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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7-22 22:36
[기타] 임진왜란때 명나라는 말도안되게 왜곡되고 있습니다
 글쓴이 : 오오타니
조회 : 10,354  

선조 32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1월 16일(임신) 5번째기사
윤근수가 요동에서 돌아왔는데, 요동에서 송응창 등에게 구원병을 청하며 올린 글

안정(安定)에서 성루(城壘)를 대하고 있는 아군은 이미 지쳐 형세가 고단하고 약하니 적이 쳐들어올 경우에 어찌 궤멸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겠습니까. 함경도의 적이 만약 보고된 대로 양덕(陽德)의 지름길을 따라 허술함을 틈타 쳐들어와 아군은 앞뒤로 적을 받아 패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찌 추격하겠습니까. 안주(安州) 서쪽 지방에는 계속 후원해 줄 남은 군사가 없으니 그들이 승승 장구(乘勝長驅)할 것은 형세가 반드시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망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번리(藩籬)가 철거되면 중국 변방의 걱정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실록만 보더라도 당시 조선은 명나라 도움 없이는 나라를 지탱하기 힘든상황이였습니다...
탄금대 전투,, 특히 용인전투 ,임진강 전투에서 주력 육군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10만이 넘는 일본의 육군을 감당하기 힘든상황이엿죠...  보급때문에 평양에서 고니시가 못올라갓다는 잘못알려진
사실이 있는데 평양성에서 왜군이 노획한 쌀이 10만석입니다... 쌀 10만석이면 2만여명의 병력이
10개월은 먹을수 있는 양이고 당시 조선의 모든 군량미는 용산창에 보관되어있엇는데  용산창마저 진작에 왜군이 점령하였습니다


 
병사들이 먹을 충분한 곡식을 조선으로 수송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도로 사정이 너무 열악하여 군량 수송에 차질이 생겼으며,
 
군량을 전선에 있는 병사가 아닌, 수송 부대가 먹어치우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하북에서 운송해 온 쌀 13만 석이 조선의 국경에 쌓여있으니 모두 징발하여 밤낮없이 운반하는 것이 최상의 계책입니다.
 
황제가 말하기를, "그 말이 옳다. 그러나 '운반할 수 없기에' 고민하는 것이다."』/ 明史


당시 명나라의 약탈이 일본군보다 더 심했다는 말들이 많습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엔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할려고했던 병력은 4~5만 규모가아닌 13만이였습니다... 근데 조선측에서
보급이 힘들다하여 줄여서 4~5만이 온겁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명군이 넘어오고 한달만에 명나라보급이
끊깁니다...... 그리고 명나라는 조선에 명군의 모든 보급을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직접 중국에서 조선으로
쌀을 보낼려했으나  당시 조선도로 사정이 워낙 좋지 않아 쌀을 국경에 쌓아놓고도 운송이제대로
안됬습니다. 또한 당시 전세계에서 화폐로 통용되던 은자를 가지고 조선에서 직접 쌀을 구입 하려했지만
그때 까지 조선은 화폐 경제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 돈이 있어도 쌀을 살수가 없었습니다 명나라측에서도
참 난감한 상황이였죠.

명군은 12월말쯤에 알록강을 건너 1월쯤 평양을 함락하고 벽제관전투이후 소극적으로 변합니다. 그럴만도한게 1593년 2월 조선실록을 보면 명나라군사들에게 보급이 잘안되어 굶고있다는 내용들 밖에 없습니다.

선조 3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2월 7일(임진) 1번째기사
비변사가 군량의 운반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며 삼현 근처로 이가하기를 청하다
변사가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양 총병(楊摠兵)이 제독의 군중(軍中)에서 옮겨 왔는데 ‘군량과 마초가 계속 보급되지 않고 군기(軍機)가 잘못된 것이 많아 회군하려고 송 경략(宋經略)에게 그 결정을 품의하려고 한다.’ 합니다. 국가 존망의 기미가 이번 길에 결정되는 것이니 형세가 매우 급박합니다. 

선조 3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2월 19일(갑진) 11번째기사
윤근수가 이 제독에게 회군하지 말기를 청한 일을 치계하다

제독 역시 울면서 답하기를, ‘내가 황제의 명을 받아 왜놈을 소탕하고 왕경을 수복(收復)하는 것으로 나의 임무를 삼았는데, 군사를 돌리는 것이 어찌 나의 본심이겠는가. 다만 봄길이 진흙탕이고, 또 수전(水田)이 많아 마음대로 진퇴할 수도 없고, 군량과 마초가 부족하여 사람을 굶주리고 말은 피로하여 죽은 말이 1만 4천여 필이나 된다

"특히 말먹이가 문제엿는데 맨처음 건너온 중국 군마는 2만 7천여필인데 1만4천여필이 마초부족과풍토병으로 떼죽음 당했습니다"


선조 3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2월 19일(갑진) 12번째기사
운암원에서 이덕형 등을 인견하고 중국군의 무기, 군량, 병력 등을 논의하다

상이 이르기를,
“의주에 있을 때에 항상 군량 비축하는 일을 말하면 조정에서는 저절로 해결할 것이라고 답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군량이 부족하여 군사와 말들이 굶주려서 물러나 주둔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제독의 허물이 아니다. 군량도 없이 머물기를 청하는 것은 바로 앉아서 굶어 죽게 하는 것이다.


선조 3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2월 22일(정미) 4번째기사
서성이 중국군이 피폐한 상황임을 아뢰다

공조 정랑 서성(徐渻)이 아뢰기를,
“신이 칠성문(七星門)으로부터 평양성으로 들어가면서 각 위(衛)에 주둔한 중국군을 보니 모두 극도로 수척하여 비록 다시 십여 일을 머물러 휴양하더라도 전쟁터에서는 쓸 수가 없으며 넘어져 다친 자 또한 부지기수였습니다. 중국군중에는 말을 도살하는 자, 고기를 나누는 자, 고기를 가지고 왕래하는 자들만이 눈에 띄었습니다. 곡초가 넉넉하지 못하여 중국군들은 허리에 찬 칼로 산과 들에서 풀을 베는데 십여 리의 지역에 어깨에 맨 자, 등에 진 자, 머리에 인 자들이 도로에 연이어 있어서 보기에 매우 참혹하였습니다.

"우리 군대가 스스로 들어온 조선은 하나의 별세계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은전을 사용할 수 없으며, 푸주간이나 술을 파는 가게도 없습니다.(돈이 있어도 소용이 없어요!) 더욱이 왜놈들의 분탕질 때문에 집들은 한결같이 텅 비었고(왜군들은 이미 조선의 경제상황을 먼저 터득), 군사들은 입술에 채소국물 한 숟갈을 적셔보지 못했으며 염장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말을 하자니 너무 서글퍼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제가 비록 누누이 염장을 풀고 고깃근을 마련하여 적당히 호상하려 했지만 끝내는 사소한 은혜를 베풀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요양사람들을 불러 장사하도록 달려오게 했지만 길이 멀어 온 자가 적었습니다.“
-명나라 동정군 경략 송응창-

실록에서 보다시피 당시 일본군의 병참실패보다 명군의 병참 실패가더 컷습니다.. 당시 조선 실록에서는 명나라군이 계속 굶고 있다는 기록밖에없고. 계속 찾아보니 보급이 제대로 안되어 이미 명으로 돌아간 군사도 많아서 3월에 평양에 주둔한 명군은 2만 6천밖에 안남았다고 하더군요... 당시실록에도 한양에왜군만 4만... 전체적으로 아직 조선에 왜군이 10만은 남았으니... 사실 남은 명군숫자로 일본군과 전면전을 펼치긴 힘든상태죠.... 그리고 강화를 맺고 4월 18일 일본군들은 남해안으로 후퇴하죠~


그리고 왜란초기때는 명은 조선에 식량을 의지했지만, 그이후로는 거의 자체적으로 대규모식량을 계속 보냈습니다.

선수 27, 26(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 4 1(을유) 7번째기사 
황제가 산동의 군량 10만 석을 배로 운송하여 군량을 보충하게 하다

황제가 산동(山東)의 군량 10만 석을 내려주어 배로 운송하여 군량을 보충하게 하였다

선조 41, 26(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 8 19(경자) 9번째기사 
비변사가 중국에서 가져 온 군량을 운반할 대책을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대병(大兵)이 양남(兩南)에 유주(留駐)해야 할 형편입니다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아무리 군량을 조치한다 하더라도 탕패(蕩敗)된 뒤라서 곡식을 모아 군량을 대주기가 어렵습니다.의주(義州)에 있는 당량(唐糧)2018) 외에 산동(山東)에서 계속 운송해 온 곡식이 있으니


선조 41, 26(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 8 28(기유) 4번째기사 
장삼외의 충고에 따라 경략에게 군량을 청하는 자문을 보내기로 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장 도사(張都司)삼외(三畏)말하기를 ‘산동(山東)에 사들인 쌀 14만 석이 있는데 이곳에 온 쌀은 1만 석도 채 되지 않으며요동(遼東)에 민간의 비상량(備上糧) 14만 석이 있는데 이곳에 온 것은 겨우 1십만 석뿐이다지금 2만 명의 유병(留兵)이 하루에 먹는 양이 4백 석이나 되니그대 나라에서 어떻게 마련하여 공급할 수 있겠는가.


선조 44, 26(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 11 16(병인) 7번째기사 
비변사가 식량 부족에 대한 계획을 세울 것을 아뢰다


 중국에서 준 양곡은 관계되는 바가 더욱 중요한데 전후에 내린 것 가운데 요동(遼東)에서 나온 것이 14만 석이나 되고 이번에 산동(山東)에서 나온 것이 또 12만 석인데이미 나온 양곡의 소재(所在)도 모릅니다그 나머지 10만 석 또한 장차 계속해서 오게 될 것이니평양(平壤)에 운반해 온다면 따로 1인을 시켜 관장하게 하고 오는 대로 받아 쌓아놓고 실제 수량을 파악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소서이렇게 한 후에 더러는 서울로 운반하고 더러는 평양에 머물러 두고서 중국군에게 지급해야 할 것이요앞서처럼 산실(散失)하여 간 데가 없게 해서는 안 됩니다.



명에서 조선으로 군량미를 보낼떄 거의 10만석씩 보냈습니다 10만석이 어느정도 규모냐면
조선 중기에 조선 1년 예산이 쌀 30만석이니 어마어마한 규모지요


 32, 31(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 4 1(을묘) 1번째기사 
왜적이 남쪽 변방에 있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중국에서 쌀을 보내 구제하다

이때에 왜적이 남쪽 변방에 주둔하고 있어 백성들이 제때에 농사짓고 수확하는 일을 하지 못해 굶주림이 날로 심해져 중국에서 산동(山東)의 쌀을 운반하여 구제하였다.

정유재란에 의병으로 활동하고 군리로도 활동한 조경남의 일기인 난중잡록에서는 만력제가 보내준 산동의 곡식 1백만석이 수많은 조선인의 목숨을 구한 사정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당시 중국 황제 만력제는 쌀 100만석을 조선백성들 구휼하는데 보냈습니다.
100만석이면 조선 1년예산의 3배가 넘는 양입니다.

또하나 잘못된것은 명나라군은 조선에서 열심히 싸우지 않앗다는건데... 요동기마병은 행패가심하고
전투에 소극적이엿으나 강남에서 징병된 남군은 굉장히 열심히 싸웠습니다. 게다가 남병이 갖춘
강력한 포병 화력은 일본군에게 큰 압박이 됬찌요


선조 37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4월 25일(기유) 9번째기사
비변사가 중국군 2천 명만 머무르도록 하라고 경략에게 자문을 보내도록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에 이 제독이 말한 바에 따라 중국군5천 명을 우리 나라에 머물러 있게 해달라는 뜻을 이미 주청(奏請)하였습니다. 이제 김수(金睟)의 장계를 보건대, 유 원외(劉員外)가 ‘혹 1만 명이나 5천명을 머무르게 할 것인데 남군(南軍)이든 북군(北軍)이든 당신들의 원하는 바에 따를 것이다.’ 하였다고 합니다. 남군과 북군은 용맹성에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연로(沿路)에서 폐단을 끼치는 것은 모두 북군의 소행이니 일이 안정된 뒤에는 반드시 폐단이 지금의 배가 될 것입니다



독 경략 군문(總督經略軍門)에 자문을 보냈는데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이 남병(南兵)을 시급히 징발하여 밤낮을 가리지 말고 와서 구원해 줄 것을 청하는 일입니다(중량)내가 우리 나라의 지형을 살펴보면 본래 마병(馬兵)에 불편하고 왜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남병(南兵)뿐이기에 

선조 85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2월 12일(계유) 5번째기사
중국의 원병을 빨리 오게 하는 것에 대해 대신들과 논의하다
그런데 저번에 손 경략(孫經略)의 제본(題本)을 보니, 요동(遼東)의 2만 7천 병력을 징발해 보낸다고 하였고, 병부 시랑(兵部侍郞)도 말하기를 ‘10여만 병력을 지금 한창 징발하고 있다.’고 했으니, 이는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요동 군사들이 왜적을 막는데 익숙하지 않은데 비해 남병(南兵)들은 왜적 방어에 익숙하며 또 전쟁을 잘하니, 이들 병력을 많이 요청해 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실제로 강남지방에서 징집된 남병들은 왜적들과 잘싸웠습니다..... 그리고 정유재란당시 육전은 명군이 거의 다하다시피 했죠.....  왜란 동안 총 집징된 명군으 28만여만명에 달한다고하며 사상자수는 9만여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왜군의 총 병력수가 30만이니... 거의 왜군에 필적하는 병력을 파병하였고 사상자수도 많앗죠...

그리고 두번의 왜란에 소요된 명나라 예산도 엄청났습니다.

[재조번방지  병부상서 형개의 상소 중


하였다이 일에 절()ㆍ섬()ㆍ호()ㆍ천()ㆍ귀()ㆍ운()ㆍ면(남북 군대를 징발한 것이 통계 22 1 5백여 인이고식량으로 소비된 은이 약 5 83 2천여 냥이며쌀과 콩을 교역한 은이 또 3백만 냥으로서 실제로 쓴 본색 은과 쌀이 수십만 석이었다.

왜란당시 명나라가 사용된 은자가 얼만지 대충 알수 있는덕목입니다...... 요동에 파병된 병력에 소요된 예산까지 합치면 두번의 왜란에 사용된 명의 은자는 800만냥이라고 합니다. 

1년 명나라 예산이 500만냥이니 어마어마한냥이죠.. 참고로 조선1년 예산을 은자로환산하면 15만냥입니다.. 실제로 명나라는 조선 파병과 군수물자 지원에 최선을다햇죠

하지만 우리나라 교과서나 드라마는 명나라는 조선에서 아무것도 한것없는 민폐덩어리취급만하니 잘못된 역사교육이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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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miky 15-07-22 23:31
   
사실, 명나라는 할만큼 했어요.
걔들도, 태업황제 만력제때 3정이라고, 명나라 쇠퇴에 한몫 하는데,
2개가 자국 내분의 반란군들 처치하는거고,
왜란때 남의 나라에서 그정도 했으면 성의는 보여준거죠.

명나라 땅에까지 전란이 올까봐, 조선에서 막자는 의미가 크고,
대국의 체면으로써, 우리한테(명) 쳐들어오려는 적들을 제후인 조선이 막고 있는데,
힘을 보태야지 않다는 명분론도 주요했죠. 

어쨎거나 중국의 최대 강점인 물량빨이 조선에 큰 도움이 된건 사실이죠.
은자, 구휼미, 대군의 군사원조..
명이 우리 뒤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는 안정감은 사실, 부인하기 힘듭니다.

물론, 명군이 민폐쟁이 이미지가 있는건 사실인데,

초반에 조선에 원병으로 들어온 명군들은 조선과 가까운 요동에서 들어온 북병(北兵)들인데
워낙에 와일드하고, 몽골, 여진인들도 섞여있어 거친 부대이기도 했고

조선측이 일단, 군사만 보내주면- 그뒤에는 명나라 보급을 대어주기로 했지만, 잘 안되었죠.
사실, 조선인들도 굶고 있던 상황이라;;
우리가 안해주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라, 우리부터가 제코가 석자였기 때문에;;

북병부대의 대부분은 기병들였는데, 산지가 많은 조선북부 지리적 특성도 있었고.
보급이 딸리니, 사람도 먹을게 없는데, 말이 먹는 곡식도 불충분한 상황에서
기병의 중심인 말이 만마리 이상 죽어나감(거의 아사)

그런 상황이다보니, 조선의 마음같아선
명군이 대군으로 팍팍 남도까지 진군해 왜군을 쓸어줬음 하는데;;
명군도 상황이 좋지가 못했죠.

징비록에선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류성용이 닥달하는 뉘앙스가 많은데,
그래서, 재대로 싸우지도 않고, 명군들이 미적거렸다는 이미지가 많고 ㅋㅋㅋ

물론, 그래서 명군들의 민가 약탈하고, 그런걸 옹호하는건 아니니까 오해는 마세요.

아까도 북병이 거친 부대라고 했는데,
조선군과 곧잘 언어소통의 문제나, 전략의견 차이의  문제나 보급이 딸리는데 불만을 품거나, 
뭐 이것저것 다양한 이유로, 조선군과 관계가 썩 좋지 못하였고

조선인들을 구타하거나, 무례하게 행동해서 민폐쟁이 이미지가 생겨버린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고관인 류성용도 이여송한테 빰을 맞고, 운적도 있으니까요. 나중에 이여송이 사과했지만..

