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를 안내하여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김무석씨는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나중에 탄식을 락엽처럼 련방 떨어뜨렸다. 이전에 땔나무 등 람벌로 벌거숭이로 되였던 산이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있었던것이다. 빼곡한 수풀속에 묻힌 장성은 그야말로 강물에 떨어뜨린 바늘을 찾기나 다름없었다.
장성은 이곳에서 그때 그 이야기로 남았지만 그렇다고 옛 기억을 죄다 지워버린게 아니였다. 세린하부근의 지명에 사진처럼 그대로 찍혀있었던것이다. 바로 서남쪽의 룡정과 화룡의 접경지에 “장성촌(长城村)”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었다. 그러나 장성촌서쪽의 산에도 성벽은 없고 돈대만 홀로 남아있었다. 산꼭대기에 위치한 돈대는 수십메터의 둘레에 높이가 3,4메터나 되여 멀리서도 금세 눈에 띄였다. 장성의 일부 구간은 이처럼 성벽이 아닌 돈대와 망대, 봉화대 등으로 이어지고있었다.
장성은 장성촌에서 계속 서남쪽으로 화룡의 약수동(药水洞)과 룡문, 장항(獐项)을 차례로 지나며 이도구의 동산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토성의 흔적을 보이고있었다. 사실 이도구남쪽 팔가자의 서산에서도 망대 등의 군사시설이 발견되였으며 이때문에 현지에서는 또 장성의 서쪽 끝머리를 팔가자 부근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 나오고있었다.
하긴 장성이라면 모두 평지를 최대한 성안에 넣고있는게 특점이다. 적군에게 산을 넘어 대렬을 정돈할 여지를 주지 않고 또 곡물이 산출되는 그 땅을 지키자는게 목적이기때문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장성이 투도(头道) 벌을 품에 안은 팔가자의 서산까지 련결된다는 설에는 신빙성이 없는게 아니다.
이러니저러니 연길, 도문, 룡정, 화룡 등 지역을 아우른 150킬로메터의 옛 장성은 지면조사에 한정되고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문헌적인 고증이 없었기때문에 상당기간 확실한 축성년대가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발해시기 중경과 동경을 수비하기 위한 군사시설이였으며 그후 동하국시기에 계속 사용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 금나라시기의 장성이라는 설도 있었다. 1986년, 연변박물관 고고학자들이 청차관 부근의 장성 돈대 단면에서 목탄표본을 채집, C14 년대측정을 진행한 결과 1580±75년전(수륜교정)으로 수치를 얻었으며 이로부터 고구려때 축성된 장성이라는 주장이 우세하게 되였다. 연변지역은 고구려가 일찍 BC 28년 북옥저를 멸하고 책성을 설치, 북옥저에 실질적인 지배를 해왔기때문이다. 따라서 옛 장성은 고구려가 4,5세기 북부 읍루세력의 침입을 방어하고 북옥저에서 고구려세력의 통치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쌓은것으로 보인다.
솔직히 고구려 150킬로메터의 장성은 명나라 만리장성의 거창한 규모에 전혀 비길바가 아니다. 또 장기적인 수비를 위한 견고한 방어선이라기보다 변방의 성곽들을 련결하는 보조시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연변에 현존하는 최대의 유적으로서 사상 전대미문의 방대한 군사시설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어마어마한 이런 시설은 약 2백년후 동북땅에 또 하나 나타난다. 고구려 영류왕(荣留王)이 당나라의 진공에 대비하여 16년간 부여성(지금의 농안부근)부터 시작하여 서남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리장성을 쌓았던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때 남자들은 모두 장성축조공사에 나가고 녀성들이 밭갈이를 하였다. 천리장성은 규모나 형태가 연변 3백리의 옛 장성과 류사한걸로 분석된다. 마찬가지로 천리장성을 축조할 때의 상황은 150킬로메터의 옛 장성 토목공사에도 엇비슷하게 벌어졌으리라고 짐작할수 있다.
미상불 이 옛 장성은 나중에 제구실을 하지 못했거나 인력과 물력만 소모한 “치레거리”에 지나지 않았나싶다. 장성에서 량군이 싸웠다는 기록은 사서에 전무하며 또 장성의 바깥쪽 전연요새로 주장되는 오호령(五虎岭)산성이나 송월(松月)산성 등 고대성곽에도 전투기록은 발견되지 않고있기때문이다. 산등성이에 피페한 언덕으로 서있는 장성유적은 어쩌면 력사에 글 한줄 바로 남기지 못한 아쉬움 그 자체가 아닌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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