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32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1월 16일(임신) 5번째기사
윤근수가 요동에서 돌아왔는데, 요동에서 송응창 등에게 구원병을 청하며 올린 글
안정(安定)에서 성루(城壘)를 대하고 있는 아군은 이미 지쳐 형세가 고단하고 약하니 적이 쳐들어올 경우에 어찌 궤멸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겠습니까. 함경도의 적이 만약 보고된 대로 양덕(陽德)의 지름길을 따라 허술함을 틈타 쳐들어와 아군은 앞뒤로 적을 받아 패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찌 추격하겠습니까. 안주(安州) 서쪽 지방에는 계속 후원해 줄 남은 군사가 없으니 그들이 승승 장구(乘勝長驅)할 것은 형세가 반드시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망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번리(藩籬)가 철거되면 중국 변방의 걱정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실록만 보더라도 당시 조선은 명나라 도움 없이는 나라를 지탱하기 힘든상황이였습니다...
탄금대 전투,, 특히 용인전투 ,임진강 전투에서 주력 육군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10만이 넘는 일본의 육군을 감당하기 힘든상황이엿죠... 보급때문에 평양에서 고니시가 못올라갓다는 잘못알려진
사실이 있는데 평양성에서 왜군이 노획한 쌀이 10만석입니다... 쌀 10만석이면 2만여명의 병력이
10개월은 먹을수 있는 양이고 당시 조선의 모든 군량미는 용산창에 보관되어있엇는데 용산창마저 진작에 왜군이 점령하였습니다
병사들이 먹을 충분한 곡식을 조선으로 수송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도로 사정이 너무 열악하여 군량 수송에 차질이 생겼으며,
군량을 전선에 있는 병사가 아닌, 수송 부대가 먹어치우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하북에서 운송해 온 쌀 13만 석이 조선의 국경에 쌓여있으니 모두 징발하여 밤낮없이 운반하는 것이 최상의 계책입니다.
황제가 말하기를, "그 말이 옳다. 그러나 '운반할 수 없기에' 고민하는 것이다."』/ 明史
당시 명나라의 약탈이 일본군보다 더 심했다는 말들이 많습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엔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할려고했던 병력은 4~5만 규모가아닌 13만이였습니다... 근데 조선측에서
보급이 힘들다하여 줄여서 4~5만이 온겁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명군이 넘어오고 한달만에 명나라보급이
끊깁니다...... 그리고 명나라는 조선에 명군의 모든 보급을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직접 중국에서 조선으로
쌀을 보낼려했으나 당시 조선도로 사정이 워낙 좋지 않아 쌀을 국경에 쌓아놓고도 운송이제대로
안됬습니다. 또한 당시 전세계에서 화폐로 통용되던 은자를 가지고 조선에서 직접 쌀을 구입 하려했지만
그때 까지 조선은 화폐 경제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 돈이 있어도 쌀을 살수가 없었습니다 명나라측에서도
참 난감한 상황이였죠.
명군은 12월말쯤에 알록강을 건너 1월쯤 평양을 함락하고 벽제관전투이후 소극적으로 변합니다. 그럴만도한게 1593년 2월 조선실록을 보면 명나라군사들에게 보급이 잘안되어 굶고있다는 내용들 밖에 없습니다.
선조 3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2월 7일(임진) 1번째기사 비변사가 군량의 운반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며 삼현 근처로 이가하기를 청하다
변사가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양 총병(楊摠兵)이 제독의 군중(軍中)에서 옮겨 왔는데 ‘군량과 마초가 계속 보급되지 않고 군기(軍機)가 잘못된 것이 많아 회군하려고 송 경략(宋經略)에게 그 결정을 품의하려고 한다.’ 합니다. 국가 존망의 기미가 이번 길에 결정되는 것이니 형세가 매우 급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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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2월 19일(갑진) 11번째기사
윤근수가 이 제독에게 회군하지 말기를 청한 일을 치계하다
제독 역시 울면서 답하기를, ‘내가 황제의 명을 받아 왜놈을 소탕하고 왕경을 수복(收復)하는 것으로 나의 임무를 삼았는데, 군사를 돌리는 것이 어찌 나의 본심이겠는가. 다만 봄길이 진흙탕이고, 또 수전(水田)이 많아 마음대로 진퇴할 수도 없고, 군량과 마초가 부족하여 사람을 굶주리고 말은 피로하여 죽은 말이 1만 4천여 필이나 된다
"특히 말먹이가 문제엿는데 맨처음 건너온 중국 군마는 2만 7천여필인데 1만4천여필이 마초부족과풍토병으로 떼죽음 당했습니다"
선조 3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2월 19일(갑진) 12번째기사
운암원에서 이덕형 등을 인견하고 중국군의 무기, 군량, 병력 등을 논의하다
상이 이르기를,
“의주에 있을 때에 항상 군량 비축하는 일을 말하면 조정에서는 저절로 해결할 것이라고 답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군량이 부족하여 군사와 말들이 굶주려서 물러나 주둔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제독의 허물이 아니다. 군량도 없이 머물기를 청하는 것은 바로 앉아서 굶어 죽게 하는 것이다.
