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일본군이 구사한 조총부대의 전술
일본군의 조총은 장전속도가 길고 발사 속도 1분에 3발 쏘는 대도 조선군들을 손수무책으로 무너뜨렸다.
게다가 사정거리가 조선의 활보단 짧지만 전쟁 초반에는 금세 조선을 먹을 기세로 덥쳤다.
장전속도는 길기 때문에 앞 부대에 있는 수십명의 군사가 조총을 쏜 뒤 곧바로 장전된 두번째 부대 조총을 쏘고 세번째의 조총병들이 확 나와 또 쏜뒤 첫번째 부대가 장전을 완료시켜 다시 전열에 나와 쏜다 그리고 이런식으로 반복하는 전술이 있다. 이 전법은 영국인과 프랑스군이 머스켓으로 일렬종대로 서서 쏘는 방식과 같다. 총알 수는 소수였기 때문에 백병전을 돌입하는 방법도 있다. 이렇게 활을 가진 조선군도 이런식으로 전법을 구사할 수 있었지만 전투미숙으로 이런 전법은 구사하지 못했다.
두번째:조선은 전쟁준비기간이 너무 짧았다.
조선군의 병조참서인 율곡이이가 1582년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도승지인 유성룡의 반대로 결국 이루어내지 못했다.그러던 중 1591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은 정명가도를 통해 조선과의 전쟁소식을 간단하게 줄여 말하니 선조는 곧장 전투태세나 장비등을 준비하도록 했고 이일등 전라도 경상도의 수령들을 통해 전쟁준비를 하라 이르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세번째: 일부 지배세력들은 무능하거나 도주를 일삼았다.
지금 말하는 것은 일부 지배세력이다. 정발,송상현,신립,김여물,이운룡등의 장수들은 용감하게 적군과 싸우다 전사했으나 이일은 상주 싸움에서 천명의 군사들을 잃고 도주했으며 가장 먼저 적을 막아야 할 원균,박홍등의 수군세력들과 여러 수령들은 도망을 쳤다. 심지어 김명원 장군은 세번의 방어선을 만들었으나 (한강,임진강,대동강) 다 무너지고 이광 장군께서는 무려 5만의 군사들을 고작 1600명의 왜군에게 패했다. (지휘관 와키자카 야스하루) 게다가 전쟁에서 패한 김명원은 도주를 몇번정도 했고 승리를 한 신각에게 허위사실을 알려 공신을 죽게 만들었으며 전투지역에서도 어이없게 당파싸움이나 이간질은 계속 되었다.
내번째: 왕이 먼저 도망치니 백성들은 왕을 버렸다.
왕이 수도를 지켜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지만 개경을 통해 평양 의주를 건너 심지어 명나라까지 간다는 소식도 들리자 실망한 백성들은 왜군의 편을 들기도 했다. 민심획득도 불가능 해서 신분제도에 대해서도 휘청거렸다.
다섯번째: 잘못된 전법과 부족한 군사수
조선의 병권에서는 잘못된 여러 전법으로 인해 지휘관이 발령이 늦게 되는 바람에 지휘관이 없는 군사들은 먼저 도망치게 되는 것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