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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7-03 22:47
[일본] 베트남전 한국군이 위안부를 운영했다는 일본기사 반박 기사 2
 글쓴이 : 해달
조회 : 3,188  

일본의 황색주간지 <주간문춘>(週刊文春, 슈칸분슌)은 봄특대호(4월 2일자)에 '역사적 특종 - 한국군의 베트남인 위안부'라는 기사를 실었다. 필자인 야마구치 노리유키(山口敬之) 당시 도쿄방송(TBS) 워싱턴지국장은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의 베트남전 관련 공문서와 참전 미군의 증언을 근거로 한국군이 베트남 여성을 고용한 '증기탕'(steam bath) 형태의 '한국군 전용 위안소'(welfare center)를 운영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비밀 문건이 폭로 박근혜의 "급소"'(米機密文書が暴く朴槿?の"急所")라는 선정적 부제를 단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한-일관계 정상화(정상회담)의 전제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해온 박근혜 정부의 도덕성과 협상력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다. 하지만 <산케이>(産經) 같은 극우매체와 혐한(嫌韓) 여론을 부추기는 황색매체를 제외한 거개의 일본 매체들은 이 보도를 무시했다. 사실을 입증할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국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 매체로는 유일하게 <한겨레>가 '일본 언론의 "한국군 터키탕", 괘씸하지만 반박이 어려운…'(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688415.html, 4월 25일자)이라고 인용 보도함으로써 국내에 알려졌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팩트 체크'(사실 검증)의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주간문춘>이 '특종'의 근거로 삼은 NARA 문서와 베트남전 당시 사이공(현 호찌민)에 거주한 관련자들의 증언을 검증취재한 결과를 3회에 걸쳐 심층 보도한다.

* 1편에서 이어집니다.

지난 회에서 기자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 문건을 근거로 <주간문춘>의 '베트남전 한국군 위안소' 보도가 역사 사료를 왜곡한 허위보도라고 지적한 바 있다. 예고한 대로, 그 연장선 상에서 미군 기밀 보고서에 등장하는 증기탕(steam bath) 주인 '한국인 신씨'를 비롯해 당시 사이공의 '코리아 하우스' 운영자, 주월 한국군 및 미군 공연 쇼단 운영자, 쇼단과 특별휴가 병력을 관리한 보안대 요원, 중앙정보부 책임자 등의 흥미로운 증언을 다룬다.

'흥미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우선 50년 전 한국군 전투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한 60년대 중후반의 시대상은 오늘의 법률적 기준과 도덕적 규범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불법과 편법이 판치는 세상이었다. 또한 '전쟁특수'(戰爭特需)라는 용어가 통용되듯이, 너나없이 가난했던 시절에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사이공(현 호찌민)에 형성된 거대한 '블랙 마켓'에서는 이 같은 '지하경제 행위'가 다반사였다. 1963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P)은 100$에 불과했다.

문제의 서명자는 'ROKFV CIC Col Lee, Sang Yul'(이상열 방첩부대장)

지난 회에 밝혔듯이, 미군의 주(駐)베트남군사원조사령부(MACV) 참모장인 코코란(Charles A. Corcoran) 장군은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 앞으로 보낸 서한(69년 2월 15일자)에서 미군 범죄수사대(CID) 조사에 근거해 이렇게 썼다.

"미군 CID는 최근 사이공 소재 PHAN-Tan-Gain Steam Bath(증기탕) 등에서 미군의 불법행위가 이뤄지고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월남 경찰과 함께 이 시설을 급습해 미군 군수품과 통관절차를 거치지 않은 물품(밀수품)들을 압류했다. 증기탕 주인은 한국인 신씨(Mr. Shin)였다. 신씨는 '증기탕(steam bath)은 한국군 전용의 복지센터(welfare center)'라고 주장하는 한국군 이ㅇㅇ 대령이 서명한 서신을 월남 세관에 제출했다고 한다."

