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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8-11 16:22
[기타] 고려에는 거란어,여진어,한족어 통역관은 있어도 발해어 통역은 없었다.
 글쓴이 : 뇌질청예
조회 : 5,706  


고려시대 발해인 관련 기록에는 고려인이 발해인을 동족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표현은 없습니다.

 그렇다고하여 이것이 발해인과 고려인은 동족이 아니다라고 섣부르게 판단하는것도 우습지요.

 물론, 동족이라고 표현한 기록은 없으나 발해인이 마지막까지 역사무대에 끝까지 살아남아
등장하는 동시대 고려의 기록들의 이면을 곰곰히 뜯어보면 최소한 고려인들이 발해인들을
거란족 여진족과는 달리 부담없이 친연성 높은 부류로 인식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그근거로서, 첫째, 거란족 여진족 한족에 대해서는 역어 즉 통역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등장하지만
거란족 여진족에 비해 내투(이민)의 숫자면에서나 횟수면에서 월등히 많은 발해인에 대해서는
역어 즉 통역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만일 발해인도 거란족, 여진족과 마찬가지로 당시 고려인의  입장에서 언어가 상당히 달랐다면
분명히 가장 많은 내투 기록을 가지고 있는 발해인들에 역어 관련 기사가 반드시 등장해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역어가 없었다는것은 최소한 고려인과 발해인 사이에 통역없이도 대화가 가능했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거란에 대해서는 태조왕건이 거란은 풍속과 언어가 우리와 다르고 발해를 멸망시킨 금수만도 못한나라
운운한 기록이 있습니다.
여진에 대해서도 역어를 두어 흑수말갈 등과 교류했다 합니다.
한족의 송나라는 두말할 나위없습니다.

문제는 여진족에 대해서는 똑같이 발해시대에  고구려유민과 마찬가지로 발해를 구성했던  발해인임에도
고려사에는 고려인들이 발해인과 여진인에 대한 시선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진족은  후삼국시기부터 고려의 북방을 심심치않게 약탈하는 짐승같은 족속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반면, 발해는 왕건 시대로부터 발해유민 관련 마지막 기록이 보이는 12세기 초반 예종시기에이르기까지
단한번도 고려를 약탈했다는 기사 한줄 없습니다.
그리고 여진인에 대하여는 거의가 조건부 귀화임에도 발해인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조건부로 귀화를 허용했다는 기사 한줄 없습니다.

고려사 기록에 발해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이 이끌고온  발해인들을 고려에서는 홀한인이란 표현을 써서
가리키고 있는데 홀한이란 바로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를 이릅니다.
그러니까 당시 고려인들이 고구려계통 발해인들이 주류로 살고 있던 상경용천부 출신은 최소한 고려사회에
바로  유입되어도 고려에 해를 입히지 않는 문화와 종족적 유대가 있었음을 반증하는게 아니냐는게 제생각입니다.  이와 반면  발해시대부터 고구려계통주민들이 많이 살던 발해5경보다는 발해 주변부에 살던 여진인들에 대해서는 왕건시대부터 적대적인 기록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볼때  고려인들은 발해인과 여진인을 언어적 문화적으로 다른 계통으로 이해했고 전자는 고려사회에
바로 받아들여도 될만큼 종족적 유대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실제로, 거란과의 3차에 걸친 전쟁에서 발생한 수만명의 거란인 포로들은 (물론 걔중에 발해출신 포로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지만) 고려 후기 최충헌의 무신정권기에도 고려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여 
몽골군에 밀린 거란잔당이 고려땅에 쳐들어왔을때 이들의  길잡이가 될 정도로 거란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고 살고 있었으나 발해인들은 거란족에 비해  귀화 규모면이나 횟수면에서  월등히 많았음에도
고려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발해인과 고려인간에 불협화음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발해가 멸망할 무렵 지배층이 자신의 의지로 가장 많이 내투한 나라가 고려이고
이는 단지 지리적 인접성때문만이라고 하기에는 상경용천부와 고려사이에는 지리적 인접성을 논하기에는
개마고원같은 장애물이 버티고 있고 거리또한 결코 가깝지 않습니다.

