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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5일 (목)

19세기 말 놀랍도록 선진적인 흔한 일본 풍경

굿잡스 조회 : 6,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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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라시 Jap~ㅋ

굿잡스 21-08-31 20:02
1878년 일본을 여행한  gustafv kry torner가 남긴 동양기행기 에서 당시 일본인의 여러모습중 인상깊은 부분과 특히 수도 도쿄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


■ [실제로 가면 기대한 것만큼 실망하게 된다  도쿄는 큰마을 정도의 느낌이다 그리고 도시에 널려있는 빈약한 목조주택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왕의 거처도 궁전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성벽같은 모습에 매우 초라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심각한 모습은 바로 통치자의 행태이다 바로 민족의 낮은 수준을 그대로 방치하고 근절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의 발전은 가장 핵심 공중도덕에 있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공중도덕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옷을 벗고 다니고 아무데서나 소변과 대변행위를 한다. 한마디로 공중도덕이 완벽히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인의 사고방식은 유럽인과 너무 차이가 난다 일본은 방문하는 사람들은 유럽과는 일거수 일투족이 전혀 다른 모습들을 늘상 목격하게 될것이다 어떤 도시든 마을이든 목욕탕이 있고 그곳에서는 어김없이 남녀가 한곳에서 목욕을 하는 모습을 발견할수 있다

그리고 특히 일본의 시골은 모두가 전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너무나 비참한 모습들이다] 


■ 반대로 한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대명사로 알려진 이자벨라의 조선의 수도 즉 한양에 대한 구절

[지금 서울은 어느나라의 수도 에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며 자신만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근대 이전 전통문화에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간직하고 있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6111


대한제국 시기 만들어진 벽돌식 하수관

https://news.v.daum.net/v/20121025154116473


오늘날 도시 배수로와 큰 차이가 없었던 신라 서라벌의 도시 인프라.


유럽 최대 도시라는 로마보다 더 컸던 세계 4대 대도시 중 하나였던 100만의 거대 신라 서라벌.

서라벌은 바둑판 형태의 정렬된 계획도시 아래

일정 블럭의 방이라는 각구역내 공간에는 각 집안내 우물 옆에 배수로가 집밖 담장의 소배수로를 통해 다시 대배수로 연결되어 있는게 확인되군요(길도 마차가 단니는 도로와 사람이 단니는 인도가 구분)

천년의 신라 수도였던 서라벌은 남북국시대 전성기를 맞으며 지금의 수도 서울 광역시(거대 메트로 폴리탄)처럼 지속적으로 팽창.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unayoon715&logNo=220882810189&proxyReferer=https:%2F%2F


서라벌 디지털 복원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2096873
너만바라… 21-08-31 20:02
요게 진짜 일본인가?
굿잡스 21-08-31 20:03
1897년 봄 서울 거리의 모습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1896년 가을부터 정부가 주도한 도로정비사업의 결과 서울의 길은 넓혀지고 깨끗해졌다. 근대적 도시, ‘개명한’ 도시의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종로와 같은 큰길들은 물론 동네동네의 작은길들도 정비되었다. 구한 말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좁고 불결한 골목길들도 깨끗해졌다.


"지금 사대문을 통하여 다니는 큰길은 정부에서 수리하거니와 각 동리의 거리와 작은 골목길은 그 동리에서 수리하되 길과 문 앞을 편리하고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내부 훈령을 받들어 방을 붙이니 인민들은 다 알고 준행하여 어김이 없게 하라"
(「독립신문」 1896년 10월 20일)

라고 한성부에서 동네마다 방을 붙였다.

실제 도로정비사업의 결과가 동네의 골목골목들까지 어느정도 미쳤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서울을 방문했던 영국인 비숍여사가 “서울은 많은 면에서, 특히 남대문과 서대문 근방의 변화 때문에 예전과는 다르게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도로들은 최소한 17미터의 폭으로 넓혀졌고 그 양쪽에는 돌로 만들어진 깊은 경계가 있으며 그 중앙은 돌의 후판(厚板)으로 메워졌다. 그 도로들이 있던 자리는 원래 콜레라가 발생했던 불결한 샛길들이 있던 곳이다. 좁은 오솔길은 넓혀졌고, 진흙투성이의 시내는 포장도로에 의해서 사라지고 없었다.”(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고 놀란 것으로 보아 눈에 뜨이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은 틀림없다.