서한에 등장하는 '한국인 신씨'는 'Mr. Shin'이라고만 표기돼 있어 실명을 확인할 수 없었다. 신씨가 압류품을 돌려받기 위해 '한국군 전용의 복지센터'(welfare center)라고 주장하면서 월남 세관에 제출했다는 서신의 '이ㅇㅇ 대령'은 'ROKFV CIC Col Lee, Sang Yul', 즉 '주월한국군사령부 방첩대 이상열 대령'이다. 이상열 대령은 이미 작고해서 서명의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방첩대는 나중에 보안사를 거쳐 기무사로 바뀌는데, 당시 방첩대장은 군 동향 파악뿐 아니라 민간의 군사용역과 위문단 관리에서도 전권을 행사했다. 명목은 적으로부터의 군사 보안 및 공산주의자 침투 방지에 있었지만, 군수물자는 물론, 군사용역 등 이권과 관련된 모든 인허가는 방첩대 관할이었다. 한국군 파월 8년 동안 주월사 방첩대장은 이상열(66~69년)-김복동(69~71년)-김갑수(71~73년) 대령, 3명뿐이었다.

공교롭게도 2인은 김재규와의 인연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김갑수는 10.26 박정희 시해사건 당시 현역 준장으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비서실장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10.26 이후 연금을 당했다. 김복동(1933~2000년)은 전두환·노태우와 육사 동기이자 노태우의 처남이다. 이상열(1929~2006)은 1965년 당시 원충연 쿠데타 모의 사건을 윤필용 방첩부대장에게 밀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군을 떠나 중앙정보부에 들어간 그는 프랑스 공사 시절인 1979년 10월 당시 김재규 부장의 지시로 김형욱 납치-암살을 파리 현장에서 지휘했다.

쇼단 최유배-교민회장 이순흥 "신광수씨가 베트남 여자와 증기탕 운영"

기자는 당시 사이공 현지 사정을 알 만한 사람들을 호찌민과 서울에서 수소문해 만났다. 이들은 작고한 이상열-김복동 방첩(보안)부대장과 가까운 신씨 성을 가진 인물로 신광수(81)씨를 지목했다. 해병대 출신인 신씨는 63년에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냉동시설 수리업을 하다가 호놀룰루 미 태평양사령부(공군)와 기술용역 계약을 따서 65년 베트남에 진출해 72년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한국인 기술자 수백 명을 데리고 미 공군 수리 용역사업을 했다. 

당시는 미8군 쇼 무대에 한국 연예인을 세웠던 서비스 용역업체들도 베트남에 진출했다. 국가대표 권투선수였던 최유배(76)씨는 미군의 대표적 용역회사인 PHILCO FORD에서 근무하다가 인종차별을 한 미국인 작업반장을 때려눕히곤 그만뒀다. 이후 그는 악단과 가수 그리고 무용수로 구성된 유니버셜 쇼단을 이끌고 위문공연을 다녔다. 최씨는 "당시 신광수씨가 사이공 중심가에서 베트남 여자와 함께 'PHAN-Tan-Gain'이란 스팀 배스(증기탕)를 운영했다"고 말했다.

미국 원조기관에 근무하다가 1968년 고철과 비철 자재를 수출하는 회사를 설립해 베트남 생활을 시작한 이순흥(78) 전 교민회장은 1975년 4월30일 사이공 함락을 현지에서 맞이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1981년까지 억류되어 미처 철수하지 못한 한국교민 150명의 대표가 됐다. 

