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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7-23 10:07
[기타] 임진왜란 초기 조선이 밀린이유
 글쓴이 : 두부국
조회 : 8,216  

첫번째: 일본군이 구사한 조총부대의 전술
 
일본군의 조총은 장전속도가 길고 발사 속도 1분에 3발 쏘는 대도 조선군들을 손수무책으로 무너뜨렸다.
게다가 사정거리가 조선의 활보단 짧지만 전쟁 초반에는 금세 조선을 먹을 기세로 덥쳤다.
장전속도는 길기 문에 앞 부대에 있는 수십명의 군사가 조총을 쏜 뒤 곧바로 장전된 두번째 부대 조총을 쏘고 세번째의 조총병들이 확 나와 또 쏜뒤 첫번째 부대가 장전을 완료시켜 다시 전열에 나와 쏜다 그리고 이런식으로 반복하는 전술이 있다. 이 전법은 영국인과 프랑스군이 머스켓으로 일렬종대로 서서 쏘는 방식과 같다. 총알 수는 소수였기 문에 백병전을 돌입하는 방법도 있다.  이렇게 활을 가진 조선군도 이런식으로 전법을 구사할 수 있었지만 전투미숙으로 이런 전법은 구사하지 못했다.
 
 
 
 
 
두번째:조선은 전쟁준비기간이 너무 짧았다.
 
조선군의 병조참서인 율곡이이가 1582년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도승지인 유성룡의 반대로 결국 이루어내지 못했다.그러던 중 1591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은 정명가도를 통해 조선과의 전쟁소식을 간단하게 줄여 말하니 선조는 곧장 전투태세나 장비등을 준비하도록 했고 이일등 전라도 경상도의 수령들을 통해 전쟁준비를 하라 이르었으나 이미 는 늦었다
 
 
 
 
 
세번째: 일부 지배세력들은 무능하거나 도주를 일삼았다.
 
지금 말하는 것은 일부 지배세력이다. 정발,송상현,신립,김여물,이운룡등의 장수들은 용감하게 적군과 싸우다 전사했으나 이일은 상주 싸움에서 천명의 군사들을 잃고 도주했으며 가장 먼저 적을 막아야 할 원균,박홍등의 수군세력들과 여러 수령들은 도망을 쳤다. 심지어 김명원 장군은 세번의 방어선을 만들었으나 (한강,임진강,대동강) 다 무너지고 이광 장군께서는 무려 5만의 군사들을 고작 1600명의 왜군에게 패했다. (지휘관 와키자카 야스하루) 게다가 전쟁에서 패한 김명원은 도주를 몇번정도 했고 승리를 한 신각에게 허위사실을 알려 공신을 죽게 만들었으며 전투지역에서도 어이없게 당파싸움이나 이간질은 계속 되었다.
 
 
 
 
 
내번째: 왕이 먼저 도망치니 백성들은 왕을 버렸다.
 
왕이 수도를 지켜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지만 개경을 통해 평양 의주를 건너 심지어 명나라까지 간다는 소식도 들리자 실망한 백성들은 왜군의 편을 들기도 했다. 민심획득도 불가능 해서 신분제도에 대해서도 휘청거렸다.
 
 
 
 
다섯번째: 잘못된 전법과 부족한 군사수
 
조선의 병권에서는 잘못된 여러 전법으로 인해 지휘관이 발령이 늦게 되는 바람에 지휘관이 없는 군사들은 먼저 도망치게 되는 것도 있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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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타니 15-07-23 10:17
   
실제 일본군 조총 무장비율은 10프로밖에 안되고...... 조총은 딱히 활보다 좋은무기도아니고

이이에 10만 양병설은 실제로 그런적 없다고하던데여... 그리고 당시 조선 재정으로 10만 상비군 어림도 없고..

선조는 도망 잘다녀서 왜국에 안잡힌게 오히려 잘한거죠 뭐
     
두부국 15-07-23 10:20
   
그렇죠 인조보다야 낮죠 선조는 도망이라도 잘치지만 인조는 도망도 안가고 별 뻘짓만 하고 있었

으니 인조가 선조처럼 도망이라도 갔으면 병자호란은 조선의 승리로 끝날지도 몰랐습니다

인조가 잡히는 바람에 1년만에 끝났잖아요
          
오오타니 15-07-23 10:20
   
애초에 그때 청나라군은 3만밖에 안되고 명과 대치중이라 조선에 오래 머물수없엇습니다.. 인조가 도망만 잘쳣어도 청나라는 회군할수밖에 없엇음
               
행복찾기 15-07-23 10:24
   
혹시 한국사를 왜놈 만화책보고 배우신 거 아니세요?
                    
오오타니 15-07-23 10:28
   
제가 잘못안 부분이 있으면 지적하면되지 왜 비아냥 거리시나요?
                         
행복찾기 15-07-23 10:56
   
님이 쓴 글들 보면 님이 정상적인 역사 공부를 한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럽니다.

한국사에  관심이 많은 듯한데
왜놈 우익들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언급을 하는 이유가 궁굼합니다.
                         
오오타니 15-07-23 11:24
   
행복찾기//그럼 어느부분이 왜놈 우익에 입각한거지 말씀해보시죠?

제가쓴글전부 조선왕조실록을 기반으로하는데 무슨 왜놈 우익드립인지?

조선왕조실록이 왜놈들이 쓴책입니까?

북관대첩도 조선왕조실록에 장문부고 올린 장계를 기반으로쓴거고

명나라관련글도 전부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디가 왜곡됏는지 그럼 반박을하세요ㅕ

그런식으로 비아냥 거리지말고
                    
뚜리뚜바 15-07-23 12:17
   
근거도 없이 비아냥좀 대지 맙시다 보는 사람도 불편해요
          
mymiky 15-07-23 10:31
   
1년이라니요..-.-
병자호란은 2달만에 게임아웃- 종료 ㅋㅋㅋ
인조가 독안에 든 쥐꼴이라;;

청태종이 직접 조선까지 온건, 청나라 역시 도박이였습니다.
아직, 명이 왕년에 비해 쇠퇴하긴 했지만, 망하기 전이라, 대치중이였고
후금왕이 수도를 비우고, 조선에 갔다는걸 알면,
혹여나 뒷통수 맞을까봐, 청 조정에서도 위험하다고 홍타이지를 만류했을 정도..

인조가 도망을 잘 쳤다면? 역사가 어찌 될런지, 아무도 모르는거죠 ㅋㅋㅋ
다만, 인조가 부산쪽으로 고고씽 했으면, 또 모르겠습니다 ㅋㅋ

인조가 갈려고 했던 곳은 강화도인데;;;
문제는 여기가 남한산성보다 -더 빨리- 뚫렸죠..세자부부 다 잡힘.

웃긴게, 정묘호란때도 강화도 갔거든요;;
청나라가 한번 속지, 두번 안속음.. 만만의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강화도에 들어갈 배까지 후금에서 운반해왔음 ㅋㅋㅋㅋㅋ

강화도로 도망갔으면 잡혔음;; 아예 질질 끌려나왔을꺼고-.-

 남한산성은 인조가 스스로 성을 나오는 형식으로, 나오기 전에,
조선 신하들이 항복의식 같은거 청과 조율해서 그나마 쪽을 덜 팔리게
해주겠다는 약속 받아내고 나온거-

원래는 사극에서
맨 발에, 흰 소복입고 상투도 풀고 질질 끌려나오는,,
한마디로 대역죄인이 유배갈때 그런 포즈로 항복받아내는 거였는데,,

우리 왕한테 그런거 시키면,
우리다 이 자리에서 우리전하랑 자결할꺼라고 조선 신하들이 울고 짜고-.-
 
청나라측도 시끄럽다고, 지금 시간없다고,
항복만 하면 되니까 알았다고, 우리도 집에 가야하니깐
빨랑 나오기나 하라고 해서,, 어느정도 조율 끝에 스스로 나오는 형식으로
제발로 걸어나옴.

그리고, 삼전도 삼배고두례 찍고..  조선은 공식적으로
명과 bye~하고 인조는 조선 최고의 암군으로 등극ㅋㅋㅋ(연산군은 폭군)
할배보다도 더 못난 놈이 되면서,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광해군이 오늘날 버프받고 있지요 ㅋㅋㅋ
앞 선조/뒷 인조의 위엄 ㅋㅋㅋㅋㅋ

(사실, 홍타이지는 광해군이 있을때부터, 조선을 쳐야 한다고 줄기차게
아버지 누르하치를 설득한 강경파 인물임 ㅋㅋㅋㅋㅋ

광해군의 중립외교로 인조대신 광해군이 계속 재위했다면 전쟁이 없었을꺼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이 있는데 ㅋㅋㅋ

이미, 청나라 다음 보위를 홍타이지가 앉았다는 것 부터가, 전쟁은 시간문제였을 따름)
               
두부국 15-07-23 11:01
   
누르하치가 죽지 않고 계속 정권을 잡았다면 후금은 중원에 들어가지도 않고 조선처럼 중국과 조공무역하면서 독립국가가 되었겠지요
                    
mymiky 15-07-23 11:13
   
누르하치 목적은,

명에 자기 실력을 보여주고, 조선처럼 조공받치고 형식상 제후국의 포장을 씌면서
사실상 만주의 지배력을 보장받고, 자기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였습니다.
뭐, 그정도만 해도 누르하치는 대박이고, 나쁘지 않는 조건이죠.

홍타이지는 아버지보다 더 야심이 컸고, 만주의 일개 독립국가에 만족하기 보다는
제2의 쿠빌라이가 되길 원해서, 실제로 몽골부족을 쳐서 대원황제 옥쇄도 받아오고
뭐 하여튼, 원나라처럼 중원을 통일해서 스케일을 크게~ 놀고 싶어했죠 ㅋㅋㅋ

뭐,, 결국 급사하는 바람에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아들대에 이렀으니, 저승에서 좋아했을지도?

하지만,,
솔직히 청나라는 자기 고향에서 내실이나 키우는게 좋았을꺼라고 생각해요.
곰이 재주는 잘 부렸는데, 돈은 딴놈이 벌고 있으니 ㅋㅋㅋ 죽쒀서 개줌
오죽하면, 만주족은 한족의 산타클로스란 소리를 다 들을까-.-
mymiky 15-07-23 10:30
   
10만 양병설은 학계에서도 떡밥으로 봅니다.
서인들이 스승인 이이를 띄워줄려고 후대에 각색했다는게 중론.
이쉬타르 15-07-23 12:35
   
조총이 조선군이 무너진 최대 요인이라기보다 일본군은 우세한 병력에 모든부분에 걸쳐 골고루 전투력이 우수한 군대라 조총을 안가지고 왓다해도 조선군의 패배는 기정사실이나 같은거지요
아시가루들을 모아서 무장을 시킨 장창병이 가장 살상력이 높아서 이넘이 최대로 무서웟다 합니다,,조선군은 그냥 오합지졸 였는데 심지어 병력에서도 부족 했고 훈련이나 무장상태 사용무기에서나 전부 밀리고 했던게죠

글고 조청전쟁에서 침공한  청군은 총인원이 12만명 정도 규모였고 이들이 전부 한양 근처로 한강 이남에 포진햇엇다고하죠
이쉬타르 15-07-23 12:43
   
조총하고 활를 비교해보면 아무래도 당시 발사속도가 느리고 불편한 화승총이라도 활보다는 우수했죠... 조총 문제로 지적을 하는 낮은 명중율이라도 실전에서는 활보다는 전장에서 우세한게 강력한 파괴력으로 보갑을 두른 보병들은 이거 맞고 죽습니다
활은 파괴력이 작아서 수십미터로 들어가기 전에 보갑으로 다 막아 내고 했으니,,조선 조정이 이걸 몰랐던 것이고 전쟁 경험이 제로..가 원인 같으며

임진전쟁에서 조선과 일본을 양군 비교해서 조선측의 무기부분의 잘못이 투사무기에서 물론이고 더우기 단병전에서 완전히 밀렷엇고 즉  //알럽 (좋지도않은 무기인)BOW..하다 망한거라고 봐야
철부지 15-07-23 12:52
   
군사적인 비교우위에 입각해서 생각하면 상당히 지엽적인 이야기로 흐를수있죠,조선은 당시 위 아래로 썩을 대로 썩었습니다 풍신수길의 야욕은 허황된 것이였죠 그러나 그 허황된 야욕의 불씨를 지펴준것은 조선이였습니다 일본이 진정 조선을 침략하는가를 살피기휘해 일본의 사신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정사 김성일은 풍신수길이 원숭이상이니 하찮은 인간이다'하며 유학자 신분으로서 국가의 충차대한 일을 그저 관상쟁이 평가를 내립니다 어처구니가 없는것이죠 그래도 만사 불여튼튼이라 성을보수하고 하고 군사를 소집해서 훈련을 하는데 당시 군역을 하는것은 상민층이였고 아래 백정이나 노비는 군역에서 제외됬습니다 오늘날 병역 탈피 면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싶어도 못하는 천민 신분이였던 것이죠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군역에서 제외된 신분중에 양반계층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상류층이나 고위공직자 자제분들이죠  당시 조선중기엔 상민보다 노비가 많았습니다 이유인즉 노비가 많으면  그만큼 부'를 나타내기 때문이고 사대부라면 노비가 많아야죠,그리고 당시 전문적 군사는 조직되 있지도 않았으며 왜국의 침입을 대비한다 해도 상민층에서 고을 수령들에게 뒷돈 찔러주고 회피하는게 다반사고 돈 없는 상민들은 다른 고을로 야반도주를 하기 바빳죠, 당시 조선의 경제는 농사였습니다 농본기때 군사를 징발하니 누가?나서겠습니까 그렇다고 애들 굶어 죽는데 나라에서 최저생계비 지원도 안해주는데요 임진왜란때 의병들이 들고 일어난것도 조선이라는 '국가'를 위해 한것이 아니라  고장을 지키기 위해서였죠 임진왜란초기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왜군이 그 고을에 쌀을 나눠주고 아녀자를 마음대로 겁탈하지않고 나름데로 점령군 질서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군이 전쟁이 장기화되자 본색을 드러내니 조선백성들은 왜군의 대항했던 것이죠.
철부지 15-07-23 13:00
   
제가 알기로는 조총때문에 왜군한테 밀렸다. 모든것을 결론짓는대 조총은 그리 많이 보급되지 않은 상황었죠 당시 조선군이 피해를 많이 본것은 일본의 창 이였습니다 조총을 사격하고 조선의 궁수들의 전열이 무너지면 창병들이 돌격해 진영을 갖춰 조선군을 숙대밭을 만들었죠 당시 조선군은 각개전투였지만 일본군은 당시 진영을 갖춰서하는 전술이 발달해있었습니다 일본하면 사무리아 칼'이라고 하는데 일본의 창병들이 쓸고가변 조선군 병사가 다처서 살려달라할때 목을 치는 도구였을뿐이죠.
sejong 15-07-23 13:05
   
상비군이라고 몇만도 안 되고 그것도 죄다 동북면 함경도 몰아놓은 조선이 무로마찌 막부 이후 몇 백년간 싸움질만안 왜인들과 싸움이 될 수 없었지요. 당시 동북 함경도를 제외한 관군은 지금으로 말하면 경찰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여기에 위정자기 유능해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합니다만...

