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생이닷컴-해외 네티즌 반응 커뮤니티


HOME

 - 커뮤니티>잡담 게시판
메뉴보기
  • 해외반응 -
  • 뉴스 -
  • 영상자료 -
  • 유머/엽기 -
  • 커뮤니티 -
  • 팬빌리지 -

회원

로그인

05월 01일 (수)

새마을 운동이 해외에서 성공 못하는 이유

푸우님 조회 : 1,418
목록
새마을 운동과 비슷한 지역 생활 개선 운동은
수많은 나라가 시도 했죠.
뭐 가까운 나라들만 봐도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본의 신촌운동, 대만의 신생활운동,
중국의 대약진운동과 북한의 천리마운동이 있죠.
사실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 이중에 가장 늦습니다.
물론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 그중에 가장 성공했고요.
지금도 새마을 운동의 대성공 이유를 외국의 개도국에서
배우고 싶어하는데 사실 그 이유는 정부의 유능함과 
국민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외의 것은 지엽적인거죠..
결국 유능한 정부와 적극적으로 삶을 개선하려서는 국민성
이 없는 나라는 새마을 운동 아무리 배워봐야 성공못합니다..
그게 지금도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 특별하게 취급 받는
이유가 될겁니다. 
 
 

CrimsonCream 13-04-30 13:31
참 신기하다고 해야할까... 세계사에서 이정도 성공은 찾아보기 힘들죠.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친 민중들의 억압되어있던 의지와 포텐셜이 한 방에 터졌다고 할까요.
hihi 13-04-30 13:32
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정부의 유능...

ㅎㅎㅎ
이순재 13-04-30 13:35
우리나라 특유의 단결력의 힘이죠
물자라 13-04-30 13:35
저는 국민성에서 찾을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때 사람들의 마인드와..
네모여신 13-04-30 13:36
정부의 유능에서 크게 웃고 갑니다...

새마을 운동의 성공은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나 그 중 크게 용인되고 있는것이 '국민의 절박함'이라고 하더군요.
CrimsonCream 13-04-30 13:40
그와 더불어 '경제개방'이 큰 축이죠. 소련이나, 중국이나, 기타 신생독립국가들 전부 정부주도 개발계획을 해 봤습니다만, 결정적 차이는 역시 국민과 경제개방 두 가지 인 것 같습니다.
gandhika 13-04-30 13:49
경제개방이라니.. 웃고 맙니다.
박통시절 경제는 폐쇄경제였습니다. 개방경제 아니었어요. 우리나라가 개방경제 체제로 들어간 것은 90년대 김영삼 시절이후입니다. 박통 시절은 정부가 환율을 통제하고, 외환을 통제했으며 (개인이 달러를 가지고 있으면 불법입니다. 달러는 정부와 대기업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며, 개인이나 영세기업이 갖고 있을 경우 타당한 이유가 존재해야 했습니다. 아니면 불법소지에 해당되었죠). 박통시절엔 물건을 사고싶어도 정부가 판단하기에 이 나라에 절실히 필요한 물건이 아니다 라고 판정하면 수입금지입니다. '불요불급'한 물건이라고 말을 했는 데, 박통왈 '달러'를 절실히 아껴야 하므로, 불요불급한 물건은 수입하여 이 나라에 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법안도 나중에 90년대초인가에 폐지되었을 겁니다.
물건을 수출할려고 하여도, 시중의 일반은행이 함부러 맘대로 신용장을 개설하여 주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었습니다. 정부가 달러 나가는 길을 틀어막고 일일이 체크하였으므로, 물건의 수입도 수출도 정부가 통제하는 국가였습니다. 개방경제요?
그냥 웃지요. 박대통령 시절을 전혀 모르는 10대애들이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꾸며낸 나라 얘기인가 봅니다.
gandhika 13-04-30 13:55
참고로 당시에는  대한민국 국민은 해외에 나가 물건을 사고 팔수도 없었습니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김영삼 시절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박대통령 시절에는 일반 시민은 1회용 여권(단수여권)밖에 못썼습니다. 그것도 나갈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증빙하여 국가를 설득해야 겨우 1회용 여권 나오는 거였습니다. 정부 공무원이 공무로 해외로 나가는 경우는 공무여권을 썼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복수여권(몇년이고 기한을 주고 그 기간중에는 유효한 여권)이 안나왔어요. 기본적으로 단수여권을 발급해줬습니다. 나갔다 돌아오면 폐기되고 다시 여권을 처음부터 발급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해외로 나갈려면 정부종합청사에 가서 여권신청해야 했습니다. 전국에서 여권 발급해주는 곳이 1곳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해외로 나가는 것 금지였습니다. 그래서 박통시절에 상류 특권층의 상징이, 핸드폰 있고, 지프차 몰고, 여권 있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인은 가질 수가 없는 물건이었으니까요.

