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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6-26 20:18
[일본] 총균쇠 증보판 완독.
 글쓴이 : 황미영
조회 : 3,168  


일본은 B.C 300년 한국의 고구려 혹은 백제인의 후손임이 확실한듯.
(현대 한국어의 기원인 신라어 보다는 고구려쪽 언어와 일본어의 유사성이 많음.
또한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의 후손, 신라는 고조선의 후손이 세웠으므로.)

B.C 300년 이후로 일본의 쌀 재배와 철기문화가 폭발적으로 증가되는데
기존 일본 원주민은 현재는 북해도로 밀려나 언어조차 말살된 아이누족이고
(얘네는 생김새부터가 이미 퉁그스계와 전혀 다르니.)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이주민이 기존 원주민을 대신해 열도에 뿌리내리게 된 듯.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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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좀와라 15-06-26 20:27
   
고구려와 백제는 고조선인이 아닌가요? 부여족은 신라와 연관이 없을까요? 이것 한국 고대사의 최대 쟁점입니다.
함부로 단정 지울수 있는 문젠 아니죠.
     
바람노래방 15-06-26 22:27
   
고구려, 백제, 부여, 신라 모두 (고)조선의 영역내의 국가들입니다.
부여족과 신라의 연관성이 한국 고대사의 최대쟁점이였나요??

신라부터 부여까지 동일 유물, 동일 생활 양식으로 같은 문화권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 열국사 연구"
          
비좀와라 15-06-26 23:05
   
단군조선이 신화라면요 고구려, 백제와 신라는 완전히 타 종족입니다.  그리고 한국인은 신라로 부터 시작되고 고구려와 부여는 타 종족국가가 되지요.  그래서 한국어의 근간은 한(신라)어가 되고 부여(고구려와 백제)는 타 언어가 됩니다.  그래서 언어적인 측면만 보면 사료에서는 통역관이 없이 삼국 의사 소통이 된다고 했는데 강단에선 안된다고 계속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단군(고)조선을 부정하고 이를 근거로 전개된 학설이 생각외로 꽤 많습니다.  뿌리와 줄기를 다르게 규정하니 종자가 바뀐다고 해야하나요.
               
바람노래방 15-06-27 00:43
   
무슨 말씀이신지?
단군조선이 신화라면요가 뭔가요?

(고)조선은 역사입니다.
(고)조선을 어떻게 부정할 수 가 있는지 궁금하군요.. 유물과 증거를 모두 다 폐기 처분하지 않는한 불가능한 가정입니다.
     
Windrider 15-06-26 22:55
   
비좀 더왔으면 좋겠네요.
바람노래방 15-06-26 22:25
   
축하합니다.
굿잡스 15-06-26 23:07
   
고구려가 부여 후손 어쩌고고 신라는 고조선 어쩌고의 이분법은 상당히 잘못된 사고군요.

우선적으로 부여의 존재는 사료적으로 기원전 2세기 경에 나타나서 거의 700여년 간 존속하다 고구려에 흡수됩니다.

그에 반해 고조선은 관련성이 높은  요서일대 기원전 2천년경의 하가층 하층문화에서부터 비파형동검이나

고인돌같은 거석 묘제 문화, 청동단추형 갑옷, 토성, 석성등의 여러 출토 유구들을 보면 분명 부여보다

훨씬 앞서 존재한 선대 국가임은 두말이 필요없군요.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분명히 주몽이 내려와 고구려 건국의 기반이 된 5부 재지 세력 중 비류국의 송양왕

과의 내용을 보면 옛 강역을 회복하는 걸 다물이라고 하고 이걸 건국 이념으로 합니다. 이말은 존속하고 있는

현 부여가 아니라 분열된 앞선 고조선의 옛강역을 의미한다고 할 수 밖에 없으며 고구려 평양을 선인왕검의 택

지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외에 고구려 각저총이나 장천 1호분등의 벽화에서 보이는 곰과 호랑이 등

여러 고조선 건국신화와 관련된 그림들이 묘사되어 있는 걸로 보았을때 고구려는 이미 고조선 재지

세력의 기반과 다물이라는 뚜렷한 계승 의식 및  인지하에서 건국되어졌다고 할 수 있군요.