그는 억류 6년 동안 교민회장을 하면서 찌화형무소에 수감된 이대용 공사 등 공관원 8명의 뒷바라지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호찌민의 서울항공(베트남-한국 전문여행) 대표인 그는 "신씨가 사이공 시장의 부인이었던 베트남 여인과 쭈민장에서 스팀 배스를 운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언론인 안병찬(78)은 1962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기자를 거쳐 베트남 종군기자 및 사이공특파원(72~75년)을 지냈다. 75년 4월 30일 사이공 최후의 상황을 기록한 르포기사로 유명한 안씨는 "신씨가 운영했는지는 모르지만, 민간인들도 이용하는 쭈민장의 증기탕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안씨는 "정부 수립 이후 첫 파병으로 종군기자와 특파원들이 많았는데, 군에서 마사지 샵을 운영했다면 감춰질 일이 아닌데 당시 군 전용이라는 소문을 들은 바 없다"고 말했다.

70년대 초반 15개월간 주월사 보안부대에 근무하면서 특별 휴가자 및 위문단 관리를 맡았던 유재만(68, 아리랑명품관 대표)씨는 "당시 사이공 홍등가는 '전쟁특수'로 인해 아시아 매춘여성들이 집결한 거대한 '오픈 마켓'이었다"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한국군 전용 스팀 배스' 운영 가능성을 일축했다. 

첫째, 군에서 그런 시설을 운영하면 보안부대가 모를 수 없는데 당시 현지에서 그런 얘기를 한번도 들어본 적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당시 매춘 시장은 개방된 '오픈 마켓'이어서 군에서 운영하면 말썽이 날 수밖에 없는데 '한국군 전용 스팀 배스'나 '마사지 팔러' 문제로 주월사에 민원이 제기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강영남 'KOREA HOUSE' 대표 "증기탕 운영한 여성과 신광수씨 가까운 관계"

더 구체적인 팩트는 서울에 돌아와서 확인할 수 있었다. 66년부터 74년까지 사이공에 체류한 강영남(75)씨는 카투사 제대후 파월 기술인력으로 미군 용역회사 RMK와 PA&E에서 근무하다가 환전(역송금)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시내 중심가에 있는 주월사령부 근처의 6층짜리 건물에 'KOREA HOUSE'(코리아 하우스)를 차렸다. 거기에 호텔, 나이트클럽, 다방, 당구장 등을 운영했는데 한때 베트남 직원 150명을 둘 만큼 번창했다. 

'코리아 하우스'는 미군 보고서에 문제의 'PHAN-Tan-Gain' 스팀 배스와 함께 한국군이 미군 PX에서 빼돌리거나 한국에서 밀수한 주류를 공급하는 '블랙 마켓'의 온상으로 등장한다. 한국인을 상대로 일종의 종합 유흥시설을 운영했는데 증기탕이 없었냐는 질문에, 그는 마사지 샵을 한 적이 없고, 대신 보안대가 뒤를 봐줘 미군 부대에서 빼돌린 '슬롯 머신'을 설치해 사설 도박장을 운영하다가 단속에 걸린 적이 있다고 했다. 

서울 경복고를 졸업한 그는 기억력이 비상했다. 그는 "가게가 주월사와 300m 근처에 있었고, 주월사 장교 동향을 감시하는 보안부대는 100m 근처에 있어 장교들을 다 기억한다"면서 "당시 주월사에는 대령만 33명이 있었다"고 했다. 미군 보고서 기록에 따르면, 그의 말대로 이상열 대령은 '렉스(Rex)호텔 307호'에 숙소가 있었고, 후임자인 김복동 대령도 미군 대령 숙소와 극장이 있던 렉스호텔에 머물렀다. 그는 문제의 스팀 배스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 'PHAN-Tan-Gain' 스팀 배스를 기억하는가.
"쭈민장이라는 사이공 시내 중심가의 불란서 식민시대에 건축한 큰 건물이었다. 사이공 시장의 다섯 번째 부인이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맹호, 백마, 청룡부대 휴가병뿐만 아니라 필리핀 군인, 태국 군인들이 이용했다." 