그리고, 명나라측이 조선 몰래 일본과 강화회담을 진행해서 뒷통수를 때린 것도,
한 이유가 되었죠. 나중에야 다 드러나고, 사실, 이건 중간에서 사기친 놈들이 욕먹을 일이지만;;
하여튼, 나만 모르고 있었다?라는게 상당히 기분나쁜 일임.
 -결국, 국제사기는 정유재란의 빌미가 되었고;;

모든일에는 잘한 점과 못한 점 양면이 다 있기 마련이고,
비슷한 의미로 중국에 공칠과삼이란 말이 있는데, 잘한게 7, 못한게 3이란 뜻임.
명군도 뭐 그런거라고 생각함.
     
오오타니 15-07-22 23:36
   
조선에서 주장한 한양에 남은 일본군 쓸어버리는라는말은 죽으라는말이랑 같죠..

2월 조선 실록 명군은 굶고있다는 있다는 기록밖에 없고 처음에 4만8천의 대군이 들어왔지만

중간에 보급부족으로 돌아간 병력도 많아서 3월달에 남은게 2만6천이 고작입니다.

약탈같은경우 만주족 여진족이 섞여있는 요동군이 많았고 그 이유도 사실 보급 부족이죠...

게다가 처음에는 군마가 2만7천필이엿는데 말먹이 부족으로 죽은 군마만 1만4천필이라

대다수가 기병인 당시 명군의 전력은 크게 약화됫죠.. 게다가  실록에서 보다시피

요동군은 일본군상대로 그닥 도움이 안됫습니다.. 강남에서 징발된 남병이 잘싸웟지

근데 당시 남병의 수는 고작 수천밖에 안됬습니다.

그렇다고 명나라가 자체적으로 보급할려는 노력을 안한것도아니고...

도로사정이 안좋으니까 조선 국경에 쌀을 쌓아두고도 제대로 운반이 안되엇죠

게다가 은자가지고와도 조선은 물물교환경제시스템이라 쌀도못사고..당시 한양으로 진짜

미친적 처들어가으면 명군은 전멸입니다... 실록에서는 그때 한양의 왜군을 4만이라하지만

당시 추정되는 일본군은 7만이엿죠... 만약 명군이 전멸되면 조선은 다시한번 아수라장 되는거지요

일본과 휴전하는 당시 명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어자피 명황제는

실제로 일본에 할지 할생각도 없었고 심유경에 속고 있었으니깐요..
          
mymiky 15-07-23 00:02
   
징비록이란 드라마에서도, 남병출신인 낙상지가 조선측에 우호적인 인물로 나오죠.
실제로도, 낙상지가 훈련도감 세우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던 사람이고
절강의 병법도 소개해주고..

님 말씀처럼 조선도, 다루기 힘든 북병보다 남병들을 더 선호했습니다.

당시, 명군들 내부에서도 북병과 남병 파벌싸움이 있었는데
남병출신들은 북병들과 사이가 나빠서, 말도 안 섞었다나?
뭐 하여간 그랬다고 들었음.

초기에 명나라 보급은 조선측에서 해주기로 했지만, 잘 안되었고,
그래서, 요동에서 조선으로 군량미가 들어가겠끔 했는데, 길도 안 좋고,
중간에서 삥땅쳐먹는 인간들도 생기고. 뭐 하여튼 막장..

그뒤엔 산동과 하북에서 서해로 곧바로 배로 배달하는 방법을 택하죠.

어쨎거나, 이 일로 오랫동안 해금정책을 취하던
명과 조선의 바다가 다시 열리게 되고,
조선도 군비를 위해 은광개발도 다시 하고,
조선후기의 상업활동에도 큰 영향을 끼칩니다.
               
오오타니 15-07-23 00:08
   
이여송이 남병들에게 지급해야할 은자가 있는데 실제로 지급 하지 않아서 남병들이 반란을 일으켯습니다.. 그래서 죽은 남병은 숫자가 천여명정도 될겁니다..
mymiky 15-07-22 23:47
   
아. 글고 명나라 군대에 악명을 끼친 에피소드가 하나 빠진거 같은데

명나라군은 조선의 원군이니까, 왜군들을 베어야 하는데,
다 그런건 아니지만..

전공에 눈이 먼 명군이 조선양민들을 죽이고, 머리를 깍인뒤, 왜군의 수급인양 취하는 경우가 있었죠.

이때문에, 원군이 올때만해도, 천병(天兵)이 왔다고 만세를 부르던 조선백성들이
왜군을 봐도 도망가야 하는데, 아군인 명나라군보고도 겁먹고 도망가는 사례가 속출;;;

조선 조정측은, 조선인들은 어릴때부터 귀고리를 하기에 귀가 꿇려있으므로
(조선 중기까진 남자도 귀고리를 했음)
귀가 뚫린 수급은, 명군이 우리 조선양민들을 죽여 왜군수급처럼 속이는 것으로 알겠다고
경고하죠.

왜군은 얼레빗이고, 명군은 참빗이다?란 말은

왜군은 원래 생각할 것도 없이 나쁨놈인거고,
명군은 원군이 우리한테 그런짓을 하다니?라는 조선백성들의 꽤심죄도 좀 적용된 사례임.
전략설계 15-07-23 00:11
   
전에 임란을 여기에 얘기할 때..
"평화시에 당해서 조선이 대비를 못했다" 이런소리 요즘 "징비록"보고 하면 클납니다.
통신사를 보내고, 대마도주가 전쟁난다고 찾아와 알리고 미리 조선도 준비를 했죠.
그래서 신립이 "쏜다고 다 맞냐"고 할만큼 왜와의 전쟁을 어떤 식으로든 상정하고 있었죠.

임란사에 명나라 관련된 부분은 읽기 쪽팔리죠.
여기서 명군이 임란때 나름 했다고 하면, 조선군 임란 몇전 몇승이라고 타율 뽑듯 확률로 얘길 해버리고..

결과로..
조선은 자기나라 전쟁터에 적이 7년을 머물어도, 징병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365일 조선땅에 24시간 전투에 임하는 10만이 넘는 적 주력군과
대치하는 주력군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그걸 4만-10만 가까이 되는 명군이 365일 24시간 대치하는 구도를 만든 것입니다.

임란때 왜의 1개 소서행장 군대에 조선주력인 신립 군대가 깨지면서 왕이 의주까지 도망갔지만..
정유재란때 천안으로 북상한 왜 우군(구로다, 모리, 가토) 군세를 맞이해서,
포격과 기병으로 정면 대결을 벌려 왜군을 남하시킨 것은 명군입니다.

큰 전투는 아니었지만, 병력빨과 왜군에 없는 야포, 기병이 있다보니 그 군세에 밀린 것입니다.
이미 왜 좌군은 전주성까지 쓸고 남하하는 상황이었고,
왜 우군은 북진하는 상황인데, 명군이 없다면 구로다, 모리, 가토의 왜 우군을 막을 군대가
조선에 있었냐 그겁니다.

서해가 막힌 상황에서 그 군대가 비록 평안도, 함경도까지 치고 올라가진 못하더라도,
명군이 없었으면 이 군세를 막을 주력군이 조선에 업시에 임란때처럼 한성은 다시 뺏길 상황이었습니다.

명군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칭송할 필요는 없지만 있는 그대로만 봤으면 합니다.
     
오오타니 15-07-23 00:21
   
조선은 경제적파이가 워낙 적어서 군사강국이 되기 힘든 면이 있죠
그 가장 큰원인이 낮은 세율과 많은 노비비율때문이죠...  세율도 낮은데 노비가 많아서 납세를해야할 양인숫자가 턱없이 부족햇죠.. 당시 명의 인구수는 조선의 약 10배지만.. 재정차이는 30배넘게 벌여졋죠...... 조선중기당시 조선1년 세입은 쌀 30만석정도엿는데 이마저도 관리 봉급으로 나가는게 10~15만석이였다고합니다.. 근데 관리 봉급주는것도 넉넉치 못해 나라에서주는 봉급으로는 먹고사는게 불가능했다고하더군요 결국 관리들은 뇌물수수와 수탈을 일삼고.. 국가에서도 어쩔수 없이 눈감아줬다고하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대규모 질좋은 병력을 양성한다는게 조선에선 불가능했습니다......돈이 없거든요
          
전략설계 15-07-23 05:32
   
고려의 광군을 보면..
경제규모라기 보다는 국가가 외적의 침입에 어떤 생각을 하냐에 달려 있는 부분입니다.

큰 나라는 어떻게 치냐, 모셔야지..
이런 생각을 왕조 창시자가 갖고 있는데,
그 후손의 생각이란 것은 선조 따라가기 나름이라, 터지면 중국군대 불러오는 습성이..
왕조말기까지 가죠.
전격전으로 명에 손 벌릴 시간도 없었던 병자호란을 거쳐,
명성황후 임오군란까지 중국군대 불러오는 데 정신이 팔려..

광군같은 우리 힘으로 외적을 물리친다는 기개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볼 수만 없습니다.
외적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의 차이죠.
               
mymiky 15-07-23 06:26
   
신라가 당나라 끌어오고
백제가 왜군 끌어오고
고려가 원나라 끌어와 무신정권 타도해버리고
(삼별초는 일본의 왜군을 끌어올려다가 일본이 거절 ㅋㅋㅋ)
조선이 명나라 끌어와 왜란 종결시키고
조선이 청나라 끌어와 임오군란 진압하고
한국이 미국 끌어오고, 북한은 중공군 끌여들어와  오늘날 휴전 ㅋㅋㅋ
                    
mymiky 15-07-23 06:39
   
솔직히, 님의 말씀처럼..
자기 능력이 되서, 외세 물리치면 그게 제일 좋죠.
하지만, 자기 상황이 여의치가 않으면, 찬밥 쉰밥 따질게 못 됩니다.

군사지원에 대해 너무 자괴감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선만이 그런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자기 능력 딸리면, 다른 나라에 원군 요청하고 그랬던 예는 많아요.

당장, 명나라군이 사르후전때 조선원병 요청하고, 청나라군은 나진정벌때
조선원병 요청했죠? 삼번의 난때도 지원할뻔 했습니다.
원나라가 홍건적 반란때 고려원병 요청한 적도 있구요.

오늘날에도, 베트남 파병가고, 이라크에도 가고, 뭐 그러잖아요?
상황이 어려우면 돕고 돕는거죠.

한미연합 작전 연습하고, 또 중국이나 러시아끼리 또 연습하고
나토군도 다 연합으로 군사훈련하고 그래요.

자기나라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날지? 누가 장담할수 있겠습니까?

물론, 님말씀처럼, 누가 와도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딴놈들 도움은 필요없다고 강짜 부릴수 있는 나라?

중립국 스위스? 아님 사실상 라이벌이 없다는 미국? 정도나 그런말을 할수 있지.
오늘날에도, 전쟁나면, 다 도와주고 그래요.(서로의 이해관계 따라서)

물론, 평소에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겠죠.
그리고, 주변국들과 우호적이게 평소에 잘 지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구요.

님은, 조선의 힘으로 왜군들을 못 물리친걸 한탄하시는거 같고,
기분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한게 뭐냐?는 뉘앙스로 말하시는 것도 에러같아 보이는군요.
                         
전략설계 15-07-23 08:48
   
사르후때 명군 10만에 낑겨 조선군 1만이 갔고.
나선정벌은 몇백 단위라.. 규모로 논하기도 그렇네요..

임란때 왜군에 대항해 우리가 주력을 차지하고, 명군이 보조 성격이라면,
명나라가 지기들도 떵줄타서 왔겠네 하겠습니다만.

조선은 1만을 넘는 주력군대가 개전시부터 종전시까지 전혀 안보이고,
육상에서 주력을 명군이 맡은 부분이..
정상적인 사고로서는 수긍하기 어렵네요.

마지막 밀어붙이는 국면에서도,
명군이 36000 투입될 때 조선군 11500 들어가고..
명군이 26000 투입될 때 조선군 10000 들어가는 모냥새까지도..

단지 필요하면 외국군대를 부른다.. 라고 당연히 봐주기 어렵네요.
왜냐 우리 땅에서 벌어진 전쟁이라..
수적으로 외국군대에 의지하는 모냥새가..
꺼꾸러였다면 차라리 봐줄만하다고 생각하겠는데..

이러니 중국애들이 임란을 두고 한국을 크게 도와준 것으로 알고..
요근래 중국 정치인들이 한중간을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사이"로
지금까지도 생색을 내는 것입니다.

조선은 단지 외국군대가 올 수도 있다 정도가 아니라,
임오군란때는 내전에서도 중국군대 불러오죠.
그 발상은 이성계가 했던 짓들, 그 기개.. 임란때 선조와 지배층이 보여줬던 모습을
따라가는 것이지, 그런 일들이 없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발상입니다.
               
오오타니 15-07-23 08:40
   
재정 능력을 절대 좌시할수 없죠... 임진왜란때 징집된 양민들은 국가가 돈이 없어 개인사비로 무기를 구입하도록했습니다... 당연히 당시 무기값은 양민들에게 큰 부담이여서 죽창,몽둥이 같은 허접한 무기로 무장하는 병력들도 많았습니다............ 징비록만 보더라도 왜란 낌새가 보여서 훈련을 하려는데.. 훈련동안 징집된 양민들 대줄 식량이 없어서 훈련을 포기하는 장면,, 양민들이 훈련할때 무기를 구입하지 못해 빚을지는 장면,곤장맞는 장면도 나옵니다.
                    
전략설계 15-07-23 08:59
   
인구가 적은 고려도..
광군 30만을 육성하고, 20만을 북계에 배치하고, 윤관이 17만 주력군대를 정벌군으로
보냅니다.

고려말..
홍건적으로 개경이 함락당하고, 왜구에 전국이 피해를 입어도,
4만이 넘는 병력을 요동정벌군으로 또 보냅니다.
그 경제는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시나요.
생각의 차이입니다.
할 수 없다고 하면 첨부터 할 수 없는 것이고, 하고자 하면 길이 있는 것입니다.

경상도 땅의 신라도 병력을 5만 만들지 않습니까..
하물며 한반도 전체를 다스리고, 각 고을까지 수령을 보내는 행정력의 조선이
1만 이상의 주력군대를 전장에 내보내지 못한 것은
하고자 뜻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왜.. 부르면 오면 명나라 군대가 있쟎습니까..
나라 기본정책부터 사대인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도 있나 싶습니다.
지가 군대 돌린걸 쪽팔려서 마음속에 두고 생각해도 되는 것을 기본정책으로
만든 것 같고, 후세는 당연히 따라가게 돼 있어, 애초부터 스스로 하는걸 포기합니다.
백성들이야 살기 위해 싸웁니다만, 윗대갈들은 이미 머리부터가 큰 나라 의지하는 식이라,
체계적으로 군대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지가 없습니다.

어느 전쟁도 편한 전쟁은 없습니다.

거란 침입후 100년의 평화를 맞이한 고려가,
외부침입이 없는대도 17만을 정벌군을 편성하고 체계적으로 실전을 벌여
성을 쌓는 과정을 보면..
국가의 외형적 크기만으로 이를 논할 수 없습니다.
                    
전략설계 15-07-23 09:07
   
하나 더 생각해보면..
나라의 구조가 다르다고 봅니다.

일본은 책이나 읽고 혼자 알아먹을 소리나 하는 비현실적인 양반계층이 없고..
노비도 결국 세금 안내고 군대 안가는 양반계층 뒤치다거리 하는 계층이라..
둘 다 전쟁에 쓸모가 없는 전쟁의 측면에 보면 낭비고..

일본은 오로지 전쟁에 맞춰져 있고..
일본만 그런게 아니라 동시대 유럽도 기사계급으로 마찬가지입니다.
책만 보고 공자왈맹자왈 계층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없었는데 조선에서 있었단 사실..
나라를 외형적 크기에 비해 문약하는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유교가 활성화 되기 전 고려도,
공자왈 맹자왈 하는 계층이 없기에..
결국은 일본처럼 지배층이라면 군사력이 있는 준군사조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란침입시까지 고려는 지방에 지방관 하나 보내지 못하는 상황이라..
호족이란 것도 일본 다이묘와 비슷한 성격이라 볼 수 있고..
비록 문관이 난리를 쳐서 무인난이 일어나지만..
고려도 문관이 있지만, 조선의 양반계층과는 다른 것으로,

조선 양반은 지방에서 하는 것 없이..
책만 보고 군대 안 가고 세금 안 내고 노비까지 부려서 노비 군대 안 보내는..
10%라 하더라도 딸린 노비들과..
또 단순 쪽수가 아닌 양반계층이 보유한 경제력을 놓고 보면..
붓 하나 들고 있는 양반계층으로 인해 군사적으로 문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록 임란때 자기 경제력(사재)을 써서 의병을 조직해 싸운 양반계층도 있지만.
일부에 불과하죠.

조선이 고려보다 작은 나라가 아님에도,
고려가 했던 것을 꿈도 못 꾸는 것은..
경제적 파이라는 것보다..
전쟁때 아무 쓸모 없는 거저 놀고 먹는 양반계층 때문이라고 봐지네요.
                         
mymiky 15-07-23 09:49
   
선조가 전란후에
[군벌]이나 [사병화]가 될수 있는 의병들을 견제한 것도 비슷한 이유죠.