선조 3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2월 22일(정미) 4번째기사 서성이 중국군이 피폐한 상황임을 아뢰다
공조 정랑 서성(徐渻)이 아뢰기를,
“신이 칠성문(七星門)으로부터 평양성으로 들어가면서 각 위(衛)에 주둔한 중국군을 보니 모두 극도로 수척하여 비록 다시 십여 일을 머물러 휴양하더라도 전쟁터에서는 쓸 수가 없으며 넘어져 다친 자 또한 부지기수였습니다. 중국군중에는 말을 도살하는 자, 고기를 나누는 자, 고기를 가지고 왕래하는 자들만이 눈에 띄었습니다. 곡초가 넉넉하지 못하여 중국군들은 허리에 찬 칼로 산과 들에서 풀을 베는데 십여 리의 지역에 어깨에 맨 자, 등에 진 자, 머리에 인 자들이 도로에 연이어 있어서 보기에 매우 참혹하였습니다.
"우리 군대가 스스로 들어온 조선은 하나의 별세계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은전을 사용할 수 없으며, 푸주간이나 술을 파는 가게도 없습니다.(돈이 있어도 소용이 없어요!) 더욱이 왜놈들의 분탕질 때문에 집들은 한결같이 텅 비었고(왜군들은 이미 조선의 경제상황을 먼저 터득), 군사들은 입술에 채소국물 한 숟갈을 적셔보지 못했으며 염장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말을 하자니 너무 서글퍼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제가 비록 누누이 염장을 풀고 고깃근을 마련하여 적당히 호상하려 했지만 끝내는 사소한 은혜를 베풀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요양사람들을 불러 장사하도록 달려오게 했지만 길이 멀어 온 자가 적었습니다.“ -명나라 동정군 경략 송응창-
실록에서 보다시피 당시 일본군의 병참실패보다 명군의 병참 실패가더 컷습니다.. 당시 조선 실록에서는 명나라군이 계속 굶고 있다는 기록밖에없고. 계속 찾아보니 보급이 제대로 안되어 이미 명으로 돌아간 군사도 많아서 3월에 평양에 주둔한 명군은 2만 6천밖에 안남았다고 하더군요... 당시실록에도 한양에왜군만 4만... 전체적으로 아직 조선에 왜군이 10만은 남았으니... 사실 남은 명군숫자로 일본군과 전면전을 펼치긴 힘든상태죠.... 그리고 강화를 맺고 4월 18일 일본군들은 남해안으로 후퇴하죠~
그리고 왜란초기때는 명은 조선에 식량을 의지했지만, 그이후로는 거의 자체적으로 대규모식량을 계속 보냈습니다.
선수 27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4월 1일(을유) 7번째기사 황제가 산동의 군량 10만 석을 배로 운송하여 군량을 보충하게 하다
황제가 산동(山東)의 군량 10만 석을 내려주어 배로 운송하여 군량을 보충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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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41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8월 19일(경자) 9번째기사 비변사가 중국에서 가져 온 군량을 운반할 대책을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대병(大兵)이 양남(兩南)에 유주(留駐)해야 할 형편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아무리 군량을 조치한다 하더라도 탕패(蕩敗)된 뒤라서 곡식을 모아 군량을 대주기가 어렵습니다.의주(義州)에 있는 당량(唐糧)2018) 외에 산동(山東)에서 계속 운송해 온 곡식이 있으니,
선조 41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8월 28일(기유) 4번째기사 장삼외의 충고에 따라 경략에게 군량을 청하는 자문을 보내기로 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장 도사(張都司)가【삼외(三畏). 】말하기를 ‘산동(山東)에 사들인 쌀 14만 석이 있는데 이곳에 온 쌀은 1만 석도 채 되지 않으며, 요동해(遼東海)에 민간의 비상량(備上糧)이 14만 석이 있는데 이곳에 온 것은 겨우 1십만 석뿐이다. 지금 2만 명의 유병(留兵)이 하루에 먹는 양이 4백 석이나 되니, 그대 나라에서 어떻게 마련하여 공급할 수 있겠는가.
선조 44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1월 16일(병인) 7번째기사 비변사가 식량 부족에 대한 계획을 세울 것을 아뢰다
중국에서 준 양곡은 관계되는 바가 더욱 중요한데 전후에 내린 것 가운데 요동(遼東)에서 나온 것이 14만 석이나 되고 이번에 산동(山東)에서 나온 것이 또 12만 석인데, 이미 나온 양곡의 소재(所在)도 모릅니다. 그 나머지 10만 석 또한 장차 계속해서 오게 될 것이니, 평양(平壤)에 운반해 온다면 따로 1인을 시켜 관장하게 하고 오는 대로 받아 쌓아놓고 실제 수량을 파악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이렇게 한 후에 더러는 서울로 운반하고 더러는 평양에 머물러 두고서 중국군에게 지급해야 할 것이요, 앞서처럼 산실(散失)하여 간 데가 없게 해서는 안 됩니다.
