)발해민 연합의 금나라가 송을 멸망시키

고 북경에 고구려계 장호가 중도를 건설하고 행궁으로 이화원도

개발했던게 금나라시기. 이후 앞선 요부터 금, 원, 그리고 고작 서토인 명나

라 200년 지나서 다시 이민족 만주족 청의 300여년. 즉 서토인이 북경에 고

작 잡고 있던 시기가 200여년에 이민족 정복왕조가 무려 600여년을 지배하면

서 이화원부터 이후 저런 별장도 청시기에 나온걸 가지고

이야기하기에는 역사의 내막을 들어다 보면 낯부끄럽고 (마치 잽강점기 조선

총독부 가지고 와 대단한 건물이다 자랑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그리고 저런 별장이야 인공 호수 어쩌고 해도 기본 자연 공간에 일부 건축물

을 둔 거지 그걸 둘러싼 전형적 성곽 형태도 아닐 뿐더러

조선의 한양은 우리의 성곽 전통에 따라 기본 평지성인 한양도성(18.6Km)과

아래에도 올렸지만 인접한 12.7km의 북한 산성, 11.76km의 남한산성같은 도시

형 대규모 산성의 셋트형 이것도 다 행궁. 그외 조선 초기에는 개경(23㎞)도

왔다 갔다 했고 그외 대표적 평양행궁(23㎞),수원화성행궁(5.52Km), 강화행궁

(7.12km), 의주행궁(8.3㎞),온양행궁,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등 10여개 이상으로 넘쳐남.


되지도 않는 쉰소리나 쳐할려면 그냥 발씻고 잠이나 자던지 헛소리는

본인 일기장에나 주절거릴 것.(이 어그로는 또 뭔 혼자 쉰소리 주절

주특기 또 할려나?  뭔 넷이라고 익명을 통한 국적불명으로

하는게 내내 이런 생활이니 어그로가 어디갈까 마는.쯧)
굿잡스 15-09-03 21:23
   
고구려 초기 2대 유리왕시절 축조되기 시작한 환도성

앞 궁궐 건물지 무려 90미터.

http://mnews.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343393


고구려  5세기
 
<안학궁 남삼문(南三門) 중 남중문(南中門) 38m 앞면 7칸

안학궁 남궁 1궁전(정전) 62m 앞면 11칸

안학궁 중궁 1궁전(편전) 87m.  앞면 19칸 >
 
 
7세기에 세워지고 확장된 당나라의 최대궁전인 대명궁의 정전인 함원전 정면 길이가 67.33m
 
북경  자금성에서 가장 큰 건물 태화전 정면 64m


동대사 크기는 높이 48m, 가로 57m, 세로 50m라오. 안의 대불은 15미터  =>백제인에 의해 건립.



인도의 타지마할의 기단 크기 94m, 건물 크기 57m

발해의 상경용천부 제2궁전 기단 크기 120m, 건물 크기 93.5m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6234&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83%80%EC%A7%80%EB%A7%88%ED%95%A0&sop=and


 
고구려는 안학궁으로부터 750m 떨어져 있는 유사시를 대비한 배후 산성이
 
대성산성으로 전체 9km가 넘고 둘레는 7km가 넘으며 남문이 있는 골 안에서는 2
 
중으로,주작봉과 국사봉 골 안에서는 3중의 겹성에 내부에는 연못이 자그만
 
치 170여개가 존재.
 