조선은 그런 점어서는 챙피할 정도지만 그 후 의병을 보면 자랑스러워 할만하지요. 자랑수러운 여사도 있는데 그런 것에는 눈을 돌리고 문제만 제기하는 것도 균형감을 잃은거지요. 왜와의 전쟁을 전술적으로만 볼게 아니고 역사적 의미가 더 중요히지요. 특정 전투에 있어 승패요인은 나무에 불과한거고 숲은 전략이나 전술, 전투 억량의 우위가 아닙니다. 역사는 그렇게 지엽적으로 보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드리고 싶네요.
이쉬타르 15-07-23 13:16
   
10만명 상비군 육성이 불가능 했느냐 하면 그렇게 조선이 국력이 아주 약한 정도는 아니엿는데 당시 조선의  인구1000만명으로 10만명을 못 모으것이냐 하는 검니다... 둔전제로 해서 자체조달식 육성시 충분한것이고 양반들이 군사훈련 받기싫어서 병력을 상비군화는 극도로 방해하고  질겁하고 햇었죠,,
조선이 북변에서 명에 보호를 200년간 받다보니 의타심이 생기고  문치로 흐를 결과 형편이 없이  군사력이 약해지고한건 부인 못하는 사실이고..그로인해  상비군화를 못한것이 임진전쟁  초반 패배 주요인이러고 봐야 지요... 이를 국가적 문제로 인식해서 무력을 강화하려던 조정내 문신들 시도는  양반 재향족들 중심으로 정치 사회적 반대를 못 극복한것이 근본이윰니다
     
오오타니 15-07-23 17:50
   
조선은 국가 재정이 허약한 편이엿습니다....... 일단 성리학을 기초한나라라 검약을 미덕으로해서 백성들에게 낮은 세율을먹엿습니다... 그리고 노비가 너무 많은 사회라서 양인들이적어 납세율이 매우 낮은 국가엿죠... 조선중기 명종때 조선 1년세입이 26만 4천석밖에 안됩니다 그마저도 14만석은 관리 봉급으로 나갔습니다...... 임진왜란 실록 읽어보면 보병 1만명이 1년에 먹는 군량미도 6만석입니다 게다가 상비군은 녹봉을 줘야합니다.....  10만은 어림없는 숫자입니다.. 조선의 재정상
이쉬타르 15-07-23 13:22
   
병자년 전쟁에서 임금및 조정이 남한 산성으로 들어간게 그나마 장기간 버티고한 요인이고 강화도에 바로 들어가 보았자 해상 전투력을 미리 준비한 청군에게 당시 그냥 내주고 한걸로 보아서는 오히려  더 단기에 항복 했엇을것이라 봄니다..흔히 말하는 식량의 부족이 항복 직접 이유인데 ... 남한산성 방어사가 전시 대비 양곡을 한강 남방 평지에 저장한 잘못을 주로 제기 하죠

일본 침공군의  각 제대 군사수 2만명 내외에서 조총병이  10퍼센드이면 2000명의 조총병의 보유인데..그 막강 화력의 2000명의 조총병이 대열 앞에 서고 후미에 장창병 장검병 궁병들이 배열이 통상적 편제 배치인데,,, 조선군은 치고들어가다 먼저 활에다 맞구서 다음 조총 세례... 그러면 전멸 당합니다
왜나라호빗 15-07-23 14:40
   
하나 더. 너무 우습게 보았다. 중국에서도 거짓말하며 같이 쳐들어오는 거 아니냐 의심했고 사이 안 좋던 만주족도 그깟 왜놈들 자기들이 처리해준다고 할 정도였음
aealex 15-07-23 14:47
   
울나라에서는 일본의 조총이 별거 아니었다는 얘기가 많죠.
다큐에서도 국궁을 띄우면서 조총과 비교하기도 하고 ...
그런데 조총의 효과와 성능에 대해 학습이 되서 평양성 전투 이후
왜군을 밀어붙이는 시기 부터 보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일본 주장과도 비슷합니다.
일본이 주장하는게 왜의 장창병과 궁수의 전력이 뛰어나다는 얘기거든요.

실제로는 조총은 그 위력과 전술이 장창이나 왜궁보다 뛰어나다고 판단이 되었기에
일본이 직접 생산을 추진하면서 많은 숫자가 보급됩니다.

유럽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16세기 일본이 조총의 자국내 생산을 시작하면서
16세기 말, 일본 조총병 숫자가 유럽 전체보다 많았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조총은 무기로서의 장점도 있지만,
활 보다 배우기 쉽다는 점,
숙련 수준에 비해 정확도가 높다는 점
활은 왠만한면 거진다 방패로 막아지는데 조총 탄은 당시에 못막았다는 점
등이 조선이 초기에 밀린 이유 입니다.

굳이 왜의 조총을 깔 이유는 없어 보이네요.
유럽의 화승총 보다는 사용하기도 편하게 개량되었고, 왜놈들의 작은 키에 맞도록 길이도 줄었구요.

조선이 일본보다 조총 부대를 먼저 만들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명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했던 만주를 점령 했을 지도 모르죠.
전략설계 15-07-23 15:20
   
활과 조총의 차이가 아닙니다.
싸우는 장소의 문제입니다. 이거는 조선에 국한되는 얘기도 아니고요.

병력, 지휘체계, 사기, 훈련 어느 것을 봐도,
조선육군이 야전에서 왜군과 싸워 이길 군대는 아니었습니다.

실제 싸워 이긴 경우도,
진주성, 행주산성처럼 성이나,
이치고개처럼 요새지에서 이겼습니다.

신립이 미련한 것은..
조령에 도착하기가 늦거나 왜군에게 우회로가 있다 하더라도,
일단 적당한 요새지에서 막고 전략적 후퇴를 하면서 적의 진격을 늦추면서,
후발 부대를 보충하여 군세를 늘리는 쪽으로 가야 하는데.

요새가 아닌 평탄한 지형에 다 죽일려고 배수진 한 것부터가
그렇게 삽시간에 말아먹기도 어려운..
누구라도 적을 두고 산이나 성에서 싸우고 싶지..
평지에서 정면대결하라면 끌려온 백성들이 싸워지나..
배수진도 싸울 능력이 있는 군대를 가지고 최대한 능력을 보일 때 쓰는거지.

오합지졸도 싸울만한 유리한 지형에서 싸워야
패닉에 안 빠지고 지 정신으로 싸우는 것인데.
첨보는 조총소리에, 본 적 없는 긴창 들고 대열 이뤄서 전진해오니.. 도망갈 밖에..
배수진은 개뿔이..

삼국시대, 고려시대 통털어,
사기가 오른 쌩쌩한 외국 군대를 맞이해 야전에서 승전한 경우가 극히 드문데..
적이 힘이 빠지고 지쳐 있을 때 돌아가는 애들 뒤통수 때려서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 것이지.

급조한 군대를 왜군과 평지에서 정면대결 한다는 것이..
기병이라고 하더라도, 적이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을 해야 기병공격이지..
적이 정면에서 대열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돌진 앞으로 하니..

이제 와서 생각하니.. 신립이 답답합니다.
조총이니 하는 것은 전쟁 나기 전부터 들었을 것이고.
드라마에선 조총사격 테스트 해봅니다만..
적 군세도 보고를 받았을텐데..
쉽게 죽으려고 강을 택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ultrakiki 15-07-23 15:27
   
조총의 당시 위력은 그다지 좋은편도 아니였고
명중률, 사거리도 형편 없는 무기였습니다.

등나무 방패에 탄을 박혔다는 사료도 있으니 생각만큼 파괴적인 무기는 아닙니다.
또한 소수의 인원이 쏴서는 목표를 맞출수 없는 병기였죠.
다수의 조총수가 흩뿌리지 않는한 맞기는 힘든 무기였습니다.

전세를 뒤엎을만한 무기는 아니였습니다.
이쉬타르 15-07-23 15:32
   
신립은 무능한 장수이고 병법을 모르는 사람이죠..그냥 닥치고 돌격 이거만 제일일줄 알고 기병 전술 조차 무능합디다..이는 조선의 군 지휘관 양성 체제에서 문제 같으며 무예위주 시험이라 무예만 잘하면 무과급제 이런 구조라서 전술전략에 허약 할수 밖에요..기병의 장점,쓰임세을 잘알아야 하는데 기병이란건 원래 추적후 격멸 이나 측면 기습등으로만 써야 하고  조선군 같이 기병 자체가 숫자가 작은 군대는 주력으로 전면적 투입은 하질 말아야 하는게죠
기병의한 일제돌격 전술이란건 전원 기병 구조인  만주족이나 몽골 거란 정도가 되야 합당하죠
     
두부국 15-07-23 16:06
   
신립은 무능하다고는 볼수 없습니다 신립은 기마병을 이끌고 여진족을 토벌해서 나라에서 상까지 받으신분입니다

조선초기에는 기병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보병과 기병비율이 1:1 이었다고 합니다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이유는 들판이 아니라 뻘밭에서 싸워서 기병이 제대로 힘들 못썼다고 합니다

신립장군의 잘못은

신립장군의 패전 원인은

그저 군사들의 훈련 부족,

지형을 살피지 못한 것(늪지대에 기병이 삐졌죠)

이 2가지입니다
          
ultrakiki 15-07-23 16:11
   
무능은 맞다고 봅니다.

엄연하게 북방 개활지의 싸움과 남쪽 산이 많이 있는 지역의 전술은 당연히 달라야합니다.

개활지란 이유로 즉 자기 주특기에 유리하다 판단되서
강을 등지고 상대방을 고려치 않은 싸움을 하고 패했으니까요.

부관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분명히 문경에서 막는것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었음에도
듣지를 않았죠.
북방에서 기병으로 공을 세운것은 사실이고 이견이 없습니다만
비가와서 다 젖은 벌에서 기병을 운용하고 국운에 영향을 끼쳤다면 무능이란 평가는 적당하다봅니다.

마치 현대의
전차를 도시 빌딩 숲에 보병지원없이 덜렁 밀어넣은것과 같죠.
          
준준 15-07-24 13:37
   
지리에 따라 병법이 달라야 하는데.. 자신의 좋았던 기억에 의존해 똑같은 병법을 사용한다는게 바로 무능력한 자들이 범하는 실수죠... 한 번은 운 좋게 이겼어도 두번, 세번째는 밑천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이쉬타르 15-07-23 15:40
   
부산성 전투에서 당시 부산 부사 송상현은 날라드는 조총탄을 막고자 나무 판자 모아다가 임시방패로 쓰고 했으나 조총탄이  이 방패를 다 뚥어버리고 조선군 병사들이 여기에 맞아 살상을 당하면서 수성에서 실패 하게 되죠
     
ultrakiki 15-07-23 15:58
   
부산성 함락은 조총 때문이 아니죠.

천여명 가량이 수성을 했고
일본군 선봉이 19000명 가량이였습니다. 1: 19 싸움이였죠.
직접가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부산성은 아주작은 곳입니다.

임진왜란의 조총강한위력설이 징비록에서 그 원인으로 돌리기도 하는데 어불성성이죠.
실질적으로 조총 위력을 발휘하는것이 50보 이내인데 성벽을 이러한 무기로 공략을 했다 ?

성벽을 공략하는데 조총을 이용했다는 설은 흥미롭습니다.

이미 성문이 열리고 백병전중 조총을 쓴것이지 성을 공략한데 쓰인것이 아닙니다.

동래성 역시 작은 토성이였구요. 송상현은 동래부사였고 동래성에서 싸웠습니다.
          
Centurion 15-07-23 20:14
   
50~60미터 정도의 사거리를 가진 조총이
고작 해봐야 몇미터 높이의 성벽을 공략하는데 어불성설이라니요..

조선군의 활이 사거리가 긴 편이긴 하지만, 활은 방패를 뚫기가 어렵죠.
근데 조총은 갑옷이고 방패고 슝슝 뚫어버리는 직사무기입니다.

그래서 조총이 쓸만한거죠.

현대식 자동소총으로 보통 교전할 때 거리도...
기껏해야 수십미터인 경우가 허다합니다.(특히 베트남전이나 요즘 중동쪽 시가전이면)

일본영화에서도 조총을 활용한 공성전이나 야전은 자주 나옵니다.
실제로도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들 전투에서도 조총은 많이 사용되었던 고급병종이구요.
(돈이 많이 듬)..

그리고 한국식 성은 보통 하나의 성벽만 담장처럼 둘러둔 형태라..
사실 길이가 한 1~2km 수준으로 상당히 긴 편이고,
이 걸 지키는 병력도 대략 최소 1~2천명 이상이어야 되는 꽤 길고 큰 규모라...
병력이 수백 단위이면 오히려 지키는게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되곤 합니다.

한마디로 공격하는 쪽 병력이 1~2만명인데, 수비군이 1천 미만이면..
이런 성은 한 10미터 당 5미터당 병력이 1명이서
적군 수십명, 수백명이 집중해서 공격해오는 걸 막다
적한테 다굴맞고 뚫리기 일쑤라는거죠..

그래서, 뭐 내성이라던가, 중앙에 본성 같은걸 둬서 소수병력으로 방어전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게 맞긴 맞는데.. 조선식 축성방식에 이런게 잘 없습니다.

오히려 삼국시대의 축성보다 규모나 견고함, 높이 등등 여러면에서 퇴화한 느낌이 강하죠.
원채 전투가 없다보니 자연스런 퇴화지만..
               
ultrakiki 15-07-23 22:11
   
백인대장님이 이미 글이 쓰셨죠.
애초에 작은성을 막기에는 무리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잖습니까 ? ㅎㅎ
부산성 동래성은 규모가 매우작은 성입니다. 병력자체도 부족했던 상황이 기습이였구요.
조총때문에 뚫린것이 아니라는겁니다.

그리고 현대식 소총을 이야기 하시는데
현대 소총과 조총 다릅니다. 오늘날의 총이라는 화기를 생각하심안됩니다.
명중률과 사거리가 극악이였고 숙련되서야 근 몇십미터 안에서 살상을 기대하는 병기였습니다.


사거리와 연사력을 갖은 무기의 사정거리 안쪽으로들어가서 거기에다가 고저차에 불리함에도 소모적인 공성전에 돈이 많이드는 고급병종 사용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죠.

