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 조선의 전술은 적의 칩입 발생시 지방군이 버티다가 중앙군이 도착하면 적을 격멸하는 형태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중앙군은 왕의 친위대인 별시위를 비롯해 주력 중기병인 갑사, 주력 중보병인 방패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적을 격퇴하는데에는 보통 5위를 편성했다고 합니다.
5위는 5개 위와 유군(예비군)으로 편성.
위는 5개 부로 편성.
부는 4개 통으로 편성.
통은 5개 여, 여는 5개 대, 대는 5개 오, 오는 5명으로 구성됩니다.
이렇게 편성하면 5위는 유군 제외 62,500명으로 구성됩니다.
특이한 점이있다면 부를 이루는 4개통중 2개통은 보병, 다른 2개통은 기병입니다.
이렇게되면 절반이 기병으로 몽골만한 기병전력이 구성됩니다.
훨신 놀라운건 그 기병이 위 사진과 같은 철갑옷을 입었습니다.
심지어 보병또한....
이런모습 입니다(...).
거기다가 유군은 그때마다 다른데 많으면 10,000명입니다.
그러면 5위는 총합하여 112,500명으로 구성됩니다.
그럼 이 유군에 대해 알아보자면...
그러합니다...
지방군은 여러 갈래로 나뉩니다.
영진유방군과 수성군, 수호군, 잡색군이 그것입니다.
일단 영진유방군은 기병으로써 중앙군 소속 갑사보단 경기병으로 주로 두정갑(윗윗 사진)을 입고 궁을 소지했으며 기병창, 환도등으로 주무장으로 사용했습니다.
그 수또한 수만이 넘었다 합니다.
세종 15년 건주위 파저강 야인 정벌전 당시 조선군 총 병력 1만 5천에서 1만이 기병이였는데 그 중 대다수가 이 함길도의 영진유방군 소속의 기병이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걸 봐서는 조선초 주력 기병은 이 영진유방군의 기병이 대다수였을거라 생각됩니다.
(역시 조선 기병)
수성군은 보병을 담당하여 주무장은 창이였습니다.
그리고 부무장은 환도나 활로 추정됩니다.
다만 자비로 장비를 마련해야 했기에 갑옷은 면갑옷또는 가죽갑옷을 입고 경보병 역할을 수행했을거라 생각됩니다.
수호군은 적이 자주 출몰하는 평안도, 함경도, 하삼도(충청, 경상, 전라)에 배치된 예비군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라졌고 후엔 능지기를 일컫는 말로 많이 썼습니다.
잡색군은 예비군의 성격을 지닌 군대였습니다.
명나라의 압박으로 정규군을 제외한 전국적 동원테세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징집 대상엔 향리, 향교학색, 공사천, 현직관리와 전직 3품 이상인 관리들을 제외된 그야말로 모든 계층으로 이루어진 예비군입니다.
25인을 대로 하여 고을 수령에게 징집과 지휘 권한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기병, 보병이 될스 있었으며 10인 기중 소패, 50인 기준 총패로 지휘권을 두었습니다.
무장은 잘 다룰수 있는 농기구를 개조한 무기나 집안에 내려오는 무기와 갑옷을 사용하여 왠만한 무장은 갗춘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름이 잡색군인 이유는 부대별로 갑옷의 색을 달리했는데 잡색군은 이 색이 뒤죽박죽이였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의문이 드는것은 기병의 비율일것 입니다.
보통 농업국가의 보병과 기벼으이 비율은 1:6~8
유목국가는 1:2~4 입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조선은 1:1의 비율을 선보였죠.
그 이유는 2가지 입니다.
첫째는 북방의 칩입자들이 대부분 유목민이였다는 거죠.
이들은 훌륭한 기병들이였기에 기병을 적극적으로 양성하지 않으면 중국처럼 두둘겨 맞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두번째는 군마의 이용입니다.
전시에는 군마로 사용하다가 평시에는 소처럼 농사나 공사에 사용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