드라마 징비록에서도 선조가 이러다가,
고려처럼 되면 어쩌냐고 걱정하는 부분이 나오죠.
무신란과 사병을 데리고, 왕권을 위협하던 권문세족 꼴이 되는거 아니냐?며
뭐 그런 대사였던거 같은데..

선조가 명군들을 띄워준 것도 명나라 대군이 도와준 것도 있겠지만.
어차피, 이 사람들이야 전란후엔 자기 집으로 갈 사람들이고,
다시 안 볼 사람들이니..
선조 입장에선, 적당히 립서비스 좀 해주고 땡처리하는게 수월하긴 했습니다.

선조가 얍삭하게 의외로 정치력이 좋았다는 평가를 받는게 이때문이죠.
절대 자기 왕권에 피해가 오는 짓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면..

조선이 왜란때 망했어야 했다고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조선이 그때 망하지 않은 이유도 선조가 워낙 뒷정리를 철저하게 단속해서, 그런 빌미를 줄 무력집단이 등장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님이, 고려는 속된말로
가오(?)가 사는데, 조선은 가오가 안 살아서
싫다는 말, 이해는 합니다.

고려 지배층들은 후삼국의 호족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그 지역의 영주들 같았고
가문별로 토호라서 그 지역색이 쎄었죠. 집안에 사병들도 데리고 있었구요.

그래서, 님말처럼 가오있게 싸우기도 했지만.

단점으로 조선에서는 없었던 무신란이나 왕권을 능가했던 권신이나 군벌들도
등장하게 되죠.

조선의  지배계급인 양반들은 과거로 배출되는 신분에다
양반이라고 자식들도 양반이고 그런 개념은 아닙니다.
조선은 법적으로 양민과 천민 두개밖에 없음. 양민 성인남자면 과거 볼수 있고..
어떤 면에선, 고려보다 더 평등한 개념이였는데-.-

양반은 그 지방의 영주같은 그런 개념도 아니였고..사병은 개국초기부터 철폐되었으며, 왕권을 능가하는 권신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음. 그나마 비슷하게 따지면, 19세기 세도가문정도랄까?  근데, 이것도 고려 권신과는 좀 차이가 있고.

전, 사실 내가 고려와 조선중에 태어나야 했다면,
(금수저 물고 지배층으로 태어나지 않을 이상)
내가 걍 평범한 일반 백성이라면?

조선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양란기과 19세기쪽 빼놓고,
왜란전 조선 전기에 태어나고 싶더라구요 ㅋㅋㅋ

님 말씀처럼 간사한 이유 때문이죠.
내가 병사로써 전쟁터에 나가라는 명을 받은 백성의 몸이라면?
솔빠, 가오가 무슨 상관임.
난 고생하고, 죽고 싶지 않은데...
그럼에도, 징병되어야 한다면 가야할 힘없는 백성중 하나일테지만.
                         
전략설계 15-07-23 11:59
   
지방관 하나 없었던 호족들이 법인 고려초기보다야..
행정체계가 잡힌 조선전기가 아마 가장 살기 좋은 시절이란 데 동감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200년이었고.. 영정조시절 70년해서..
조선의 절반은 살기 좋은 시절이었네요.

'가오'에 대해서..
'가오'가 없으면 주변국에 쉬이 보여 안 맞을 걸 맞게 대고,
더 많은걸 줘야 하고,
평범하게 살걸 부마국으로 살아야 하고,
더 많은 전쟁을 불러오게 됩니다.

고려를 '가오'라고 보는데 딱히 동의하기 어렵네요.
거란, 홍건적, 왜구는 쳐들어왔으니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이지.
'가오' 잡기 위해 싸운게 아닙니다.

외교를 잘 하고 잘 싸서 그 와중에 거란으로부터 '평안도' 땅을 수복하고,
여진이 커지면서 고려변경에 위협을 감지하고 먼저 나서서 때리니,
금의 침입이란 전란 하나를 피해나가면서 '함경도' 땅을 조선시대에 수복할
명분을 세웠습니다

고려말에 요동정벌을 2번 나갔으니..
1300년전 고구려때 기억이 아닌 600년전 역사로 '만주는 우리땅'이란 소리를
한번은 해보는 것입니다.

어디에도 '가오' 잡기 위해 한 것은 없습니다.
고려 사람에게 만주는 우리땅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오'(?)를 포기하고 명나라 철령위를 요구를 들어줬다면,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있을까도 싶네요.
고려말 유학에 물든 신진사대부는 반대하고 결국 무모하게 보이지만,
마지막 고려의 인물인 최영이 그걸 했기에..
아마도 윤관의 여진정벌도 그런 기개로 한 것으로..

원나라 부마국 시절에서 벗어나..
그래도 명나라로부터 조공국 정도로 격상된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죠.
싸우지 않고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고려는 '가오'가 아니라 '기개'입니다.
변방에 원나라에 빌어먹던 이성계가 건국을 하면서 '기개'가 사라졌고.
조선에 익숙한 현대 한국인들이 감잡기 어려운 '기개'가 고려인들에게는 있었죠.

고려는 '기개'입니다.
mymiky 15-07-23 00:21
   
왜란때 조선군은 15-17만 정도
(그중에 어중이 떠중이, 훈련도 제대로 못하고 불려나온 사람들까지 다 합치고 대략 이 정도)
명나라군은 5만 파병(대부분 가까운 요동병+일부 남병)

정유재란때 조선군은 3만명 정도 감소.
( 고향 재건하라고 지방으로 내려보내고,  보급을 위해 농사지으라고 내려보냄)
명나라군은 10만 조금 넘게 파병-수군포함
(정유재란때는 명 조정도 강화론보다 주전론이 득세, 매우 적극적으로 나옴)
     
오오타니 15-07-23 00:23
   
조선에 군적은 믿을만한게 못됩니다.. 실제로 왜란 1년전 신립이나 기타 장수들이 군적 확인하러갔는데. 있어야할 병력 태반이 없고. 무기나 활 상태도 엉망이고
1594년 유성룡이 한번더 군적 감사를나간적이 있었는데 군적에는 15만넘는 병사가 적혀있는데
실제 병력은  기록된거에 10프로도 없엇다고 한말이 기억나는군요.
두부국 15-07-23 00:41
   
조선이 군사에서 몰락한이유는 사림파가 훈구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을때입니다

훈구파때도 선조시대만큼 부정부패는 심했습니다 하지만 훈구파들은 왕권강화와 부국강병이라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사림파는 추구하던거부터가 조선은 왕이 아니라 지들 사대부가 세운거라 믿는애들이라 국방에 별로 신경을 안썼지요
     
mymiky 15-07-23 00:47
   
조선에서 군사가 몰락한 이유는, 딴거 없어요.
조선이 안정기가 지나치게 길었던게 이유입니다.
평화가 계속 되다보니까, 헤이해진거죠.
기본적으로 문치주의기도 했구요.
          
두부국 15-07-23 00:49
   
심지어는 화살 칼을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는 병사들도 있었답니다
               
mymiky 15-07-23 00:54
   
과장이 심하시네요-.-

걍... 평화기가 오래되다보니, 실전경험이 부족해진건 분명히 있었죠.

활과 칼을 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몰랐다니요;;
특히나, 활쏘기는 군인뿐만 아니라, 문관들에게도 교양으로 기본중의 기본입니다.
                    
두부국 15-07-23 00:59
   
제가 과장이 너무 심하게 생각한것 같군요
                         
오투비 15-07-23 04:44
   
이 분은 그냥 개그맨인듯ㅋㅋㅋ
          
mymiky 15-07-23 00:51
   
훈구파들이 왕권강화와 부국강병이라는 것도 조선초기의 말이지;;
선조 앞에 훈구파들에겐 그딴거 없음.
이미 개국한지도 200년이 지났고, 애네들도, 걍 기득권 세력으로 눌러 앉은지 오래.
뭐,, 그게 권력의 속성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림파들이 왕이 아니라, 사대부가 세운거라고 본다?
뭔 말인지-.-;;
애초에, 조선이란 나라 자체가 동북 군벌인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이 손잡고 세운 나라예요.

국방에 신경을 안 썼다라는 것도 억지구요.
왜란발발 전에도, 조선측은 전쟁준비를 했습니다.
단, 잘못이 있다면 판단미스가 있긴 했죠. 걍. 이번에도 왜구가 올려나보다.

적들의 수가 수천- 많아도 1-2만 정도로 예상하고, 아무도 일본에서  10만대군이 올꺼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이 일본인들과 싸운 경험이야. 왜구가 다였고, 삼포의 난 정도입니다.

그 이전에, 고려말 왜구침입이 있겠지만. 이미 2-3백년 전의 일이라,
조선인들에게 별로 감흥이 없었으며

더 나아가, 왜란전 우리나라에 10만대군이 쳐들어온 최근 기록은,
고려초 거란족 침입입니다.(- 고려 현종이 전라도 나주까지 몽진갔죠.)
 
삼포의 난, 고려말 왜구침입보다 이건, 더 몇백년 이전의 일이니,
더더욱 별나라 이야기죠.
경영O근혜 15-07-23 02:25
   
하긴 이랬으니 만력제가 명나라 멸망후에도 조선땅에서 300년이나 더 제삿밥을 얻어먹었겠죠...
오투비 15-07-23 04:43
   
이쯤되면 굿잡스님이 등장해 이 게시물 전체 의견에 대한 반론을 펼쳐야 되는데... 어째 안보이네 ? 제가 그분을 통해 알게 된 당시 조선은 이렇게 무능하지 않았고 명군 보다도 승률이 좋고 막 그랬는데..? 굿잡스님 빨리 와서 논파해주세요!!
     
전략설계 15-07-23 05:26
   
프로야구도 아니고 전쟁에 승률이 먼 필요가 있나 싶네요.
조그만 전투 10승보다,
탄금대에서 1승 했으면 왜군의 북진을 멈추게 했고,
울산성에서 1승 했으면 바닷가 성 쌓고 죽치던 왜 애들 불안해 퇴각을 궁리하게 만들건데..

중요한 국면의 큰 전투의 승전이 중요한 것입니다.

프로야구도 아닌 전쟁에다,
왜군에 몇전 몇승 이게 머 중요하답니까..

지 힘으로 물리치지 못해 명나라 군대를 불러오고, 바닷가 1만씩 죽치던 애들
자력으로 내보내지도 못 한 것 다 아는 사실에..

임란에 들먹이는 승률과,
군적부 가지고 조선 병력이 마치 십수만이 되는 것처럼 떠드는 것처럼,
수모감이 깊은 전쟁을 잘 싸워 이긴 것처럼 만드는 우리끼리 자위용이죠.

그 전쟁이 수길이 죽어서 끝났지,
중국군대 불러놓고도 우리네 힘으로 이 땅에서 몰아낸게 아닙니다.

자위용 역사에서 배울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오타니 15-07-23 06:04
   
전투라고 다 같은 전투가 아니죠 그 전투에 양측에 동원규모는 얼마엿는지 전략적으로 어느정도 가치를 갖는지...... 잘 살펴봐야겟죠
꼭보면 명나라가 임진왜란때 전투 참여횟수가 적고 조선의 참여횟수가 많고 승이 많다고 명측을까는경우가 많은데.... 조선측 참여횟수가 많은건 의병들이 소규모 게릴라전이나 보급부대를 공격한경우가 많아서그렇죠...  이런경우 규모가 너무 작아서 전투라고 불리지 않는게 태반입니다.. 사상자라고해봤자 수십명나는정도 ? 물론 이것들이 누적되서 왜군에게 피해를 줫겟지만... 결정적으로 전세에 많은 영향은 못주죠.... 명나라 참여횟수가 적을수밖에 없는게 명나라는 조선 의병처럼 소규모 게릴라전을 펼친것도 아니고 한번 전투가 일어나면 기본 3~4만명씩 동원하엿습니다. 즉 왜군의 주력군과 맞상대했고 병력동원규모가 엄청나다보니 전투 횟수가 적을수밖에 없죠 이런 전투는 양측에서 사상자가 수천 많으면 수많까지도 났으니깐요... 임진왜란시 각종전투에서 조선군이 1만가까이 동원된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즉 명나라같은경우 전투를 벌이면 만단위가넘어가는 대규모로동원된 전면전 형태가 많았고 조선의병들은 수십,수백단위로 소규모게릴라전이나 왜군의 보급부대를 공격하는 형식이였으니 전투횟수 차이가 나는건 당연한겁니다.
     
전략설계 15-07-23 08:31
   
수만의 주력군의 존재란 것은 안 붙고 대치만 해도
그것으로도 적이 쉬이 까불지 못하는 가치가 있어 전쟁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정유재란 직산전투에서 명군이 작은 전투 벌리고나서 수원으로 후퇴했지만,
왜군은 북진을 포기했죠.
임란에서 똑같은 경우로 명군이 벽재관전투에서 패전했지만,
결국 왜군은 한성을 포기하고 남진했습니다.

일본 본토에 늙은 수길이가 늦깎이 아들을 봤는데,
이에야스가 건재한 상황에서 그 아들에게 100% 정권이 이어받을 것로 볼 다이묘가 몇이고..
괴멸적 피해를 생길만한
몇만 vs 몇만의 큰 전투는 자기 영지의 휘하 군대, 부하장수들 잃기 싫어서
알아서들 피했다고 봐야 됩니다.

일본내 판도에 어떻게 바뀔 지 모른 상황에서
다이다이 할 일이 없고.
행주산성처럼 수적으로 만만하거나 진주성처럼 수길이가 난리치면 죽기살기로 댐벼들죠.

4-10만 정도 명나라 군대 없이..
신립군대처럼 1만 정도 병력으로 직산에서 막아섰다면 에워싸고 난리가 아녔을겁니다.
1-2만 정도 왜군의 군세를 고개나 성에서 지체시키거나 막아세울 수 있으나,
조선육군은 몇만 단위로 이동하는 왜군 주력군과 정면상대한 적이 없습니다.
규슈 한 구탱이에 있는 소서행장 군대에 나가떨어지는 상황입니다.
참담합니다.

전투를 벌이지 않아 승률로 집계되지 않더라도,
상시 적과 대치하는 대규모 주력군대의 전략적 가치는 대단히 크고,
복싱 선수 소개하듯 몇전 몇승 몇패로 전쟁을 논할순 없는 것입니다.

2차대전은 몇승 몇패인가요?
이거 따져서 어느 쪽이 잘 싸웠다는 사람 있으면 한눈에 부족해보이는 사람입니다.
Centurion 15-07-23 12:58
   
위에 분들..

유성룡이 올린 1594년 시무자차를 통해
상번한 중앙군 숫자가 7920명 이거 보고 말씀하시는 모양인데..
상번, 번상병이라는게 왕이 있는 수도로 올라와 근무서는걸 뜻합니다.

본래 고려도 중앙군 2군 6위 같은건 숫자 얼마 안됩니다.
조선도 초기엔 5위, 중후기엔 5군영 체제로 가는데..
이게 중앙군이고, 이걸 군적에 올라와 있는 병력들이 교대로 와서 채우는 형태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수방사에 해당하는 병력인데 이게 한 2~3만 정도 되었던 것입니다.

장계로 올라와 파악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병력은 관군+의병 합쳐서 17만이 넘습니다.
실제로 전라도 근왕병 5만이라던가, 유명한 의병장 밑으로 수천명 단위가 넘어가는 의병부대들이 여기저기 있었죠.

일본의 군대 역시 사실 비슷한 상황입니다.
일본군 편제를 제대로 살펴보면, 얘네들도 거의 반수 이상이 비전투병력입니다.
(일본군 참전 다이묘가 작성한 병종 구성비율이 기록된 문서 찾아보면 나옵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각 진을 살펴보면, 2개 이상의 다이묘들이 연합을 한 형태인데...
그 밑으로도 여기저기 잡다한 군소 다이묘들이 끼어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얘네들도 기본적으로 전쟁할 때, 제일 위에 있는 다이묘가 군대동원을 명령하면,
그밑에 성주, 가신들이 자기 영지에서 병력 꾸려서 많게는 몇천, 적게는 몇백, 몇십 단위로 끌고오는 형태입니다.

다이묘가 사단장, 여단장급이면,
그 밑에 가로들이 연대장이나 대대장급, 그 밑에 사무라이대장들이 중대장, 소대장급쯤 되겠네요.

일본 전국시대도 농사지을 때는 어지간해선 전쟁 안했어요. 농병일치제도라서..

돈으로 고용하고 사시사철 유지되는
상비군, 직업군인제가 만들어진게 오다 노부나가 이후부터입니다.
히데요시가 그런 체계를 물려받은 것이구요.

그리고 사실 조선군은 너무 몽골군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궁술과 말타기에만 집착했습니다. 무과 시험 과목이 말타기, 활쏘기 정도 뿐이니..
그 말은 즉슨 아무리 체격이 좋든, 운동신경이 좋아도 기껏해야 궁기병 육성이 목표였다는 소리죠.

백병전 기술인 창술이나 검술 같은게 많이 경시되었던게 사실이고..
임진왜란 때 이러한 백병전에서 많이 밀립니다.