실제로 동래성 전투에서 중갑을 입은 왜군이 사각다리 타고 넘어왔다는 자료가 남아있죠

일본 영화를 예로 드셨는데 카케무사의 예로 들겠습니다.
영화 내용을 보면 성 안에 있던 신켄이 저격을 당해서 죽어서 이야기가 시작되죠.
하지만 실제로 그런식으로 운용할수 없는 성격의 무기였습니다.

역으로 인원차의 극도로 불리함과 기습의 동래성이나 부산성보다 
행주산성의 싸움에서 알수있었듯 조총의 역활은 미비했다고 볼수있겠죠.

그렇다고 조총의 효용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니 곡해하지 마시길 ..
                    
Centurion 15-07-23 22:55
   
님께서 조선식 성..
그 성벽 1~2km 짜리 성을 매우 규모가 작은 성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신데..
요즘으로 치면 1개연대 병력이 지켜야 되는 꽤 큰 규모의 성입니다.
시리아에 있는 십자군의 난공불락 요새라는 크락 더 슈발리에의 외성이 1.5km구요.

그 고급병종이라는게 조총 무기값이 비싸다는 소리지.
운용하는 병사 훈련 및 양성이 어렵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일본 축성을 보면, 총안구가 벽에 많이 뚤려있죠.
사람키만한 일본식 활로 거기서 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총안구 맞구요.
카케무샤에도 그 총안구는 나오죠.

그리고, 애시당초 사실상 기습적인 공격이라, 병력 동원에도 차질이 있었고,
일부 병력은 지휘관이 도망치기까지 하거나, 해산시켰죠.

그래서, 동래성이나 부산성의 경우 그 성벽 길이에 비해서도 병력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적이 허술한 곳을 집중 공격해 성벽을 넘어 들어온거구요.

그리고 조총의 경우 평양성 전투 기록에도 사용된게 나와있습니다.

평양성 공격 당시 대동관을 조총으로 공격했ㄷ거나,
고니시의 조총부대가 모란봉에 배치되어 조명연합군을 공격했다거나..
조총부대로 평양성전투에 참가한 명군 무장이 매복에 걸려 죽었다거나.
이런 내용들이 비일비재해요.

동래성, 부산성 한정으로 말하는거라면, 님 말도 맞을 수 있지만..
거긴 솔까 병력 열세로 인해 제대로 싸워볼 환경이 아니었던거고,
공성전에서 조총은 꾸준히 사용됩니다.

당시 명나라 종군화가가 그린
울산성전투도나 사천왜성전투를 그린 임진왜란 기록화에도 총안구에서 조총을 겨누는
일본군 모습은 흔히 나옵니다.

http://pds9.egloos.com/pds/200808/06/57/f0006957_489877740c7ec.jpg

http://img.kbs.co.kr/cms/1tv/sisa/historyspecial/view/vod/__icsFiles/artimage/2012/11/19/c_1ts_hists1/01.jpg
                         
ultrakiki 15-07-23 23:03
   
조총이 안쓰였다고 부정하는게 아닌데 그렇게 해석을 하시나요 ?

하지만 주도적이고 위력과 사거리등등이 형편없고 공성전에 활약을 하지 못했다는겁니다.

공성하는데 보조적인 성격의 무기였다는 겁니다.

애초에 인원수가 20배에 가까운 싸움에서 조총이고 장창이고 뭐고 없었던 싸움입니다.

글타레가 부산성 싸움을 이야기 하는데 뭔 도베이 이야기를 하시는지 ....
                         
Centurion 15-07-23 23:06
   
활약을 못한게 아니라 공성전에 사용된 기록이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 당시는 일본군이 불과(?) 3~4미터 삼간창들고 성벽을 공격하던 시절인데,
사거리 50미터가 짧다고 생각하시는게 문제지요.

어불성설은 님이 조총을 공성전에 못쓸 무기라고 하면서
본인이 내뱉은 용어지 제가 쓴게 아니랍니다.

**********************

임진왜란의 조총강한위력설이 징비록에서 그 원인으로 돌리기도 하는데 어불성성이죠.
실질적으로 조총 위력을 발휘하는것이 50보 이내인데 성벽을 이러한 무기로 공략을 했다 ?
성벽을 공략하는데 조총을 이용했다는 설은 흥미롭습니다.

*****************************************************

본인께서 동래성 전투에 한정되지 않고,
조총이라 무기체계가 공성전에 쓸만한 물건이 아니라는 씩으로 생각하기에 드리ㄹ는 말씀입니다.

사실, 조총이 아퀘부스라는 서양식 화승총인데..
이거랑 큰 차이 없는 머스켓으로 서양은 15~18세기 동안 수많은 공성전을 치뤘습니다.

화승으로 점화하느냐, 부싯돌로 점화하느냐의 차이인거지.
머스켓이나 화승총이나 사거리 짧고, 명중률 나쁘긴 얼추 비슷했죠.

나중에 강선총(라이플)이 나오고 나서야 상황이 슬슬 달라지는거구요.
                         
ultrakiki 15-07-23 23:11
   
그런 논리하면 행주산성에서 왜가 패할일이 없었겠죠 ?

부산성 동래성 인원수 격차가 그리나는데 뭔 수성을 논합니까 ?

그새 사족을 다셨네요. 다아는 정보는 구차하게 다실필요가 없으세요.
아퀴버스니 강선이니 하는것은 말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퀴버스랑 머스켓은 차이는 결정적으로 화력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그리고 또한 아퀴버스로 공성전에서 주도적인 역활을 한적이 없죠.

자 그러면 왜란으로 돌아가서
목책으로만 둘렀던 행주산성의 전투에서는 조총이 어떤 활역을 했죠. ?


현대전 교리에도 나와있지만 투사병기라는것이 고저차의 불리함이 있는겁니다.
더구나 왜란 당시 짧은 사정거리, 극악의 연사기능을 갖은 것으로 성을 공략이요 ?
공성이란 상황에서 그저 보조적인 성격의 병기를 너무 과대 평가를 하시네요.

그리고 링크하신 그림은 수성인데 ....공성의 근거로 갖기에는 ;;;;;
                         
Centurion 15-07-24 00:00
   
님이 말씀하신 영화 카케무샤가 바로 수성전에서 조총 사용한 케이스입니다.

다케다 신겐이 공성을 하던 도중에 수비군 조총수에게 총맞아 죽었다는 썰로 만들어진 게 그 영화죠.

그리고, 임진왜란 기록에도 일본군이 조총병을 동원해 공성, 수성을 한건 많다니까요.

아니, 수성할 때도 총 쏘는데,
멀리서 적군 수비병을 쏴죽일 수 있는 공성전에 조총을 왜 안쓰겠습니까?
일본은 활도 후져서 조총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는데요.
                    
Centurion 15-07-23 23:54
   
행주산성전투에 대해서 잘모르시나본데요.
당시에도 호리병 지형이라고 불리울만큼..대군이 공격하기 힘든 지형입니다.
산아래에서 산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져서 한마디로 정투정면이 좁은 지형이란 소리죠.

http://cfile240.uf.daum.net/R400x0/1263BD3D4ED605A62FEDB5

http://cfile206.uf.daum.net/image/1221071A4C22CE0D17DFC9

http://cfile22.uf.tistory.com/image/1128BE464F90AB56391FD6

이걸 보면 알겠지만, 정면의 토성 길이가 415미터 정도로 아주 짧고.
배후는 한강으로 막혀있고, 뒷부분은 산이라 즉, 적에게 몰리면 산위로 올라가서
계속 방어정면을 줄일 수 있는 지형입니다.

게다가 배후는 한강으로 막혀있어서 적군에게 밀려도 산위로 계속 후퇴하면 되는거죠.

동래읍성은 막상 가보면 알겠지만.(읍성 자체가 시가지에 있다는 소리죠)
그리 높은 곳에 있는 험준한 지형의 작은 성이 아니구요.

부산성은 부산진 자체가 해안가라 평지성일 수 밖에 없고,
여긴 말 그대로 주둔군이 수백명 밖에 안되서 궤멸당한거죠.
(부산진성 둘레는 511.8미터로 작은 편은 맞습니다)
근데 부산진 병력은 800명이었고, 백성 2200명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1미터 당 병사 1명, 백성 5명의 비율 정도로 싸웠다는 소리지요.) 그런데 상대는 1만8700명. 고니시 1군.

동래성의 경우 대략 1km 정도의 성에 2500명 병력과 군민 포함 2만명이라고 하는데..
동문이 성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해 여기를 집중공격해 뚫립니다.

즉, 행주산성은 정면에만 병력을 집중할 수 있었는데..
동래성은 병력배치 혹은 병력 부족으로 인한 잘못된 병력운용으로 함락당한것이죠.

3090척(대략 1km), (임진왜란 이후 개축된 건 대략 3.8km)의 성을 2500명이 지키는건데.
1미터당 2.5명이면 그렇게 작은 병력이 아닐수도 있지만, 너무 정면에 집중해서 측후방이 뚫린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개전초기 일본군에 대해 잘 모르고, 경험도 부족한 병사들과..
나름 권율이라는 명장 밑에서 이치 전투, 독왕산성 전투 등을 치르고 단련된 승전하며
행주산성의 권율휘하부대랑단순 비교는 어려운 문제죠.

http://pds12.egloos.com/pds/200901/14/07/a0105007_496d3909188ac.jpg

http://cfile235.uf.daum.net/image/1762B04F4FD3DE3535E864

동래성이 어떤 성인지 보시려면 이걸 보십시요. 동래성은 평지성입니다.
                         
ultrakiki 15-07-24 00:01
   
그새 또 찾아보셨네요.
또 한번 이야기드리지만 일일이 설명 안하셔도 되요.
다 아는 겁니다. 구지 길게 사족을 다실필요 없으세요.

조총의 역활은 님이 끌어가져오신 울산성 전투 그림에서 보듯
수성하는데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무기입니다. 공성이 아니라요.

님의 지금 댓글을 잘 읽어보세요.
님이 말슴했듯 공성에서 조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잖습니까 ?
                         
Centurion 15-07-24 00:05
   
참 이상한 고집을 피우시네요.

무슨 조총이 수성전에만 사용되는 전용무기인줄 아시나요?

일본 영화에도 조총을 동원한 공성전 영화가 수두룩한데요.

걔네들이 고증 없이 만드는 애들도 아닙니다.

https://youtu.be/kNox_pfgW9c?t=15s

이건 오시성 전투라고, 임진왜란 발발 전에 히데요시군의 호죠씨 토벌을 다룬 영화입니다.
                         
ultrakiki 15-07-24 00:09
   
아집은 그쪽이 부리는것 같은데요.

동영상속에 조총이 주력입니까 ? 잘 보세요.

동영상속에서도 어디까지나 보조적인거 아닙니까 ?
                         
Centurion 15-07-24 00:16
   
말을 이상하게 또 바꾸시는데.
님이 지금 말 계속 바꾸는데요.
 
님은 조총이 공성전에 사용된 걸 의심스럽게 생각하다가.

카케뮤샤 드립을 치시길레, 그 영화에서도 조총을 공성전에 사용했다.
임진왜란 기록에도 조총을 공성전에 사용한 기록과 그림이 널렸다.

그래서 제가 공성전 중 수성전 뿐만 아니라, 공성전에도 사용된것까지
지금 보여드린건데..

왜 갑자기 또 주력이나 보조냐 이런 드립을 치시는건지??

뭐, 자기가 뱉은 말 지기 싫어하는 그런 감정 같은데..
보통 그걸 가리켜 아집이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

사실을 지적한 저한테 갖다붙일 말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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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조총강한위력설이 징비록에서 그 원인으로 돌리기도 하는데 어불성성이죠.
실질적으로 조총 위력을 발휘하는것이 50보 이내인데 성벽을 이러한 무기로 공략을 했다 ?

성벽을 공략하는데 조총을 이용했다는 설은 흥미롭습니다.

이미 성문이 열리고 백병전중 조총을 쓴것이지 성을 공략한데 쓰인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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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최초로 적어둔 말에 대해서 충분히 제가 반론으로 지적해드린건데..
이제와서 보조 전력 타령을 합니까? 조총이 공성전에 쓰였다는걸 말하는건데..
                         
ultrakiki 15-07-24 00:20
   
수성과 공성은 엄연히 성격이 다른것인데 ;;;
저것이 조총으로 성벽을 공략한겁니다까 ?
그럼 어떤 효과를 보였나요 ?

뭔 되도 않은 논리를 피는지 ;;; 그런 아집이면 곤란합니다.
동영상속 초반 조총 쏜것 가지고

' 우앙 조총으로 성을 공략했어 ! ' 이렇게 주장하는겁니까 ?
          
이쉬타르 15-07-23 23:40
   
기록에는 동래성이 어떻게 무너졌느냐하면 성의 북동 측이 허술한...높이가 얕은 토성 축조형태인데 여기를  일본군이 집중해서 돌격해서  성내에 진입해왔다고 하는게죠 그러니 조선병사는 일본의 조총에 그냥 노출이 된겜니다
그란디 조총으로 동래성벽을 부수고  들어왔다고 대체 누가 그렇게 말하든가요?????????....(난 안했는데?)
               
ultrakiki 15-07-23 23:46
   
부산성과 동래성부터 잘 확인하시길 바래요.
부산성 이야기를 하면서 송상현을 이야기 하는것부터 어이가 없었지만...

조총때문에 수성에 실패했다는 소리를 하시고는
'성벽을 부셨다고 말안했음 ' 이렇게 말슴하심 곤란해요.

누가 성벽을 조총으로 때려부셨답니까 ?
이미 적이 성안으로 그 인원이 들어오면 수성이 아니죠.

애초에 조총의 문제가 아니였습니다.
                    
이쉬타르 15-07-23 23:55
   
부산진성 전투하고  동래성 전투를 혼동한것은 내 잘못인데 송상현 부사가 지휘한 전투이며 목재를 대서 조총 사격을 막앗단 이야기 자체는 잘알려진검니다..
허허 수성을 실패 햇다는 거이가 성벽을 무너진것으로 바로 동의어가 아니죠 ...성벽이 무너져도 공자를 격퇴하여  수성을 성공 시킨 사례는 공성전에서 많습니다
성벽을 조총으로 파괴시킬 정도로 원래가 조총이 위력이 큰게 아닌데  ,,조총은 대포가 아니니 갑자기 괴상한 상상이 다 나오는구먼요
                         
ultrakiki 15-07-24 00:05
   
물타기하지 마세요
조총으로 성벽을 파괴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19000 여명과 1000여명 싸움에서 성이 열리면 수성에 실패한거죠. ;;;;

뭔 조총때문에 수성실패를 했다는 소릴하는지.;;;;
님이 주장한바는 조총으로 공략당해서 수성의 실패로 이어졌다는 거아닙니까 .;;;

진짜 괴상한 태세변환 다보겠네요.
                         
