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등신이 모르는 마오쩌둥의 실체
이 같은 마오쩌둥의 발언으로 볼 때 마오쩌둥의 일본 감사 발언은 충분히 납득할만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2008년 베이징시 당국의 기관지 ‘베이징일보’는 “마오쩌둥의 일본 침략 감사발언을 정확하게 이해하자”라는 문장을 게재해, 마오쩌둥이 말하는 ‘감사’는 ‘경쟁자에 대한 감사’와 같은 의미로 마오쩌둥식 발언의 습관 및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천톄젠 연구원은 항일 전쟁사의 전문가 장전쿤(張振鵾)의 ‘감사는 감사다’라는 문장을 인용해, “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국민당군을 패배시켜 점령지를 확대해 갔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이를 두고 ‘일본이 우리를 도왔다’라며 늘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즉 천톄첸 연구원은 감사라는 표현은 일시적인 착상이나 유머가 아닌 마오쩌둥의 진심어린 표현으로, 마오쩌둥의 ‘혁명 공리주의’에서 나온 말이라고 지적했다.
2. 일본 덕분에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다!
공산당은 비록 항일(抗日)이란 큰 깃발을 높이 들었지만, 전방에서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으면서 후방에서는 도리어 지방군과 유격대를 흡수하였다. 평형관(平型關) 전투를 비롯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몇 차례 항일전투를 제외하고 공산당의 항일전투성적은 말할 것이 없다. 다만 공산당의 세력을 확대하고 일본이 투항할 때 항복한 일본군을 빼앗아 자신을 확대하여 90여만 명의 정규군과 200만 민병(民兵)을 지닌 강대한 역량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항일의 정규전투는 전부 국민당 군대에게 남겨두어, 국민당은 전사한 장군만 200여 명에 달했으나 공산당 지휘관은 거의 손실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의 교과서는 줄곧 국민들에게 국민당은 항일하지 않았으며 공산당이 항일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지도했다고 말해왔다.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항일전쟁은 1931년 9.18 만주사변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14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국민당은 1932년에 ‘1.28 쑹후(淞滬)항전’을 했고, 1933년에는 장성(長城)항전을 진행했다. 그러나 중공은 도리어 9.18사변이 발생한 두 달 후, 장시(江西)에 할거정권을 세웠다. 중공이 줄곧 ‘8년 항전을 견지했다’고 말하는 자체가 바로 1931년부터 1937년 사이에는 전혀 항전에 참가하지 않았음을 자백하는 것이다.
‘바이퇀 대전(百團大戰)’은 중공 내부에서 도리어 당 중앙의 전략방침을 어긴 것이라고 여기며, 전공을 세운 펑더화이(彭德懷)는 도리어 ‘죄를 지은 장수’의 하나가 되었다. 1959년의 루산(廬山)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다시 한 번 이 사건을 가지고 펑더화이를 공격했다. “일부 동지들은 일본이 땅을 적게 차지할수록 좋다고 여기는데, 나중에야 인식을 통일했다. 일본이 땅을 많이 점유하게 해야, 애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장제스의 나라로 변해 버린다.” “우리는 바로 국민당과 일본인이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게 해야 하며, 우리는 그 속에서 발전해야 한다.” 1972년, 마오쩌둥은 중국을 방문한 일본의 다나까 가꾸에이(田中角榮) 수상에게 “당신들은 사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오지 않았더라면(침략하지 않았다면), 우리 공산당이 정권을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중공이 적극적으로 항일했는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일본을 지지하여 중국을 침략하게 했는지는, 마오의 대답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인민영웅기념비’에 새겨진 비문도 항일에 대한 중공의 태도를 잘 설명하고 있다. “3년 이래, 인민해방전쟁과 인민혁명전쟁 중에서 희생된 인민 영웅들은 청사에 길이 빛나리라! 30년 이래, 인민해방전쟁과 인민혁명 중에서 희생된 인민영웅들은 영원히 길이 빛나리라!” 여기서 분명한 것은 중공의 진정한 적은 국민당이었고, 8년 동안 중화민족이 외부의 침략에 저항해 목숨 걸고 피 흘려 싸운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중앙 당사(黨史)연구실, 국가 당안국(國家檔案局)에서 운영하는 ‘민족 혼’사이트에 나열한 ‘항일전쟁시기’ 희생자 명단 중, 절대 다수는 모두 국민당과 전투에서 사망했다. 단지 사망한 시기가 ‘항일전쟁시기’였을 뿐이다. 중국 민중들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전투영웅 둥춘루이(董存瑞), 추사오윈(邱少雲), 황지광(黃繼光) 등도 항일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은 없다.
