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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5일 (목)

불교 고수님께 질문드려요..

차크라 조회 : 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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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을 통해 많은 공부를 하고있는 눈팅족입니다.

신앙이 아니라 마음공부의 수단으로 신약성경, 불경, 바가바드 기타 등을 읽고 있습니다. 
요즘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아상경(無我相經)을 공부하다가 의문나는 점이 있어 고수님께 질문을 좀 드려봅니다.


무아에 대한 질문입니다.

“수행승들이여, 색(것, 물질, 몸)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색이 나라면 이 색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색에 대하여 ‘나의 색은 이렇게 되라. 나의 색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색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색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색에 대하여 ‘나의 색은 이렇게 되라. 나의 색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이 말씀은 나의 것이라 여겼던 이 몸이 나의 통제권 밖에 있다면 나의 몸이 아니라는 것이고, 이는 수(느낌)도 마찬가지이고, 상(새김, 지각), 행(거님, 형성), 식 (알이, 알음알이)도 마찬가지이며. 한 마디로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무아(無我)라 한다고 해석이 됩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다섯제자들은 바로 수긍하였는데, 저는 잘 수긍이 되지 않습니다.
통제권 밖에 있더라도, 괴롭고 무상하더라도 그냥 그대로 '나'가 아닌가요?

당시 인도인들은 '아트만 사상(영원불멸의 자아가 있다)' 때문에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러한 사상이 없는 저 같은 타 문화권 사람은 어떻게 무아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요?

잘 지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마타 18-03-22 22:15
'아'는 궁극적 실재로 변하지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말의 나라는 것과는 좀 다른 의미입니다. 내 몸이 '아'라고 부를 만한 그 무엇이라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라고 늙고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변화하는 것이기에 그 무엇이라고 할  수가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나라 여기지만 시선을 돌린 그 순간 좀 전의 나는 이미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라는 것을 만들어 그것으로 나를 삼고삽니다. 그걸 일러서 아상이라 부릅니다.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을 영속하는 자아라고 여기며 그 아트만이 윤회의 주체라 여깁니다. 영혼같은 것도 그러한 것이지요. 그나마 아트만과 영혼은 변하지않고 영속하기라도하지만-만약 있다면-, 몸은 그것조차 안됩니다. 그래서 공하다고 합니다.
차크라 18-03-22 23:15
'아'는 궁극적 실재로 변하지않는 것을 말합니다. 라고 하셨는데 ,
이는 '아트만'이나 대승불교의 '참나'를 의미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이해가 됩니다만, 형이상학적인 영혼이나 참나를 인정해야만 하는 점이 저로서는 어렵습니다.

초기불교는 윤회를 제외하고는 형이상학적인 부분을 거론하지 않아서 받아들이기가 쉬웠는데 형이하학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 없나 싶어서요..ㅎㅎ

석가모니 부처님의 경전은 형이하학으로 설명하시는 경이라 비 신앙인이 받아들이기 좋더라고요..
사마타 18-03-23 00:02
아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몸이거나 또는 마음이거나 등등을 '아'라고 받아들입니다. 이정도만 되어도 아트만은 아닌 셈이지요.

힌두교는 아트만이 없는 개체까지 거론했지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까지는 아트만으로 윤회한다고 보았지만  수트라, 즉 불가촉 천민은 아트만이 없는 존재라 보았습니다. 막 죽여도 됐지요.

부처님은 윤회를 인정하셨지만, 윤회의 주체를 부정하셨습니다. 당시 인도에서는 혁명이었겠지요. 불교의 윤회는 업, 업의 표상, 태어날 다음 세상에대한 표상으로  생겨난 재생연결식으로 윤회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고정된 자아도, 마음도, 알음알이도 아닌 것입니다. 소위 업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그것입니다. 문제는 그것도 계속 변한다는 겁니다. 무아지요.

그냥 뭉뚱그려 받아들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업으로 윤회하니 업을 깨끗이하면 다음 생에 더 좋은 세상, 더 나아가 해탈도 가능하다는게 불교의 기본 교리입니다. 대신 청정한 삶을 추구해야겠지요.