일본의 경우엔 눅눅한 날씨떄문에 활이 발달하지 않아, 사거리가 짧은 활 밖에 없었는데도..
궁시로 인한 사망자 숫자가 전국시대 사망자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만큼 많았죠,

어찌보며 이게 글케 효과가 없는건 아니지만,
제한된 전장에서 회전을 벌일 때 오합지졸의 민병 소집해서..
숙달된 궁수를 충분히 보충할 수 있었던가?
혹은 그 상황에서 회전으로 정면 승부를 낼만큼 병력의 자질이
숙달되어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물론 그게 당연히 안되니까, 탄금대에서 신립이 발린거고, 전라도 근왕병이 발린거지요.

그리고 나선 게릴라전 국면으로 들어갑니다.
이동중인 적 소규모 부대나 적의 보급대열을 기습해서 승리를 취하는것이죠.
이로 인해, 300인 이상이 아니면 왜군들은 각 거점과 거점 사이를 이동하지도 못할 정도로 시달립니다.

이런 게릴라전을 하는 의병부대의 규모도 많게는 수천명 이상인 부대들이 흔했습니다.

이런 의병장들의 부대가 거의 연대급에서 여단급 수준이라고 쳐도,
일본군 역시 본래 군소다이묘들은 몇천 끌고와서 몇명이 합쳐서 1~2만 만드는 케이스도 흔했습니다.

그러니 일본군은 각 진별로 1~2만인데 조선군은 왜 그 모양이냐고 따지는것도 틀린겁니다.
조선의 각 도 별 병력은 1~3만 이상인 경우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이 일본군들은 본래 각 진별로 각 도를 하나씩 맡아서 점령하는 부대들인데..
나중에 평양성 전투쯤에 대부분 북상해서 벽제관전투에서 명나라군 바를 때 활약했다가,
행주성 전투 때 와장창 깨진 후 경상도의 남부해안으로 철수하게 되죠.
 
그리고, 이 부대들이 각자 흩어져서 경상도 남부해안에 왜성을 쌓고 장기주둔을 하게 됩니다.
보급부족과 병력손실을 감당하지 못해서 그랬던겁니다.

이런 왜성을 공격하는건.. 일본 내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라, 병량이 떨어질 때까지 굶기는 작전이 많이 쓰였죠.
참고로, 히데요시의 주특기가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운 포위와 병량공격입니다.

이게 그나마 성공할 뻔한게 울산성 전투에서 가토군을 굶겨죽이는 상황이었는데,
그나마도 각개격파를 우려한 일본군 다이묘들이 연합해 지원해서 포위를 깨뜨리고 구원했죠.

어쨌든, 이런 전쟁양상을 인식못하고,
뭐 전쟁 초반 이야기만 갖고 논하는 것도 에러고.. 주력군으로 견제를 했니 못했니 하는것도 에러죠.
애시당초 그런 주력군 자체가 당시엔 왕을 지키는 임무가 주임무구요.

그리고 이렇게 되다보니 대군을 유지할 식량부족이 문제라,
돌아가서 농사지어라고 병력을 해산시킨것이고..
막상 일본군도 정유재란 초반 때 빼곤 활동이 둔화되서 왜성에 쳐박혀 있으니 크게 문제가 안된거죠.

그러다 갑자기 정유재란 때 다시 병력 보충해서 대군을 모아서 진주성 깨뜨리고,
전라도 넘어가서 깽판치다, 명량해전에서 깨지고, 또 안되겠다 싶어서 다시 왜성으로 돌아간거고..

상시적으로 적과 대치하는 대규모 군대?
보급곤란으로 자기들이 알아서 경상도 남부해안의 왜성에 쳐박혀서 시간 죽이는데...?
굳이 알아서 쳐박힌 왜성 앞에 공성전도 없이 밥만 축내며 몇만대군 집결시켜놓고 견제를 따로해줄 필요가 있나요?

아마 선조가 중앙군 데리고 있고, 권율은 전라도 관군같은 지방군 데리고 있었을겁니다.

임진왜란 연표 찾아보면 알겠지만..
1592~93년까지 행주성 전투까지는 그나마 치열했지만, 그 이후로 몇년간 소강상태입니다.
임진왜란 개전으로부터 채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구요.
     
오오타니 15-07-23 18:04
   
행주성 때문이죠 아니죠 정확히는 명군과 대치중이니 남해안으로 간거겟죠..... 당시 한양에 왜군만 수만이고 이와 상대할 조선군은 없었습니다. 급히 징집된 농민군들이야 군사기강도 없고 병력의 질도 엉망이엿죠...... 용인전투같은 참사가 일어난것도 그원인이구요 특히 조선군같은경우 개인무기도 징집된 양민들에게 구매하도록했는데 당시무기값은 비싼편이여서 조선군 무장상태도 좋지 못한편이엿습니다... 행주산성에서 왜가 패하긴했어도 병력을 뒤로 다뺄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건아닙니다.. 왜가 보급상황이 못한건 맞는데 명군,조선군은 보급상황이 더 안좋았습니다. 당시 4만 명군도 보급이 한달만에 끊긴 상황이엿는데요.... 명군같은경우 1월에 4만 8천이 건너왔는데 3월달에 남은건 고작 2만6천밖에 없습니다.. 도중에 보급이 안되서 요동으로 다시 돌아간 병력이 많습니다. 거기다가 보급 우선순위인 중국군인데도 그모양이엿는데 당시 후순위인 조선군 보급상황은 눈물날지경이엿죠...

그리고 정유재란시 왜군의 전략은 애초에 조선전역 점령이 아니라 전라도 경상도 점령이엿습니다. 도요토미가 내세운 할지론이 먹히지 않아 전쟁을 벌엿고. 정유재란 목표는 한강이남땅 하삼도엿죠. 초기에 전술이  잘먹힌게  고니시의 간계에걸려서 이순신이 자리를 박탈당하고.... 전라도에 5만대군을 투입시켜 전라도를 쑥대밭으로만들죠 그리고 경상도 전라도에 각각올라온 10만대군으로 한양을 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명군도 거의 10만이 넘는대군이 내려오져..... 임진왜란당시는 별도움도 안되는 기마병위주엿다면 이번엔 강남지방에서 징집된 전투력이 좋은 남병들이 차출되었고 그들의 화포화력은 왜군들에게 감당이 안되엇죠.. 편제에서 명군이 한수위 그래서 다시 남쪽으로 철수한거구요..... 어자피 당시 왜군들은 중앙군도아니고 각자 다들 개인사병인데 괜히 대규모 접전을 펼쳐 자기 사병을 희생시킬 이유가 없었구요  그동안 조선군은 왜 징집이 안됫냐고 묻는다면 조선은 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그마저도 휴전기간중에 가뭄이 연달아들어 당시 실록을 보면 백성들이 서로 인육을 먹는다고 할지경이라고 나옵니다 이런상황에서 조선이 대규모 징집을하고 병력을 보존하는건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선조가 휴전기간때 의병들을 조지는바람에 의병활동이 정유재란때 크게 위축되기도했구요
          
Centurion 15-07-23 19:31
   
명군과 대치중인게 문제가 아닙니다.

벽제관에서 명군 선봉이자 이여송의 최정예 기병이 작살이 나고,
이여송이 목숨만 부지해 겨우 도망쳤는데.

행주산성에서 일본군 연합부대가 모였거든요.


우키타 히데이에-총대장(제8군 우키타 히데이에(10000명))
이시다 미쓰나리-군감, 히데요시의 최측근
오타니 요시쓰구-히데요시 가신, 이시다 미츠나리 절친

고니시 유키나가-1번대 대장 (최초 병력 1만8700명, 직속부대 7천)
구로다 나가마사-3번대 대장(총병력 1만1천명, 가문 직속부대 6천명)
고바야카와 다카카게-6번대 대장(1만5700명)
모리 히데모토- 7번대 부장(7번대 총병력 3만)
깃카와 히로이에-모리 가문의 별동대 지휘(6군 혹은 7군 소속)
호소카와 다다오키-9번대 부장(총병력 1만1500명, 다다오키 직할부대 3500명)
**9군 대장 하시바 히데카츠는 거제도에서 병사

즉, 본래 여기 참전한 일본군 지휘관 면면을 살펴보면
빠진 군대가 가토의 2군, 모리 요시나리의 4군,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5군 정도로..

임진왜란에 출전한 9개의 진영 중에
1,3,6,7,8,9번대 총 6개 진영의 대장 및 부장급들이 대거 출진한게 행주대첩입니다.

그 병력이 3만명이라고 하는데..
행주대첩 직전 이 병력들이 복수 출진했던 벽제관 전투..
즉, 한양에 몰려있던 일본군들이 명나라군을 매복으로 패퇴시킨 벽제관 전투 일본군 규모가 7만명 이상임..
(우키타 히데이에(8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6군), 다치바나 무네시게, 고니시 유키나가(1군), 가토 기요마사(2군), 나가오카 다다오키(9군), 요코야마 가케요시)

면면을 살펴보면, 행주성이 각군 대장들이 더 많이 참가한 전투인데, 3만이라는데..
이건 어찌 된일인지는 모르겠고, 여기서 일본군 네임드들이 줄줄이 깨지고,
총대장이 중상을 입고 업혀서 실려갈만큼의 악전고투였던데다..
일본군 장수들이 혈서까지 써가며 치욕을 씻기로 결의할만큼 충격적인 패전이었슴.

어쨌든 명나라군은 벽제관에서 깨지고 진격을 정지한 상태였고..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한 건 결국 의병들과 조선수군의 보급로 두절
+ 행주성 대첩의 피해가 컸습니다.
               
오오타니 15-07-23 23:44
   
행주대첩은 고작 전투 하루 벌어졋습니다... 일본군이 3만이엿다곤 하나 사상자수가 그닥 많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권율도 왜군들이 재침할까봐 걱정되서 파주로 철수해버렷구요......  일본군들은 개인사병으로 이루어졋습니다 장수들이 자기병력들이 많이 사상자가 날정도로 웬만해선 공격하지 않아요 안되겟다싶으면 빨리 퇴각하죠.
해전은 잘 모르겟으나 육전에서 일본측 피해가 가장 컷던건 4차평양성 전투나,
진주대첩이겟지요... 이때도 수천정도에 피해로 예측됩니다.

평양성 전투이후 ... 명군이 대대적으로 남하하여 개성인근까지 내려왔습니다
이에 일본군 수뇌부는  싸울것인가 싸운다면 방어할것인가 공세할 것인가?
아니면 철수 할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 하였습니다 ,
결론은 총감군인  석전삼성이 총퇴각을 발표 했지요
여기에는  소서행장의 충격적인 패배의 결과가 크게 한몫한 것입니다
 
이때  후방에 있던  6군과 9군이  한양에 도달 했습니다
2개군 병력이 3만이 넘었으니 일본 연합군으로썬 사기가 올랐겠지요
이 중에  6군의 소조천융경이 적극적 전투를 하자면서 퇴각을 반대 합니다
결국 일본군 수뇌부는 전투를 하기로 하고
방어를 하려는 계획보단 선공세를 펼치자 하여
 
한양에서 30리 밖의  파주에서 일전을 벌이기로 작정 합니다
당시 한양에 집결한 일본군 총병력은 7만4천500명이구요
이 중에  .. 한양 후방으로의 경계 방어를 맡은 부대는
4군의 도진의홍의 1만 ,  6군 소조천융경 휘하 모리수포가 2천으로 한양후방을 경계 합니다
이는 후방에 산재해 있는 조선 관/의병의 후방급습을 막고자 함 입니다
 
그리고 한양 왕경성에 주둔하여 한양을 방어하는 부대는
8군의 우희다수가 8천 , 1군 소서행장의 6천 ,  총감군인 석전삼성 직계 2천이 한양 왕경성 방어를 맡았구요
그리고 한양에 주둔한 일본군의 식량이  용산에 있었는데 ..
이곳에  일본의 유명한 칠본창중 하나인 가등가명이 5천 병력으로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파주 벽제관 인근으로 진출한 부대는
6군 소조천융경이 1만, 3군의 흑전장정이  9천 , 9군의 우시수승이 2만 .. 그리고  임화종무가
2천500명으로 선봉에 섰습니다 ,
즉 한양에 집결한 부대원은 총 7만4천500명 이구요,
이 중에  전투에 직접 참여한 부대병력은 4만 1천 500명 입니다 ,
 
반대로 벽제관 전투에 참여한 명군은 선봉에 사대수가 섰고 병력은 3천(고언백의 조선군500명포함)
이후 사대수의 선봉부대를 구원하기 위해 명군 총대장 이여송과 부대장 양원이 직접 3천의 병력을 이끌고 왔으며
차후  이방춘의 철기군과 손수렴의 화기군이 도합 5천이 지원 왔으며  전투에 참여한 병력은 1만 1천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투결과 .. 명군 2천사망 , 부상자 1천 , 조선군 사망자 300명 ,  //  일본군 3천사상자 ...
여기까지 입니다

벽제관 전투도 생각보다 명나라 피해는 크지 않았구요 일본군 사상자도 많습니다

그당시에도 아직 일본군 7만이 한양에 주둔해 있었습니다

행주성떄문에 일본군이 후방으로 남하 했다는건 옳지 못하다고보는데요...

사상자가 그리 많지 않았고 아직도 한양에 일본군숫자는 꽤 많았습니다.

명군이 없었으면 계속 한양이라든지 북쪽 땅에 주둔하고있었을겁니다

어자피 일본군들은 명나라가 참전하고나서 이길 가능성이 없어졋다는걸 알고 있었습니다.
어자피 조선을 친것도 명나라로 가는 길목을 안비켜줘서인데...... 명군을 계속 공격해서

소진시켜봤자 더많은 명군이 계속 증강될것은 불보듯 뻔하기 떄문이죠........

조승훈 3천병력을 평양에서 전멸시키자 이번엔 4만8천이 건너왔고 정유재란떄는

10만이넘게 지원이 왔죠... 일본은 결국 명나라의 물량빨을 감당못할것입니다.

어자피 이기지도 못할 전쟁 계속 자기들 개인사병들 희생시키고 싶진 않앗겟죠

전쟁에서 이겨야 조선을 영지로 받는데 이기도못하면 자기 재산만 꼬라박는거죠

전쟁에서 사용되는비용  병력들까지 전부자기  개인재산들인데

그래서 대부분 일본 장수들은 빨리 화친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햇죠

실제로 조선에 참여한 일본 장수들은 고니시가, 심유경가 사기극을 벌인다는걸 알면서도

도요토미에게 일러바친사람이 없습니다 딱 한명있쬬 고니시랑 견원지간인 가토...

근데 그 가토도 고니시 모함한다며 오히려자기까 혼쭐 났습니다.........

명참전후 일본측은 아에 전쟁을 이길수 없다고 생각했고...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엿죠...... 도요토미만 무슨 명나라를 접수가고 인도를 점령한다는 망상을했지

다이묘들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Centurion 15-07-23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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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병력 : 17만 2400명

육군

경기도(1만 9300명)
전라도 병마절도사 최원 : 4000명
경기도 순찰사 권징 : 400명
창의사 김천일† : 3000명
의병장 우성전 : 2000명
전라도 순찰사 권율 : 4000명
방어사 고언백 : 2000명
순변사 이일 : 600명
경기도 순찰사 성영 : 3000명
조방장 홍계남 : 3000명

충청도(1만 1600명)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옥 : 2800명
평택현 등처의 장수들 : 3000명
각지의 의병 : 5000명
경상좌도(3만 7000명)[편집]
경상좌도 순찰사 한효순 : 1만 명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 → 고언백 : 2만 5000명
의병장 성안 : 1000명
의병장 신갑 : 1000명

경상우도(4만 명)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 : 1만 5000명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김성일 → 조대곤 : 1만 5000명
의병장 정인홍 : 3000명
의병대장 곽재우 : 2000명
의병장 김면† : 5000명

전라도(1만 명)
각처에 나누어 주둔한 조비군 : 1만 명
함경도(1만 200명)[편집]
함경도 병마절도사 성윤문 : 5000명
함경도 평사 정문부 : 5000명
함경도 별장 김우고 : 100명
조방장 김신원 : 100명

강원도(2000명)
강원도 순찰사 강신 : 2000명
평안도(1만 5300명)[편집]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일 : 4400명
평안도 좌방어사 정희운 : 2000명
평안도 우방어사 김응서 : 7000명
의병장 이주 : 300명
소모관 조호익 : 300명
조방장 이사명 : 1000명
수군장 김억추 : 300명

황해도(8800명)
황해도 좌방어사 이시언 : 1800명
황해도 우방어사 김경로 : 3000명
황해도 순찰사 이정암 : 4000명

수군
경상좌도(1만2천 병력와해)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박홍(→병조참판) → 원균† : 병력와해
경상우도(병력와해)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경상좌도수군절도사) → 배설 : 1만2천 병력와해
전라좌도(5000명)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 : 5000명
전라우도(1만 명)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 : 1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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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1만 8700명)
고니시 유키나가(제1군 대장) : 7000명
소 요시토시(부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 : 5000명
마쓰라 시게노부 : 3000명
아리마 하루노부 : 2000명
오무라 요시아키 : 1000명
고토 스미하루 : 700명
승려 겐소

제2군 가토 기요마사(2만 2800명)
가토 기요마사(제2군 대장) : 10000명
나베시마 나오시게 : 1만 2000명
사가라 요리후사 : 800명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1만 1000명)
구로다 나가마사(제3군 대장) : 6000명
오토모 요시무네 : 5000명

제4군 모리 요시나리(1만 5000명)
모리 요시나리(제4군 대장) : 2000명
시마즈 요시히로 : 10000명
다카하시 구로오 : 1000명
아키츠키 다네다가 : 1000명
이토 스케타카 : 1000명

제5군 후쿠시마 마사노리(2만 2700명)
후쿠시마 마사노리(제5군 대장) : 5000명
도다 가츠타카 : 4000명
하치스카 이에마사 : 7200명
조소카베 모토치카 : 3000명
이코마치 가마사 : 3500명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1만 5700명)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제6군 대장) : 10000명
다치하나 무네도라 : 2500명
모리 히데가네 : 1500명
츠구시 고오몬 : 900명
다카하시 나오지 : 800명

제7군 모리 데루모토(30000명)
모리 데루모토(제7군 대장) : 30000명

제8군 우키타 히데이에(10000명)
우키타 히데이에(제8군 대장) : 10000명

제9군 도요토미 히데가쓰(11500명)
도요토미 히데카츠(제9군 대장) : 8000명
호소카와 다다오키 : 3500명

수군(9450명)[편집]
구키 요시타카 : 1500명
도도 다카토라 : 2000명
와키자카 야스하루 : 1500명
가토 요시아키 : 1000명
구와야마 마사하루 : 1000명
구루시마 미치후사 : 700명
도쿠이 미치토시† : 700명
스가이 에몬쇼우 : 250명
호리우치 요지요사† : 850명
스기와카 덴사부로 : 650명

https://ko.wikipedia.org/wiki/%EC%9E%84%EC%A7%84%EC%99%9C%EB%9E%80_%EA%B5%B0%EB%8C%80_%EB%AA%A9%EB%A1%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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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일본군 편제를 보면
각 군 대장 밑에 있는 사람들이.. 그 대장 밑에 있는 가신은 커녕 친족인 경우조차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대장을 맡은 녀석보다(대장급은 주로 히데요시의 직속가신 혹은 상대적으로 친밀하고 밀접한 동맹가문)
영지나 명성이 높은 다이묘급이나 다이묘급 무장이 배속되어있는 경우도 종종 있구요.