정안국부터 대연림의 흥요국 후발해국 등 발해유민의 부흥실패후 그 세력들이 선택한  나라도 고려이고
특히 대연림이 요나라에 봉기하여 고려에 군사원조를 청할때는 반드시  대씨와 고씨 사절단만 보냈는데
이는 분명히 대씨와 고씨로 대표되는 발해유민들과 고려사이에 언어적 종족적 유대감이 존재했기때문이
아닐까하는  강한 추측을 하게끔 만듭니다.

발해는 거란과 여진족과 같은 위도상에  위치한 국가였고 중국사서에서도 그나라의 땅은 몹시 차가워서
벼농사(수전)은 어림없다고 했듯 결코 농업에 유리한  기후가 아니었음에도 발해인들의 1차산업은 남쪽의
고려처럼 농업이었습니다.

이는 확실히 발해인이 부여의 맥을 잇는 농경중심의 경제생활을 영위했고 한반도의 예맥족과 거의 비슷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온돌도 그러한 예죠.

 아무튼 고려가 발해어 통역을 전혀 두지 않고 있엇다는  사실은
 언어적으로  고려인과 발해인의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것이고 이는  확실히 고려가 발해인을 우대하여
 귀화를 받아들인것이 종족적 연대감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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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공부 15-08-11 22:0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님의 의견이 상당히 타당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늘 건강하세요...화이팅...
바람노래방 15-08-11 23:03
   
이게 새삼스런 얘기가 아닌데요...
거란과도 고구려를 통한 상호 연관성을 서로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을때 주장을 했어고, 거란을 보는 시선은 그들이 다른 민족이란 시선보다는 발해라는 대의에 동참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걸었다는것에 대한 배신감이라고 봅니다.
여진이라고 축소된 말갈은 그들이 다른 민족이였다기 보단 열국시대부터 여기저기 털고 다녔던 도둑집단이란 편견이 뿌리 깊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거란의 침입시에도 여진인들은 대체로 고려의 편에 섰고, 그 여진을 배신한건 고려였죠!
여진은 그들 스스로 떨어져 나갔다기 보단 고려가 내쳤다고 판단합니다
     
mymiky 15-08-11 23:43
   
고려가 뭔 여진을 내쳐요? -.-
여진족들은 부족별로 다 다르기 때문에, 고려에 호의적인 부족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족도 있고 스펙트럼이 다양했습니다.
이건, 조선시대때도 마찬가지구요.
          
바람노래방 15-08-12 00:54
   
거란과의 협상에서 고려는 여진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호의적인 부족들마져 등을 돌리게 했죠.
윤관의 동북 전쟁으로 여진과는 사실상 적대 관계가 되고 이후 두번 다시 여진이 호의적으로 돌아선 적이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여진을 내친셈이나 마찬가지죠.
               
막걸리한잔 15-08-12 11:49
   
조선시대 기록들..
燕山 43卷, 8年(1502 壬戌)
領議政韓致亨、左議政成俊、右議政李克均、兵曹判書李克墩、左參贊申浚、右參贊尹孝孫、吏曹判書姜龜孫議: “接待唐官護送軍于義順館。 雖義州官吏開端失當, 然不可中止, 姑令該曹措置館待之具。 但遼東等地, 本是高句麗之地, 故自鴨綠江至遼河所居之人, 皆我國之民。 高皇帝初定天下, 以鴨綠爲界, 慮兩國人民互相往來, 設爲東寧衛, 以處元居民, 使地界截然限隔。
연산 43권, 8년(1502 임술 )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좌의정 성준(成俊), 우의정 이극균(李克均), 병조 판서 이극돈(李克墩), 좌참찬 신준(申浚), 우참찬 윤효손(尹孝孫), 이조 판서 강귀손(姜龜孫) 등이 의논드리기를,
“중국 관리와 호송군(護送軍)을 의순관(義順館)3384) 에서 접대할 때에 비록 의주(義州) 관리들이 사단(事端)을 낸 것이 부당했으나 중지할 수 없으니, 우선 해조(該曹)에서 대접할 준비를 조치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요동(遼東) 등지는 원래 고구려(高句麗)의 땅이었으므로 압록강에서 요하(遼河)까지 거주하는 사람이 모두 우리 나라 사람입니다.
肅宗 31卷, 23年(1697 丁丑)
臣於此, 又竊有所感。 蓋豆滿江北, 今雖爲異域, 實是我穆、翼兩祖胚胎日月之地, 比之周家, 卽同不窋之自竄、古公之陶穴。 今江北幹東、奚關城之間, 古德陵、安陵, 尙可指點其處, 鐵龍之埋山、白馬之渡水, 邊上之民, 傳說至今。 在今聖上, 眷焉北望, 其於濬哲長發之祥, 必有追慕繹思之懷矣。 至於遼左, 初是箕子受封之疆, 而開原縣, 乃古扶餘國, 高句麗始祖朱蒙發迹之地。 今之盖平縣, 乃辰韓故境, 亦我三韓之一也。 曾在高句麗盛時, 遼東一帶及女眞之屬, 大抵皆是封內, 以此爲海東强國
숙종 31권, 23년(1697 정축)
요동(遼東) 왼쪽에 이르서서는 처음에는 바로 기자(箕子)가 봉지(封地)로 받은 지역이며, 개원현(開原縣)은 바로 옛날의 부여국(扶餘國)이며,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 주몽(朱蒙)이 나라를 세운 곳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개평현(盖坪縣)은 바로 진한(辰韓)의 옛 지경인데, 역시 우리 삼한(三韓)의 하나입니다. 일찍이 고구려가 융성할 때에는 요동 일대와 여진(女眞)에 속한 것들이 거의가 모두 지경 안에 속해 있으며, 이 때문에 해동(海東)의 강국(强國)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람노래방 15-08-12 12:47
   