명에서 조선으로 군량미를 보낼떄 거의 10만석씩 보냈습니다 10만석이 어느정도 규모냐면
조선 중기에 조선 1년 예산이 쌀 30만석이니 어마어마한 규모지요
수 32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4월 1일(을묘) 1번째기사 왜적이 남쪽 변방에 있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중국에서 쌀을 보내 구제하다
이때에 왜적이 남쪽 변방에 주둔하고 있어 백성들이 제때에 농사짓고 수확하는 일을 하지 못해 굶주림이 날로 심해져 중국에서 산동(山東)의 쌀을 운반하여 구제하였다.
정유재란에 의병으로 활동하고 군리로도 활동한 조경남의 일기인 난중잡록에서는 만력제가 보내준 산동의 곡식 1백만석이 수많은 조선인의 목숨을 구한 사정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당시 중국 황제 만력제는 쌀 100만석을 조선백성들 구휼하는데 보냈습니다.
100만석이면 조선 1년예산의 3배가 넘는 양입니다.
또하나 잘못된것은 명나라군은 조선에서 열심히 싸우지 않앗다는건데... 요동기마병은 행패가심하고
전투에 소극적이엿으나 강남에서 징병된 남군은 굉장히 열심히 싸웠습니다. 게다가 남병이 갖춘
강력한 포병 화력은 일본군에게 큰 압박이 됬찌요
선조 37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4월 25일(기유) 9번째기사 비변사가 중국군 2천 명만 머무르도록 하라고 경략에게 자문을 보내도록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에 이 제독이 말한 바에 따라 중국군5천 명을 우리 나라에 머물러 있게 해달라는 뜻을 이미 주청(奏請)하였습니다. 이제 김수(金睟)의 장계를 보건대, 유 원외(劉員外)가 ‘혹 1만 명이나 5천명을 머무르게 할 것인데 남군(南軍)이든 북군(北軍)이든 당신들의 원하는 바에 따를 것이다.’ 하였다고 합니다. 남군과 북군은 용맹성에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연로(沿路)에서 폐단을 끼치는 것은 모두 북군의 소행이니 일이 안정된 뒤에는 반드시 폐단이 지금의 배가 될 것입니다
독 경략 군문(總督經略軍門)에 자문을 보냈는데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이 남병(南兵)을 시급히 징발하여 밤낮을 가리지 말고 와서 구원해 줄 것을 청하는 일입니다(중량)내가 우리 나라의 지형을 살펴보면 본래 마병(馬兵)에 불편하고 왜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남병(南兵)뿐이기에
선조 85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2월 12일(계유) 5번째기사 중국의 원병을 빨리 오게 하는 것에 대해 대신들과 논의하다
그런데 저번에 손 경략(孫經略)의 제본(題本)을 보니, 요동(遼東)의 2만 7천 병력을 징발해 보낸다고 하였고, 병부 시랑(兵部侍郞)도 말하기를 ‘10여만 병력을 지금 한창 징발하고 있다.’고 했으니, 이는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요동 군사들이 왜적을 막는데 익숙하지 않은데 비해 남병(南兵)들은 왜적 방어에 익숙하며 또 전쟁을 잘하니, 이들 병력을 많이 요청해 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실제로 강남지방에서 징집된 남병들은 왜적들과 잘싸웠습니다..... 그리고 정유재란당시 육전은 명군이 거의 다하다시피 했죠..... 왜란 동안 총 집징된 명군으 28만여만명에 달한다고하며 사상자수는 9만여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왜군의 총 병력수가 30만이니... 거의 왜군에 필적하는 병력을 파병하였고 사상자수도 많앗죠...
그리고 두번의 왜란에 소요된 명나라 예산도 엄청났습니다.
[재조번방지 ] 중 병부상서 형개의 상소 중
하였다. 이 일에 절(浙)ㆍ섬(陝)ㆍ호(湖)ㆍ천(川)ㆍ귀(貴)ㆍ운(雲)ㆍ면(緬) 남북 군대를 징발한 것이 통계 22만 1천 5백여 인이고, 식량으로 소비된 은이 약 5백 83만 2천여 냥이며, 쌀과 콩을 교역한 은이 또 3백만 냥으로서 실제로 쓴 본색 은과 쌀이 수십만 석이었다.
왜란당시 명나라가 사용된 은자가 얼만지 대충 알수 있는덕목입니다...... 요동에 파병된 병력에 소요된 예산까지 합치면 두번의 왜란에 사용된 명의 은자는 800만냥이라고 합니다.
1년 명나라 예산이 500만냥이니 어마어마한냥이죠.. 참고로 조선1년 예산을 은자로환산하면 15만냥입니다.. 실제로 명나라는 조선 파병과 군수물자 지원에 최선을다햇죠
하지만 우리나라 교과서나 드라마는 명나라는 조선에서 아무것도 한것없는 민폐덩어리취급만하니 잘못된 역사교육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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