몇백명, 몇천명 단위로 그냥 그 지역의 다른 영주, 이웃한 다른 세력끼리 묶어서 군을 형성한게 대부분입니다.
     
오오타니 15-07-23 17:57
   
저 조선군 편제는 아마 1593년 1월 실록으로아는데 솔직히 부풀려진감이 없지 않아 잇죠 애초에 조선군 군적은 믿을게 못되서...., 왜란전에 전쟁낌새가 있어서 군적감사를나가니까 있어야할병사,무기가 없는게 태반이엿죠 그리고 kbs 역사스페셜 봤는데 1594년이니까 유성룡때도 군적상으론 15만대군이 있엇어 유성룡이 실제로 확인해보니까 80~90프로는 없는병사라고 나온적있습니다 1593년 2월 실록을 보면 명나라 4만대군 보급도 1달밖에 못되서 보급을 힘들어하는 조선인데  2월 조선실록만 보더라도 보급안된다고 아우성입니다.조선군까지 17만이 있으면 정말 보급불가입니다..... 애초에 보급우선순위가 중국군인데 중국군조차 저상황인데 10만이넘는 조선군은 어떻게 보급하겟습니까... 게다가 경상도에만 8만대군이라니.... 경상도쪽병력이너무 비현실적입니다. 나중에 도원수 직위에 오른 권율이 지휘한 병력이 최대 1만 5천이엿는데 경상도 지방장수인 박진 휘하 병력이 2만 5천이질 않나..... 저 조선군 군적은 1593년 1월 자료인데 현실성이 그닥 없습니다...  그리고 왜란내내 경상도 쪽은 8만대군이 있엇다는건데 일본군그\가 이럴타할 대규모 충돌도 없엇다는게 의아하죠.. 실제로 보급이 가능햇는지도 의문이고...
          
Centurion 15-07-23 19:39
   
잘못 아신거라니까요.
무슨 조선군이 어디 한군데 몰려있는 줄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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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나고 2년 후인 1594년 유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을 보면 현역군인 수는 7920명이었다. 전투에서 병력을 다수 상실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조선이 유지한 현역군인 수는 이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송복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中)

비교자료는 ‘경국대전’(1469년)에 기재된 중앙부를 지키는 병사의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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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은 이 숫자가 7560명이라고 기록했다. (즉 한양을 지키는 중앙군을 의미)

유성룡의 상소문에는 현역군인 7920명 중 중앙을 지키는 병력이 4640명이었다.
이로 미루어 임진왜란 발발 120여년 전에는 현역군인이 약 63%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이 비율을 적용하면 조선시대 현역군인 수는 1만2900여명이라는 추계가 나온다.

유성룡의 상소문을 보면 현역군인 외에 명단에 기재된 군인은 4만명 정도였다. 또 보(保)나 봉족(奉足)으로 불린 보조군은 12만명이었다. 그러나 율곡 이이가 전쟁 전 상소문을 올려 보고한 것처럼 조선 군적에는 허수가 너무 많았다. 실제 동원 가능한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

유성룡은 1592년 8월 5일 보고서에서 “(평양~안주 사이의 요충지인) 순안의 총대장이 거느린 군사가 수천명밖에 되지 않는다”며 “그것도 과반수가 쓸모 없는 병사”라며 한탄했다.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040608033376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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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말도 안되는게. 조선의 현역 타령을 하는데..

전라도 근왕병 수가 5만명이 넘고, 이순신의 수군 병력이 1만명이 넘는데..
이런거 다 제쳐두고 그냥 중앙군에 얼마 밖에 없더라 이 소리임.

신립이 깨먹은 5~8천 병력,
함경도, 평안도에서 내려온 북방군 병력들은 아예 포함도 안된 통계임.

이것만 다합쳐도 최소 2~3만 이상..

물론 왕을 수비할 조선의 중앙군 5위와
궁궐수비에 속하는 병력 숫자는 편제상 1~3만 가량 되어야 되는데,
이게 개판이어서 나중에 집계를 해보니 불과 수천명이더라 이 소리임..

지방의 상비군 격인 진관에 배치된 군 병력이나 동원된 병력들은 감안안한 집계임.

즉, 지방군이 서울로 올라와 번상(돌아가며 근무)를 해야 되는데, 전시상황이라..
지방군이 왕이 있는 곳까지 와서 번상할 처지도 아니었고.. 자기 고향 근처에서
의병이나 관군형태로 싸우기도 바쁜 상황이라 발생한 이야기임..

(뭐, 물론 소집해도 안갈 사람들도 많았겟지만..)
          
Centurion 15-07-23 20:25
   
그리고 보급 문제가 나왔는데..

조선군은 대부분이 의병 및 지방군이었습니다.

이게 뭘 뜻하냐면.. 요즘으로 치면 향토방위사단에 소속된 예비군이란 말이죠.

보급요??

예로 들자면 그 동네에서 농사짓고 밥해먹고 살던 사람들 모아서,
전쟁했다는 소리입니다.

조선의 식량 운송은 전적으로 해로수송에 의지했습니다.
세금으로 받은 쌀들을 배로 운반했다는 소리죠.

명나라 군 먹여 살리는게 문제가 된게, 이 쌀들의 육로수송이 원활치 않아서 입니다.

반면, 조선군은 그냥 예를 들어, 경상도면 경상도, 전라도면 전라도..
그 해당 지방 관청에서 쌀을 세금으로 받아 보관해뒀던지..
지역 주민들에게서 징발을 했든, 사들였던, 자기가 갖고 오게하든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본래, 대군을 원정보내는게 어려운게 이 식량과 무기 등 보급품을 멀리서 운반해야 되기 떄문인데.. 지방군들은 그 보급을 자기 고향에서 해결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보급 문제가 자체해결되는겁니다.

물론, 전쟁으로 농민들이 농사짓기 힘들어서 도망치거나 해서 식량 자급률이 떨어지기도 하고,
일본군이 세금으로 쌀을 걷어들여, 농민들이 의병으로 궐기하는 상황이 되기도 하지만..

님이 생각하듯.. 조선 중앙에서 각지의 지방군에게 쌀을 보내는 상황은 커녕...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순신의 전라도 수군조차 왕이 있는 중앙으로 식량을 실어보냈죠.
          
Centurion 15-07-23 21:12
   
근데 제가 올린 명단에 박진은 안나옵니다만..??

박진은 개전당시 밀양부사였고,
훗날 경상조도병마사, 경상우도병마사, 황해도 병마사 등에 임명되었다가,
명나라 장수 누승선의 행패로 인한 가슴뼈 골절 등 구타 후유증으로 사망하는 인물이죠.

경주성 전투 당시 16개 읍의 병력 수만명을 모아 경주성을 공격했던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소 병력 1만 이상 보유했죠.
               
오오타니 15-07-23 23:26
   
선조 34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월 11일(병인) 15번째기사
각도에 있는 병마의 숫자

보(答報)하면서 헤아려 개진한 것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 강화부(江華府)에 주차(駐箚)한 전라도 절도사 최원(崔遠)의 군사 4천 명, 경기도 순찰사 권징(權徵)의 군사 4백 명,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3천 명, 의병장(義兵將) 우성전(禹性傳)의 군사 2천 명, 수원부(水原府)에 주차한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의 군사 4천 명,【이상은 왕경(王京)의 서쪽에 있으며 경성(京城)과의 거리는 1일 정(程)이다. 】 양주(楊州)에 주차한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의 군사 2천 명, 양근군(楊根郡)에 주차한 의병장 이일(李軼)의 군사 6백 명,【이상은 왕경 동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1일 정이다. 】 여주(驪州)에 주차한 경기 순찰사 성영(成泳)의 군사 3천 명, 안성군(安城郡)에 주차한 조방장(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의 군사 3백 명【이상은 왕경에 있으며 1일 반 정이다. 】 충청도 직산현(稷山縣)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이옥(李沃)의 군사 2천 8백 명, 평택현(平澤縣) 등처의 장관(將官)들이 각각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는데 합해서 약 3천여 명, 각처의 의병이 각각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는데 합해서 약 5천여 명이다. 【이상은 왕경 남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2∼3일 정이나 4∼5일 정이다. 】
경상좌도 안동부(安東府)에 주차한 본도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의 군사 1만 명, 울산군(蔚山郡)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박진(朴晉)의 군사 2만 5천 명, 창녕현(昌寧縣)에 주차한 의병장 성안(成安義)의 군사 1천 명, 영산현(靈山縣)에 주차한 의병장 신갑(辛碑)의 군사 1천 명, 경상우도 진주(晉州)에 주차한 본도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의 군사 1만 5천명, 창원부(昌原府)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김시민(金時敏)의 군사 1만 5천 명, 합천군(陜川郡)에 주차한 의병장 정인홍(鄭仁弘)의 군사 3천 명, 의령현(宜寧縣)에 주차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군사 2천명, 거창현(居昌縣)에 주차한 의병장 김면(金沔)의 군사 5천 명,【이상은 왕경의 남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7∼8일 정이나 12∼13일 정이다. 】 전라도 순천부(順天府) 앞바다에 주차한 본도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수군(水軍) 5천 명,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의 수군 1만 명 및 각처에 나누어 주둔한 조비군(措備軍) 1만 명,【이상은 왕경 남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8∼9일 정이나 13∼14일 정이다. 】 함경도 함흥부(咸興府)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성윤문(成允文)의 군사 5천 명, 경성부(鏡城府)에 주차한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의 군사 5천 명, 안변부(安邊府)에 주차한 별장(別將) 김우고(金友皐)의 군사 1백명, 조방장 김신원(金信元)의 군사 1백명,【이상은 경성 북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15∼16일 정이나 24∼25일 정이다. 】 강원도 인제현(麟蹄縣)에 추자한 본도 순찰사 강신(姜紳)의 군사 2천 명이다. 【왕경 동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4일 정도다. 】
평안도 순안현(順安縣)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이일(李鎰)의 군사 4천 4백 명 내에 사수(射手) 1천 2백 80명, 법흥사(法興寺)에 주차한 본도 좌방어사 정희운(鄭希雲)의 군사 2천 명 내에 사수 2백 23명·포수(砲手) 50명, 의병장 이주(李柱)의 군사 3백 명 내에 사수 70명, 소모관(召募官) 조호익(曺好益)의 군사 3백 명【이상은 평양부(平壤府) 동쪽에 있으며 본부와는 1일 정이다. 】 용강현(龍崗縣)에 주차한 우방어사 김응서(金應瑞)의 군사 7천 명 내에 사수 7백 70명, 조방장 이사명(李思命)의 군사 1천 명 내에 사수 90명, 대동강 하류에 주차한 수군장[舟師將] 김억추(金億秋)의 군사 3백 명 내에 사수 1백 20명,【이상은 평양부 서쪽에 있으며 본부와의 거리는 1일 정이나 반일 정이다. 】 황해도 황주(黃州)에 주차한 본도 좌방어사 이시언(李時言)의 군사 1천 8백 명, 재령군(載寧郡)에 주차한 우방어사 김경로(金敬老)의 군사 3천명, 연안부(廷安府)에 주차한 본도 순찰사 이정암(李廷馣)의 군사 4천 명이다. 【이상은 왕경에서 서북쪽, 평양부에서 남쪽에 있으며 왕경과의 거리는 7∼8일 정이며 평양성과의 거리는 1∼2일 정이나 4∼5일 정인데 모두 대동강 남쪽에 잇따라 있다. 】
위의 각처 군마(軍馬)는 합계가 17만 2천 4백 명인데, 적의 향방에 따라 기회에 따라 진격하므로 주둔하거나 가는 곳을 확실하게 지적할 수 없으며 또한 군사의 수효도 첨가되거나 나뉘어져서 많고 적음이 일정하지 않다

님이 올리신 총병력도 17만 2천 4백이라나오고

1593년 1월 15일 실록에 집계된 조선군도 17만 2천 4백만이라 나옵니다

아마 조선군 총병력은 이 실록에서 근본이 된게 확실하다봅니다

경상도 병력에서 조선군이 이끄는 장수 이름만 몇몇 바꼇지 병력수도 똑같고

다른 곳은 병력과 지휘병력과 장수가 일치합니다.

여기서 박진이 2만 5천 , 김시민이 1만 5천이라나오는데 지방 장수가

후에 도원수가된 권율보다 지휘병력이 많습니다...........

이런 병력들은 자기가 가지고있는 병력에다가 근처 백성들까지 병력에 낑겨넣었을

확률이 크지요

그리고 아무리 지방군의  그동네에서 해결된다해도.. 전쟁통에 저정도 병력을 다시

징집한다는게 쉬운것도아니고 전란중에 가장 피해가 컸던 경상도에만 8만 대군이 있다???

이상한일이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왜란중 파괴된 경작지가 전체에 경작지에

70프로나 됩니다.. 게다가 왜놈들은 살인적인세율떄문에 대부분

백성들이 농사짓길 포기하고 산으로들어가거나 아무튼 도망갑니다 그런상황에

17만 대군의 보급이 된다구요??? 솔직히 불가능하다고 보는데요

농경지 절반이상을 못쓰게 된데다가 왜놈들의 살인적인 세율때문에 있는 경작지마저도

대부분 백성들은 농사 짓길 포기했습니다. 정상적인 땅이야 전라도 밖에 없는데

전라도에서 조운선으로 계속 명쪽 식량셔틀했습니다.

17만이 보급될려면 중앙에 어느정도 도움이 있어야하고  조선 평시에도 보급하기

어려울정도에 병력입니다.. 게다가 당시 명군 4~5만도 있어서 중앙쪽 도움은

받기가 불가능햇어요

제가알기론 왜놈들은 세금을 못내면 참수를해버린걸로압니다.

게다가 조선 군량미를 같은경우 평소에 용산창에 전부 모와둿는데 이것마저도

왜군들이 점령하엿죠...... 그리고 경상도어 저 대군은 8만이나 있으면서

이럴타할 전공조차 없습니다. 하물며 제 2차 진주성전투때 진주성을 도와주거나

왜군 후방을 공격하거나 부산을 공격하거나했어야하는데 당시 일본군이 모두

진주성으로 빠졋는데 뭘햇는지 알수가 없죠.. 그래서 군적에 뻥튀기가 어느정도 있다는겁니다

선조실록 40권 26년 (1593년 7월 16일)
창의사 김천일 3백명 , 충청병사 황진이 7백명, 경상우병사 5백명 의병 복수장 고종후가 4백명 부장 장윤이 3백명
의병장 이계련이 1백명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이 3백명 의병장 민여운이 2백여명을 거느리고와 초유사 김성일
목사 서예원과 김준민 이종인등과 수성을 논의 하였다

2차 진주성 전투당시 진주성으로 도움을 온 병력들 양인데 하삼도에서 온 병력이

합쳐서 고작 수천밖에 안됩니다... 군적상으로는 하삼도에 10만의 조선 육군이

경상도에만 7만7천에달하는 육군이 있음에도 불구하구요

결국 이 진주성전투로 군민 6만이 학살 당합니다..........

실제 경상도에 7만7천이나되는 육군이 있었다면 어떤식으로든 진주성 전투때

도움을 가는 액션이 있었어야 정상입니다... 아무것도 한게 없죠.

 
그리고 전라도 근왕병이야 전쟁이 터지가 급격히 징집된 군사들이겟지요...