제가 이야기는 여진이 우리와 다른 민족이거나 영토적으로 다르다는 말이 아니라, 사이가 좋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굿잡스 15-08-12 15:02
   
도리어 대금이 요,송과 격렬했지 고려와는 별 충돌없이 지냈던 시기군요

(삼국시대 고,백,신이 진짜 열심히 치고 받은.)

그리고 이미 고려는 후삼국 통일 마지막 전투였던 일리천에서

흑수(黑水)ㆍ달고(達姑)ㆍ철륵(鐵勒) 등 제번(諸蕃)의 강한 기병 9천 5백 명

을 거느리고 있었군요. 왕건의 이런 고려 천하관과 제번을 아우러는 의

식은 이후 발해민들의 지속적 흡수 및 말기 신라계가 통합한 일부 흑

수부에서 나오든 여진족이라는 명칭이 넓게 범칭된 여진족도 내투 내

왕등 지속적 교류가 있었고.

단지 짱개풍의 화이관이 스며들면서 이후 이런 제번을 통합하고

아우러는 의식이 점차 이분화되어 희석된 면이 있긴 합니다.
굿잡스 15-08-12 15:37
   
앞서도 올렸습니다만 여진족이라는 족명도 무슨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새로운 종족으로 대체되었던게 전혀 아니란 말이죠.

기본적으로 우리쪽 사료가 부족하다 보니 서토 사서에 의지함에서 우리관련 정체성에 혼돈이

오는 경우들이 제법 나오는데 고조선 시기의 동호나 이후 고구려 수도 함락 이후 30여년이

안되어 나오는 발해 건국에 갑자기 서토사서에서는 이런 고구려 지역과 고구려 백성이

어느새 말갈이라는 명칭으로 다 대체되어 버리는 황당한 형태가 나옵니다. 그리고는 다시 발해 이후

에 여진족 어쩌고.

상식적으로 잽강점기 35년보다 더 짧은 30년만에 건국된 고구려 땅에서 그것도 고구려 수도

함락이후 연남생을 앞세우고 빠르게 요동의 점을 따라 치고 들어왔던 당나라가

제대로 고구려 영역을 통치하지도 못하고 나온 고구려 민호 69만호 대략 70만호면

최소 호당 5명으로 잡아도 350만 대체로 당시 7,8명으로도 보았던 기록도 있는 상황에서

못해도 350만에서 500여만 정도의 고구려 백성이 존재했고(상시 30만 전시 최대 4,50만도

가능했던 점으로 봤을때) 이후 수도에서 끌려간

수십만명과 황해도 투항 세력을 빼더라도 못해도 3,400만 정도는 고구려 내지에서

그리고 요동등에서고 계속해서 격렬한 투쟁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탈출해서 이후 주변 고구려민들을 빠르게 통합해서 나온게 발해인데 갑자기 고구려 백성은

어디로 가고 말갈 어쩌고 이런 식의 일방적 서토 사서기록에 전후 정황 분석없이 마구잡히로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점이죠. 발해 건국의 추축인 속말말갈도 고구려가 종족의

예로 대우한 우리쪽 부여를 말하는 것이고

백산말갈 역시 고구려가 길림성 일대 전기 수백년을 지배하던 국내성 일대의 고구려 백성들인데

마치 말갈이 고구려와 다른 이질적 종족취급한다는 게 우습단 말이죠.

