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발해인 관련 기록에는 고려인이 발해인을 동족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표현은 없습니다.
그렇다고하여 이것이 발해인과 고려인은 동족이 아니다라고 섣부르게 판단하는것도 우습지요.
물론, 동족이라고 표현한 기록은 없으나 발해인이 마지막까지 역사무대에 끝까지 살아남아
등장하는 동시대 고려의 기록들의 이면을 곰곰히 뜯어보면 최소한 고려인들이 발해인들을
거란족 여진족과는 달리 부담없이 친연성 높은 부류로 인식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그근거로서, 첫째, 거란족 여진족 한족에 대해서는 역어 즉 통역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등장하지만
거란족 여진족에 비해 내투(이민)의 숫자면에서나 횟수면에서 월등히 많은 발해인에 대해서는
역어 즉 통역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만일 발해인도 거란족, 여진족과 마찬가지로 당시 고려인의 입장에서 언어가 상당히 달랐다면
분명히 가장 많은 내투 기록을 가지고 있는 발해인들에 역어 관련 기사가 반드시 등장해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역어가 없었다는것은 최소한 고려인과 발해인 사이에 통역없이도 대화가 가능했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거란에 대해서는 태조왕건이 거란은 풍속과 언어가 우리와 다르고 발해를 멸망시킨 금수만도 못한나라
운운한 기록이 있습니다.
여진에 대해서도 역어를 두어 흑수말갈 등과 교류했다 합니다.
한족의 송나라는 두말할 나위없습니다.
문제는 여진족에 대해서는 똑같이 발해시대에 고구려유민과 마찬가지로 발해를 구성했던 발해인임에도
고려사에는 고려인들이 발해인과 여진인에 대한 시선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진족은 후삼국시기부터 고려의 북방을 심심치않게 약탈하는 짐승같은 족속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반면, 발해는 왕건 시대로부터 발해유민 관련 마지막 기록이 보이는 12세기 초반 예종시기에이르기까지
단한번도 고려를 약탈했다는 기사 한줄 없습니다.
그리고 여진인에 대하여는 거의가 조건부 귀화임에도 발해인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조건부로 귀화를 허용했다는 기사 한줄 없습니다.
고려사 기록에 발해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이 이끌고온 발해인들을 고려에서는 홀한인이란 표현을 써서
가리키고 있는데 홀한이란 바로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를 이릅니다.
그러니까 당시 고려인들이 고구려계통 발해인들이 주류로 살고 있던 상경용천부 출신은 최소한 고려사회에
바로 유입되어도 고려에 해를 입히지 않는 문화와 종족적 유대가 있었음을 반증하는게 아니냐는게 제생각입니다. 이와 반면 발해시대부터 고구려계통주민들이 많이 살던 발해5경보다는 발해 주변부에 살던 여진인들에 대해서는 왕건시대부터 적대적인 기록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볼때 고려인들은 발해인과 여진인을 언어적 문화적으로 다른 계통으로 이해했고 전자는 고려사회에
바로 받아들여도 될만큼 종족적 유대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실제로, 거란과의 3차에 걸친 전쟁에서 발생한 수만명의 거란인 포로들은 (물론 걔중에 발해출신 포로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지만) 고려 후기 최충헌의 무신정권기에도 고려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여
몽골군에 밀린 거란잔당이 고려땅에 쳐들어왔을때 이들의 길잡이가 될 정도로 거란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고 살고 있었으나 발해인들은 거란족에 비해 귀화 규모면이나 횟수면에서 월등히 많았음에도
고려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발해인과 고려인간에 불협화음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발해가 멸망할 무렵 지배층이 자신의 의지로 가장 많이 내투한 나라가 고려이고
이는 단지 지리적 인접성때문만이라고 하기에는 상경용천부와 고려사이에는 지리적 인접성을 논하기에는
개마고원같은 장애물이 버티고 있고 거리또한 결코 가깝지 않습니다.
정안국부터 대연림의 흥요국 후발해국 등 발해유민의 부흥실패후 그 세력들이 선택한 나라도 고려이고
특히 대연림이 요나라에 봉기하여 고려에 군사원조를 청할때는 반드시 대씨와 고씨 사절단만 보냈는데
이는 분명히 대씨와 고씨로 대표되는 발해유민들과 고려사이에 언어적 종족적 유대감이 존재했기때문이
아닐까하는 강한 추측을 하게끔 만듭니다.
발해는 거란과 여진족과 같은 위도상에 위치한 국가였고 중국사서에서도 그나라의 땅은 몹시 차가워서
벼농사(수전)은 어림없다고 했듯 결코 농업에 유리한 기후가 아니었음에도 발해인들의 1차산업은 남쪽의
고려처럼 농업이었습니다.
이는 확실히 발해인이 부여의 맥을 잇는 농경중심의 경제생활을 영위했고 한반도의 예맥족과 거의 비슷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온돌도 그러한 예죠.
아무튼 고려가 발해어 통역을 전혀 두지 않고 있엇다는 사실은
언어적으로 고려인과 발해인의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것이고 이는 확실히 고려가 발해인을 우대하여
귀화를 받아들인것이 종족적 연대감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