이쉬타르 15-07-24 00:10
   
하하핫,,그 동북방 토성을 넘어 들어 일본군이 들어온거 람니다..동래성이 북측면이 험한  산지이죠,,거기는 원래 보를 축조 안하는 자리이고 부수고할게 뭔가요? 그냥 넘어올 자라인데??
조총에 맞아서 조선군 병사가 계속 사상,,그러면 병력에서 부족이고 성을 못 지키고 실함...성벽이 망가지지않고 온전해도 적 공격에다 성을 상실하는것이고 ,,공성 작전에서 보통 사다리는 기본적 사용이라 공자가  사다리 타고 들어간다면 성벽 파괴를 할 필요도 없고 ,,방자인 조선군 숫자가 줄어들면 이런 공격에도 못 저지 하고..
                         
ultrakiki 15-07-24 00:15
   
'성벽 파괴'를 왜 드립하는지 모르겠네요 ?
별 희안한 물타기 다봅니다. 어느누구도 성벽파괴를 이야기 하지 않았어요.

애초에 병력이 부족했다니까 조총드립이신가요.;;;
1:19 의 비율싸움이였다니까;;;;
                         
이쉬타르 15-07-24 00:16
   
자료에는 공자인 고니시 부대는 병력이 3만명 조선군은 2500에서 3000명 군민이 3만명이 동래성에 더 들어가 있었고 ,,어디 기록에는 일본군이 최첨단 공성 장비를 가지고서 공략을 시도해서  2시간만에 동래성이 무너졌다라 하든데 ,,탑 형태로 성을 파괴 안하구도 그냥 성내에다 사격도 해주거나 하는  그런 공성 장치들은 많습니다
                         
이쉬타르 15-07-24 00:18
   
깔깔깔.. 동래성 실함 원인이 성벽을 조총을 쏘아 일본군이  부수고 들어온거라란 사람은 대체 누구여??
                         
ultrakiki 15-07-24 00:21
   
그것은 님의 망상속에서는 나오는것이죠.

누가 성벽을 부셨다고 계속 드립합니까 ? 뭔 물타기도 저렇게 저질스럽게 하는지..;;;
                         
이쉬타르 15-07-24 00:39
   
앗 글고보니 조준 실패당...크크크...Centurion 님이 하신건데도 본인이 잘못  쏨

근데 성밖에서 부터 일본측 조총탄이 날라들어서  조선군 병사가 고전한 이야기가 이 동래성 전투의 전해지는 스토리 란게죠
오오타니 15-07-23 18:10
   
신립이 무능했다고하시는데 당시 신립보고 막으라고 했던 일본군은 총 3갈래길 총병력 5만이엿습니다

1만밖에 안되는 거기다 병력으 반은 오합지졸인 신립보고 3갈래길로오는 왜적을 어떻게 다막으라는건지

애초부터 말도안디는 명령을 선조가 내린게아닌지
돌개바람 15-07-23 18:26
   
오류 1) 임진왜란때 조총은 생각보다 크게 활약한 무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당시 왜군이
가진 무기중에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게 장창이었습니다.
오류2) 율곡이이가 10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설은 확인된 바 없습니다. 율곡의 제자 김장생이
쓴 율곡행장에 최초로 나오고 그 전 실록같은 정사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리고 김명원 신각 문제는 김명원이 신각을 모함한게 아니라 실제로 김명원이 신각과 연락이
두절되자 상부에 그대로 보고 했고 조정에서는 신각이 도망친 걸로 잘못 판단해 처형하라는
명을 내린 겁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초기 조선이 일방적으로 밀린 이유는 다른거 없습니다. 100년 넘게 내전으로
다져진 숙련된 수십만의 군사들이 있는 나라와 200년동안 전쟁이 없었던 나라의 군대간의 대결은
전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전자가 우위를 가집니다. 당시 조선 조정이 한 오판은 일본이 1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할 거라고 생각을 못한것이죠 그냥 남부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킬 정도의 규모로 봤고 대응도
거기에 맞춰서 했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숙련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한 전면전이 벌어지면서 초기에 혼란에
빠지고 일방적으로 밀리게 된겁니다.
     
뚜리뚜바 15-07-23 20:25
   
님 말처럼 조총의 위력으로 따지자면 생각만큼 큰 활약을 한 무기는 아니였지만 조선군 대부분은 조총을 처음 보는 만큼 두려움의 대상이 었을 겁니다. 왜란 초기 심리적 요인을 크게 준게 조총이었다면 후반에는 조선의 총통들이 었죠
          
구름위하늘 15-07-28 12:16
   
조선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총통을 중심으로 하는 부대이기 때문에
조선군이 화약무기 종류에 대하여 생소했다는 느낌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물론 조선군도 임진란 후기에는 조총을 복제하고 사용하기도 했지만,
초기에도 조총과 유사한 개인화기 총통이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조총은 일본군이 절대적인 열세였던 원거리투사무기의 전력을 어느정도 상쇄시키는 역할이었고,
실제 패전은 대부분 근접전에서의 일본군 우세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원거리 무기(총, 활, 쇠뇌, 화포...)로 화력전만 펼쳤다면 조선군이 훨씬 좋은 결과를 보였을 것입니다.
Centurion 15-07-24 00:25
   
그리고 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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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으로 조총 위력을 발휘하는것이 50보 이내인데
성벽을 이러한 무기로 공략을 했다 ?

성벽을 공략하는데 조총을 이용했다는 설은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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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공격하는데 조총을 왜 쓰겠습니까?
성벽 뒤에 있는 사람 맞추는데 쓰는게 조총의 용도에요.

활쏘고 창 휘두르는데 사람이 자기 몸을 노출 안시키기 어렵거든요.
그거 쏘는겁니다.

물론 대구경 조총도 있습니다.
나카쓰스나 오오쓰스 같은 대구경 조총도 있습니다.
영화 명량에서 큰 조총 보셨을텐데 그겁니다.

조총 사거리를 위력으로 따지는게 아니고,
명중률 때문에 50보 타령하는건 모르시지 않겠죠?

50보 거리의 성벽을 무너뜨릴 용도면 조총을 쓰면 안되는거고.
그만한 거대한 표적인 성벽 맞추기가 어려울 일도 없습니다.

성벽맞춰서 무너뜨리려면 막강화력의 대포를 들고와야죠.

참 말을 아리송하게 하시네.
50보 안에서 사람 직사무기로 맞춘다는게 얼마나 큰 매리트인데,
그게 공성전에서 효과가 없을거라 생각하시다니..
     
ultrakiki 15-07-24 00:34
   
자꾸 사족 달지 마세요
대조총같은거 다 아는 것이에요. 그런거 자꾸 구차하게 이야기 할 필요성이 없어요.
사족만 달고 뭐가 얼떻게 활용됬다는 근거가 전혀없어요.

자 님이 주장하는 동영상속 성벽을 기어오르면서 조총을 쏘던가요 ? 아니던데요 ?
초반에 조총쓰고 끝입니다.

자 문제의 본질로 돌아가
' 공성전에 조총이 어떤 활용을 했나 ? ' 입니다.

실제로 없다고 할만큼 미미한 역활이고 동래성 부산성전투에 과연
조총으로 성이 무너졌다 할만큼 공성전에 있어 미미합니다.

성벽을 공략하는데 썼냐 ? 아니죠. 그저 기선재압정도로 쓰인겁니다.
실제로도 부산성 동래성에서 성을 공략당한것은 조총병이 아닌 중갑을 입은 왜군이 성을 넘어
왔고 그 원인은 전력차에서 비롯된거죠.

(님이 주장하는 고증이 철저한) 동영상을 보자면 초반에 나와서 총포만 쏘고 들어가는데
성벽의 공략에 쓰였다고 주장을 하면 글쎄요...

지금의 개념의 직사화기라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수정하셨네요.
그리고 성벽을 무너뜨린다는 드립은 왜나오는거죠 ?
누구도 조총으로 성벽을 부셨다고 이야기 한바가 없는데...
          
Centurion 15-07-24 00:37
   
다 아는 사람이 공성전에서 조총이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의심하는건 뭔 상황이랍니까?

이건 전혀 문외한이나 할 소리를 본인은 다안다면서 내뱉고 있네요 ㅋㅋ
사족은 님이 너무 몰라서 붙여주는건데.. 고맙다는 소리보단 사족붙인다고 역정이라니.

그리고 조총을 어떻게 사다리 타면서 쏩니까? 이거 기본이 너무 안되신거 같네요.
금속카트리지 금속탄피 등장 이후 권총이라면 모를까..
미국 남북전쟁 공성전 때도 상상하기 힘든 이야기를 하시네. 사다리 타면서 총질이라..허허

공성전에 머스켓 쏘는 영화 보여드릴까요?
어디 사다리 타며 머스켓 쏘는 병사가 있는지.

다른 사람들 사다리타고 건너갈 때 엄호해주는겁니다. ㅋㅋ
               
ultrakiki 15-07-24 00:43
   
논리를 뒷받침하지도 않는 사족을 달아놓고선
더구나 누구나 다 알고 님보다 더 잘아는 사실을 놓고서는 뭔 고마움을 바라는지..

황당하기가 이를때가 없네요.
                    
Centurion 15-07-24 00:49
   
이야. 님 진짜 너무하시네.

본인 스스로 말을 몇번이나 바꿔가며..

공성전에서 조총이 무슨 역할을 할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에 증거 갖다대니 수성전 때는 쓸수있으나, 공성전 때는 어렵다느니 하다가,
영화로 링크 걸어주니, 공성전에서 쓸수 있는데 주력이 아니라 보조전력이라고 했다가..
이젠 기선제압용이고, 자신을 포함한 남들이 더 잘안다고 나를 깍아내리시네..
그리 잘아는 분이 그리 문외한이나 할 뻘소리를 늘어놓으시나..

ㅋㅋㅋㅋ 아 노답..

알지도 못하면서 티를 팍팍 내시다가, 말바꿔서 그러면 안 쪽팔리시나요.
자신한테는 쪽팔리실텐데.. 남 눈 걱정해봤자 소용없어요.
딴 사람들은 읽으면서 다 눈치까기때문에..
                         
ultrakiki 15-07-24 01:04
   
진짜 너무한것은 그쪽이에요.지금 흥분하신것 같은데.
몇일있다가 정신차리고 보면 다시보면 쪽팔릴것은 그쪽입니다.

님이 링크한 이미지와 동영상은
백인대장님의 논리를 스스로 참혹하게 까부수는 내용인데 ;;;;

공성전에서 역할자체는 미비하고
동래성 부산성 이야기하는데 공성으로 많이쓰임 하면서 링크가
' 울산성 '수' 성 '

동영상속 영상 역시 전투가 시작되고 기선제압용으로 쏜것을
 ' 우앙 조총이 공성전에 쓰임 '

동래성, 부산성은 전력차가 너무난것임 행주산성과 비교하라는 말에는
행주산성관련 글일 긁어오고서는 대답도 못하고...

조총이 성따는데 위력적이면 행주산성은 왜 실패를 했는지....
그렇게 위력적인 직사화기인데 왜 ?
지형적으로 그러하다 ?
권율의 휘하 조선군은 정예병이여서 ?


정신승리 하심 곤란합니다. 에휴.
                         
Centurion 15-07-24 01:34
   
이보세요.

행주산성은 성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토성입니다.
그 토성 위에 세워둔게 목책이라 몸을 숨기기도 어려운 곳이구요.
사실 이쪽이 조총에 더 취약한건 사실이지만, 대신 산입니다.

그리고 지금 공성이나 수성이나 둘 다 사용되는 예를 보여준겁니다.
기록으로도 존재하고, 유명한 장군이 수성전에서 공성측에
저격당해 전사한 일례도 보여주고요.

그냥 행주산성에서 승리한건,
권율장군과 그 병사들이 지형과 무기체계(신기전, 화차 등등)를 잘활용해,
정말 잘싸워서 그런것이지. 그걸로 일반화시키는건 무리인겁니다.

동래성은 참고로 평지성이고,
행주산성은 높지는 않아도 산이구요.

한마디로 님은 평지전이랑 지금 고지전을 비교하고 있는겁니다.

행주산성의 적은 언덕위로 뻘뻘 땀 흘리며 올라가다가 화차에 쓸리고, 퇴각하고,
다시 교대하고, 다음 군대가 그 화망을 맞으면서 기어오르가다가 털리고 퇴각하고의
연속입니다.

동래성 전투는 그딴거 없었고요. 적군이 평지에서 성벽 꼬라보고, 대병력으로 포위해서,
허술한 동쪽 성문 공격해서 이긴거고. 이게 일본군 입장에선 훨씬 편한 싸움일 수 밖에 없는겁니다.
                         
ultrakiki 15-07-24 01:45
   
성벽을 공략한다니까

' 성벽을 무너뜨리는데는 대포공격 ' 드립하는 분하고 말을 섞은것이 잘못이네요.

님말처럼 행주산성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급조한 목책등으로 이뤄졌죠.
자 그러면 조총우월론 분들의 주장대로라면 조총에 더욱 유리하겠죠 ?

성이라 함은 평지가 아니라 인위적인 기물을 쌓아올려 지형적 이점을 취하는것이죠.
단순 평지로 생각하신다면 더이상 뭐라 해드릴 말이 없네요.

남이 주장하는 것은 일반화고 님이 주장하는것은 정론이고요 ?
시간도 늦었으니 여기까지합니다.
이쉬타르 15-07-24 00:32
   
조총 사거리가 100에서 최대 200미터 라서 이거리에서 조총부대가 사격시 성벽위에서 지키는 조선군에다 맞춰서 살상이 되니 ,,양자 병력 차이 10배로 본다면 ,,수성에서 실패할게 자명하죠
동래성이 높이 지은 성이 아니니 잘해야 성벽 높이가  8미터 이하 라 쏘나기로 날라들 조총탄에 성벽에 붙어있기도 힘듬니다

마침 일본의 전통 무기중 하나가 굴려서 밀고 다니는  탑 방식 공성 기구가 있더라 말이죠
Centurion 15-07-24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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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rakiki 15-07-24 00:20 
수성과 공성은 엄연히 성격이 다른것인데 ;;;
저것이 조총으로 성벽을 공략한겁니다까 ?
그럼 어떤 효과를 보였나요 ?

뭔 되도 않은 논리를 피는지 ;;; 그런 아집이면 곤란합니다.
동영상속 초반 조총 쏜것 가지고

' 우앙 조총으로 성을 공략했어 ! ' 이렇게 주장하는겁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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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귀가 서툴거나 밀리터리에 아주 문외한이신 모양인데..

조총으로 공성전에 활용한다. 성벽을 공략한다는건..
조총으로 수비군을 저격해서 죽인다는 소립니다. 나참..