개방경제라 하면, 돈과 물건, 인력이 열려있어서 오가는 것이 개방경제인데, 박통시절은 그게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시장이 그걸 결정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결정했죠.
지해 13-04-30 15:56
뭔 멍멍이 소리...
박통때 특권이 핸드폰?????
15살 짜리구먼 핸드폰이 언제 생긴지 모르는걸 보니...ㅉㅉㅉㅉ
gandhika 13-05-01 04:03
아 , 핸드폰은 전두환시절.
왜 기억하느냐 하면, 친 형 때문. 당시 대학입시 지원신청하는날이면, 사람들이 경쟁률 보면서 실시간으로 경쟁률 낮은 과에 지원넣을려고 했기 때문에, 핸드폰이 필요한 물품이었어요. 그런데 핸드폰이 흔한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핸드폰있는 친척집에 찾아가 빌려오고 가족들이 총출동하여 몇개대학 접수창구에 가서 죽치고 있다가 지원했었음.
참고로 당시는 아직 삐삐나오기 이전으로 기억함. 삐삐는 내가 대학 입학하던 시절 대유행이었고, 형은 나보다 5살 많았으니까. 삐삐도 아직 없던 시절 벽돌장 크기로 나오던 핸드폰은 특권층 물건이었슴.
푸우님 13-04-30 13:36
실패의 짱은 중국의 대약진 운동..
잘살자고 한 대약진 운동이 망해서 수천만명이 굶어 죽었죠..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책임을 따지다가 몰린 모택동이
반대세력을 반동으로 몰아 문화 혁명을 일으켰죠..
그 바람에 중국이 퇴보되어 70년대까지 세계 최빈국으로 떨어졌죠..
푸우님 13-04-30 13:38
뭐 대부분의 개도국 정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유능한건 사실이죠..
Paranova 13-04-30 13:39
정부의 유능함이 뭐가 웃기죠? 백 번 옳은 말인데요. ㅋ
스나이퍼 13-04-30 13:41
정부의 유능이라.....그냥 웃음만 나오네요....