(실제 고구려는 초기부터 한나라와는 격렬한 투쟁을 통해서 성장)

여기에 고조선 기반 아래 이루어진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등은 기본적으로 예,맥, 한등으로 우리 민족의

중축 세력들이지 따로 분리 이분화된 세력들이 전혀 아님.


그기에 아래에 가끔 보면 별 근거도 아는 것 없이 언어적으로 무슨 잽과 고구려,백제의 언어가 유사하지 신라는

예외 어쩌고 쳐하는 무식한 소리들을 하는데 백제와 신라가 따로 통역질 했다는 소리는 들어 본바도 없거니와

오늘날 고구려 언어 어쩌고 떠드는 이들은 실제 아는 것 없이 주절이는 식임. 왜냐? 지금까지 사료로서 고구려

관련 단어들은 상당히 제한적으로 남아 있어 무슨 풍부한 근거하에 고구려 언어가 어떻고 잽과 동일 어쩌고

이런 건 본인 혼자 자위망글이군요. 단지 전체적 전후 사료와 유적등을 보면

고구려 자체가 앞선 고조선의 거수국 중 하나로 보이는 부여등의 문화적 영향력도 받았지만

선대 고조선 재지 세력의 기반하에서 압록강 상류쪽에서 초기 건국되어 평양일대등

수백년을 지속하는 등이나 고구려인 스스로 삼한인식을 보이는 금석문이나 여러 사료를 보았을때

고구려의 언어 및 구성원은 지금의 우리 고대어와 지역적 방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특별하게 삼국이 언어적으로 소통에 무리가 있지는 않았다는게 학계의 전반적 정론들이군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시조혁거세거서간)

"(고)조선의 유민이 신라를 건국하였다"


(고구려 본기 제 5 동천왕 21년)

"평양이라는 곳은 본시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누군가는 왕의 도읍을 왕검이라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이곳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물리쳐 버리니, 말갈이 두려워 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 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굿잡스 15-06-26 23:11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국내 최초 고조선 문헌 발견
 

복 교수가 발굴한 문헌은 '고려사'에도 '단군편'이 별도로 있다는 것과 강화도 참성단 축조 시점이 당초 알려진 고려 후기가 아닌 고려시대 이전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작성한 '승정원일기' 영조44년 5월 22일자 기록에 몽골의 침략으로 도읍을 강화로 옮긴 임금 원종도 참성단에 올라 단군에 대한 제사를 지내거나 훗날 권근이 황제를 대신해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복 교수는 밝혔다.

그는 강화도 참성단 축조 시점이 고려시대 이전이란 사실도 찾아냈다.

그동안 국내 학계에서는 참성단 축조 시점이 고려가 몽골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하고 난 고려 후기에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 교수는 그러나 "이는 고려사의 기록만을 참고로 했기 때문"이라며 "고려말 권근이 우(禹)황제나 또는 창(昌)황제 때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낸 제문을 살펴보면 실제 축조된 시기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라와 백제에서도 1년에 두 번씩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확인됐다"며 "이 기록은 그동안 백제와 신라가 고조선의 후예였나 하는 의구심을 풀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http://www.nocutnews.co.kr/news/4092145
근초고왕 15-06-27 01:03
   
만약 신라어가 부여어족(고구려 백제어랑) 달랐다면 왜 지금도 경상도 지역이랑 타지역이랑 언어가 다르지 않죠? 특히 통일 이후에도 극도로 지방민을 차별하고 경주 그것도 오직 김씨만을 위한 김씨만을 위했던 신라가 잘도 타 언어를 신라어로 흡수시켰습니까? 여기서 중국/일본 일부 유저분들은 고구려 유민은 중국과 일본으로 모두 다가고 백제유민들도 일본으로 모두 이주했기 때문에 신라인만 남았다 이런 개소리를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면 후고구려/후백제는 어떻게 설명하실려고요? 더구나 신라어를 근간으로 했다는 것도 개소리. 신라는 250년도 안되서 망하고 옛 고구려 영토인 개성과 한양 그 일대로 1000년이 동안 정치적 수도로 입지를 다지고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는 둘째치고 조선에서도 두번째로 중요한 도시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이었음.. 자 그럼 정치성으로 따지면 고구려가 영향이 클까? 신라가 영향이 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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