성벽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성벽을 공략한다면, 대포를 들고 와야죠.
일본에서도 당시 포루투칼 상인에 의해 전래된 대포가 오토모 가문 등에서 쓰였습니다.

이런 문외한이 본인이 다 안다고,
설명해주는 사람을 남들 다아는 얘기 한다고 깍아내리고, 사족 타령하는게 웃긴 노릇이군요.

무슨 조총이 성벽 부수는 무기라서, 성벽을 조총으로 공략한다고 쓰는 줄 아시나요? ㅋㅋ
     
ultrakiki 15-07-24 01:13
   
뭔 성벽을 무너뜨리는 소리를 계속 하시나요 ? -_- ;;

성벽을 공략한다고 하면 성 위에 있는 병사를 공격한다는것이지
성벽 돌덩이나 흙덩이랑 때리고 있는다고 말 그대로 해석하시나 ;;;;;
말장난은 그만 하세요.


그 당시에 조총은 흩뿌리는것이지 지금의 총과같이 핀 포인트로 저격을 하는 병과가 아니였어요.
물론 소수  저격을 위한 잘쏘는 포수들을 운용하는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동래성 부산성이 저격수에 노출되서 성이 따였다 ? 글쎄요.


사족도 어처구니 없게 다는군요.
설마 진짜로 성벽을 공략했다라는 말을 ' 성벽을 무너뜨리고 부신다 ' 이런 말로 해석한것인지
말장난을 하시는것인지..;;;; 이런 사족이 어처구니 없는 겁니다.
          
Centurion 15-07-24 01:18
   
군대 미필이세요?
50미터 사거리에서 사격이 맞는다는게 뿌려댄다는 표현을 쓸 정도인 줄 아시나봐요?

그리고 누가 지금 동래성만 얘기합니까? 공성전 자체에 조총이 쓰인걸 이야기하는거지.

님이 조총(아르퀘부스)가 공성전에서 사용이 의심되나고 한 순간
전쟁사 문외한인거 뽀록난겁니다. ㅋㅋ

다른 영상 하나 보여드려요?
아르퀘부스(조총)을 활용하던 스페인 테르시오 소총병이
네덜란드 전역에서 공성전 벌이는 건데. ㅋㅋ

아니면 러시아와 폴란드가 공성전에서 화승총 쓰는영상 보여드릴까요? ㅋㅋ

그리고 위에 댓글 자체가
본인 자체가 조총이 어찌 공성전에 사용되는지도 모르니까 하는 말이구요. ㅋㅋ
               
ultrakiki 15-07-24 01:21
   
부왘 ㅋㅋㅋ

조총의 위력이 좋아서 공성전에 쓰였다며

당장 왜란의 행주산성은 지형탓 장수탓 하면서...

이제는 유럽 ㅋ


어이구 ...

좀 모르면 가만히 계시지 사족을 달면 뒷받침 할것이라 생각하나 ;;;;

미필드립은 아주 가관 그 자체네요.
                    
Centurion 15-07-24 01:40
   
조총이 유럽산 아르퀘부스(화승총)인데..
하.. 물건너와서 일본이 쓰니까 만만해보이시나봐요?

괜히 유럽에서 화승총 등장 이후 기사계급이 몰락한게 아니고,
기사 대신 총사대를 중심으로 창수, 궁수, 화승총병, 대포병으로 이뤄진
새로운 군대 편제가 괜히 나타나는게 아닌데..

유럽이라니.. 부왁 이러시네..
일본이 쓰던 그 조총이 유럽에서 쓰던 그 아르퀘부스 화승총이라니까요. ㅋㅋ

글케 잘안다는 사람이 ㅋㅋ

대항해시대 때 유럽이 쓰던 총이 바로 그 총이고,
잉카제국 정복한 코릍테즈의 병사들이 쓴 총이 그 아르퀘부스 화승총(MatchLock)이에요.

유럽 최강으로 스페인이 군림한 배경에도 이 총이 있었는데, 허허..

좋은거면 서양 똥도 갖다 쓰는
일본이 1자루에 쌀 몇십석 값을 치루고 그걸 왜 사고 만들어서
병사들에게 쥐어보냈겠어요?

왜 조선이 전쟁 끝나고 화승총을 무려 10만자루 이상이나
나라 망할때까지 주구장창 생산했는지도 모르시나보네요.
                         
ultrakiki 15-07-24 01:55
   
답답...

아퀴버스란 설명 할필요가 없다니까요 ㅋ 참 징하게도 사족을 다시네요.

테르시오 드립도 진짜 황당할 따름.
사족에 일일이 구차하게 이야기 하는것도 추잡스럽기에 이야기 안하는것인데

자 봅시다
테르시오는 파이크병이핵심이라봅니다만.
포수가 흩뿌리는 탄막을 형성하고 본격적인 백병전 유도하는 전술을 구사하는것인데
오늘날 해병대처럼 특화된 것이구요.
아퀴버스 뿐만아니라 머스켓도 쓰였어요. 아퀴버스만 쓰인것처럼 이야기를 하시네요.

왜란 직후에 화승총 부대가 늘어났지만
이괄의 난때 털리고, 호란때는 기병한테 탈탈 털리고

무기라는것이 상황과 때가 적절할때 발휘하는것이지요
아무때나 우앙짱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이런 구차한 이야기까지 해야합니까 ?
답답하다.
                         
Centurion 15-07-24 02:02
   
무슨 테르시오가 파이크병이 핵심이랍니까? .

훈련도감의 삼수병 체계처럼.. 살수, 궁수는 포수(화승총병)을 보호하고, 장전하는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이고..

테르시오의 탄생 자체도 이탈리아 전쟁에서 스페인이 중기병한테 개발린 이후,
총병을 중심으로 전력을 짠겁니다. 파이크병은 기병 접근 거부용이고..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아예 총검이 개발되서 창병도 사라져요. 괜히 소총병만 살아남은게 아닙니다.
                         
ultrakiki 15-07-24 02:08
   
에휴

나중에야  1:1 비율까지 갑니다.

그 전까지는 수대: 1로 탄막을 구성하는 아퀴버스, 머스켓 비율이 적었구요.

여기서 머스켓을 제외하면 아퀴버스의 비율은 현저하게 적었겠죠.


테르시오 진법은 파이크 병이 없어진후에는 필요가 없어지는 겁니다.

당시에는 근접이 핵심인데요.

삼수병도 명나라 군체계에서 영향을 받아

핵심이 살수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포수들만 때어놓고 이야기를 하시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참 딱 아는만큼만 이야기를 하시니 ....
          
Centurion 15-07-24 01:58
   
님이 왜 미필 같냐면..

50미터를 우습게 아시는데..
군대가면 100-200-250미터 사격합니다,. 100미터 맞추기 쉽죠.

근데. 100미터 달리기 하면 보통 13~18초대인데.. 그 사이면 소총탄 수십발에 벌집되는 시간입니다.
조총요? 장전해두면 50미터면 맞추는 명중률인데.. 50미터 달려오는 속도 감안하면.. 1명은 반드시 저승길 보냅니다.

성벽 위에 있다구요? 창들고 활들고 있다가 몸을 내밀면, 조총 한방에 죽기 딱 좋습니다.
몇미터 되는 성벽위에서 뛰어내려서 죽이려 달려올 수도 없거든요.

즉, 상대방은 공성전 시 대나무 방패나 나무방패 뒤에서 성벽 조준하고 있으면, 수비군 골로 보내기 딱 좋다 이겁니다.
무슨 조총이 흩뿌린다뇨. 이게 뭔 산탄총입니까? ㅋㅋ

일정 사거리 이상에서 잘안맞는다는 소리지. 일정 사거리 안에선 그냥 말 그대로 직사무기에요.
10~20미터정도면 대충 지향사격으로도 맞춰서 죽일 거리입니다.

이걸 막으려면 두툼한 돌벽 뒤에 있던가, 상당한 두께의 나무 방패 뒤에 있어야되는데..
전쟁하면서 창휘두르고 활쏘러 적 위치 파악하고, 조준하고 쏴야되는데 몸을 숨기고만 있을 줄 아세요?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높은 산위에서 아래를 내다보고 좁은 정면으로 헉헉 대며 달려오는 적들한테..
신기전 화차와 대포로 집중사격을 가하는게 행주산성전투인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 보셨음??
한마디로 기관총과 대포로 집중 사격하는데 적군은 그거 맞으면서 기어올라오는게 고지전입니다.

군대에서 소부대전술훈련 마일즈 훈련 이런거 해보면, 고지전의 위력을 체감하셨을텐데..
               
ultrakiki 15-07-24 02:01
   
지금의 소총과 당시 극악의 명중률과 사거리를 생각하니 답없니다.

당시 괜히 진영을 짜서 쏘는 것이 아닌데.;;;;


행주산성에서 이제는 몇세기를 넘어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 까지 ㅋㅋㅋㅋ
                    
Centurion 15-07-24 02:12
   
극악의 명중률이라뇨.. 허허..
상대방이 창칼들고 달려들면, 50보 밖에서 죽이는 무기체계를 우습게 보세요?

상대방이 총병한테 도달하는 사이에 골로 가는 겁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성벽이란게 오히려 기동력을 제한하기 때문에..
그 상대가 창칼 들고 있어도 아래서 총갈기는 조총병을 못죽여요. 궁수면 모를까.

근데 그 궁수도 석축 밖에 몸 내밀다가 골로 가기 좋을 정도의 명중률이
50미터 안에서는 확보된다는겁니다. 총은 방아쇠 한번 당기면 나가죠.
활은 시위 당겨서 조준하고 시위 날려야되죠. 행동도 크고 반응시간이 좀 더 느리죠.

게다가 보통 조총병은 창병과 궁병이 보조를 합니다.
오히려 야전이면 아군 등에 쏘는 오인사격 위험이라도 있어 전투초기에나 잠시 쓰지만,
공성전이면 높은 곳의 적을 조준하는거라 오히려 쓰기 더 좋은 상황이죠.

극악의 명중률과 사거리란게.. 당시 창칼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긴겁니다. ㅋㅋㅋ
님 창칼 던져서 50미터 밖에 성밖의 조총병 맞춰 죽일 자신 있슴?
반대로 조총병은 그게 가능합니다만.

임진왜란 끝나고 활쏘기를 그리 중요시하던 조선이 화승총을 그렇게 대량생산하는지 이해를 좀 합시다. 참 고집 쎄시네. 일본이고 조선이고 왜 화승총에 그리 몰두했는지 이해를 못하시나봐..
                         
ultrakiki 15-07-24 02:21
   
웬 창칼 드립...

조총으로 50보내에 쏜다고 다 죽는것이 아니에요.
그정도 와야지 효과를 기대한다는 것이죠. 쏜다고 맞는것이 아니에요.


현대의 총이란 무기랑 당시 무기랑 비교하시는 것 자체가 무리에요.

아퀴버스보다 한세대 개량된 머스켓 싸움할때
괜히 일렬로 라인베틀 하는것이 아닙니다.
흩뿌리는 탄환에 하나라도 맞추려고 하는것이죠.

머스켓도 그러한데 화승총이요 ? ㅎ

현대의 소총의 수준으로 쏜다고 착각하시는것이 오류의 시작입니다.

진짜 명즁률이 극악이였어요. 누구를 저격하기에는 더더욱 힘든 무기였구요.


그럼 왜나라가 왜란을 끝나고 세키하라전 이후 도쿠가와 정권이 들어서는
조총을 왜 줄여갔는지는 생각 안하시나요 ?

어떻게 보고싶은것만 보고 끌어다가 이야기를 하시는지....
                         
Centurion 15-07-24 02:29
   
https://youtu.be/zh_yTV8r-W0?t=23s

Polish-Russian War - 1612

임진왜란 1592년~1598년이고, 이건 1612년이니 그닥 차이도 안납니다.

화승총(matchlock)을 공성전에서 어케 쓰는지나 보세요 ㅋㅋㅋ
                         
ultrakiki 15-07-24 02:36
   
영상속에는 화승총 아퀴버스가 아니라 머스킷입니다.
사거리도 위력도 더 크죠.

알고 링크조 하시지. 괜히 밀집대형을 짜는것이 아니랍니다.
영화적 연출을 현실로 받아들이는것은 문제입니다.

또 조선 삼수병이야기를 하시는데 몇보 내에 접근했을때 사용하는지는 아실듯.
워낙 잘 안다고 하시니 ㅎㅎ
오라네공의 전술과 제법 비슷한 구석이 있으니 아실겁니다.
                         
Centurion 15-07-24 02:54
   
이 님 이럴 줄 알았다.

이보세요. 머스켓이랑 아르퀘부스는 단지 크기 차이인거고,
둘다 활강 총신에 동일한 구조를 씁니다.
물론, 화약의 양과 총신의 길이에서 차이가 나지만.
(대략 아르퀘부스(조총급이 1미터), 머스켓이 1.4미터)

https://namu.wiki/w/%EB%A8%B8%EC%8A%A4%ED%82%B7

소위 머스켓 유효사거리는 약 100야드(91미터)로 80미터~90미터까지 보는거고.
정확한 명중률을 위해 40~50미터근접을 보고,
화약무기이기에 최대사거리는 500~700미터도 넘게 날아갑니다.

그래서 조총의 경우도 실전적으로 조선군에서도 50보 정도를 유효사거리로 본거고..
저격수는 이 활강총으로도 150미터 정도 커버했다고 하는거구요.

그리고 애시당초 총 쏘는 이유가 파워가 쎄서 갑옷을 숭펑숭펑 뚫기때문에 쓴겁니다.

**********************************

현재 전해오는 조선 시대 조총 중 구경이 가장 작은 것은 7mm급 정도, 최대급은 25mm급이고 가장 흔한 유형은 13~16mm급이다. 길이는 90~140cm 정도이며, 무게는 4kg 이하가 대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일본 조총의 유효사거리는 30~50m 수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관통력, 명중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수치일 뿐 무기 자체의 성능상 한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인 조총일 경우 200m 이상의 거리라면 사람을 살상하는 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조준한 목표를 맞춰 신체상의 손상을 입힐 수 있는 유효사거리는 100m 이내이며,
숙련된 사격자일 경우 100m 이내라면 10발 중 8~9발은 사람의 상반신에 명중시킬 수 있다고 한다.

실제 구경 9~16mm급에 3~6몬메(11.25~22.5g) 탄환을 사용한 일본의 표준형 조총으로 실험한 결과를 보면 30m정도에서는 확인 사살이 가능한 수준이고, 50m부터는 대략 표적을 맞추긴 해도 탄착점이 조금 분산되는 경향이 있다.

http://bemil.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21/2011072101813.html

**************************************************

아~ 유용원 군사세계 글로 대신합니다. 좀 그만 좀 고집피우시죠.
30~50미터는 맞추기 수월한 편인거고.
소위 조총으로 100미터~150미터까지 맞추는 수준을 저격수 영역으로 봅니다.