과거 국민성(우리 어르신세대들께서 잘살아보자라는 강한의지와 단결력)이 새마을운동 성공의 주된 이유지
정부의 유능이 주된이유는 아닙니다.... 정부가 주도를 했으니... 어느정도 긍정적인 영향은 끼쳤지만
작성자님처럼 그렇게 찬양할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gandhika 13-04-30 13:42
박통시절에 새마을운동 회보에서나 나올법한 주장을 태연하게 하는 거 보면 참 어이가 없습니다.
그거 증명할 수 있습니까? 정부의 유능함과 국민성이 우월하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연구가 이 세상에 단 한개라도 존재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냥 내가 보니까 딱 그래. 라는 노인정에서 할아버지가 막걸리 마시고 할 법한 주장입니다.
새마을 운동 부터가 일본을 베낀 거였는 데, 박통이 일본 메이지 유신의 추종자 였음을 상기하기 바랍니다. 박대통령은 일본식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후,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따서 대한민국을 근대화한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집권 후반기에는 유신 체제라는 것을 만들어 집권했습니다. 그럼 그 체제로 앞서가서 선진국이 된 일본은 우리보다 더 정부가 유능하고, 국민성도 더 뛰어난 애들이겠네요. 걔네들은 후진ㄱ숙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는 데, 우리는 기껏해야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올라가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일본의 신촌운동도 언급했는 데, 신촌운동의 성과가 무엇이고 한계는 무엇인지,
그리고 새마을운동이 어느 부분이 성공하고 어느부분이 실패했는지. 왜 박통 집권 후반기부터 새마을운동이 안먹히고 퇴락해갔는지 알고는 있습니까. 
잘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딱 그래 라며 말을 하는 데, 그게 딱 40년전 대한뉘우스 에서 국정홍보처가 하던 소리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라니..
Paranova 13-04-30 14:38
되도 않는 메이지 유신 드립은 치지 마시고요. ㅎㅎ 메이지 유신과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목표,수단, 이념은 '개혁' 이라는 공통점만 공유할 뿐 극명하게 성격이 다릅니다.

박정희의 개혁이 메이지 유신의 모방이라는 소리는 러시아 혁명이 프랑스 혁명의 열화 버전이라는 개소리하고 똑같은 수준이죠. 사족으로 요새 '유신' 이라는 단어 하나에 함몰되서 별 같잖은 소리를 해대는 부류들이 있는데, 무슨 고대 역사 언어학적으로 해석하는 마냥 박정희가 메이지 '유신' 의 신봉자였기 때문에 '유신' 체제를 일으켰다는 근거 없는 역사 왜곡을 저지릅니다만, '유신' 이라는 단어는 5공 망하고 군사 정권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마치 사회적 금기어처럼 여겨진 탓에 요새 쉽게 볼 수 없어졌을 뿐이지, 실제로 박정희 시대에 '유신' 이라는 단어는 굳이 정치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쉽게 통용되던 단어였습니다.(당장 이승만 정권 시절 신문만보더라도 유신이라는 단어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죠. ㅎㅎ) 유신이라는 단어의 뿌리가 메이지 유신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박정희가 메이지 유신의 신봉자였다? 근거라곤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개소리죠. ㅋㅋㅋ
gandhika 13-05-01 04:20
근거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무식함에 비웃어주면 되는 거냐?
하다못해 구글링 한번 안해보고 주둥아리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이는구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172213085

박정희의 일본 유신에 대한 동경은 70년대가 아니라 5.16 쿠데타 직후 부터 나온다.
1961년 5.16쿠데타 후에 일본의 기시 노부스케 수상을 만나 박정희가 말하기를,
“마치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청년 지사와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품고 그분들을 모범으로 삼으려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5.16혁명을 메이지 유신에 비유하면서 자신들은 메이지 유신  당시의 지사의 심정으로 혁명을 일으켰다고,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인 기시노부스케 수상에게 밝히면서 요시다 쇼인, 다카스키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3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euijong1004&logNo=150108947525

이게 1961년 11월이다. 참고로 박정희는 메이지 유신뿐만 아니라 1930년대 쇼와 유신에도 영향을 받았는 데, 이유는 "‘쇼와유신’은 국가가 혼란할 때 군부가 직접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정당정치와 대중의 다양한 여론을 사회 혼란이라 생각하고, 민주주의를 방종 또는 국가의 ‘적’으로 돌리며 강력한 반공정책을 내세운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농촌진흥운동’과 ‘새마을운동’
일제 말 각종 기관지는 모범일꾼을 표지모델로 삼아 미담과 성공수기를 소개하고 그들을 본받으라고 촉구했다(왼쪽). 새마을운동 역시 지도자의 성공담을 퍼뜨렸다. ‘자력갱생’과 ‘농가경제부흥’을 내걸었지만 농촌 통제 수단으로 작용한 일제의 농촌진흥운동과 국민총력운동은 ‘유신체제의 실천도량’으로 불린 새마을운동과 빼닮아 있다."