하삼도에 5만의 근왕군을 모집햇는데 경상 충청도 에서 징집된게 1만이고

나머지 4만은 다 전라도에서 징집됫습니다...... 아무튼 훈련도 안된 오합지졸은

잇으나마나지요 고작 2천도안되는 왜군들에게 털리고 여기에 들어간 군수물자나

보급된쌀 다 내팽개치고 도망쳣지요.......

긍집징된 병력들은 차라리 도움이 안됩니다만..
                    
Centurion 15-07-24 06:30
   
글쎄요.

조정에 올릴 장계에서까지
굳이 병력을 뻥튀기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예를 들어 지적하신 김시민 장군이
굳이 자기 휘하 병력을 부풀릴 인격의 인물로 보시는지?

물론 진주성 싸움에서 경상좌우도의 그 7~8만의 액션은 없었죠.

하지만 그 외에도 저기에 나열된 중에는
실제 병력과 근접한 규모의 군대들도 많습니다.
일부가 허실이 있다고 해도, 저게 모조리 뻥은 아니란 소리죠.

그리고, 조선은 인구가 적은 나라가 아니죠.
17만이라는 숫자가 그리 인구에 비해 못동원할만큼 많은 규모도 아니고,
전쟁으로 인해 원한과 피폐함 등 백성들의 전쟁 참여에 대한 동기부여도
이뤄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비슷한 상황이 고려 말기에도 있었죠. 그 때에도 최영장군이 20만 대군을 거느렸죠)

그리고, 왜군의 경우 전쟁 초기 상당수 병력이 북방으로 진격해 한양에 있었기 떄문에..
후방에는 님도 알다시피 많은 부대와 병력이 남아있지 않았고,
그나마도 각 도로 퍼져 있었죠.

즉, 전쟁 극초반과 달리,
그제서야 병력을 소집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고,
경남지방은 역사적으로 인구가 많은 지역입니다.

애시당초 식량난이라고 해도, 중일전쟁 때처럼.. 일본이 점과 선을 장악했지.
면을 장악한 상황이 아니었고, 그 살인적인 세금정책 때문에 반감을 사서,
그들이 의병으로 궐기하거나 가담해 해당지역에 대한 해방구를 만드는 상황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죠.

이런 부대들은 크게 의협심이 강하지 않으면 무리한 이동이 없을 수도 있고,
특히 관군 지휘관들도 전쟁에 자신이 없어 소극적인 행동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라도 근왕병을 이끈 관군지휘관들이 병력많이 거느렸다고 훌륭한 지휘를 했던것도 아니구요.

물론, 예외적으로..
박진 같은 경우는 관군 지휘관치고 상당히 용감한 지휘관이죠.
전쟁 초기에도 삼량진 근방에서 왜군과 싸웠고,
후퇴는 했어도 계속 싸움을 걸고 탈환을 시도하는 지휘관입니다만..
다른 관군 지휘관들이 다 그랬던 건 아니죠.

2차 진주성 싸움 때에도 무려 10만이 집결한 일본군 앞에 의병장들조차
행동을 망설이고 증원을 포기하는 상황이었고..
(이때 상황은 이미 왜군 주력이 한양에서 내려와  경상도 일대에 주둔해
강화 협상을 벌이며, 진주성 공격을 예고하던 상황이죠.)

호남의병들 중에서도 들어온 부대들도 전군을 이끌고 들어오지 못하고,
소수의 병력만 거느리고 들어온 케이스가 많죠.

그리고, 님도 위에 써놓은거 보면 잘 아시는듯한데..
일본군 다이묘들도 히데요시의 야망과 달리 자기 생각하기 바쁜 사람들이었고,
임진왜란 초기와 정유재란 때의 초반 액션을 제외하면 왜성 쌓고 지키기에나 몰두했죠.

그러니 보급 잘되는 남해안 왜성에 눌러앉아 서로 포위당해 죽지 않을 정도만 서로 도와가며 버티던 상황인 것이고.. 그 상황에선 사실상 경상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조명연합군 관할로 수복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죠.

진주성 전투 무렵에도 명나라군은 경상도에 이미 진출해있었고 말이죠.
물론 진주성 구원에 안나서긴 이 쪽도 마찬가지지만..

애시당초 진주성을 비우는게 당시 명나라의 입장이었고,
일부 조선군들도 개죽음하느니 자결하겠다며 안간 상황이죠.

어쨌든 2차 진주성 전투만으로 조선군이 허수라고 하긴 어렵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병력 운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저게 만약 1만5천이라 쳐도,
3교대로 굴리거나, 1인 전투 복무, 2인 보조(농사나 경제적 활동, 훈련) 이런씩으로
굴렸을 가능성도 있겠죠.

서애집에 나와있는걸 보면 서울에 번상한 병력이 무려 7교대인 경우도 있더군요.

만약 7교대로 돌아가면 7~8만 병력이 있다쳐도, 현역은 1만명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즉, 인적자원은 많아도, 전쟁 뒷바라지하는 둔전을 짓거나,
교대로 휴식 또는 기타 경제적 활동 및 잡무에 동원되는 병력이 상당히 많았을 수도 있단 소리지요.

군행정과 예산이 쪼달리면.. 지금의 북한처럼 병력이 훈련보다 자급자족에 동원되거나,
심지어 휴가를 보내서 부대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시키는 경우가 벌어지는 것과 같은..
좀 막장스러운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고..

이건 그나마 전라도에 근간을 둔..
상대적으로 상황이 양호한 이순신의 수군조차도
그런 경제활동을 상당히 벌여 예산과 물자를 조달했죠.
                    
전략설계 15-07-24 11:27
   
남자에게 칼을 쥐어주면 병사가 됩니다.
그렇다고 다 똑같은 병사가 아니죠.

훈련이 되어야 하고,
지휘체계가 잡혀 전투시 안 도망가고 싸워야 하고,
집에 안 가고 장기간 전장에서 전투에 임해야 됩니다.
이래야 병사입니다.

임란 개전초 상주에 4만이 모였는데,
서울에서 지휘관이 안 내려왔다고 지들끼리 흩어져버린 남자들..
그게 병사인가요?

5만명이 올라와서 2천 와키자카군에 줄행랑 친 그 남자들..
그게 병사인가요?

조정 장계가 거짓말이겠냐고 하시는데..
그런 남자들 숫자만 딸랑 적은 것입니다.

일본군이 15만이고 조선군이 얼마다고 이런 곳에 비교할 때는..
최소한 병사라고 볼 수 있는 주력군대의 수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지휘관 안 내려와서 흩어진 남자들..
2천에 도망간 5만 남자들..
매번 이런 토론이 있을 때마다 그런 남자들 숫자 들어밀이서..
'우리나라 만세' 자위일 뿐 무엇이 달라지나요.

17만이 있다면서..

몇만 병사들이 있다는 경상도에서 방어선도 하나 치지 못하다..
신립이 한달간 소집한 병력이 1만,
걸어서 한달이면 부산서 한양 갈 기간으로 전국에서 한양으로 병사가 모일 시간임.
최소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강원도 관서쪽은 소집이 되고도 남을 시간임.
중앙군은 얘기할 것도 없고요.

그럼에도 오합지졸 1만이라면 이 나라는 병사가 없는 나라입니다.

임진강에서 1만 내보내다 규슈 일개 다이묘 가토에게 깨져..

평양성 탈환한다고 1만 내보낸는데.. 성밖에서 몇 죽이다 성문으로 적군 나오니까
줄행랑치다..
명군이 와서 불랑기포 쏘고 절강병법이니 해서 평양성 수복해..
(전투 과정이 징비록에 자세히 나옴)
벽제관 전투때도 조선군은 보이지 않고..

정유재란때 전국을 쑥대밥을 만들어도 17만은 보이지도 않고..
천안에서 왜 우군을 막아선 것도 명군이지.
조선군은 어디에서도 안 보임..
정유재란은 적이 넘어올거 이미 다 예견하고 군대 준비할 시간도 많은데..

서울로 올라오는 왜 우군 6만을 막아달라고,
선조가 평양의 명군에게 부탁하는 국면에서.
17만 대군 어딨습니까? 전쟁중에 한번도 안 보입니다.
장계에만 있습니다. 인용할 가치가 있습니까?

적을 몰아낼 수 있는 전쟁의 막바지
울산성, 순천왜성 전투에서 조선군 1만 규모입니다.

왜적은 전부 남해안에 죽치고 있는데.
전선이 아닌 후방인 경기도, 충청도, 평안도, 함경도
장계에 100만 대군이 있으면 머합니까?
중요한 전투에서 쪼작 1만 단위로 나가는데..

실제 전투에 없는 글로만 존재하는 병사들, 그냥 남자들일 뿐입니다.
책에 있는 숫자는 의미가 없고요.
실제 전투에서 어느 정도 전투력 있는 조선군 병사 몇만이 어디 성을 공격했다든가..
야전을 벌렸다든가.. 이게 병사지요.
그러고 적은 365일, 24시간 전쟁에 임하는데.
한번 싸우고 집으로 가버리는 것도 군대라고 할 수 없죠.

2천에 싸우지도 않고 와해되는 5만을 그냥 병사로 보는 것에 경악하네요.
2천은 병사고 5만은 그냥 남자들입니다.
                         
Centurion 15-07-24 17:05
   
앵 근데 그걸 왜 저보고 따지십니까?
제가 조선을 문약하게 만든 주범도아닌데..
지휘관들이 장계로 올려서 이 사람들 군인 맞아요~하고 올렸는데 그걸 어쩌라는건지.요?

글고, 아무래도 영화 300 보고 울컥하신 거 같네요.

"너의 직업은 무엇이냐?"
"목수요" "대장장이요"
"너의 직업은 무엇이냐..?스파르타인들이여~~~~"
"너희들의 직업은 무엇이냐~!(아우!아우!아우!)"
"아무래도 우리쪽 병사가더많은거같군.."

그리고, 혹시 대학시절 데모 같은거 해보셨나 모르겠는데..
개인적 경험입니다만, 군중심리라는게 경험을 해보면 참 웃겨요.

소싯적에 미국 대사관 앞에 모여있던 사람이
시위대가 4~5만명인가 그랬고, 경찰은 8천명이었나 그랬는데..

어떤 철부지 통일선봉대란 놈이 경찰한테 뭘 던지며 시비를 걸었는데,
빡친 경찰들이 그야말로 파도와 같은 기세로 달려오는데..
제 앞 쪽에 있던 한 2만명쯤 되는 사람이 도망치는데...
그야말로 쓰나미가 사람을 덮치듯이 시꺼먼 경찰들이 달려오고,
알록달록한 민간인 복장의 시위대가 순식간에 삼켜버리듯 없어집디다.

물론 못 도망치고 밟히거나, 경찰들 속에 갇힌 사람들보다
뛰어서 도망친 사람이 더 많은데..

그 기분 느껴봐야 알텐데..

순식간에 2만명정도가 증발하고,
대열 중간쯤에 있는 제 앞쪽에 경찰들 달려오는게 보이더군요.

그래서 우리 학교 사수대장이
남학생들 나와서 막아야 된다고 큰소리쳐서 사람들 해치며 몇발자국 앞으로 나갔는데..

여자들이 경찰 군홧발에 밟히는게 보여서
앞으로 걸어나갔더니, 불과 몇초만에..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도 없네요.

그거 아실랑가?
자원하는 사람 한발짝 앞으로 해야 되는 상황인데..
다들 한발짝 뒤로 빠져서 자원자가 된 기분..

눈 앞에 서울제1기동대 3중대였나? 2중대랑 딱 대면을 했는데..
(사실상, 도로가 넓다해도.. 최선봉 서울 1기동대 2,3중대 하나만 최선봉이었기 때문에..
 1개중대에 2만명이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경찰 선봉의 네다섯명한테서
쏟아지는 군홧발과 방패찍기를 가드자세로 막고 쓰러지지 않고
한 1 분간 3~4 걸음 정도 밀렸는데..
얘네들이 절 쓰러뜨리고 계속 폭풍진격해야 되는데 못쓰러뜨리니 못밀고 가는거죠.

웃긴게 ∧ 모양의 최선두에서 경찰 공격을 몸빵해버리니..
그제서야 경찰들 돌격이 멈추고.. 시위대도 정신 차리고 경찰과 몸싸움 시작.
그러면서 전선이 안정되더군요.

이게 실제 전투양상과 비슷한 겁니다.
전쟁과 평화라는 영화를 보면, 러시아 군대가 막 도망치니까
남자 주인공이 쓰러진 깃발 들고 병사들 독려해 다시 싸우러가죠.

인간이라면 대부분 목숨이 아까운 줄 압니다.

게다가, 못미더운 지휘관 밑에서 못미더운 지휘통솔하는 사람들 밑에서
자기 목숨 아까워 할 사람들은 더 많구요.

조선 문관이든 무관이든 왜군 앞에서 알아서들해를 외치며
줄행랑 먼저 치는 인간들도 많았고 그런 공포는 전염이 쉽게 일어납니다.

싸워보지 않아도,
앞쪽에 몇놈이 뒤돌아 줄행랑 치면 멀쩡한 뒷사람들도..
같이 따라 도망치는게 그 상황에서의 군중심리에요.

말 그대로 패퇴하는 상황이라지휘도 안먹히고, 지휘 자체도 병맛인데..
전쟁 처음 해보는 오합지졸들이 묵묵히 용감하게 잘싸울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죠.

그래서 제대로 된 군인을 양성하는데 오래 걸리는겁니다.
스파르타 용사들이 하루 아침에 태어납니까?
어릴 때부터 그렇게 혹독하게 키워지는겁니다.

소위 대학 사수대 중에서도 최정예라고 불리우는
남총련 계열 녹두대, 오월대 이런 애들 보셨거나, 무용담 들어보셨나 모르겠는데..

얘네들은 전라도 광주 출신들이라 정부와 경찰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그 적개심으로 대학 들어가면, 소위 전투조직화 되서
산에 올라가 쇠파이프 훈련도 하고, 무수한 시위에서 철통같은 규율 속에서 키워집니다.

얘네들이 어떤 수준이냐면..

딴 대학 사수대 수백명이 못막아서 뒤로 밀렸는데..
모 대학 정문이 경찰들한테 뚫리고 뒤로 밀렸답니다.

뒤에서 도시락 까먹던 남총련 사수대 애들(녹두대였나) 50명이 쇠파이프 집어들더니.

"뒤로 머리 돌리는 놈은 나한테 먼저 대가리 깨질줄 알아라"

사수대장이 그렇게 외치면서 시작하는데..
50명이 경찰 수천명을 미친듯이 난타해서.. 경찰들 수천명이 다시 밀려났습니다.
(물론 이것도 따지고 보면 대학 정문 폭이 고만고만 하기 때문에, 경찰 최선봉 1~3개 중대가 뒷걸음질 치니 뒷부대들도 자연스레 같이 밀린 셈..)

다른 사수대는 뭐 경찰들 안죽을만한 부위를 쇠파이프로 때리는데..
얘네들은 경찰 죽일듯이 위험한 급소를 때리며 사실상 경찰을 죽이려듯 하는게 특징이라더군요.

이게 거의 사상자도 안나오는 폭력시위도 이 모양인데..
(사망자는 몰라도 부상자는 좀 나옴)

진짜 사람이 죽고 목날라가고 꼬치가 되어버리는 전쟁터에서..
전쟁경험도 없는 무지렁이 백성들 모아놓고 잘 싸우길 바라면 그게 더 이상한 겁니다.

'태극기를 휘날리며'에 보면 깃발부대라는 부대가 나오죠.
거기에 국군이 겁먹고 후퇴하는 장면도 나오구요.
나름 전쟁경험 많은 사람들도 답안나오는 상황이면 뒷걸음질 치는게 전쟁 상황입니다.

더 버티면 혼자 고립되어 죽는 상황 밖에 안되기도 하고요.
이게 님은 하나 뿐인 목숨이 걸린 일인데, 쉽다고 생각하시는지?

제 경험상... 죽는게 아니라, 단지 경찰서에 잡혀가는것도
인생에 빨간 줄 갈까 걱정되는 시위에서도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걸 많이 봣는데..
목숨이 달린 일인데.. 그런 용기가 쉽게 나오는 줄 알면 이상한거죠..

만약 님이 어느날 예비군 갔는데..
거기서 어떤 배나온 동대장 아저씨가 여기서 죽을 각오로 싸워라고 하는데,
그 동대장 아저씨가 다음날 안나왔다고 칩시다.

거기 모인 수백명의 예비군들이
"동대장 어디 갔어?"  웅성웅성하다가 다들 흩어지는거 백프롭니다.

동대장이 안나왔으니 왠 듣도 보도 못한 예비군 아저씨가
"내가 동대장 대신 지휘하겠소. 당신들은 날 따르시오~"하는
드라마틱한 상황은 나오기도 어렵고, 사람들이 따르지도 않을겁니다.

그게 실제상황인거죠.

반면, 적군은 오랜 전쟁경험과
확실한 주종관계, 서열, 충성, 복종관계를 갖고 온 프로페셔널한 직업군인들입니다.

일본애들이 그렇게 열심히 창을 휘두르는 것은..

내가 사람 대가리 몇개 따면
'내 석고가 오르겠지.', '내 신분이 오르겠지'라는
사회 경제적 출세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게 당시 봉건제적 전통에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군~! 오야가타 사마!"을 외치며
그렇게 주군을 지키는데 혈안인 것은..