현대소총이 아니라 조총 기준으로 말이죠.

아시겠죠? 님이 상상하는 거 이상으로 잘맞는다는 소립니다.
                         
ultrakiki 15-07-24 03:00
   
진짜 노답
세상 편하게 사시는분.
어떻게 딱 아는 만큼만 보고싶은것만 보고 이야기 할까...

님이 링크하는게 님이 주장하는바가 아닌데...
                         
Centurion 15-07-24 03:05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요.

머스켓이나 아르퀘부스나 화약 장약과 총신 길이 정도의 차이지..
뻔히 실험결과나 문헌기록으로나 사거리가 거기서 거기고만..

그걸 머스켓이잖아요로 일축하고
아르퀘부스는 안되고 머스켓만되거든여로~ 정신승리하시네.. ㅋㅋㅋ

저기 문헌과 사격실험 결과
조총 사거리가 30~50미터 이상이라고 나오잖습니까. ㅋㅋㅋ
숙련된 사수는조총으로도 100미터 이내에 8~9발 맞출 정도고..

이게 머스켓이랑 뭔 하늘 땅 차이가 납니까. 사거리나 명중률이나 거기서 거기고만.
머스켓도 뻔히 명중률 구려서 40~50미터에서 쏘는 무기인거고..
                         
ultrakiki 15-07-24 03:16
   
단지 길이의 차이 ;;;;;
본인이 가져온 링크는 읽어보고 하는 말인가 ;;;;

'이미 유럽에는 (아퀴버스보다) 상대적으로 크기가 더 크고 화력이 강한 머스킷(Musket) 방식의 화승총을 이미 운용했다. '

머스켓이 더 크고 화력이 좋았고 총신이 더 긴만큼 명중률도 손톱만큼이라도 당연히 좋았을것인데 남의 미필을 논하기 전에 그런것은 상식아닌가요 ?

참 답답 그자체.

착각속에서 나오세요.
라이언 일병 드립을 치질 않나 미필드립을 치질않나
성벽을 공략한다니 ' 성벽을 때려부시는데는 대포임 ' 드립하질 않나....

그만 해야겠네요.
제대로된 답은 없고 본인 링크속에 다 답이 있는데 정신승리로 일관하시니.
센Q정전 ! 만세
                         
Centurion 15-07-24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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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말:
머스켓이 더 크고 화력이 좋았고
총신이 더 긴만큼 명중률도 손톱만큼이라도 당연히 좋았을것인데
남의 미필을 논하기 전에 그런것은 상식아닌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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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손톱차이인데 뭘 모른척 하십니까? ㅋㅋㅋㅋㅋ

그리고 다 아는거 사족붙이네 뭐네 하면서 남 깍아내린건 님이 먼저에요.
미필 드립은 님이 너무 뭘모르니까 하는 말인거고.

솔까 군필자라면 입 밖에 내기 어려운 말인거고.
신교대 사격이랑 선착순 몇번해봐도
 25미터, 50미터, 100미터 어떤 거리인지 느낌이 확 올테니까.

뭐 머스켓은 50미터에서 맞추는데, 아퀘부스는 5미터 밖도 못맞춘답니까?
그런 자료를 들고와서 반박을 하세요. 거기서 거기고만.

본인이 아집에 사로잡혀 큐짓을 해놓고 이제와서 엄한 사람한테 누명씌우네.
기가 찬다. 기가 차. ㅋㅋ

명중률 거기서 거기인 활강총에 체급 좀 다른걸로..
이건 공성전에 못쓰네 마네 하다가, 동시대 매치락 머스켓으로 공성전 치루는 영상보고는..

저건 머스켓이잖아욧~~~!!! 아 웃겨..

조선시대 문헌에 수성전 도중 공성하는 왜군 조총에 맞아 돌아가신 김시민 장군 글을 적어둬도 그건 저격수거든욧~!! 아놔 참.. 그럼 공성전에 조총 안쓴게 됨? ㅋㅋㅋ

진짜 큐네 큐네. 울트라 캡숑Q 시구만. 울큐정전 보소.
               
구름위하늘 15-07-28 12:24
   
100미터 달리기 대부분 성인 남성이라면 20초 이내에는 달리죠?
빠르신 분은 15초 이내이고요.

조총 장전 & 발사 속도는 대략 숙련된 사람이 분당 2발... 즉 30초에 한발입니다.

100미터 달리기로 들어오는 상대방에게 1발도 못쏠 가능성이 훨씬 많습니다.

제 견해로 조총은 일본군의 열세인 원거리 전력을 조금 올려준 것이지,
그것이  화포나 활 보다 우세하지 않았다 입니다.

조총 종류가 많아서 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유효사거리를 50M로 봅니다,
우리나라 활은 유효사거리가 그것보다 훨씬 깁니다. (보통 100M 이상)
곡사라는 것이 단점도 되지만 장점인 경우도 있고, 연사속도에서는 상대가 안될 정도로 활이 좋죠.
Centurion 15-07-24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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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대첩

한 번 대패한 일본군은 진주를 빼앗으려고 다시 계획을 세웠다. 1592년 11월 8일(음력 10월 5일) 일본의 2만 대군이 진주성(晋州城)으로 쳐들어왔는데, 1부대는 마재를 넘어오고 2부대는 불천을 넘어 들어오고, 3부대는 진양을 무찌르고 들어왔다. 그런 다음 성을 둘러싸고 포위 공격을 감행하자 김시민은 고을 안에 사는 백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성으로 들어오게 하고 여자는 모두 남장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조직된 3,8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성을 철통같이 지키며 7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을 물리쳐 퇴각시켰다. 조선군의 위대한 승리였다.

1592년 11월 12일(음력 10월 9일) 마지막날의 전투에서
김시민은 격렬한 접전 도중 유탄에 맞고 의식을 잃었지만
이광악이 지휘를 이어받아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진주성을 필사적으로 항전하여 막은 진주목사 김시민장군은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의 나이 향년 3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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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장군이 일본군 공성전 도중에 쓴 총탄에 맞아 순국하셨네요. 더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일본군이 공성전 할 때 조총 썼다는 소리입니다. 그것도 김시민 장군을 저격해서 전사시켰네요.

사실상 공성전보다 더 열악한 파도치고
일본선박보다 훨씬 높은 판옥선 위에 있던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것도..
일본군의 조총에 맞아 돌아가신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총이 공성전에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질문은 전쟁사 문외한이나 할 소리죠.
자기자신 15-07-24 02:14
   
조선군이 패한이유? 뻔하지요 오랜전쟁을 해보지않았으니까요 약200년간 전쟁에 대한 위기의식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고 훈련나태.군기문란.교관들에 무능.이상한훈련방식 조선군주력무기는 창도 아니고 칼도 아닌 바로 활 각궁 궁술만 집중적으로 배움 창술이나 검술은 거의 안배웠다고했도 무방 또 전쟁경험이 거의 없었던 병사들이니 활솜씨는 개판오분전 더구나나 논이나 가꾸던 농민들 전투훈련도 받지않은상태에서 부략부략 모았죠 급하게 이게 가장큰 연전연패에 원인
스마트MS 15-07-24 11:00
   
오늘의 포인트밭이군요.. 냠냠
하얀그림자 15-07-25 10:24
   
징비록에 나옵니다
왜적이 대동강 건너에서  평양성을 향해  쏴서  사람을 맞춥니다(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반적인 공성전은 포격에 이은 기마병 투입이죠
조총은  초반  기마병이나 돌격병 엄호 정도의 용도겠죠
주로 사거리내 엄폐 구조물을 확보되었을 때  노출된 적병을 사살하는 용도입니다
당시 조선은 화약 무기가 매우 발전한 국가였습니다
개인화기인 총통부터 대포까지 있었습니다
수성 공성전에 쓰였죠
근데 총통은 조총처럼 견착식이 아니라서 정확도가 없지요
조총은 30-50미터가 유효사격거리라지만 더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치명적일수 있습니다 정확도도 현대 소총보다는 못하지만 활이나 창보다  살상 거리나 정확도가 뛰어납니다
글구 유럽은 석회암이 많은 지역입니다
우리나라 성은 화강암이지요
머스킷이 아니라 캐레바 50으로도 화강암 못뚫습니다(링크 러시아 폴란드 공성전을 보고)
임진왜란 공성전에 조총이 쓰여진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만
수성전에 더 효용이 큰 것도 사실입니다

행주산성에서 권율도원수는 솥을 뒤집어 쓰고 독전 지휘했습니다
 화살이라면 투구로 족했을 겁니다
 모냥 빠지게 솥을 뒤지어 쓴것은 조총에 대한  방어책이었죠
김시민 장군도 장수로서  수성전을 지휘하다가 머리에 총을 맞으셨던것으로 추측됩니다
현대전처럼 CP나 지하벙커에서 지휘하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조총이 지휘관 저격용으로 쓰였던것도 사실입니다
바다 위나 성에서 북채와 칼을 잡고 전투를 지휘하는 것이 장수의 본분이었던 시절이었죠

M16 최대 사거리가 2000여 미터로 알고 있는데
대동강은 큰강입니다 (삐라에서 봤는데 넓더군요 한강만큼은 아니라도......)


글구 신립이 ㅄ인것은  북방에서 여진족 상대하던 기마전술로  조총을 상대했다는 겁니다
문경세제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다가  북상하는 일본군을 맞았다면 행주대첩의 효과를 보았을 텐데말이죠
그렇다며 전황은 실제 역사와  달리 돌아갔을 겁니다
뭐 결과론적인 생각일수도있지만
신립은  조총에 대한 이해가  미진했던거죠
전략설계 15-07-25 15:40
   
공성전에서..

성과 50미터 거리에 대나무방패 뒤에 총구 좀 내놓고 조준하는 조총수를..
성벽 뒤에 서서 궁수가 그 틈으로 쏴 맞추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조총수는 성벽 사이로 모습을 들어내는 조선군을 저격하기는 가능한 것으로..
총과 궁의 정확도의 차이가 공성전에도 영향을 준다고 봅니다.

성내 충분한 수량의 총통으로 방패 하나 하나를 날려버린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죠.
50미터 거리라면 방패 맞추는 것도 어렵지 않을거 같네요.
총통과 궁수가 충분히 갖춰진다면 공성시 그 당시 조총으론 얼굴 내밀기 어려워 보입니다.

만일 조선측이 총통이 갖추지 못한 공성을 가정할 경우에나
50미터 거리에서
방패뒤 조총수 vs 성벽뒤 궁수의 쌈은 조총수 승일 것으로 봐지네요.

진주성이 함락된 이유는 이런 조총의 위력이 아닌,
성벽이 무너지면서 왜군 보병이 들이닥친 것이라,
임란 공성전시 일본측 주역이 조총수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구름위하늘 15-07-28 12:33
   
총구멍에 해당하는 사혈이나 성벽 위의 요철에 해당하는 여장으로 보이는 상대방을
저격해서 쓸어뜨릴 정도로 정교한 사격(저격에 가깝네요.)을 조총으로 전쟁 시에 할 수 있었을까요?

사거리면에서 활과 화포가 훨씬 긴데?
활은 곡사라서 관측만 미리 되면 성벽에서 살짝 떨어져서도 쏠 수 있습니다.

저는 조총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엄호사격이 되어서
근접 전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돌격이 가능했다 정도로 보지
조총 vs 활에서 조총에 손들어주는 것은 조금 오버가 아닌가 합니다.

실제 명중율을 생각하면 엄호 이상으로 저격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요? (조총에 강선이라도 들어가면 모를까)
마우스치워 15-07-25 21:21
   
신립장군은 바보가 아닙니다 ㅡ,ㅡ; 당시 최강국으로 성장할 잠재력을 가진 여진과 대치하면서 조선군 최고급 장군이 바보일리가 있나요; 대세를 모르거나 지형을 몰라서 탄금대 전투를 치른게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숫적으로우위인 병사, 무기,병참이 우위인 적군, 훈련도가 압도적으로 차이나는 적군을 상대로, '숫자만'을 맞추기위해서 중앙정부에서 제대로 창조차 한번 잡아보지 못한 농민들을 대다수로 해서 통솔을 해서 다수의 적군과 전투를 중앙정부에서는 '결전'을 강요합니다. 이는 이순신, 원균이 중앙정부에서 전시상황을 모르면서 압력을 가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문관출신들만 모인데다 이론으로 조차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이 싸우기만 강요를 하는 상황이죠, 계속된 중앙정부의 재촉에, 이동중에 사기는 바닥인 농민군들은 하루가 지나면 수백수천명이 떼지어 도망가는 형편이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유리한 공략하기 힘든 지형이란 곳에서 시간을 보내면 사람이 없어서 전투를 시작도 못할 지경이었다는겁니다; 신립의 잘못이라면 단지 중앙정부의 명령을 거스를 용기가 없었단겁니다. 그러나 당시 같은 전제왕정국가에서, 이를 거스르는건 대역죄에 준하는 죄로 집안이 멸문을 각오할 수준의 문제였으니 그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잘못된 명령이라도 일단 따를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였단거죠
     
마우스치워 15-07-25 21:37
   
굳이 란체스터의 법칙과 숫적인 우세를 적용하지 않더라도, 병역제도가 부패하여 유명무실해져
숫자상으로만 기입되어 있던 백성들이 어느날 듣도보도 못한 왜적이 쳐들어 왔다는 예기를하고
사망시의 가족에 대한 복지같은게 적용되던 시대도 아니고, 기본적인 방어구는 커녕 무기조차
녹슨 창촉 단 무기들 규격화도 되지 않은것도, 제대로 된 수량도 아니고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본적인 규율훈련같은것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사기는 말할것도 없었습니다. 저녁만 되면 탈영해서 도망가고, 호구조사 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이 부지기수이던 시절 죄다 도망가는 분위기입니다. 이상태에서 누가 지휘관인들 어떤 선택지가 있을까요? 차라리 3천정도되는 여진족과 대치하는 국경지대의 기마병만으로 치고 빠지면서 지연전술을 하면서 축차투입으로 인한 병력손실을 막고 시간을 벌어 기본적인 훈련이라도 해서 거점방어를 하는것이 최선책이지만 중앙정부에서는 '결전' 만을 강요하는 상황입니다 어서 싸워서 적을 전멸시키라는거죠....  일본에서 실제로 이순신에 대해서는 도리어 급수가 김시민이나 권율보다 급수가 월등히 떨어지게 평가합니다, 군 감찰관의 객관적인 수치평가를 내리는 상황으로 김시민,권율장권 같은 경우 수치나 전략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는걸 보면 조선장수라고 폄하해서 그런것만은 아닙니다. 단지 일본에서는 당시 주전력이라고 할만한 '전투선' 중심의 부대와는 상당히 제한된 전투만이 있었고, 주로 보급선, 수송선을 급습하는 형태의 전투를 했던게 이순신장군이라는겁니다. 실제 전투선중심은 한산대첩이라고만 할 정도이기까지도 합니다...  이는 이순신장군의 폄하가 아니라, 전력이 열세인데 '무조건' 싸우는 멍청한 짓은 바보나 하는거라는겁니다. 칠천량의 원균이 중앙정부의 명령에 따랐던 경우를 생각하면됩니다. 상대를 이기는건 적부대를 이기는것만이 능사가 아니고 보급을 곤란하게 하거나, 거점을 점령해서 상대를 고립시키거나 하는 화려하지 않은 전투가 오히려 대국적인 측면에서 더 큰 효과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는겁니다. 당시 임진왜란에 참여한 다이묘들 중 병사수치를 보면 십여년을 전투를 해도, 사상자가 절반을 넘는 다이묘가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 냉병기 시대에 사상자는 그렇게 많지가 않고, 무조건 무기도버리고 뛰어 도망가는 상대를 보병이 잡아서 죽인다는게 그만큼 어렵다는거죠... 그렇기 때문에 거시적인 측면에서 중앙정부를 거스르면서 까지 병력을 운용한 이순신장군이 훌륭한거고, 신립장군또한 전쟁초기에 그런식으로 중앙정부를 거슬렀다면 백의종군수준이 아니라 전투에 나서기도 전에 궁궐 앞마당에서 참수되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였다는걸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하얀그림자 15-07-26 00:27
   