이게 경향신문 기자의 썰인 게 아니라, 책들마다 곳곳에서 박정희의 일본 유신정책 베끼기가 나온다. 지금 내가 구글링 해서 나온 첫페이지에 뜬 거 두개만 긁어온 거다.  니가 박정희 책을 두세권만 읽었어도 박정희가 얼마나 일본 근대화의 성공에 매료되었던 유신 빠돌이인지 알았을 거다. 


무식하면 좀 책을 읽어라.  남들에게 '근거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개소리죠'라고  헛소리 하지 말고. 하다못해 구글링만 해봤어도 첫페이지에 딱 나오는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제 깜냥에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고 남을 깔아뭉개며 헛소리 하는 건 뭐냐.
Paranova 13-04-30 13:57
ㅋㅋㅋㅋㅋ 별 웃긴 소리를 다 듣는군요. 지금 바빠서 장문은 못 남깁니다만, 그냥 간단하게 페론 이후  아르헨티나의 현재 꼬라지와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우오오오 13-04-30 13:58
몇몇 분들이 헷갈려 하시는 거 같은데 무능한 것과 부패한 것과는 다른 겁니다.
반대로 유능함과 청렴함이 다른 것처럼 요.
당시 국가의 발전상으로 보건데 정부의 능력은 상당히 유능했습니다.
대신 부패했고, 반민주적 이였습니다.
말그대로 엘리트주의의 표본 같은 국가였습니다.
우오오오 13-04-30 14:16
엘리트주의란 플라톤이 내세운 이론으로 무지한 국민이 정치에 관여하여 국가를 혼란시키는 것보다는 몇몇의 엘리트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는 이론입니다.
엘리트주의의 치명적 약점은 관료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부정부패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찌보면 엘리트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대말입니다.

우리들 인식으로는 민주주의가 옳고 엘리트주의는 나쁠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닙니다.
민주주의에서의 치명적 약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국민이 무지하면 우민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겁니다. 당시의 국민들의 교육수준은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 이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민주주의보다는 엘리트주의가 더 국가발전에 어울렸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재의 대한민국은 국민의 지식수준이 상당하므로 민주주의가 바르게 정착할 수 있는 여건이 됩니다.
QPR에이스 13-04-30 14:00
등소평은 등쉰이었군요.. 무능한 박정희정부를 벤치마킹하려했으니
cordial 13-04-30 14:17
박정희 벤치마킹해서 성공한곳이 있죠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

박정희를 본받지 않은점은 마하티르 스스로가 권력에서 적당한때에 물러났다는것
역시 박정희 시해에서 얻은 교훈이겠죠
심판자 13-04-30 15:26
윤보선 정권, 실질적으로 장면 정권이 기초한 경제개발5개 년 기획안의 내용은
국군 5만명 감축을 통한 국방비 절약,
외국에 경제지원을 요청하는 계획(미국에 4억 2천만 달러 지원요청 등),
태백산 종합개발계획(연간 2000만 톤의 석탄 개발),
농어촌 고리채정리, 식목사업 및 고속도로 개발 이라고 합니다.
즉, 내용을 판단하면, 미국이든, 어디든 외국으로부터 돈을 빌려와 1차산업을 지원하고,
공공사업 등으로 내수성장, 실업해결, 광업을 지원한다는 겁니다.
즉, 단순노동과 1차 산업 육성, 수입대체산업육성을 통한 경제발전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 정도 사업만으로 한국이 단기간에 발전할 수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아직 윤보선의 경제개발계획에서는 중화학공업을 주류로 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없었는데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비전을 논하는 와중에서 누가 리더가 되든
경제는 같은 수준으로 발전했을거라는 주장,
더군다나 그 대안조차 제시못하고, 당연히 근거, 자료 등도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러면서 경제는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했을거라는 의견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심판자 13-04-30 15:31
당시 장면정권은 구파와 신파로 나뉘어 구파를 지지하던 윤보선 대통령은
김도연을 총리 후보로 지명하려 했는데 신파인 장면이 총리로 선출되었고,
그런 구파와 신파의 갈등조차 무마못하고,
구파가 떨어져 나가 신민당이라는 간판으로 야당이 됩니다.