http://blog.naver.com/bestchoi21/20018007630 -> 대성산성 사진
주글랭말랑 15-09-04 08:44
   
동양 최고의 궁전이 자금성이라잖아요 ㅎㅎ 물론 과거의 경복궁이 대단할지 모르지만... 현재의 경복궁은 어떤가요... 일제침탈 땜에 다 타버리고 남은거라고 근정전 향원정 경희루 이것밖에 없죠.... 지금 재건 하고 있다죠? 다 완성 돼도 자금성에 비하면 세발의 피죠 ㅎㅎ 실제로 봤는데... 자금성이랑 비교했을때 너무 초라했다는거에요...ㅠ  괜히 황제의 궁이라고 불리는게 아니였죠 .. 구한말에 경복궁 사진 남아있는데 그때 엄청 크고 넓었죠... 대원군이 복구시킨게 옛날 경복궁이랑 똑같이 복구한거죠... 그래도 자금성에 비하면 아기수준... 인정할건 인정해야죠... 서양인들에게 물어보면 동양 최고궁전 말하라면 100에 100 자금성이라고 말하죠
     
굿잡스 15-09-04 10:27
   
ㅋㅋ 하긴 조선 고궁처럼 아담하고 이쁜 담장과 운치나는 조경과 어우러진 자연지세와는

거리가 한참 먼게 자금성이긴 함.ㅋ 직접 가보면 단순 높은 담장에 붉은 색 떡칠

하며 자객 침입 어쩌고 하면서 성내에 제대로된 나무 한그루 없이 휑한게 명 군주

들 중에 사이코들 많이 나온 이유가 나름 있긴 하지요.

그리고 님은 최근에 공개되기 시작한 창덕궁 후원의 기호헌같은 왕세자 공부방

건물 보면 더 초라 어쩌고 놀라겠군요. ㅋ.  일국의 왕세자의 공부방이 어느 사대부

집 공부방 건물보다 못한 매우 검박한 수준에 그것도 남의 눈에 잘 보이지도 않던

후원에서도 그러고 놀고 있었으니.(일국의 왕세자 아비가 권력이 없어? 돈이 없어 조선은

이러고 놀았을까??)

고려와 조선은 세계관부터 그래서 문명관 또한 다른 시대임. 이걸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듯 하신데 고려시대에는 지방에서 조차 귀족들은 축구장 이상의 장원

에서 개인 사병을 거느리고 고루 누각들이 웬만한 대도시에는 흔한 모습들이였지만

동북방(고조선 문명권과 관련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상황이고)에서 내려온

동이족 상나라의 후예로 이야기되는 공자가 춘추전국시절 서토가 혼란기로 점철되자

이런 동이족의 예법과 제례등을 재집대성하고 체계화한 유교가 송,명을 거치면서

서토에서는 정치적 통치 수단 정도로 가지만

유교의 완성은 조선에서 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선은 정치에서도

동북아 나라중에서 유일하게 제대로된 발전적 공론 정치화를 구현했고

(일반 조선의 서민 서당 교육도 무슨 단순히 드라마에서 보이든 하늘 천 따지 어쩌고

읽고 따라하던 수준이 아니라 자율적 문답과 개인의 자율적 사고를 작문화 하는 등

오늘날 미국같은 수업방식)

단순히 정치 부분뿐 아니라 개인의 수양과 생활 밑바닥까지 이런 유교의 윤리 규범과

실천적 생활화로 유교 문명국을 지향했던 나라였군요.  지금에 와서야 이게 잘 이해가

안될지 모르지만 중세 시절 카톨릭이 중세 유럽의 세계관과 문명관의 기본이고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 이런 조선 역시 유교를 단순히 정치 이념을 넘어 생활의 가

장 보편적 윤리와 도덕관으로 체질화시켜 냈고 그러다 보니 조선의 지배층 조차 함부

로 건물을 확장, 탐심을 가지지 못하게 아예 법제화 규격화했던 시대상에 조선의

한양 도성내에서도 궁궐의 주요 관리들이야 내에서 머물렸지만 상당수가 양반층이

아니라 중인 이하의 계층들이였음.

그리고 지방의 중요 읍성조차도 일반 양반층들이 성내에 살았던 시대가 아니라

이들은 도리어 향촌 자치화로 성 외의 변두리에 본인들 성씨집단을 이루고 후학양성

및 향촌화로 도리어 이런 시골 변두리에 도시에서 볼 기와집들이 읍성내보다 더

많이 보이든 시절이군요. 이게 뭔 소리인줄 아시겠는지?