- 그곳을 신광수씨가 운영했거나 뒤를 봐줬다는 얘기가 있다. 
"그 스팀 배스를 운영한 베트남 여자는 '스트롱 우먼'이었다. 사이공 시장의 다섯 번째 부인으로 경찰서장과도 다 통해서 신씨가 뒤를 봐줄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스트롱 우먼'과 신씨가 아주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에 그 증기탕을 한국인이 운영한 것으로 소문이 났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베트남에는 한국군 말고도 민간인들이 몇 만 명이었다. 이들이 씨를 뿌린 '라이 따이한'(베트남전 기간에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 2만 명이었다. 그 민간인 기술자들이 다 스팀 배스 고객이었다. 군인 전용이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말이 안된다. 그랬으면 다 소문이 났고 보안부대나 언론에서 모를 수가 없다."

미군 용역업체에 근무해 미군 부대를 수시로 드나든 강씨는 "베트남에서 한국군 휴가병들은 촐롱의 사창가와 증기탕 같은 유사시설을 이용했다"면서 "오히려 미군은 일부 사단들이 영내에 장병 복지시설로 '증기탕'을 운영했다"고 증언했다(이에 대해선 관련 기사 - "주월미군 영내에 증기탕 운영, 베트남 여성 50~60명 출퇴근" 참조)

이대용 공사 "쭈민장의 2층집 '스팀 배스' 압류 기사 본 적 있다"

구엔 반 티우 전 월남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주월남대사관 무관(63~66년), 정무공사68~71년), 경제공사(73~75년)를 지냈고, 사이공 함락 때 억류되어 찌화형무소에서 6년 더 생활(수감)을 한 베트남의 '살아있는 전설'인 이대용(90, 육사7기) 전 공사도 문제의 스팀 배스와 신광수씨를 기억했다.

"쭈민장에 2층집으로 된 스팀 배스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 군인들도 가고 민간인도 이용했다. 베트남 현지 신문에 기사가 나서 기억한다. 주택가인데 2층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서 옆집에서 고발해 문제가 된 것이다. '스팀 배스에서 매춘을 하고 있다'는 현지 신문의 고발기사를 봤던 기억이 있다."

1968~1969년 무렵이면 그가 현역 준장으로 중앙정보부 정무공사를 하던 시절이다. 정무공사는 군사정보를 포함한 모든 정보가 취합되는 자리였다. 그가 미 육군지휘참모대학에 다닐 때 친한 동료였던 티우가 나중에 베트남 대통령이 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티우와의 '핫라인'으로 삼기 위해 무관(3년)을 마친 그를 정무공사(3년)로 보낸 데 이어, 나중에 다시 경제공사로 보냈을 정도다. 

결국 그 때문에 베트남에 억류된 이대용 공사의 일화는 '월남 형무소서 온 쪽지… "각하, 저희들을 구해주십시오"'(http://news.donga.com/3/all/20141101/67585139/1)에 잘 담겨 있다. 

- 미군과 월남 경찰이 신광수가 운영한 스팀 배스에서 군수품을 압류했다는 얘기가 있다.
"신광수씨는 대사관에도 자주 왔다. 베트남에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들었다. (스팀 배스가 있던) 쭈민장이 주월사령부하고 가까웠다. 당시 미군이 쭈민장의 PX 물품을 압수했다는 얘기는 기억이 난다. 그런데 군에서 담당하는 일이라서 (정무공사인) 나는 개입하지 않았다." 

- 미군 조사기록에 보면, 당시 방첩부대장이 한국군 복지센터 물품이라고 서명한 서한을 신광수씨가 월남 세관에 제출했다고 한다. 물론 신씨가 서명을 조작하거나 위조했을 가능성도 있다. 
"미군이 압수한 것을 되찾기 위해 '가라'(가짜)로 쓴 거라면 방첩대에서 써준 것일 것이다. 서명이 사실이면 방첩부대장의 직인을 사칭했거나, 아니면 신씨와 가까웠던 방첩부대장이 신씨를 도와주기 위해 써줬을 것이다. 전시 상황이고 이국땅이라서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렇지만 후자라면 군이 잘못한 것이다."