중공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은, 마오쩌둥에 의해 “산 아래서 복숭아를 딴다(下山摘桃子)”고 비웃음을 당했던 장제스 국민당 정부가 1937년부터 1945년 사이에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전쟁터에서 일본군과 소형전투 총 3만 8,931차례를 치렀고, 중대한 전투 1,117차례와, 큰 전투 22차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희생된 고급장교만 200명 이상이고 사망자수는 330여만 명에 달한다. 타이얼좡(台兒莊), 쑹후(淞滬), 창사(長沙), 두산(獨山) 등 정규전쟁과 상하이(上海), 젠차오(筧橋) 등 공중전에서 일본군을 크게 타격했고 최종적으로 간고하고 탁월한 노력을 통해 나라를 지키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공산주의 이상이 이미 사람마음을 미혹시키는 모든 능력을 상실한 오늘날, 중공은 민족주의 깃발을 자주 사용하면서 스스로 중화민족의 정통대표라고 자칭하기에, 절대로 “항일전쟁의 튼튼한 기둥”이라는 월계관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의 진상은, 전국 인민이 온 힘을 기울여 외부 침략자에 대한 반격이 가장 필요할 때, 중공은 도리어 수치스럽게 조국과 인민을 배반했다.
출저 -구평 공산당 2평-
3. 일본군이 난징을 함락시키자 마오쩌둥은 기뻐서 술에 취했다! 난징대학살 때 술이나 처 먹은 인간
毛沢東は延安で、日本軍が南京を陥落させたニュースを聞いて大喜びし、祝杯をあげ大酒を飲んだ。
모택동은 옌안에서, 일본군이 난징을 함락시킨 보도를 접한 뒤 크게 기뻐하며 축배를 들며 많은 술을 마셨다.
이 부분에 관한 출처는 『歴史通』2013年1月号「毛沢東は日本軍と共謀 阿片で巨利!(모택동은 일본군과 공모, 아편으로 큰 이익)」에서라고 합니다.
"사실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첫째, 장제스의 힘을 약하게 해 주었다. 둘째, 우리의 공산당 지도부의 근거지와 군대 확충을 도왔다. 항일전쟁 전, 우리 군대는 30만명에 달했지만, 우리 스스로 저지른 실수로 불과 2만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과 8년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 군대는 120만명으로 늘었다. 이것이 큰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모택동 외교문선-
4. 통일을 가로 막은 중공 마오쩌둥
중국이 6·25전쟁 당시 100만 대군을 투입한 것은 통일 한국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였다. |
중국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불편한 일이지만, 국제정치학적·지정학적으로 올바른 일이다. 국제정치는 힘의 정치(power politics)이며 힘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가 분단 상태에 있는 것이 중국에는 훨씬 좋은 일이다. 국제정치 이론은 이웃에 강한 나라가 출현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 중국이 1950년 늦은 가을 100만 대군을 한국전쟁에 파병했던 것은 통일 대한민국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였다. 중국은 자국 청년 60만명의 희생을 통해 한국의 통일을 막았던 것이다.
지정학은 중국의 행동을 더욱 정당화시킨다. 중국은 통일된 한반도를 마치 중국의 뒤통수에 붙어 있는 망치와 같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한반도 상태는 망치의 쇳덩어리 부분과 나무자루 부분이 단절된 상태다. 중국은 아무리 골치가 아파도 북한이 존재하는 것을 원한다. 중국은 대한민국이 통일을 이룩하는 것은 물론 북한의 통일도 원하지 않는다. 국제정치학의 영원한 진리인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철칙은 통일된 한반도는 결국 중국과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해양국가와 연계될 수밖에 없을 나라로 보는 것이다.
5. 마오쩌둥의 쓰레기 같은 망언들
"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의 행태에 대한 보고를 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