자기가 모시는 주군 대가리가 따이면,
그 밑에 있는 모든 가신과 병사들의 경제적 기반이 적한테 뺏기기 때문인겁니다.
그 부하들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거나 일족이 몰살당하구요.
(차라리 그럴 바엔 멀쩡할 때 항복하고, 열심히 적장을 기쁘게 한다는 마음가짐 또한 얘네들 종특..)

얘네들은 그게 백년동안 전국시내 내전 상황에서 몸소 겪고, 귀로 듣고
마음에 새긴 애들입니다.

반면, 조선군은 그냥 예비군 동대장한테 소집명령 받고 모인 예비군들하고 딱 비슷하구요.

어쨌든 님이 생각하듯 당시 상황이란게 만만찮은 겁니다.
조선은 스파르타 전사를 키우지 않았어요.
                         
전략설계 15-07-25 11:10
   
2006. 6. 23.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제목이
"8천 조선군, 16만 대군에 맞서다"로,
17만이란 병력은 글자로 있는 병력입니다.
이 사람들 하나 하나에 칼이나 한번 쥐어줬나 싶고요.

전사에도 그 병력들이 야전에서 이동하고 주둔하고 전투하는 걸 보기 어려워..
상식이 있다면 군적부상 싸울 수 있는 남자수로 이해해야 됩니다.

전에 S모가 실록에 있다고 배껴와서 세조때 병력 40만을 얘기하든데.
이거 믿는 사람 있나요.
싸울 수 있는 남자의 수(군적부)와 정규병사는 별개의 것인데..

이번처럼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책에서 배껴서
군적부를 마치 정규병사, 정규군대인양 어거지 피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디서 세조때 조선군대가 40만이었다고 떠들고 다니면 누가봐도 그건 헛소리입니다.
군적부에 있는 수치를 정규군대로 둔갑시키지 말라는 겁니다.

군적부 수치는 군적부,
전쟁에서 지휘계통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행동하며
실제로 싸우는 정규군대는 정규군대일뿐 둘이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말을 안해도 알아먹을 수 있는 것을
이 곳에선 일일히 설명해줘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 발제글 보면..
명군 얘기를 하고 있고, 댓글을 일본군을 얘기합니다..
임란때 조선땅에 들어온 명군, 일본군,
전부 365일, 24시간 전투에 임하는 정예군대입니다.

남들이 주력군대를 얘기하는데, 혼자 어디 군적부상 있는 병력 수치를 가져와서
들이밀어 반박하는 것은 사고의 문제입니다.
반박을 해도 남이 말하는 대상의 수준에 맞춰서 반박을 해야 합니다.

명군이나 일본군의 숫자는 실제 조선땅에 와서 24시간 전투에 임하는
주력부대의 숫자라..

장계에 그런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져다 여기서 반박자료로 삼은 것은 님 생각 아닙니까?

조선도 숫자적으로 충분한 병력이 있었다고 반박하고 싶다면
명군, 왜군와 같은 주력부대임을 입증해야죠.
남은 주력부대를 얘기하는 것인데, 이런걸 어거지 피운다고 합니다.

장계에 있는걸 어쩌라고요?
그걸 반박자료로 삼은 사람이 누군가요?

명군, 왜군은 첨부터 난 병사인듯 말씀하시는데..
규슈의 20만석짜리 다이묘들인 가토, 소서가 2만여 군대를 상시 유지했겠습니까..
250을 곱하기 해도 5천명인데.

애들도 전쟁한다고 농민들 쥐어 짜낸 것이지..
평시에 2만이겠습니까..
명군도 마찬가지고요.
윤관이 17만 거병해서 여진정벌할 때.. 그 병력들이 죄다 직업군인이겠습니까..
고려가 광군 20만을 거란침입시 북계로 보냈다는데. 그것은 시작부터 농민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365일 24시간 전투에 임하는 주력군대입니다.

조선은 스파르타 병사를 양성하지 않았다고요?
가토, 소서의 2만여 병사들이 날 때부터 병사로 양성됐다는 얘기인가요?

군적부상 병력이란거 다 알면서..
지기 싫어서 군적부 들이밀다. 인제 스파르타가 아닌 평범한 농민들이라고요.

대부분이 전쟁도 뛰지 않은 그냥 농민들이었습니다.
자기 고향에서 전투 벌어지면 좀 뛰었을지는 모르겠네요.
상주 4만명, 전라도 근왕병 5만명은 한번 모였다가 해체한 후 그 뒤로
그런 규모로 소식이 없습니다.

똑같은 시기인 1593년 유성룡이 올린 시무차자를 보면..

"유성룡이 왕에게 올린 ‘시무차자’에 의하면 당시 군적 상의 전체 군인 수는 145,620명, 이중 정로위, 갑사, 별시위 등의 정예병은 23,620명, 그런데 정예병 중 전투원은 7,920명, 나머지 15,700명은 전투원을 지원하는 보인, 즉 비전투원이었다. 그나마 8,000도 안되는 전투원이 항시 국방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1년에 3개월만 근무하고 교체되었다. 즉 평상시에는 2천의 정예병만이 국방을 맡았던 셈이다."

명군이나 왜군처럼 365일 전투에 임할 정예군대가 2천이라고, (수군 제외)
1593년 전쟁중에 유성룡이 왕한테 보고했네요.
                         
전략설계 15-07-25 11:46
   
고려 2군6위 병력도 적다고 하는데.
1령당 1,000명씩,
45령 총 4만 5천명입니다.

2군6위 중앙군은 자식에게 군인신분이 세습되는 전문 군인집단이었습니다.
그게 족히 4만5천이라..

고려보다 땅땡이도 크고 인구도 많은 조선이 가난해서 병력을 각출못했다
이건 고려를 보면 변명이고.

고려의 귀족은 사병이라도 있어 전쟁나면 귀족이 바로 군대가 되지만,
조선의 양반은 경제력을 쥐면서 나라의 곳간은 비게 하면서,
평시 글자나 보다 놀고 먹다가 막상 전쟁 터지면 상당수가 전쟁을 회피하는
양반계층 때문이라고 이유를 분석해야지.

군적부 들이대면서 조선도 병력이 충분했다고 '우리나라만세' 부르는 것은
사실이 아닌 어거지일 뿐입니다.
                         
Centurion 15-07-25 16:17
   
일본군이나 명군을 보고,
계속 24시간 정규군 타령을 하시는데.

그거 원정군이라 그런겁니다.

일본 전국시대 때 다이묘들끼리 싸울 때에도, 농번기는 피해서 싸웠습니다.
이 땐 영지의 농민 = 병사(=가장 말단의 부하)였죠.

농사 문제때문에 전쟁 관두고 쌍방이 철수한 예도 꽤 있습니다..

그 유명한 전국시대 최강무력의 우에스기, 다케다군 조차도
가와나카지마에서 찔금찔금 수차례 싸운 이유도 농사문제가 컸구요.

그 거대한 규모의 군대를 365일 24시간 교대없이 군인으로 굴리려면,
식량, 무기 등 소모품을 계속 나라에서 딴 백성들을 쥐어짜서 공급해줘야 되는겁니다.
평시에는 굳이 그걸 계속 지급하느니, 최소규모만 굴리는게 국가 재정면에서 유리한거죠.

그리고, 군적부에 올라와 있는게 계속 군인이 아니라고 우기시는데.

본래 조선 군인은
기병은 1명 당 봉족이 3명, 보병은 1명 당 봉족이 1명 이런씩으로
경제적 보조를 하는 일반 백성들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저기 7천명이니 하는 이야기도..
엄연히 전쟁터에서 직접 싸우고 있는 지방군 이야기가 아니라,
중앙군에 상번하는 병력만 놓고 말하는것이고.

유성룡의 1594년 <진시무차>에선
의흥위에 4640명, 정로위에 2161명 별시위에 1119명
모두 7920명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임..(이들 모두 중앙군)

물론 본래 상번을 교대로 도는 병력은
기병 2만3700명, 보병은 1만6200명으로 총 4만병력이고,
상번병은 즉 5교대로 돌아갔다고 볼 수 있슴.

그리고 이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기병 봉족은 7만명, 보병 봉족은 1만6200명으로 모두 합쳐서 8만6200명이란 소리임..

이걸 합치면 상번병 전부 합쳐 4만 + 봉족 8만 합쳐 12만명이 된다는 소리임.
(수도권 한정)

유성룡 진시무차에도
"타색(他色)의 군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타색군(他色軍=>지방군)는 여기에 계산하지 않았으며,""라고 분명히 적혀있슴.

즉, 얘네들은 엄연히 경기도 지방, 수도권일대의 병력만 놓고 이야기하는겁니다.

그리고, 일본군이나 명군이야 원정을 왔으니, 지들이 좋든 싫든 24시간 정규군이죠.

물론 큰 전투때야 100% 동원했겠지만,
얘네들도 평상시엔 불침번 근무서듯 돌아가며 휴식을 취했을지 모를 일인거고..

실제적으로 전체병력이 동원되는
굵직 굵직한 전투가 1년 365일 24시간 매일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문제는 조선의 경우 본토가 전장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의 여파로인해 경제적으로나 행정력이 미치는 것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는 거죠.

즉, 병력이 있다한들, 이걸 왜군 점령지에서 수습해 동원하는게 어렵다거나.
마찬가지로 거기서 세금을 거둬들이는게 어렵다는 겁니다.

즉, 병력을 동원해도 경제적으로나 인력과 노동력, 물자조달에 있어서
전쟁 전에 비해 확실히 쪼들린다 이겁니다.

고려군이든, 명나라군이든, 일본군이든..
그 총병력이 24시간 풀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는건 님 상상일 뿐이구요.

제가 따로 올린 병종구성에 대한 국방일보의 분석글을 읽어봐도 알겠지만,
일단 일본군의 비전투병력만해도 무려 전체의 55%에 달합니다.(전투병력은 별도로 또 주둔지에서 경계와 휴식을 교대로 했을지 모르는 일..)

참고로, 미국 남북전쟁 터지기 전이랑
남북전쟁 터지고 난 후 군대 규모의 차이 아시려나 모르겠는데..
남북전쟁 터지기 전에 미국 상비군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고작 대령인 로버트 리 대령이
링컨한테 병력 20만 정도의 포토맥군 총사령관직을 받을뻔한 나라입니다.

그 전에 로버트 리나 그랜트나 여러 남군,북군 장군들이 위관급, 영관급으로
멕시코쪽 국경 기병대에서 한솥밥을 먹을만큼..규모도 작은 군대였습니다.

2차대전 앞두고도 사실 그랬죠.
그런데 전쟁이 터지니까, 지구상 가장 많은 병력을 가진 국가로 탈바꿈했죠.

그런데, 평시와 전시를 구별못하고,
예전 상번병이 5교대로 올라오던 시기와
수도권이 전쟁 상태에서 행정이 개판이 되버려 병력 소집이 안되는 상황을
뒤죽박죽 섞어서 지금 착각하고 있는겁니다.

지방군(타색군, 잡색군)은 상소로 올라온 것 그대로고,
(뭐 지방 육군은 3교대 정도는 한 거 같다만..)
왕을 모시는 중앙군 사정이 저리 개판이라는 소린데.

어쨌든 일본 본토와 명나라 본토는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행정과 물자조달이 수월했죠. 그래서 그걸 배로 실어보내기만 하면 된건고..

반면 조선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체 농지 140만결 중 54만결까지 생산력이 뚝 떨어집니다.

조선 전체 55% 가량의 관,읍이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45% 정도는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소리겠죠.
조선은 행정체계가 붕괴되고, 나라가 개판이 된 상황에서 전쟁치러야 했는데..

병력이 많다해도 이들을 먹여살릴 군량 마련과 무기 조달 자체도 어려울 수 밖에 없죠.
그래서 병력을 쪼개서 둔전과 무기 생산 등 경제적인 활동에 분담할 수 밖에 없었겠죠.

이런 점을 무시하고, 예전 광군이니 별무반이니 이런거랑 단순비교하기 어려운겁니다.

애시당초 7~8천 병력 드립조차도 단순 경기도 중앙군 한정 이야기인데,
저거에 낚여서 임진왜란 조선군 전체병력 17만은 뻥이더라 논하는게 틀린 소리임.
                         
전략설계 15-07-26 07:27
   
1593년에 조선에 17만 병력이 있었다고 계속 주장하시는데..

조선에 17만 병력이 있는데..
율곡이 왜 10만 양성을 주장합니까? (율곡 제자가 조작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10만 병력이 없으니까 10만을 키우자고 한 것 아니겠습니까..

역사스페셜에서 결론 내린 것은 1593년 실 전투병 8천..
그것도 1년 4교대라 한 시점의 조선 주력병력은 2천이라 그것이죠.

님 주장대로 경기도에 12만이 있는데..
신립이 그 1/10도 안되는 병력을 소집하는데. 애를 먹은게 머겠습니까?
그때까지 조선 정규군이 나가 싸운 적이 없습니다.
(부산성. 동래성) 빼고는 의병빼고 조선 정규 육군이라는게 참전한 적이 없습니다.

경기도에만 12만이 책속에는 있을 지 모르나,
전쟁때에는 쓸 수 없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우시나요.

인제는.. 명군, 왜군은 그냥 원정군이다??
원정이 더 어려운거 모르세요.
명나라가 5-10만 조선으로 보내다 국력이 쇄했다고 하는데..
어디 광동성 정도 반란군 진압에 저정도 병력 보낸다고 중원제국이 쇄하진 않죠.

원정이기에 몇배는 더 국력이 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하고 붙어있다면 이에야쓰 군대까지 다 넘어왔겠죠.

원정하는 군대는 365일, 24시간 전투에 임하고 있는데..
왜 자기나라 땅에서 전쟁하는 데도 그런 주력 군대가 잘 안 보이는 것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원정이니까 24시간 오로지 전투에 임하는 군대가 있고..
자기 나라 땅이니까 듬성듬성 쉬엄쉬엄 대충하는 군대여도 된다고요.
조선에만 있는 일이고.
듬성듬성 대충 하다 보니 5만 장정이 몰려가도 2천에 줄행랑 놓치 안습니까..
전쟁에 대충이 어딨나요.

조선이 그렇게 대충하니,
지 나라 땅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휴전협상에 끼지도 못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원정이니까 24시간 뛴다? 님한테 첨 듣는 해괴한 논리네요.
원정이 아닌 자기나라땅 방어전에서는 정규군대를 양성할 필요가 없다..
그러든가요.. 세계 어느 나라가 그러든가요..

고려만 봐도 평시에 4만5천 직업군인들이 중앙에 배치돼 있었으니,
거란침입을 지 힘으로 막은 것입니다.

실제 존재하지 않는 군대를 병력을, 군적부을 들이밀어 어거지 부리지 마시고,
그 병력은 책에 수치로만 존재할 뿐,
실제 전투에 투입할 수 없는 책속에 있는 병력임을 인정합시다.
                         
Centurion 15-07-26 17:16
   
고려 광군 30만이니 별무반 17만이니 하는것도 나라가 멀쩡할 때 상황입니다.
광군은 거란이 쳐들어 오기전 총규모,
별무반은 여진을 정벌하기 전 병력이에요.

그리고 계속 어거지를 피우시는건 그 쪽이신데..

병조판서까지 지낸 유성룡이
직접 수도권(경기) 지방의 중앙군 병력이 4만명,(5교대로 평시 8천명)
이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봉족이 8만명,
총 12만명이라고 쓴 장계를 갖고 토론을 하는겁니다.

그리고, 8천명, 2천명 드랍으로 줄어들었는데.

일단, 신립이 끌고간 도성의 중앙군이 적어도 5~8천 정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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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성룡이 김응남과 청대(請對)하여 신립을 먼저 보내기를 청하자,
상이 신입을 불러 하문하니 신입도 사양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았다.
성룡이 즉시 모집한 장사(壯士) 8천 명을 신립에게 소속시켜 떠나게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할 때에 상이 신입을 인견(引見)하고 보검(寶劒)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일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참(斬)하라.”하였다.

당시에 상이 김여물(金汝?)의 재능과 용맹을 아까와하여
방어해야 할 긴요한 곳에 정배(定配)시켜 공을 세워 보답하도록 명하였다.
여물이 출옥(出獄)하자 성룡이 불러 계책을 의논해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여물을 처음 보고 병사(兵事)를 의논해 보니,
무용(武勇)과 재략(才略)이 남보다 뛰어날 뿐만이 아닙니다.
막중(幕中)에 두고 계책을 세우는 데 자문하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신립이 또 청하기를,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진영을 맡았을 적에
여물을 알았는데 재능과 용맹 뿐만이 아니라 충의(忠義)의 인사였습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가게 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또 따랐다.

신립이 거느린 것은
도성의 무사(武士)·재관(材官)과 외사(外司)의 서류(庶流)·한량인(閑良人)으로
활을 잘 쏘는 자 수천 명이었다.

조관(朝官)으로 하여금 각기 전마(戰馬) 한 필씩 내어 돕도록 하여 떠나 보냈는데,
거둔 방읍병旁邑兵은 겨우 8천 명이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4일
 
********************************************************************


자, 일단 신립이 거느린 병력규모가 나오는데..

도성의 무사(武士)·재관(材官)과
외사(外司)의 서류(庶流)·한량인(閑良人)으로 활을 잘 쏘는 자 수천 명
+  방읍병旁邑兵은 8천 명

즉 수천 무사 + 방읍병 8천 이미 규모가 1만 이상 되는걸로 추정되는 수준입니다.