신립이 비난받은 것은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조정 대신들도 신립이 패배한 것은 문경새제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햇습니다
신립의 부장들도 문경새제를 지키자고 했고
신립의 군대를 괘멸시킨 고니시도 신립을 바보라고 했습니다
후일 이여송도  신립이 문경새제에서 지키지 않은 것을 실수라고 했습니다
조선이 오랜기간의 태평성대로 인해 병제에 문제점이 많았습니다만
신립의 군대를 정예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급히 군사를 마련하느라고 어중이 떠중이가 섞여있었지만
당시 선조가 보검과 술을 하사하며 출전을 명할 때 신립에게 주어진 군대는 조선 최고의 정예엿습니다
신립이 문경을 선택하지 않고  평지에서 결판을 내려했더것은
갑자기 얻은 오합지졸보다는  잘 훈련된 기병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징비록에 나와 있습니다
유성룡이 조총에 관해서 신립에게 걱정스럽게 묻자
조총이란것이  쏠때 마다 (우리 병사에게)맞는 답디까?라고 말했습니다
조총에 대한 신립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지요
기마병은  그 자체로 오합지졸이 아닙니다
최소한 수년간  반복된 훈련을 해야 그 특성이 발휘됩니다
마ㅏㄹ타는 것도 자유롭지 못한데  마상에서 활을 쏘고 칼을 휘드루겠습니까?
문경새제를  신립이 선택하지 않은 것은 기병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조총을 과소평가한것이죠
견착 개머리판이 없는  명중률이 극악인 총통과  비슷한 화약무기로  생각했던거죠
새제의 좁은 험로로 말을 몰고 올라가 전투를 하기에는  말의 활용도가 제로에 가까울 것입니다
때문에  기마병을 문경새제 후방에 배치시키거나 말을 버려두고 고지전에 임하려 도보로 문경세재에 올라야 했을겁니다
병력을 분리해야 하거나(새제와 평지) 뛰어난 軍器인  말을 버려두는게 신립입장에서는 못내 아쉬웠을 겁니다
조총을 능가하는(?) 기동대(기마부대)의 능력을 믿은 겁니다
님 말씀대로 전쟁은 판타지가 아닙니다
어중이 떠중이(급편제된 보병) 데리고  산에 올라가 싸우느니
자신이 북방에서 해왔던 기마 기동 전술이 더 유용한 전술이라고 확신했을 겁니다
즉 신립의 군대는 조선의 최정예(精兵 ....실록의 표현을 빌리자면)+제승방략제도에 의한 경기 충청의 지방군으로 구성됬습니다
신립은 전장을 누벼온 백전노장이었고 당대 최고의 장군이라고 칭송받아 왔느니 모르지만 조총을 몰랐던 겁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스페인의 아르퀴부스를 처음 본 아메리카 원주민 같은 입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제가 신립을 위한 변병을 애써 찿는다면  위에서 언급한 산속에서는 말을 파킹(?)할 자리가 없다
군대를 둘로 가르거나 (평지와 문경새제)하면 전력이 약화하기에  차라리 들에서 싸우는게 낫다라고 판단한것이다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고
그의 판단(들판에다 진을 친것)은 오늘날의 관점이나 패전 직후의 관점에서 봤을 때 결과론적으로 매우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것입니다
김시민이나 권율은 정예부대로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한게 아닙니다
정예타령을 유독 신립에게 적용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마우스치워 15-07-25 21:42
   
일부 군사정권시절 과대하게 미화된 이순신장군의 이미지 때문에 이런 말을하면 욕을 하는 사람까지도 있는데
이순신장군이 싸우는 족족 무조건 이기고 이순신 예기만 들어도 도망가고... 이런식으로 말을 할정도면 중앙정부에서 싸우라고 하는데 수차례나 거부를 해서 조정에서 소환하고 하는 예기들은 말이 안되죠... 싸우기만 하면
적이 수십 수백 수천배라도 다깨부수는데 이순신장군이 왜 미쳤다고 중앙정부의 명령을 거스르겠습니까??
하하 .. 잡것들 하면서 정박된 배들 까지 모조리 정면대결로 죄다 수장시켜버리죠? 정유재란당시도 왜군이 오는 정도는 초기와 달리 그정도 대군의 움직임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고 봐야하는게 상식이고, 바다 건너기도 전에 수천척에 달하는 전투선 보급선을 50척 정도 전선 끌고가서 죄다 수장시키나요? 전쟁은 판타지가 아니란겁니다... 그런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이순신 장군자리에 있지 않았기에 조선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한거죠
     
하얀그림자 15-07-26 00:43
   
군사정권시절  과대하게 미화된게 이순신이라고요?
군사정권이 왜 이순신을 미화했을까요?

세조 인조 중종등 반정을 시도한  왕들이 미화되거나
  김유신 김춘추 신라의 통일을 미화하면 했지

이순신을 통해 상징조작을 할 이유가 있을까요?
(교과서 왜곡등의 문제로 극일의 분위기가 높아졌을 때
이순신장군을 주제로한 드라마가 방송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정권적 차원의 자기 이미지 관리와는 다른 것이죠 이순신 장군은 오히려  조선 내부에서 저평가 받아왔습니다)
실제로 5공시절 세조나 한명회(군사구테타)
효종(북벌) 김유신 김춘추(남쪽이 통일)를 영웅시하면서
고려나 고구려를 다루는 역사드라마가 전무했던 실정이었습니다
고려시대나 고구려를 다시 다루기 시작한 때는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이후입니다
전통 노통시절에는 없던것으로 기억합니다
왜 고려나 고구려는 북한을 으미하기 때문이었죠
마우스치워 15-07-26 00:47
   
하얀그림자// 제승방략상의 부대와 + 최정예라는 부분이 모든 말을 하는거죠... 실질적으로 중앙정부는 '회전'으로 단기전에 승부를 보기를 원했지, 신립을 보냈을때 거점방어를 명하지 않았다는겁니다.  그런데 회전을 위해서는 상대의 군부대의 수가 보병 vs 기병 구도라도 어느정도 숫자가 맞춰질떄 그것도 성립합니다. 총알받이 개념으로라도 필요했던 제승방략상의 부대원이 농성전도 아닌상황에서 탈영병이 매일 수천 수백이 된것은 여러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최정예 기병 3천정도로 잡고, 그걸로 보병대 5만과 전투과 될까요? 조선처럼 평지가 많은 지형도 아닌곳에서? 이후도 평지전에서 극심하게 싸웠다 하면 쳐발리는 수준이라, 결국은 명군이 오기전까지는 거점방어, 민병의 게릴라전 형태로 된것이죠, 문경세재가 제대로 된 성터가 있는것도 아니고, 초기에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에서 목책조차 준비가 안된상태로 적의 대군을 상대로 탈영병이 속출하는 상황에서는 도망가는 아군을 추스르기도 힘들단겁니다... 진주성 같은 상황처럼 성으로 이루어져서 탈영이 힘들거나, 해전에서처럼 배를 타서 도망가기 힘든 상황과는 달리 조금만 야간에 숲으로 들어가면 탈영이 가능한 그런 지형에서 제승방략상의 주군을 믿느니, 그나마 도망가기전에 병력을 어느정도 깃발들이 용으로 쓰고 정예병으로 공략을 하겠다고 생각을 한거죠.... 당시 조총을 인지를 못했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러다보니 아메리카원주민이 총기 처음접한... ㅡ_ㅡ; 이런 비약까지 하시는데 훈련이 안된 민간인에게 와닿는 그정도의 쇼크였지, 어느정도 훈련된 정규군들에게 영향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어죠... 명군과 접전당시 조총에 대해서 명군이 그렇게 신경을 썼다는 기록은 도리어 보기도 힙듭니다. 그런부분은 어떻게 설명이 될까요? 조총이 아니라, 왁 ~ 하고 적군 다수가 소리만 크게 질러도 도망가는 수준의 군기가 문제였던겁니다. 쌍령전투의 경우에 조총에 패한건가요? 이후에 훈련이 안된 부대로 일반적인 부대간의 평지 회전이 안되는걸 인정하고 거점방으로 돌아서면서 그나마 군사접전이 가능한 명군이 들어오면서 전투가 성립이 됬다는걸 현실적으로 인정을 해야죠
     
하얀그림자 15-07-26 01:03
   
고니시군은 1만 8천
신립의 군대는 1만 2천 정도로 보고있습니다
일본이 5만이라고요?
후속해서 올라오는 일본군이 있었지만
고니시 군은 1만 8천입니다
신립이 이끌었던 병사는 실록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역사가들이 추측하는 것이 대략 1만 2천~1만 6천 정도로 보고 잇습니다
탈영이 매일 수백 수천이라고 어디에 나와있는지요?
김시민 장군이나  이순신장군이 탈영이 불가능한 상황이라서 대승했다고요?
신립은 탈영이 가능해서  패전했고요?

어떻게 그런 사고를 할 수 있는지요?


 병사들이 싸울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승전할 수 있었겠는지요?
탈영을 못해서 그래서 머릿 수가 유지되서 대승했고
신립부대는 탈영해서 패배했다고요?
신립부대는 고니시 앞에서 반자이 어택한겁니다
신립의 부대를 신립이 사지로 몰아넣은거죠
너무 무모했습니다
이에 비해 이여송은  자신의 부대를 끔찍히 아낍니다
이여송이 현명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군대는 자신의 입지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쟁자체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신립한테 선조가 언제 돌격하라고 그랬는지요?

신립(申砬)을 삼도 순변사(三道巡邊使)에 제수하였다. 상이 친림하여 전송하면서 보검(寶劍)한 자루를 하사하고 이르기를,

“이일(李鎰) 이하 그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는 경이 모두 처단하라. 중외(中外)의 정병을 모두 동원하고 자문감(紫門監)의 군기(軍器)를 있는 대로 사용하라.”

하였다. 도성 사람들이 모두 저자를 파하고 나와서 구경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1장 A면

전권을 줬고  최고의 무기를 줬습니다
          
자기자신 15-07-26 02:05
   
아뇨 8.000명임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는
               
하얀그림자 15-07-26 03:11
   
임란 발발 90년 뒤에 조야기문이라는 야사에 8000으로 나옵니다만 그걸 신뢰할 수 없습니다 고니시를 종군한 포루투칼인은  탄금대 전투의 조선병을 8만명이라고 했고
난중잡록에는 6만이라고 되있습니다
실록에 선조가 中外 精兵을 데리고 가라고 기술되있는데
한양의 정병은  서류상 4만정도였습니다
京(수도)畿( 그 의미는 봉건제적 의미의 제후에 봉분한 영토가 아니라 직할지라는 의미이지만 후일 수도의 주변을 일컷는 말로 전성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외라함은 畿의 병력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京의 일부도 포함될수도 있겠지요)
신립이 데려간 정병은 한양지역 혹은 한성 외의 정병을 의미합니다
거기다가 남하하면서 합류한 군사들이 합쳐진 것인데 사가들은 1만 2천에서 1만 6천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쪽 기록은 자신들 전공을 부풀리고 우리쪽은  야사서라도 신립의 군대를 의도적으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립의 군대는 최소한 만명이상이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마우스치워 15-07-26 00:55
   
제가 이순신은 과대포장됬다기보다, 과도하게 미화됬다고 했죠.... 이걸 참 무조건 엉뚱한데로 몰아가는 사람들 떄문에 말하기가 그런데, 과도하게 미화하다보니, 실질적으로 당시에 왜군이 도리어 더 꺼려한 곽재우라던가 김시민같은 인물은 아예 의미가 없고, 이순신 한명으로 그냥 다쳐바른듯이 묘사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겁니다
조선조에서는 당연히 중앙정부의 출전요구(신립과 같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투를 하라) 같은 내용을 거부한 이순신장군을 좋게 평가하기엔 절대왕조에서는 무리였다고 보입니다. 선조처럼 말도 안되게 의병장 쳐죽이는것도 문제지만, 다각적인 공을 한명에게 다 몰아서 미화하는것도 문제가 있다는겁니다. 이순신장군이 아무리 잘싸웠어도, 진주성이 돌파당하고 전라도 지역이 점령당하면 당시 식량및 보급의 거점이 끊긴 상황에서 얼마나 지속이 가능했을까 이런걸 아예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 많단겁니다. 사서상의 기록도 3개국에서 적힌 내용이 다 의외로 관점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는것도 인정을 해야죠... 예를 들면 징비록상에서는 유성룡이 아주 미화가 되는 상황이 되지만(본인의 입장이니), 명군이 지원을 왔을당시엔 아주 간신중의 간신, 당신같은 사람때문에 왜가 쳐들어 왔니 이런 소리까지 하는게 기록상에 남아있습니다... 이런면을 생각해서 객관적이고 3국이 다 인정할만한 사서가 필요하다는겁니다
     
하얀그림자 15-07-26 01:12
   
제가 봐도 유성룡은 군주제하의  예스맨 신하의 한계를 벋어나지 못한 한계를 가진 인물입니다 뻑하면 선조가 불쌍해서에 울었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유성룡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징비록 속에 신립이 "쏘는 족족 명중한답니까?"라는 말을 통해 신립이 가진 조총에 대한  생각을 공개한 것 뿐입니다
왜구들이 곽재우나 김시민을 더 무서워했다라는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누가 더 큰 타격을 주었는지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립은 1만며 군대를 끌고 가서  막말로 고기값도 못했고 자기 자신도 xx했습니다
시간지연도 못하고조총에 대한 공포심을 왕과 조정대신 장군 군다 일반백성에게 심어줬죠
신립은 오판한겁니다
곽재우  김시민 이순신 누가 더 고레벨이냐 이게 중요합니까?
적에게 누가 더 고평가 받냐가 왜 중요합니까?
그 평가가 중요하다면 고니시는 신립을 바보라고 했습니다
신립은 그야말로 바보같은 일을 결정했습니다
너무 자신의 아집에 치우쳐 객관적인 지형 전술을 무시한 것이죠
     
자기자신 15-07-26 02:14
   
미화는 아니죠 육지에서 막았다고하더라도 바다에서 또다시 대규모병력을 이끌고 온다면 웬만해선 막을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바다에서 일본수군을 물리친게 이순신장군이죠 계속 연전연패를 당하니까 육지에 일본군은 먹을식량이 없어지니까 고립당하죠 식량을 일본본국에서 들어와야되는데 바다에서 이순신장군이 막으니까 일본군은 멘붕상태가 되죠 그랬어 전라도를 공격한것군요 알았어요 거기서 예상치못한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의병들이였군요 이순신장군 혼자서 일본군다쳐바른것 사실임 임진왜란초창기에 계속 연전연패를 당하던 조선군에게 첫희망과용기를 불어넣어준게 바로 이순신장군임
     
Centurion 15-07-26 02:47
   
별로 과도하게 미화된게 아니죠.
일본은 그냥 수치스러워 이순신 장군 활약 자체를 숨깁니다.

