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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5일 (목)

[통일] 왕검성과 패수의 위치

감방친구 조회 : 5,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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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조선 열전을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왕검성이 지금의 평양이고
패수가 지금의 청천강, 또는 대동강이라는 게
납득이 안 갑니다

위만조선 뿐만 아니라
고조선 자체의 영토가 납득이 안 가요
교과서 국사로는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의 출토지가
요서, 요동, 만주, 한반도, 규슈, 화북, 산동입니다
세형 동검도
애초 남만주일부와 한반도에서만 출토돼
후기 고조선ㅡ위만조선의 영역이다 하는데
고고학적성과가 거침 없이 진전되면서
만주 전역과 요동에서도 나온다는 게 최근의 사실입니다

또한 애초
철기의 경우
중국에서 전해졌다고 하는데
이 역시 고고학적 성과로
이미 기원전 5~6세기 철기유적과 유물이 남만주,두만강 인근에서 발굴돼
오히려 고조선이 중국에 철기문명의 영향을 주었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고 합니다

왕검성과 패수의 위치에 대해
누가 설명 좀 해주세요.

디노 13-12-04 03:54
진번조선과 연의 국경을 결정짓는 패수(沛水)는 능양하, 위만조선과 한의 국경인 패수(浿水)는 요하입니다. 그리고 왕검성은 요동반도 개평 동북쪽에 있었어요.
연아는전… 13-12-04 04:55
평양이 한지역이 아니며 수도를 뜻한다는것과 왕검성 역시 수도를 뜻한다는 것은 아실겁니다 즉 한곳이 아니라고 뜻이지요 일단 마지막 왕검성으로 추정하며 확신하는 곳은 하북성 보정현이라 봅니다
 또 패수의 위치를 물어셨는데 패하,패수,패강이 있으며  큰 틀은 패하는 요수인 상간수아래에 있는 강이며 패수는 대릉하 패강은 북한 압록강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계하는 경계를 나타내는 말로 우리 고대어에 패라는 말이 경계라는 것이다.  세개의 패가 있는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역때문입니다. 패강은 고구려와 신라 패수는 백제와 고구려 패하역시 백제와 고구려이며 그 이전에는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경계이기도 했습니다.
디노 13-12-04 05:33
위에 한자를 적어 놓았지만 사기 조선전의 패수와 한서지리지의 패수는 다른 강을 가리는 거에요.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패수는 예성강이에요.
한서지리지의 패수는 17세기 한백겸이 동국지리지에서 처음 청천강이라고 한 이후 이병도가 이 설을 따랐고...그 뒤로 압록강, 요서지방 대릉하로 보는 설들이 등장했지만 대체로 위에 적어 놓은 위치가 맞습니다.
연아는전… 13-12-04 07:07
맞습니다 패수,패하,패강이란 말에서 패란 계를 나타내죠 즉 경계를 뜻하는 것으로 다를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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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漢山)의 아래 지금의 광주(廣州) 에 나아가 책(柵)을 세우고 백성을 옮겼다. 그리고 국경을 획정하니, 북으로는 패하(浿河), 남쪽으로는 웅천(熊川)  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대해(大海), 동쪽으로는 주양(走壤)  에 이르렀다.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한 지 13년 만에 옮아간 것이다