업은 의도로 만들어집니다. 마음과  몸의 암시나 행동, 말의 암시나 행동이 그것을 만듭니다. 몸과 말에 더불어 마음조차 해로운 과보를 짓지않는 그런 청정한 삶...그런 삶을 살아가야한다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 지향점입니다.

참, 대승의 참나는 존재하거나 개념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 즉 마음도 알음알이도  모두 사라진 그 어떤 것을 말합니다. 문자로 보여지는 나를 생각하시면  그건 참나가 아닙니다.
차크라 18-03-23 00:17
아트만이 아니면 참나인가요?

윤회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서, 말씀하신 '아'가 대승의 '참나'와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제가 이것만 명확히 알아도 공부에 많은 진척이 있을 것 같아서 집요하게 질문드리니 보시한다고 생각하시고 답변해 주시길 바랍니다. ^꾸벅^
사마타 18-03-23 00:31
참나는 무아를 말합니다. 나라 할것이 없음을 깨닫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참나라고 합니다.

아트만같은 존재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라할 것이 없는 줄을 안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를 말합니다.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더군요.

나라할 것이 없으며, 그 없는 것에서 세상을 지혜로 관조하니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참나는 결국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며, 그것이 특정된다면 곧 참나가 아닙니다.
차크라 18-03-23 01:04
명확한 의견 감사드립니다. 수행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저도 참나로 이해하면 무아가 이해가 되었어요.
근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참나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으셨고, 초기불교 하시는 분들은 참나의 존재를 인정하시지 않으시니까요.

저도 '참나'의 형이상학적인 객체를 빼고 이해해보고 싶었어요~~
타이치맨 18-03-22 23:01
사마타님의 댓글에 보충하여 설명드리자면
현재 나를 이루고 있는 몸과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몸과 마음의 연기에 의해 일시적으로 나라는 생명이 존재하고 있지만, 몸과 마음의 결합이 사라지면 몸과 마음의 어디에도 불변의 뭔가가 있어서 윤회할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오온을 설하심은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뿌리깊은 본능(유신견)을 타파하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생명체로서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두뇌활동이 나의 몸을 공간속에서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의 위치, 자세, 크기 등을 인식하는 그 기본활동은 내 밖의 대상과 나를 분리하여, 내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착각을 만들어냅니다. 특히 어떤 마음(영혼)이라는 게 있어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생각을 유신견이라 하는데 참 없애기 어렵습니다. 이 유신견을 깨뜨려야만 비로소 깨달음의 길로 들어선다고 합니다.
차크라 18-03-22 23:47
답변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답변을 읽다가 또 다른 의문점이 있어 질문드립니다.

유신견은 에고(Ego)를 뜻하는 것인데, 이것이 없으면 현상계에서는 살 수 없지 않나요?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 이 현상계를 살아가는데, 이를 깨트리려면 출가하여 산 속에 있어야면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부처님이 출가해야만 나한이 될 수 있다고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아를 깨치려면 유신견(에고)를 버려야 하는데 이는 현상계를 버려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나요?

이상 어리석은 질문이였습니다.
사마타 18-03-23 00:22
좀 끼어들어도 됩니까? ㅎㅎ

현상계, 즉 이러한 욕계 세상을 탈출하는 것이, 더 나아가 색계, 무색계 마저 벗어나는 것이 해탈,열반이고 그  방법을 팔만사천이나 되는 경전에서 주구장창 이야기합니다.

현상계에서 욕망을 갈애하며 사는 수밖에 없는데 그런 해탈의 마음을 내어서야 어떻게 현세를 살겠습니까?하는 질문은 이 현상계를 벗어나기 싫다는 역설이지요. 

그렇다면 아직은 현상계, 즉 욕계의 즐거운 감각적 욕망과 괴로움을 더 겪고 집착도 해야지요.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다 때가 돼서 떠나고싶을 때 경전을 다시 들여다보면 달리 와닿겠지요.
차크라 18-03-23 00:48
방법은 대승경전에 잘 나와 있더라고요.
윤회를 거부하고, 보살이되어 중생심을 갖고 현상계에서 영원히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지요.