바다에서 수장당한 병사들이 태풍만나 죽었다
배가 뒤집혀 죽었다 이런씩으로 거짓말로 떼죽음의 원인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말이 뭐 보급선이고 수송선이지.
근본적으로 일본의 선박들은 짜달시리 보급선과 전투선 구별이 없었습니다.
그냥 아타케부네, 세키부네, 고바야 등등 대선, 중선, 소선 등 여러 목적의 전투선만 있었죠.

사람 많이 실고 다니며 전투하면 전투선인거고,
보급품 많이 실고 가면 그게 수송선인거구요.

막상 또 초반에 깨진 일본선단들은 육지에서 노략질하다가,
이순신함대가 등장하자 덤벼들다 훅가버렸죠.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건.. 남해바다가 장악당해 수로로 와야될 일본함대가 묶여서,
이걸 해결하고자 한양의 일본군 본진이 모여서 회의를 한 후
수군 담당 장수들을 뭉쳐서 보내려다,
그 와중에 와키자카 혼자서 공 세우려고 닥돌하다 쳐발린것이죠.

일본에 임진왜란 이후 고니시를 주제로 한 연극 같은게 생겼는데.
거기 보면 조선 장수 "목사"와 바다의 해룡이 나옵니다.
물론 목사는 김시민 목사를 말하는 것이고, 해룡은 바다에서 일본 함대를 수장시키는 무시무시한 괴물로 나오죠. 이게 거북선이자 바로 이순신 장군을 비유한 겁니다.

물론 주인공 고니시가 해룡을 죽였다고 나오긴 정신승리릃 하지만,
해룡이라는게 초인적인 것으로 기본적인 포쓰가 대단하단 소리죠.

그리고 김시민 장군이 참 잘싸우긴 했는데, 너무 일찍 전사하셨습니다.

근데 문제는 김시민 장군이 승전한 1차 진주성 싸움이 1592년 11월이고.
패전당해 함락당한 2차 진주성 전투가 1593년 7월이라는 점이죠.

그리고 전라도가 침공당한건 4년 뒤인 1597년 정유재란 때 칠천량해전 뒤였습니다.

일본군의 전라도 침공을 막아낸 이치전투는
1차 진주성 싸움보다 4개월 앞인 1592년 7월이구요.

진주성도 전라도 침공을 위한 전진기지이자 일본군의 통수를 노리는 걸림돌이라
없애러 간 것은 맞지만, 1593년 함락으로 인해 진주성이 함락되서 전라도 침공의 걸림돌 역할은 더 이상 못하게 되죠.

당시 원채 수만명의 백성들도 함께 학살당해 진주지역 인구가 급감했다고 합니다.

***************************************

진주성이 돌파당하고 전라도 지역이 점령당하면
당시 식량및 보급의 거점이 끊긴 상황에서 얼마나 지속이 가능했을까
이런걸 아예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 많단겁니다.

****************************************

그리고 이 상황이 바로 정유재란 칠천량 해전 이후 상황인데..
그 때 13척의 배로 명량해전의 기적을 만들고, 일본 함대를 견제하고,
북상 중이던 일본군이 임진왜란 초기 보급난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여
다시 Back~! 하게 만든게 이순신 장군이죠.

아무래도 님은 이순신 장군의 과도한 미화를 논하기 전에 과소평가를 하고 계신듯..

군대에서 밥차 안와서 한끼만 굶어도 난리가 납니다.
하루 종일 행군하다 건빵 인원수에 안맞게 빵꾸나고, 밥 적게 나와도 미칩니다.

그런 보급란, 식량난을 일본군에게 강요하며,
대량의 해양수송보급을 임진왜란 정유재란 통채로 차단한게 이순신 장군의 함대에요.

일본 드라마에도 밥 굶어서 허기지고 병들어 죽은 일본군이야기가 나올 정도구요.
일본군이 북상을 포기한것도 결국 배고픔과 보급곤란, 추위 등등이 아주 큽니다.

*************************************************
님 주장:

단지 일본에서는 당시 주전력이라고 할만한
'전투선' 중심의 부대와는 상당히 제한된 전투만이 있었고,
주로 보급선, 수송선을 급습하는 형태의 전투를 했던게 이순신장군이라는겁니다.
실제 전투선중심은 한산대첩이라고만 할 정도이기까지도 합니다... 
*****************************************************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보급선, 수송선을 이순신 함대가 격파했다고 폄하할 수가 없는게..

자, 앞서도 말했지만, 그냥 수송선, 화물선 용도의 배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그냥 아타케부네와 세키부네, 고바야 같은 대중소선들만 있었죠.

그리고, 보급선, 수송선은요.
본래 제해권이 장악된 뒤에 보내거나, 호위함대와 딸려서 보내는게 상식입니다.

예를 들어,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 해병대 상륙 당시 이들의 물자를 보급하고, 수송선단과 이들을 지키는 호위함대가 존재했습니다. 물론 밤에 일본군 함대에게 털리지만..

근데, 일본군도 바보가 아니고, 자기네 선단이 계속 깨지면서 동쪽으로 제해권이 밀리는 상황에서, 전투함대가 아닌 수송함대를 호랑이 입에다 계속 털어 넣어줄 생각은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일본은 아예 해전을 포기하고, 해안가에 왜성을 쌓고 포대를 설치해서 접근거부 전략을 채택하고, 아예 해양수송을 포기한채 육로수송만 합니다.

(이순신 함대가 부산앞바다에 출동하자,
일본군들이자기들이 타고온 대함대 중 4~500여척의 배가 격침되는데도..
바다에서 안싸우고 육지에 올라가, 조선에서 노획한 대포로 반격만 했습니다.
보급선, 수송선을 급습하는 전투가 아니라, 일본이 아예 바다를 포기하게 한겁니다.)

근데 이 육로수송이란게, 해로수송에 비해 훨씬 양은 적고, 의병 기습에 취약했습니다.
그러니까 몇백명 단위로 쌀 운반하다간  어지간한 의병들도 도처에서 수천명 단위로
움직이는데 죽기 딱좋죠.

그래서 최소 300명 이상 무리지어 이동해야만 했고, 이런씩으로 보급이 전달되니 트럭도 없는 시절에 사람과 수레로 고속도로도 없는 산길을 운반했다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견적이 나오죠.

그래서, 북쪽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못견디겠고, 북쪽에선 조명연합군이,
남쪽에선 조선관군과 의병이 버티고 있으니, 철수한거죠.

그리고는 남해안에 왜성을 짓고 강화회담만 지루하게 하면서 시간 질질 끕니다.
얘네들도 함부로 움직일 생각못했던 건 역시 임진왜란 첫해에 겪은 보급곤란 때문인거죠.

이건 결국 이순신 장군이 해낸겁니다.
임진왜란 때에도 해냈고, 정유재란때에도 해냈죠.
전략설계 15-07-26 16:15
   
행주산성을 보면.. 배수진을 어떻게 쳐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오합지졸이라도 심리적으로 안정이 될만한 장소에서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들한테 싸우라면,
장검에 조총 뿜어대는 적을 앞에 두고 평지에서 싸우고 싶나요..
하지만 높은 곳이라면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방어선이 뚫려도 그때그때 삐져나온 애들만 찔러죽이면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지만..
평지에서 일본애들하고 1:1로 칼시합하라면 해본 적이 있어야 싸울 맛이 나지요..

간단한 것입니다. 이 간단한 것도 신립은,
조총도 잘 알지 못하면서 "쏘면 다 맞냐"는 식으로 독선으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충청도까지 거침없이 올라는 팔팔한 적 주력을 놓고,
일부 정예기병이 있었다고 해도,
급조한 오합지졸을 데리고 퇴로가 막힌 평지에서 맞서는 것은 바보지요.

신립에게 기병이 주력이라면, 전장이 우리땅이기에,
유리한 정보력을 가지고 '치고 빠지고' '치고 빠지고' 힘 빼는 히트앤드런도 생각해야지..
정예 기병까지 배수진을 쳐서 한 전투로 깨끗히 없애버리는 것이 무슨 생각인가 싶습니다.

소서행장 부대를 몰살시킨들 다른 부대들이 연속으로 올라오는데..
정예기병은 후일을 기약하고 남겼어야 합니다.

행주산성 전라도병 2천 가지고도 3만 왜병을 상대하지 않았습니까..
정예기병까지 포함된 1만여 병력을 한 판에 깨끗히 날려버리는 데에,
신립이 미련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한 정황을 유추해볼 순 있으나,
변명의 여지는 없다고 봐지네요.

배수진이라고 안 도망가겠습니까.. 물에 악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합지졸이면 오합지졸일수록,
유리하게 싸울 수 있는 전장을 택해야 오합지졸도 안 도망가고 싸웁니다.

신립이 경험이 많다고 하나,
만 단위 <기병+보병>를 몰고가 야전에서 만 단위 보병이랑 붙는 전투를 해본 적이 없을 겁니다.
똑같이 오합지졸이란 것을 아는 부하의 처방도 요새지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인데..

"쏘면 다 맞냐"는 신립의 말처럼 사고의 폭이 좁은 인물 같아 보입니다.
그에 반해 이순신은 명량을 보더라도 대단히 전략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장군이죠.
한산대첩을 보더라도, 한 수 한수 대단히 철저하고,
상부에서 압력을 넣더라도 지는 전투는 피할줄도 아는, 전략적 사고의 인물입니다.
     
하얀그림자 15-07-26 21:00
   
저도 명량과 탄금대라는 제목으로 이 게시판에 글을 쓰려다 말았는데요
신립의 사람됨은  마초에 자만심 강한 고집쟁이 스타일인것 같습니다
몇가지 신립에 대한 일화를 소개해보면
선조가 출병전 "신립에게 왜적하고 해볼만 하겠냐?"라는 식으로 묻자
"개네들 별거 아닙니다 사돈!"했답니다
선조는 신립이 간 다음에 " 변협(임란 3년전 타계한 장수)이 말하길 왜적이 상대하기  가장 힘들다"라고 했는데
신립이는 큰소리만 뻥뻥치고 있네 변협이 살아 있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걱정하지 않지"라고 했답니다
(연려실기술)
선조도 신립을 출전 전 이미 믿지 않았었던거죠
그리고 신립은 나탕계 소탕으로 백성들에게는 인기가 많았지만(달천 몽유기라는  소설에서도 신립은 원균처럼 조롱받지 않고  두둔받습니다 )  부하들에게는 꺼려지는 상사였습니다 
실제로 탄금대 전투전 척후병이 "적이 가까이 왔다"라는 보고에 병사가 동요하자 목을뱁니다
상관모독으로 비전시에 병사를 참했다 파직되기도 합니다
이일등이 문경새제에 진을 치자고 하니 화를 내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고집불통이라는 거죠
임란전 왜구의 동향에 대한 회의에서 왜구는 해전에 강하지만 육전은 약하다는 이유로 수군을 폐하자고 주장했던 사람이 신립입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쌍수를 들어 말려서 수군을 보전했답니다
신립의 무용담이 많은데, 심지어 탄금대에서 xx 직전 수십의 왜병을 죽였다고 하는데
다 뻥인거 같습니다  당시 나이가 적지 않았었죠
신립의 후손과 같이 xx한 김여물의 후손이 인조반정을 주도한 세력입니다

즉 구테타에 성공해서  권력을 세습한 집안입니다
당시 군제는 면포를 납세하면 군역을 면제받는  상황으로  오랜 태평성대로  군역 시스템에 구멍이 있었다하나 당시 동원된 군은  그나마 조선의 최정예였습니다
문경새제를 넘어 온  지친 왜군은 신립군의 규모를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신립군의 기세(?)만은 매우 당당했던 것 같습니다
행주산성이나 진주성 전투처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참여한 전투가 아니라는 거죠

탄금대 전투의 패전 후 평양성까지 왜적은  거의 무저항으로 치고 올라갑니다
이것이 전쟁 초기 밀린 이유죠
구름위하늘 15-07-27 13:09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조총을 사용한 '3단철포'이니 하는 것이 효과적인 전술인가에 대해서는 반론도 많습니다. 조선이 조총의 위력을 너무 몰라다거나 신립의 기마부대가 조총부대를 돌파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반론이 많고요.
조총의 집단운용(3단철포 같은 것은 개구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이 조선에게는 낯선 방식이라는 것은 마지만 초기조선의 패전은 오랜 평화로 인하여 전투경험이 거의 없는 상황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단철포에 대한 반론
"난 '삼단철포'를 믿지 않는 사람인데 ???"
http://halmi.egloos.com/v/1537561

사냥용 조총을 전쟁용 무기로 대량 도입한 오다 노부나가(유럽은 이미 다음 단계의 소총을 만들어서 전쟁에서 사용하고 있었고, 일본은 사냥용 조총을 전쟁용으로 대량 사용한 '이상한' 나라였다고 합니다.)도 기마부대로 유명한 다께다 신겐의 생전 시에는 이름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즉, 조총의 집단운용이 단독운용보다는 효과적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사냥용으로 만들어진 조총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효율적인 무기였냐에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

남방왜구와 북방기마민족과의 분쟁으로 소규모 전투는 경험이 있었지만,
일본 전국시대를 거친 다수의 정규부대와의 전투경험이 없던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은
조선의 정규전 '경험' 부족으로 보는 것이 맞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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