태조, 태종, 세종, 성종등 조선 임금의 시호에 조,종이 붙은 것만 봐도 알겠지만

조선은 엄연히 황제 시호를 붙이고 놀던 나라임. 그기에 실제 대외의 왜국,유우국등

주변 여러 나라에서도 조선의 임금을 황상,황제로 불렀고.

무슨 조선시대 건물이 고려시대에 비해 규모가 축소되고 다층 누각이 줄어들었다고

황제 지향 아니고 뭐 어쩌고 이런 단순 사고로 보면 참 이해부족이군요.

(아기 수준 어쩌고 하는 자금성 절반 이상의 경복궁이 고작 1여년 만에 만들어진 궁궐)


그기에 이민족 만주족이 서토를 정복하고 자금성 안에 지낼때 서토인 웬만한 관리

들은 자금성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음. 이때문에 자금성은 근대 서구 열강시기까지

비밀의 성으로 인식할 정도였고 서토인들도 자금성 안에 도대체 누가 살고 뭔 일을

하는지 몰랐던 시대 상황이였지만 조선의 도성은 내성 대신에 낮은 담장으로 그만큼

주변 백성의 여론과 동향에 민감하고 민의를 상당히 존중, 반영하는 정치철학과

건축 양식이나 문명관에서도 자연스러운 조화를 중시하고

지나치고 과함을 경계하는 걸 큰 미덕으로 하던 생활 철학을 가졌던 시대.


그리고 아래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나라 고대 도시문명 즉 성곽은 단순히

서토처럼 단순 평지형만이 아니라 대규모 도시형 산성에 탁월한 역량과 특징을 가

졌고 이런 오랜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다르지 않게 평지성인 한양도성과 인접한

12.7km의 북한 산성, 11.76km의 남한산성같은 도시형 대규모 산성을 셋트형으로

축조.
     
굿잡스 15-09-04 10:35
   
(조선)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62414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A1%B0%EC%84%A0+%ED%99%A9%EC%A0%9C&sop=and
 

에도막부, 조선통신사 일행에 극빈 대접

“한해 쌀 수확량 12% 접대비로 사용”

옥스퍼드大 루이스 교수 논문

“일본이 조선통신사의 한 차례 방문에 쓴 접대비용은 (일본의) 한 해 쌀 수확량의 12%를 넘었다.”


http://news.donga.com/3/all/20090202/8690797/1


(5월 3일) 술시(戌時) 조선의 도읍 동대문으로 진입, 거기서 황성(皇城)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玉樓■x殿)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軒)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중략)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위에 솟아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秦宮)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중략) 후궁(後宮)에는 화장품 향기가 감돌고 산호의 대상(臺上)에는 화려한 거울이 덧없이 남아있다. 난 향기는 전각 밖까지 풍기고 사람 살던 자취도 그렇거니와 하염없는 구슬로 장식한 침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을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도 천자(天子)의 옥좌(玉座)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에도시대의 문헌 "조선정벌기 (朝鮮征伐記)"에서-

天順三年,邊將奏,有建州三衛都督私與朝鮮結,恐為中國患

명사

천순3년(1459년 조선세조 제위당시) 변경장수가 보고하길 건주삼위의 도독이 몰래 조선과 결탁하였습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중국이 병이 나다.


세조실록
 
야인과 왜인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우리의 신민(臣民)이니 왕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 하여 혹은 무력을 사용기도하고, 내가 즉위한 이후에 남만, 북적,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아니다. 흑룡강, 속평강, 건주위, 올량합, 이만주 동창등 심처 야인과 삼위 달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입조하기를 청하거든, 그 종인을 줄여서 후대하여 올려보내라


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1월 2일(경오) 3번째기사
 
시무8조에 관한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문
 
우리 나라의 인민(人民)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이고, 정예(精銳)한 병졸이 10만 명이며, 용감한 군사가 3만 명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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