제가 질문을 드린 이유는 가생이 게시판에는 초기불교를 잘 이시는 분들이 활동하시는 것 같아  초기불교 관점, 즉 석가모니 부처님 관점에서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초기불교를 공부하다보니 매력적인 것이 신, 천국, 지옥 뭐 이러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없는 사안들을 거의 빼버리고  현상계에서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만을 가지고 설명한다는 점이였습니다.

저한테는 종교경전이라기 보다는 철학으로 보였습니다.
이러한 명확한 초기불교 관접에서 이해하고 싶어 질문드렸습니다.

불편하셨다면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사마타 18-03-23 00:53
전혀요. 도반을 만난다는 것처럼 기쁜 일이 또 어디있을까요?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길을 걷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언제든 궁금한 점 있으면 글 올리세요. 제 능럭을 벗어난 것이라면 스님께 물어보고서라도 답을 해볼께요. ㅎㅎ
유수8 18-03-23 00:11
갠적인 생각엔..

인간의 몸 자체가 지수화풍 사대로 부터 와서 만들어진 존재이며
또한 이로 인해 안이비설신의의 여섯가지 감각으로 인하여 팔만가지번뇌가 생성하며
이 번뇌생성하는 것을 나라고 믿는것에 대한 미혹함을 말함이 아닌가 싶음.

바라문교의 아트만.. 은 진실된 나... 지수화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참 나를 말함인듯 한데..
그건 소위 범아일여를 말함이지만 이건 머....;;

지수화풍으로 생성된 몸에서의 나라는 존재가 아닌 지수화풍이 사라져도 존재하는 나라는 존재..
나라는 형체의 존재가 사라졌는데 내가 존재한다는것은 논리로서 불가..

결국.. 바라문교의 아트만은 불교에서의 불성과 비슷한걸 말함인듯한데..
인간이 본래 누구나 지니고 있다는 참나... 불성에 대한것을 말함이 아닌가 싶음.

그걸 논한다는 자체가 이미 깨달은 존재임....;;
논리로서 아무리 내세워봐야 입증 불가한 것에 대한 부분이라..
이것은 수행으로 체험할 문제이지 문답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님.
차크라 18-03-23 02:50
그렇군요.
수행을 통해 체험을 얻어 증득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네요.

명상으로 오직 한 가지 생각만 하다가 그것 마저 놓으면 잠시나마 무념의 상태가 오긴 하는데 이를 계속하다 보면 성과가 있으려나요? ㅎㅎ

선종에서는 참선을 통한 체험을 중시하나, 교종에서는 경전연구를 중시하니 참선과 함께 경전의 해석을 통한 수행도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질문을 드렸습니다.