을묘년 마한 신라 시조 52년, 고구려 유리왕 14년, 백제 시조 13년(한 애제(哀帝) 건평(建平) 원년, B.C. 6) 삼국사기
 백제는 두개의 한수와 한산을 두었는데 이는 백제왕성이 두군데 이기때문이다. 비류왕은 미추홀에 도읍하고 온조왕은 하남위례성에 도읍했으니 처음에 백제는 맏형인 유리왕과 헤어진후 베이징남쪽으로 내려왔는데 둘째인 비류왕이 먼저 미추홀에 정착하고 온조는 그 남쪽에 도읍했다. 그러니 유리왕의 이름을 딴 유리라는 지명이 베이징에 많이 있는것이다. 주몽이 살아있을때 세아들에게 각기 나라를 세워 번창하라고 한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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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정월 북제(北齊)가 백제 왕을 책봉하였다.
사지절 도독청주제군사 겸청주자사(使持節都督靑州諸軍事兼靑州刺史)로 삼았다.
추7월 고구려 왕이 패하(浿河) 가에서 사냥을 하고 50일 만에 돌아왔다
 신묘년 신라 진흥왕 32년, 고구려 평원왕 13년, 백제 위덕왕 18년(진 선제 태건 3, 571  삼국사기
패하의 위치는 화이도에 나오는 계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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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온조왕 37년(19) -왕망(王莽) 때이다.- 에 한수(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그다음 해 봄에 온조왕이 순무(巡撫)하면서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
실제 위치는 현재의 텐진에서 남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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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방(朔方)과 화주(和州)ㆍ명주(溟州)로 동계(東界)를 삼고, 패수(浿水)의 서쪽으로 북계(北界)를 삼았다
 병자년 정종 2년(송 인종 경우 3, 거란 흥종 중희 5, 1036  동사강목
 삭방이란 말은 요하의 동녘을 말하는 것이고 화주는 요하중류일대이다. 명주는 북한 백두산 북쪽일대이다. 여기서 말한 패수는 대릉하로 거란과의 경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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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서》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고구려는 본래 부여(扶餘)의 별종(別種)이다. 지역은 동으로 바다를 넘어 신라에 이르고, 남으로 또한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서북으로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와 접하며, 북쪽은 말갈(靺鞨)이다. 그 임금은 평양성(平壤城)에 거하는데 이 성을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하며,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이었다. 경사(京師)로부터 5천 리 떨어져 있고,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으며 남은 패수(浿水)에 연해 있는데, 왕이 그 좌측에 궁궐을 수축하였다.
또한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는데 별도(別都)라 한다

 한성이 바로 북한의 평양성이다. 주춧돌에 그렇게 써있다. 국내성은 요하바로옆에 있고 당시의 평양성은 조양일대이다.그곳에 패수즉 대릉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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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신라가 통일할 때에는 고구려의 패수(浿水) 남쪽의 땅만을 얻어 한주(漢州)ㆍ삭주(朔州)ㆍ명주(溟洲) 등 3주를 두고 평양 이북은 신라의 도적(圖籍)에 들지 않았다  동사강목
 신라가 대릉하 남쪽을 차지한 것을 말한다. 실제로 발해와 신라는 이하즉 대릉하를 경계로 했다. 물론 발해가 남하하여 신라를 북한 압록강이남으로 밀어버렸으나 말기에 신라가 다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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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지지,
“북계(北界)는 본시 조선의 옛땅인데, 삼국 시대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다
 고려의 북계는 대릉하 북쪽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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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묘(箕子廟)가 부성(府城) 북쪽 토산(兎山) 위에 있는데, 정자각(亭子閣)·석인(石人)·석양(石羊)이 모두 남쪽을 향하였으며, 사당(祠堂)은 성안 의리방(義理坊)에 있다 동명왕 묘(東明王墓)가 부(府) 동남쪽[巽方] 30리쯤 되는 중화(中和) 지경 용산(龍山)에 있다
 지리지 / 평안도 / 평양부
  요동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므로 고려왕 묘(高麗王墓)가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일찍이 우사 상국(雩沙相國 이세백(李世白))의 일기(日記)를 보니, 광녕성(廣寧城) 북쪽에 기자정(箕子井), 기자묘(箕子廟)가 있다는 말이 있었다
 연행일기(燕行日記) 제9권
 광녕성은 조선후기에 대릉하와 요하사이에 있었다. 즉 조양과 가깝다. 조선전기의 평양부가 바로 그곳에 있었음을 알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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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양현(遼陽縣)은 본디 한나라의 패수현(浿水縣)으로, 고구려에서 구려현이라고 고쳤으며, 발해 때에는 상락현(常樂縣)이었다

 요나라가 발해와 고구려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 요나라의 기록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요나라의 요양은 난하동쪽이며 패수란 대릉하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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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에 행차하다가 거가(車駕)를 평주(平州)에서 머무르고, 숭수원(崇壽院) 남지(南池)에서 배를 띄워 밤에 호종하는 신하들과 잔치를 베풀었다.