단지 최소추정 8천으로 보는거죠.


그러고 나서 탄금대전투 바로 다음 목표인 한성 공방전을 봅시다.

도원수 김명원이 군관 50명과 병력 1천을 데리고 방어에 임합니다.
 
이걸로 최소 조선의 경기지방에 있는 군대가
최소 9천에서 1만여명 이상인걸 확인할 수 있죠.
(신립이 데려간 수천의 무사 + 8천 방읍병(수도의 중앙군이 아닌 경기지방군)+김명원의 1천병력 + 선조의 도망갈 때 호위병력)

한양이 점령 당한 뒤론.. 경기도 지방에서 병력소집이 불가능해집니다.

그 뒤 김명원이 지휘한 임진강 전투를 봅시다.
이원익이 압록강 쪽에 있던 북방 군사들을 내려보내는데
임진강 수비병력은 도합 1만3천~1만5천입니다.

거기에 당시 북상하던 전라도 근왕병이 5만명.

합치면 이미 조선군의 숫자가 최소 7만명에 달합니다.
(신립 8천 + 한강 1천명 + 임진강 1만3천 + 전라도 근왕병 5만) => 7만1천명

그 외 동래성 3천명 + 부산성 800명 + 전라좌우수영 합쳐서 1만5천명 = 1만8800명
(+ 싸워보지도 않고 해산된 경상 좌우수영 합쳐서 2만~3만)

여기에 나온 숫자만으로도 이미 9만 병력에 달하죠.
두만강쪽의 함경도 군사는 치지도 않았습니다. 이거 포함하면 10만 넘어갈걸요.

근데 이것만 있느냐?

경상도에서 이일이 소집해서 대기하던 병력이 수만명으로 보는데..
일본군이 진격해오고, 지휘관이 이일이 도착하기 전에 패닉상태로 흩어집니다.

그래도 이일이 도착한 후 재소집하자, 다시 모여든 병력이 실록에 6천명.(야사로는 1천명)

계속 남자 타령하고 이 걸 군대로 안치시는데.. 기록된 군병력이 그런걸 어쩝니까?

그리고 임진강 전투의 참패로 1만2천명이 전사,
다시 평양성 전투 때 명나라군과 남하한 조선군이 1만명.

즉 7.1만 + 1만1천명(임진강 잔여병력 + 새로 투입된 조선군) + 이일(1~6천 병력) = 8만3천~ 8만8천명. 전투 기록상에 등장하는 병력만 이 정도죠.

자, 그럼 뭐 다른 조선 8도엔 군사가  또 없었느냐? 당연히 관아마다 병력이 있을 것이고,
일본군이 왔건 안왔건 소집령이 내려졌으니 병력을 모은겁니다. 그게 17만명인거에요.

자, 그럼 여기서 전멸하거나 소모되어 죽은 병력수만 놓고 봐도
탄금대 1만(전후) + 임진강 1만2천 + 부산 3800명 + 용인전투(불명)

전쟁 초기 전사자만 최소 2만 6천. 즉, 17만 + 3만 가량해서 20만 정도 되는겁니다.

물론, 거의 전쟁하기도 전에 원균과 박홍에게
해산된 경상좌우수영 2만 병력까지 치면 22만 이상이죠.

아니 이런 상황에 2천 드립이 뭔 말입니까?

님이 말한 이이의 10만양병설은 서인들이 자기네와 이율곡을 띄우기 위한 카더라란 썰이 많구요.
그게 사실이라해도 중앙군 혹은 상비군 10만일 가능성이 높아요.
어차피 조선은 제승방략체제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진관체제라는 이름의 상비군제도 운용했습니다.
특히나 불만 많은게 수군으로 징발된 해안가 백성들이 군선을 만들기도 해야해서 빡세기로 유명했습니다.

조선은 암만 낮게 잡아도,
함경도 평안도 북방군만 적어도 2~3만에
중앙군 4만(상번병8천),
경상, 전라도 수군만 3만5천 이것만 해도 이미 10만이 넘어갑니다.
그 외 경상전라도는 인구가 많은 지역이라 육군만 잡더라도 8~10만 잡아야 되요.
타 도는 또 군대가 없는 것도 아니고, 소집못할만큼 인구가 적은 것도 아니구요.

괜히 군적에 40만 대군이 올라와 있었던게 아닙니다.
나중에 군적이 개판이 되긴 해도.. 인구 1천만 가까운 나라에서 그 정도 나오는건 당연한거죠.

그리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군대가 점점 들어오니, 얘네들 먹여살리기도 벅차니,
소집된 병력을 다수 해산시켜 고향보내서 농사짓게 합니다.

******************************************
역사스페셜에서 결론 내린 것은 1593년 실 전투병 8천..
그것도 1년 4교대라 한 시점의 조선 주력병력은 2천이라 그것이죠.
***********************************************************

그런데 이런 익히 알려진 기록상에 등장하는 병력만 해도 이 정도인데.. 2천요??

유성룡이 올린 장계에서 등장하는것만 수도권 4만병력 총원에 5교대로 상시 존재하는 군대가 8천입니다.
그래도된다 15-07-23 15:45
   
명나라에 대해선 새롭게 알게 되네요
그나저나 생각보다 조선이 무능해서 놀랐다.
저 당시 명과 왜국은 일찌감치 은을 화폐로 사용했는데 조선만 화폐경제가 아닌 물물교환 시스템이었다는게 ...;;
     
Centurion 15-07-23 20:35
   
본래 화폐라는게 못믿을만한 상황에선 현물이 오히려 가치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독일이 1차대전 패전 이후 엄청난 인플레로 고생하던 시절에...
은행 예금 찾으러 간 병사에게 편지가 도착했는데..
그 사람이 저축해둔 돈보다 거기 편지에 붙어있는 우표값이 더 많았다는 말이 있죠.

그래서 차라리 못믿을 화폐보다 쌀이나 옷감으로 화폐를 대신한거죠.

요즘도 사람들이 화폐가치가 불안정할때..
금이나 석유, 농산물 등 현물에 투자해놓고, 투기하는 사람은 많죠.
          
오오타니 15-07-23 23:35
   
15세기 100년동안 조선 정부는 화폐 유통을 시켜보려고 노력한다

태조는 저화라는 지폐를 세종은 조선통보라는 엽전을

세조와 성종은 번갈아가며 저화와 엽전의 유통을 시도해보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가장큰 원인은 화폐사용경험 부족과 불신때문이었다

여기에 조정에서 세금을 돈이 아닌 쌀,면포,특산물로 받으려는 모순적인체제도 한 몫 했다

이는 세금을 은화로 내게 했던

명나라의 일조 편법이나 청나라의 지정은제와는 전면 배치되는 행태였다

그나마 태종때 세액 납부를 저화로 일부 가능하게 했고

녹봉도 저화로 지급하는 등의 노력을 해봤으나

애초에 화폐 유통량이 적었던 탄에 그 효과는 미비했다

계속 실패를 보긴 했어도 늘 조선 정부는 화폐를 통용시키고 싶었다

1678년 숙종은 허적의 건의를 받아들여 상평통보를 유통하게 된다

이때는 예전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신중해져서

엽저늘 쌀,무명,은화와 연계했고 세금이나 녹봉의 일부 지급에도 엽전을

사용해서 사회 심리적으로 엽전의 안정성을 보증 받을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점차 성공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다

고려 성종 이후 근 700년을 노력한 끝에 드디어 성공적으로 안착하게 된 것이다

애초에 조선에 화폐 경제체제가 자리 잡힌게 1683년입니다 임란전에는

화폐경제체제가 자리 잡질 못햇죠
               
Centurion 15-07-24 00:36
   
그건 저도 예전에 동아게에서 토론한 내용이라 압니다만..
이걸 무능함으로 밀어붙이긴 좀 어려운 부분인겁니다.

물론, 무능함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레의 사용, 도로포장, 상인에 의한 교역의 활성화를 추구하지 않은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기적인 문제가 큽니다만..

왕들이 그리 노력해도 안먹히는건,..
조선 경제 체질이 화폐를 별로 신뢰안한다는 소리거든요.

전쟁이나 내전 겪는 나라에선 화폐가 별 소용없는 경우 많습니다.
나라가 망하다시피하면 특히나 화폐가 똥값이 되죠.

그런 경우 믿을 수 있는게 현물화폐입니다.
즉, 쌀이죠. 이건 먹을 수가 있으니까.

전쟁터에서 미군이 스타킹이나 초콜릿으로 유럽여성들 많이 꼬셨죠.
자기들끼린 담배를 화폐삼아 물건 거래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구요.

그런 상황이랑 비슷한겁니다.

조선은 사실상 쌀이 화폐역할을 대신했던거지.
물물교환이라고까지 깍아내릴 정도는 아닙니다.

명나라도 은과 쌀이 은자 1냥에 쌀 2섬, 혹은 쌀4~8섬까지 왔다리갔다리 하는데..
그냥 조선은 화폐 안쓰고 쌀을 화폐로 대신한거죠.
                    
오오타니 15-07-24 00:55
   
무능했다는게아니고 당시 조선이 화폐경제가 아니였다는걸 말씀드리는거뿐입니다... 전쟁이 아니엿어도 화폐통용은 아직 요원 했습니다.
                    
그래도된다 15-07-24 03:36
   
이걸 무능함으로 밀어붙이긴 좀 어려운 부분인겁니다.

물론, 무능함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레의 사용, 도로포장, 상인에 의한 교역의 활성화를 추구하지 않은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기적인 문제가 큽니다만..

//////////////

무능하다고 밀어붙이긴 곤란하다면서 바로 밑에 '물론 무능함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 이라고 쓰는건 뭐죠 ;;?

그니까 그게 무능하다는거 아님 ?
                         
Centurion 15-07-24 04:51
   
이게 무슨 차이인지 이해를 못하시는거 같아 부연설명을 하자면..

화폐를 퍼뜨리려한 그 왕이 무능해서라기보다,
조선의 건국이념과 신분제도, 지배이데올로기 자체가 사농공상으로
상업을 천시하고, 상공업의 발달과 화폐경제의 출현을 제약했단 소립니다.

즉, 이런 상황에서 죽어라 씨앗을 퍼뜨려봐야 죽는거에요.

중국과 일본이 화폐경제, 은자가 유통이 잘된 이유는.. 서양과의 교역도 큰 몫을 합니다.
서양애들이 와서 은자를 받아가려고, 열심히 장사하러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그로인해 당시 세계화폐가 금, 은 위주로 굴러가던건데..

조선은 일부 상인들을 제외하곤, 뭐 딱히 은자의 필요성을 못느낀거죠.

일부상인들의 경우에야 외국과 교역에서 은자로 결제를 해야되기 때문에 갖고 있는거고.
요즘으로 치면 이게 달러나 다름없는거죠. 기업들이야 달러가 중요하지만, 개인 입장에선
원화 쓰면 그만인거니까. 요즘으로 치면 그 원화가 바로 쌀인겁니다.

왕이 엄청 유능해도, 이만한 상태라면.. 나라를 뜯어고치는게 아주 힘들죠.
표트르 대제 정도의 계몽군주가 튀어나와야 가능한 일입니다.
게다가 조선은 전제군주정이라기엔 왕권이 강한 편도 아니고, 신하들의 입김이 강하죠.

개혁이란게 혼자 맘먹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왕들은 보통 기존 체제의 가장 혜택을 누리는 특권층이기 때문에
개혁에 관심을 못갖는 태생적 한계를 갖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대통령이나 재벌, 기업인들 중에
지금 한국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인간 있을 거 같습니까? 자기들이 꿀빠는 사회인데요.
새로운 도전자, 경쟁자가 치고 올라오지도 못하고 딱 좋죠.

사회가 낙후가 되더라도, 거기서 자기가 상위 1%면 보수성향을 띄는게 사람 심리입니다.

즉, 태생적으로 조선왕들은 상공업이 낙후되고 이런 환경이 조장된 유교적 신분제와..
도로교통의 발전을 저해한 조선의 방위전략 같은것의 변화에 큰 필요성을 못느꼈죠.
자기야 남들이 불편하든 말든 어가 타고 다니니.

그래서 단지 무능함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좀 더 포괄적이고 종합적이고 거대한 문제가 있다는겁니다.

게다가 해외와의 교류를 부정적으로 보고,(=손해)
대체적으로 사대교린의 입장에서 시혜를 베푸는 입장에 있었던 조선으로썬..
은자를 통해 외국과 교역하는게 국부유출로 생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명나라도 조선에 대해서 손해를 봤지만,
조선 역시 일본과의 교역을 꺼려
이에 불만을 품은 일본인들에 의해 삼포왜란이나 왜구약탈이 터지는 걸 보면..
외국과의 교역이 뭔가 손해보는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죠.

그렇게 사들인걸 다시 명나라에 비싸게 팔아서 떼돈을 번다 이런거면 좀 다르지만.

이런 쇄국적인 발상은 일본 도쿠가와 막부도 비슷했던 모양이고,
일본 역시 서양과의 무역에서 엄청난 은의 유출이 있었죠.

그리고 막상 또 은자를 사용하다보니,
모문룡 껀처럼 아주 조선에서 돈을 팍팍 긁어가는 케이스도 있고..

쌀은 그나마 좀 옮기기라도 버겁지만,
은자야 궤짝 몇개는 엄청난 양의 '부'를 옮길 수 있으니..
차라리 화폐니 뭐니 가난하고 궁상맞아 보여도, 딴 놈들이 탐을 못내게 하는게 좋다..
뭐 그런 위장전략 같은것도 필요할 때가 생기는 법이죠.

(금광, 은광의 개발과 채굴을 제한한다던가 등등)

고려 말기에 원나라, 홍건적, 왜구 등등에 시달리던 걸 보고,
검소함을 앞세워 나라를 세운게 바로 조선이고, 그래서 예전 왕조들에 비해서,
화려함이 떨어지는 거죠.
(고려가 아주 국제적이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편.. 기존 삼국도 그렇고)

어찌보면 이게 조선이 평화를 누린 일종의 위장색과 같은 가난함 때문인지도 ㅋㅋ
어찌됐든 상공업의 억압과 검소한 기풍, 농본주의 국가 등등.. 수수하고  없어 보이는게..
조선이 추구하던 스타일이기 때문에,
화폐경제 개혁이나 상공업 육성 같은게 일개 군주 한사람의 뜻으로 어찌 바뀔 문제가 아닌거죠.

건국초기 그나마 유학자들보다 실용적인 훈구파 시절에도 세종대왕이 신하들 반대에 얼마나 부딪혔나 생각해보면
이걸 군주 차원에서 해결하려면 무능함 차원이 아니라 아주 탁월한 수준의 뭐가 좀 있어야 하거나,
시대가 그만큼 알아서 성장해서 화폐경제를 요구할만큼 상공업이 발전하길 바랄 수 밖에 없죠.
                         
그래도된다 15-07-24 16:23
   
저도 마찬가지로 왕이 무능했다고 말하는게 아니라 조선의 구조적인 사회,경제 시스템 자체가 무능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즉, 님과 저는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죠.
     
비좀와라 15-07-23 22:20
   
화폐, 도로와 군사력 이런건 왕권이 세야 됩니다. 또 이건 세금등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단순히 화폐가 발달하고 하는 것이 경제가 발달 했다는 의민 아닙니다.

중앙은행이란 개념은 프랑스가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더 거둘려고 만든 것 입니다.
하얀그림자 15-07-24 06:15
   
명나라가 참전을 결정한 후 하북성등에서 식량과 마초를 구매해서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은자도 가지고 왔습니다
군대를 움직일 때 식량을 확보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입니다
다급한 전황상 식량을 구매해서 전장으로 운송하는 것은 양적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식량을 현지구매할 요량이었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그런  대량 유통 마켓이 형성되 있지 않았습니다
명나라가 조선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윤을 일종의 사기나 죄악으로 보는  극단적 유교적 마인드 때문입니다
자본주의가 태동된 유럽에서도  이윤창출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들이 있었습니다
동이나 서에서 상인들은 천시 여겨졌죠

후일  보급선을 단축하기 위해 산동에서 들어온 군량은 모래가 섞였거나 장마로 인해 쌀이 젖어서...
즉 관리들의 장난이나  기후등, 기술적인 문제로 조선측 관리가 인수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그 관리는 명 장수에게  곤장을 맞기도 하지요
명쪽에서 보급문제에 얼마나 치를 떨었으면  전쟁이 끝나고 철군할 때  은본위제를 권고했을까요

징비록에도 나와 있지만 유성룡은 이여송에게 군량조달 문제로 많은 스트레쓰를 받습니다
당연히 이여송도 자신의 군대를 잃지 않기 위해 전투나 진격의 전재 조건으로 유성룡을 들볶습니다만
유성룡의 입장에서는 조선군만한 투지를  명군에게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실제로 위 실록에 양총병으로 되있는 양원은 남원성에서 포위되자  왜군과 타협하고 줄행랑을  치기도 했죠
여담으로
이와중에  부상 당한 양원에게 쪼다 선조가  자신 때문에 다쳐서 어쪄냐며 울고불고 난리치고 결국  남원성 담합(?) 사건으로 처형장으로 가는 가는 양원을 배웅(?) 하면서 질질 짯으면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셨다는  소식에는 왜그리 냉정했는지.....
은어를 매일  먹으며 와신상담을 하지는 못할 망정 도루 묵이라고 하는  최고권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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