서울의 거리 풍경을 이렇게 급격히 변화시킨 도로정비사업은 1896년 9월말 내부대신 박정양의 이름으로 공포된 내부령 제9호 「한성내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내부령 제9호는 종로와 남대문로의 길폭을 55척으로 새로 정하고 가가(假家)를 정비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근거로 간선도로는 정부주도로 정비되었으며 앞서 「독립신문」의 기사가 전하는 바와 같이 일반의 소로들은 시민들이 자기 집 앞을 정비하는 방법으로 정비되었다. 당시 한성부 판윤이던 이채연이 이를 앞장서 지휘했고 경무청 소속 ‘순검’들이 도로와 가가의 정비를 단속하며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도로정비사업과 함께 서울 최초의 도시공원이 등장했다. 1896년을 전후한 시기에 원각사지 10층 석탑 주위에 빽빽히 들어서 있던 민가들을 철거하고 조성된 탑골공원이 바로 그것이었다. 도시공원은 근대도시의 또 하나의 상징적인 표상이었다. 왕을 위한 궁궐내의 정원과는 달리 도시의 시민을 위한, 공공을 위한 공간이 도시공원이기 때문이다. 공원의 또 한가지 실질적 기능은 도시의 허파로서 시민을 위해 도시의 위생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1896년 10월 「독립신문」의 논설은 공원의 도시위생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서울 성곽 주위에 나무를 심어 공원을 조성하자는 흥미로운 제안을 하고 있다.


“지금 성안으로 다니며 나무를 모두 돌아가면서 심으면 몇 해가 안되어 훌륭한 울타리가 될 것이요 무너지고 허술한 성을 숨길 것이요 또 보기에도 매우 좋을 것이다. 다만 보기에만 좋고 모양만 나을 뿐 아니라 성안 성외 인민의 위생에 대단히 좋을 것이다. ...... 외국은 동리마다 공원이 있어 나무를 많이 심는지라 조선도 다른데 공원을 만들기 전에는 성가로 다니며 나무를 심게 하는 것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많이 있을 터이니......”

19세기 후반 김옥균, 박영효에서 박정양, 이채연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위생개선, 도로정비의 움직임들은 일제강점 이전 우리 손으로 이루어가려 했던 자주적인 근대도시 서울의 건설, 우리나라 근대도시계획의 태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서구에서도 근대도시계획은 산업혁명 이후 도시인구의 증가와 환경악화로 인한 공중위생문제로부터 태동하기 시작했으며, 19세기 중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파리에서 시행된 도로정비와 공원의 조성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도시개조사업을 거쳐, 19세기 말에는 독일을 중심으로 제도화된 도시계획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발전되어갔다. 19세기 말의 조선에서도 일본을 다녀온 김옥균이나 미국을 다녀온 이채연, 그리고 영국인 맥리비 브라운을 비롯한 외국인 고문들을 통해 구미의 상황들이 소개되었을 것이다.

■ 1897년 봄 서울의 모습을 일신시킨 도로정비사업, 탑골공원 등 공공을 위한 도시공간으로서의 공원의 조성 등 일련의 근대도시 서울을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들은 근대도시계획의 세계적인 움직임과 그렇게 큰 시간차 없이 진행된 것이었다.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AGE&search_div_id=CP_AGE004&cp_code=cp0434&index_id=cp04340032&content_id=cp043400320001&print=Y


1879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고 불과 8년 만에

대한제국 건청궁에서(1887년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전등을 사용 한성전기를 세우고

전기 전차 전화등 근대화의 개혁을  급속히 추진하게 되군요

이미 대한제국은 천여년 전부터 선진 중앙집권 체재를 완비해 놓고(1600여년 전 이미 문무겸비 귀족 뿐 아니라 세계 최초 서민 교육 기관인 경당을 설립