○ 영명사(永明寺)에 행차하여 용선(龍船)을 대동강에 띄워 술자리를 마련하고, 또 영명사에서 배를 타고 홍복사(洪福寺)에 갔다가 곧바로 팔경정(八景亭)에 임어하는 물놀이를 관람하였다.
○ 여름 4월에 수레로 패강(浿江) 용서정(龍瑞亭)에 이르러, 배를 타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 서울로 돌아와 사면령을 내렸다

 고려사절요 제11권기축 23년(1169), 송 건도 5년ㆍ금 대정 9년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대동강과 패강이 따로 등장하니 다른강이다. 고려 의종이 북한 압록강에 놀러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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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한산주(漢山州 에 순행하여 한산의 민호(民戶)를 패강진(浿江鎭)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임술년 선덕왕 3년(당 덕종 건중 3, 782) 삼국사기

 신라의 한산주는 북한 평양시일대이다. 그러니 압록강이 가깝다.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바닷길을 따라가 남쪽으로 해연(海壖)을 끼고 패강(浿江) 어구와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新羅) 서북쪽의 〈장구진(長口鎭)〉에 이른다

 《당서》
 등주에서 요동반도동쪽으로 간다음 패강이 나오니 패강이 북한 압록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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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지리지에,
“함자현(含資縣)의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대방(帶方)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고, 백제기에,
“비류(沸流)는 온조(溫祚)와 함께 패수(浿水)와 대수 두 강을 건너서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한이 천하를 평정하고 나서,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삼고, 연이 쌓은 장새(障塞)가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요동(遼東)의 옛 장새를 수리하고서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한서》
 한나라때 패수는 요수즉 상간수이다. 한이 장성을 거기까지 쌓았으니 패수가 상간수이다. 즉 패수가 한나라떄와 고구려때 다른강이다.
  패수(浿水) 물이 서쪽으로 증지(甑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왕망은 망선정(望鮮亭)이라 했다 한다
《한서》낙랑군
mymiky 13-12-04 06:03
왕검성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는건 이미 조선시대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죠..
지역이름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기 때문에, 꼭 평양이 지금 북한 수도인 평양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현재 북한이 정통성을 세우려고, 평양에 단군릉을 거대하게 조성했지만.. ㅋㅋㅋ설마, 믿지는 않겠죠?)
왕검성은 현재 요령성 안산시에 속해있는 해성시-하이청 海城市 부근이 유력하다고 하는데, 고구려의 안시성도 이 부근 근처라는 말이 있음.
패수는 요하강 또는 그 약간 밑쪽에 태자하-타이쯔 강이라고 보고 있는 사람도 있음.
대략 그 부근을 지도에서 찾아보세요.
디노 13-12-04 11:12
고대의 지명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예요.
지역에 고정된 이름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명에 관련된 사람들이 이동해 가면서 위치가 바뀌었던 거에요.
mymiky 13-12-04 15:18
고대의 지명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이동해 가면서 위치가 바뀌기도 합니다.
바뀌는 예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제 고향이 마산인데, 고대엔 합포라고 불렀고, 지금은 창원이라고 불리죠.더구나 고대엔 우리말로 된 도시도 많았습니다. 강릉은 하슬라였다죠?
(뭐, 현재 우리가 볼수있는 기록이란게 한자로 쓰여졌기에 한자로 끼어맞추는거 같다만)
옛날에도 똑같이 불렀겠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봐야죠.
그 지명에 관련된 사람들이 이동해가면서 위치가 바뀌는 예는 지금도 유목민족들은 그러한데,  몽골족이나 퉁그스족들이 이동하면서 자기들이 신성시하던 바위나 산 이름을 함께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자기 앞산이 복드산이면, 자기가 이동해간 곳에 있는 산 이름도 복드산이라고 붙이는 풍습이 있지요. 예를 들자면,  백두산을 별칭인 불함산이라는 것도 몽골족들이 밝은 산이란 뜻의 부르칸산의 음차표기일꺼라고 보는 사람도 있긴하죠.
디노 13-12-04 15:54
고대의 지명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 사람이 이동해 가면서 변한다를 단정적으로 말한 게 아닙니다. 고대에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이동해 가면서 지명도 함께 이동해 갔다는 것이죠.
몽골말고도 중국에서 세운 안동도호부만 봐도 지역세력이 커지면서 점점 한족들이 사는 곳으로 후퇴해 가게 되는데, 그 때도 이름은 여전히 안동도호부를 가지고 갔었죠. 그래서 위치를 파악하는 데 헷갈리게 되는 부분이 많아요.
mymiky 13-12-04 16:19
이를테면, 철령위의 문제도 이와 비슷하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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