그리고 당시 민주당 내부에서도 소장파 의원들이
권력 중추에서 소외된 것에 반기를 들고,
중석수출커미션문제와 추경예산오류문제를 걸고 반대를 하죠.
그밖에 5만명 국군감축계획으로 국방력을 소홀히해
군부로부터 지지를 못받고, 각종 혁신당 등을 제대로 통제 못해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으며, 태풍 등으로 민생고마저 해결을 못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우선 고속도로 하나도 기획만 했지, 추진도 못한 실정이었죠.
그런 추진력으로 과연 경제발전이 가능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중화학공업 위주 본격적인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박정희 정권에서 -5년종합경제재건계획-이라는 타이틀로
유원식, 정소영, 백용찬, 김성범, 박희범 등의 인재들로 준비된 팀을
바탕으로 비로소 중화학 중심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이라는 기획이 구상됩니다.
1950년대식,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답습한 장면정권의
수입대체산업화전략과는 다른
자동차, 조선, 공작기계, 기초화학공업, 제철, 제강 등의 공업들을 추진한다는 틀이
완성된게 박정희 시절입니다.
그리고 5개 년종합경제재건계획을 보완한게 제1차경제개발5개 년계획이죠.
즉, 장면정권까지 중화학공업을 육성시킨다는 계획은 없었다는게 주류적인 평가입니다.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도 장면때의 기획안을 답습했다는 근거없는 주장과
누가 대통령되던 경제발전이 같은 수준으로 되었을거라는 헛소리는
자제해야 합니다.

왜냐면
리더의 능력과 역할도 중요하지만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 리더라는 것도
국민들이 선택해야만 비로소 능력을 다바쳐 국정을 수행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리더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지나간 역사적 사실들을 넓은 지혜로 분석하고,
평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 대통령되든 경제발전은 같았다가 아니라
어느 진영과 다른 진영의 경제발전비전이 어떤 방향이었는지,
그 방향과 능력의 차이점은 어느정도인지, 어느게 더 타당한 선택인지는
판단할 줄 알아야 하죠.
그래서 계속 지나간 일이지만 박정희 정권을 대체할 수 있던
대안, 즉 정권이든, 경제팀이든 대안을 제시해야 박정희 시절을 비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심판자 13-04-30 15:35
당시 장면정권은 중화학주도의 수출드라이브 정책 자체를 기획하지 못했다는게
주류적인 평가이고, 민주당 자체마저도 수습을 못해 구파가 야당으로
떨어져 나가 신민당을 만드는 것조차 막지를 못했으며,
남은 민주당 소장파들마저 화합시키지 못해 뒤통수 맞는 형국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혁신당들을 통제 못해 언론의 자유가 아닌 언론의 방종을 초래했고,
국군 5만명 감축이라는 희대의 무리수마저 들고 나왔던게
당시 민주당이었습니다.
경제발전의 비전도 없었던 민주당, 그마저도 추진할 능력도, 강단도, 화합도 없었던
민주당이 리더로서 경제발전을 같은 수준으로 추진할 수 있었을지 정말 궁금합니다.

즉,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평가할 줄 알아야 미래의 리더를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평가하는 것도, 최소한 경제발전에서는
어떤 선택이 더 옳았는가를 제대로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겹도록 박정희 아니라 누가 대통령 해도 잘 되었을거라는
주장들의 근거, 자료 등을 제시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확하고, 옳은 평가를 하자는 겁니다.

목록 PC버전 위로

Copyright © gasen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