중세와 근세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이미 전국적 교육 인프라를 구축. 실제 대한제국은 전국적 근대 교육령을 발표하면서 이런 기존 서당등 전국 기관들이 기존 교육에 서양교육  과정도 병행하면서 근대 전문 고등 대학교도 빠르게 설립 진행 )  있다보니 이른 결심만 섰다면 근대 산업화든 모든 급속도로 더 빠르게 진행이 가능했을 것이군요.
HHH3 21-08-31 20:04
동그라미 쳐진 건 똥입니까?
굿잡스 21-08-31 20:05
■ 미개한 Jap의 오랜 노상방뇨변 문화.

과거 왜국에서는 나라(奈良,710∼794)시대나 헤이안(平安,794∼1192)시대까지만 해도 수도(首都)나 도시라고 해봐야 농촌과 별 차이 없이 공지(空地)가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변소를 이용하는 일 없이 집 주위에서 방분, 방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문명국이었던 중국, 한국과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이들 나라의 풍습이 전해지기 시작했고 이때 중국의 호자(虎子),한국의 요강(尿岡)등이 들어와 일부 왜국 귀족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순소로(糞小路)와 노방변소

■ 19세기 근세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은 노상에서 방뇨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

당시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노상에서 방뇨하는 일본인의 모습을 인형으로 만들어 자기 나라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교토(京都)에는 '분소로(糞小路)'라는 거리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이 거리가 바로 화장실처럼 누구나 가서 대. 소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거리에는 언제나 오줌, 똥이 쌓여 있어서 누구든 이 거리로 들어갈 때에는 신고 갔던 신발을 벗고 입구에 놓여 있는 굽 높은 나막신으로 바꾸어 신고들어가야 했다고 한다. 그후 왜왕이 우연히 이 거리를 지나다 그 내력을 듣고 거리 이름을 바꾸도록 지시해서 오늘날의 금소로(錦小路)가 되었다.

■ 메이지(明治)3년(1870) 일본 정부는 '방뇨 취제의 포고'를 내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요코하마 시내에는 83개소의 노방(路傍)변소가 만들어졌다.

이 노방변소는 일본 최초의 공중변소였는데 큰 변조를 땅에 묻고 그 주위를 판자로 막은 어설픈 것이었다. 

일본 정부의 노력에도 불고하고 노상방뇨의 
풍습은 쉽게 근절(根絶)되지 않았다.

.

■ 서서 오줌 누는 일본 여성

에도(江戶,1596∼1686)시대 일본 교토(京都)의 여자들은 길가의 소변통에 허리를 구부리고 서서 예사롭게 소변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풍습은 메이지 시대 말기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염집 아가씨. 하인을 거느린 상류층 부인들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도로변 벽을 향해 엉덩이를 내놓고 선 채로
오줌을 누면서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두고 비웃는 사람도 없었다.

https://m.blog.daum.net/dandakhan/16615018
대당 21-08-31 20:15
대당 21-08-31 20:15
냐옹냐옹 21-08-31 20:18
기저귀같은거만 차고 다니고, 아프리카 원주민같네요.
안알려줌 21-08-31 20:25
저 웃통 벗고 일하는 습관이 일본 패전후에도 남아 있었다고 ..

일본이 서구 본 받자고 자국 과거 혐오하던 1900년대 전후에 그렇게 자국 악습 많이 없앨려고  노력.

1920년대 식민지및 유럽 1차대전 영향 특수 같은 걸로 환경이 많이 나아지고

1950년대 미군정 영향하와 국민의 소득 분배가 확실히 좋아지면서

1960년대에 지금의 일본의 그 이미지가 확립
redshark 21-08-31 20:49
이런것들이 힘 좀 생겼다고 제국주의를 부르짖었으니.....
이름없는… 21-08-31 21:08
일본인들은 이불도 없었음. 겨울에도 그냥 옷입은 채로 잠을 잤다고. 한반도에서 그랬다가는 얼어죽었지.
하야덴 21-08-31 22:31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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