그리고 굳이 발해가 왜국과의 외교 문서에서 당당히 고려국왕 어쩌고 밝힌 기록등의

문헌 자료를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발해의 후왕제도나

문왕의 둘쨰 공주였던 정혜 공주묘의 대흥(大興) ,보력(寶曆)이라는 발해의 독자적 연호나 문왕을

황상으로 표기한 비문 기록 및 출토되는 고구려 양식의 조우관, 그외 4세기에서 7세기에

평양에서 유행해서 길림성으로 퍼진 고구려 석실봉토분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나

길림성 집안일대에 발해 특유의 손끝무늬 기와등이 발견되면서 발해가 고구려 태왕릉등 묘제를

관리했다는 연구 외에 고구려 5부의 영향을 받은 발해 5경 도시문명체재 및 기와, 불상, 축성

방식등 다양한 사료,고고학적 부분에서 고구려 계승국으로서 발해는 확인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런 여진족이라는 명칭도 단순히 발해민과 이원화된 즉 숙신-말갈-여진 단일계통으로

보는 건 학계에서도 이미 부정적 시각이군요. 앞서도 말한 말갈 자체가 따로 고구려시대

고구려 백성과 동떨어진 새로운 신진 유입 세력도 전혀 아닐 뿐더러 여진족 역시도

후발해의 통제 아래 있던 변경의 흑수부 일대가 신라계가 통합하면서 이후 발해 말기 발해가

약화되는 시점에서 일부에서 사용되다 발해가 망하고 후발해 시기에 요와 알력을

통해 점차 세력을 키워 후발해민들을 흡수하고 점차 상경용천부 일대의 수십만 이치 요양

발해민까지 아우르면서 대국을 운용했던게 금나라이고 보면 (이런 과정에서 범칭되어

거란의 통제아래 있던 발해민은 숙여진, 통제밖의 후발해민들은 생여진으로 불림)

그리고 이런 커지는 과정에서 초기 고려의 세력권 아래 있던 지역으로 세력을 뻗어오자

일어난 충돌이 윤관의 출정등으로 전체적 흐름과 맥락에서 시대 상황을 봐야

이해의 폭과 깊이나 커질 것으로 보이군요.

그외 지금 제주도 방언도 서울이나 가까운 부산 사람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흑수부같은 북쪽 변경에 수렵생활이 강하던 이들 부락쪽이나 일부 연해주 일대의 변경 기타

토착민들이 남국 고려인들이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든 부분도 있었겠지만 이쪽 관련 나오는

유물이나 무기를 보면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부여에 신속 이후 고구려시대 고당전쟁에서도 나가

싸우고 발해 200여년간 다시 용접되면서 상호 지속적 교류를 통해서 언어도 완전 이질적인

계통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 그렇기에 흑수부 일대 신라계 아골타역시 이런 발해 시대

같은 발해민이였기에 여직 발해 본동일가라는 말도 나온 것이라 볼 수 있겠죠.


왜 여직(진)발해본동일가(女直渤海本同一家)라고 했을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8992&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97%AC%EC%A7%81&sop=and
괴개 15-08-12 20:44
   
여진의 만주어 발음이 "쥬센"이던데, 따지고 보면 환빠스럽지만 조선의 옛말로 생각하는 "쥬신"과 너무 비슷하지 않나요?
어쩌면 같은 근원을 가진 단어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막걸리한잔 15-08-12 23:42
   
시대별로 갈라진 민족들로 보여집니다..
우리가 흔히 고려인 조선족 교포 등으로 표현되듯이요..
우리 조상들이 예맥으로 불릴때 갈라진 민족은 에벤키족..
고조선에서 갈라진 민족은 쥬센..
뭐 이러지 않을까 추측되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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