신광수 "증기탕 운영자는 마담 바 사우(BA SAU)로, 당시 쉰 살이었다"

신광수(81)씨는 6.25 때 해병대로 참전해 63년에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냉동시설 수리업을 하다가 미 공군과 용역계약을 따서 1965~1972년 7년간 베트남에서 한국인 기술자 수백 명을 데리고 수리용역 사업을 했다. 다음은 호놀룰루에 사는 그와 전화통화한 일문일답이다.

– 일본 <주간문춘>에 베트남전 당시의 '한국군 전용 위안소' 기사가 났는데, 그 스팀 배스에 선생님이 관련돼 있다는 얘기가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다. 거기는 사이공에서 유명한 베트남 부인이 운영한 것이다."

– 제가 만난 분들은 그 베트남 부인과 선생님이 가까운 사이라고 말한다. 
"(잠시 침묵하더니) 잘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다. 스팀 배스는 나와는 전혀 관계 없다.."

- 당시 미군 CID와 월남 경찰이 스팀 배스를 수색해 PX에서 빼돌린 물품을 압수하니까, 이상열 방첩대장이 서한을 써준 적 있냐? 
"난 그런 일이 벌어진 것 자체를 기억 못한다."

- 이대용 공사는 그런 일(압수)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그분이 잘못 알고 계신 것이다. 당시 이 장군은 중앙정보부 공사였고, 이상열 대령은 주월사 방첩대장인데 겉으로는 공조하는 사이지만 속으로는 경쟁상대였다." 

- 이상열 대령과는 가까운 사이였나?
"이상열 대령은 물론, 후임 김복동 대령과도 가깝게 지냈지만 상호간 뭔가를 거래한 것은 없다."

– 혹시 스팀 배스를 운영한 베트남 부인의 이름과 나이를 기억하는가.
"마담 바 사우(BA SAU)로, 당시 쉰 살이었다." 

- 사이공 시장의 5번째 부인이었다는데..
"시장과 가깝게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낭설이다. 쭈민장은 내 숙소(가 있는 곳)이고, 스팀 배스 영업장은 '바오-탕'의 '판-탄-장'(PHAN-Tan-Gian)이다. 

– 장소와 시설이 미군 기록과 일치한다. 문제는 누가 운영했는가이다. 
"'바 사우'가 운영한 것이지, 나와는 관계는 낭설이다. 나는 미 공군과 용역계약을 맺고 한국인 기술자 수백 명을 송출해 베트남 전역에서 미 공군 수리용역을 했다. 그것이 내 본업이었다."

사이공에서 유흥시설을 운영한 강영남씨와 쇼단을 관리한 최유배씨, 그리고 호찌민 한인사회의 산증인인 이순흥 전 교민회장 등이 모두 1968~1969년 당시 증기탕의 압류품을 되찾기 위해 방첩대장이 서명한 서한을 제출한 'Mr. Shin'이라는 인물을 신광수씨라고 지목했다. 신씨는 이에 대해 '낭설'이라고 일축했다. 다만, 신씨는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증기탕을 운영한 베트남 부인의 이름과 나이를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남자였다.

* 3편으로 이어집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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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달 15-07-03 22:47
   
이쉬타르 15-07-04 12:01
   
베트남전에서 위안부 운영하거는 미군도 한거이고..사실 역사상 모든 나라 군대가 위안부하고 군인들이 거래를 해온거라 하나도 불법이거나 특이한게 아닌데 물론 정당하며 범죄도 아니고... 일본군은 범죄적 행동 였고 은근히 한국군을 욕보이고 결국 일본군 악독한 과거에다 면제 해주려는 일빠나 마찬가지의 행동인데

 한국 좌파들이 이제는 친일행동 까지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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