답변 정말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골가생 18-03-25 23:44
제가 주워들은 지식으로는
초기 불교하는 분들이 참나 라는 단어에 경기를 일으키는데
부처님은 에고의 나를 부정하셨지 참나에 대해서는 형이상학적인 질문과 마찬가지로
정의를 내리지 않은걸로 압니다.
대승불교의 참나에 대한 설명은 부처님의 열반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에고적인 특성이 사라지고 남는 자리는 초기불교든 대승불교든 기독교든 인종과 시대를
막론하고 같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현재 인구가 60억이면 60억 모두 마음의 구조는 동일합니다.
그들이 어떤 수련을 하든 어떤 종교를 믿든 에고를 초월해 도달하는 자리는
어떤 이름을 붙이든 같은 자리라는 겁니다.
60억 인구는 모두 같은 운영체제를 사용하는데 다만 사용하는 소프트웨어가 제각각인 셈이죠.
시골가생 18-03-25 23:52
그리고 대승불교를 초기불교의 발전된 형태라기 보다는 완전히 다른 사상으로 보는 관점도 많더군요.
전혀 지향하는 방향이 다른데, 대승불교가 초기불교와 완전히 결별하지 않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권위를 계승하면서 초기 대승경전들을 보면 일관성이 결여되는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화엄경 등 후기 경전들을 보면 초기불교와는 확연히 다른 참나->법공(색즉시공,공즉시색)->6바라밀
체계가 정립됩니다. 대승불교의 부처님은 초기불교의 부처님과는 완전히 다른 가상의 개념이죠.
시골가생 18-03-26 00:06
글쓴님이 의문을 표하신게 에고와 현상계가 어떤 의미가 있는냐인데 대승불교에서는 참나 못지 않은 의미를
지닙니다.  처음에 참나에 들때는 현상계는 실재하지 않고 참나만 존재하지만 참나 상태에서 반야가 깊어지면
참나와 현상계를 구분하는게 무의미해지고 모든게 통으로 하나다(범아일여) 라는 지혜가 생긴다고 합니다.
실제 선정이 깊어지면 나와 남, 나와 현상계를 구분짓는 분별의식 자체가 사라지고 통으로 알아차리는
의식만 생생하다고 합니다. (이때 의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고하는 의식이 아니라 거울이 비추는 속성이
있듯이 가치성이 개입되지 않는 순수한 의식의 기능성을 의미합니다.)
대승에서 현상계는 참나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참나와 구분하기 어려운 참나에서 나툰
창조물, 아바타?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시골가생 18-03-26 00:14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와는 정말 너무나 다른 사상입니다.
같은 용어들을 쓰고 있고 열반(참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동일할뿐
그 이후는 가는 길이 완전히 다르죠.
초기 불교의 아라한들은 열반에 들고 그 상태에 머무르는게 지상 목표이고,
그래서 그 경지를 깨지 않도록 세속을 멀리하고 숲속으로 들어가지만
대승불교는 참나를 깨치기 까지는 초기불교와 동일하지만 참나를 깨치는게
수행의 종점이 아니라 6바라밀의 긴 여정을 향한 수행의 제대로된 출발점이 된다는겁니다.
대승불교의 목표는 참나를 깨치고 참나와 에고, 참나와 현상계가 둘이 아님을 알고
참나의 법성을 에고와 현상계에도 구현해서 현상계를 불국토로 만들고 한사람 하사람이
깨달음을 얻은 보살이 되어서 온 우주를 화엄의 장엄한 꽃으로 수놓자는 지극히 능동적이고
현실참여적인 사상이죠.
akrja 18-03-26 01:06
무아가 무엇이냐?  글쎄요 무아가 무엇일까?

 경에 이르길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둘이 아닌것이 무엇입니까?

물으니

한 이가 답하길ᆢ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니다 라고 했으며

한 이는 안과 밖이 둘이 아니다 하였으며

한 이는 오고감이 둘이 아니다 하였으며

한 이는 생사가 둘이 아니다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마지막에 한명에게 물으니 이 질문을 받은 이는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

 
이  인물이  유마거사 입니다


마음은 거울이라 오직 비출뿐이다  비어있어 비어있다란 자각도 없음이 곧 비어 있음이라 

비추는 대상이 없다한들 이 비추는 근원의 존재의 유무를 어떻게 단정할것인가?

있다고 한다면 바른도가 아니요 없다고 한다면 그것또한 바른도가 아니다

오직 지금 이순간 필자는 무슨 답을 하였는가?  답을 알고자 하는가?

지금 시간 오전 1시 6분
지니지 18-04-02 11:50
얼음이 녹아서 물 한방울이 되었습니다.
얼음이 죽고 물이 태어났습니까?
좀 이따가 물이 증발해 없어졌습니다.
물이 죽었습니까?
좀전에 있었던 얼음도, 물도 이름이 얼음, 물일 뿐 어떤 특정한 실체가 없습니다.
물과 얼음은 인연에 의해 그 이름에 상관없이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잠깐 인연에 의해 나타난 '몸뚱이'가 '나'라고 집착하면 진실을 보지 못하는 장님과 같아집니다.
이런 착각들(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서 벗어나야 실상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어려울 것이 전혀없고 너무나 당연한 말씀만 하셨습니다. 한자나 빨리어로 되어있어 어려워 보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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