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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04일 (토)

[세계사] 고구려가 초기, 전쟁 원문 기사가 더 있을까요?.

아비바스 조회 :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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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기록 무단 복제 방지를 위해 일부러 문맥을 다 합쳤습니다.  




1. 주몽시절 정복기록 


朱蒙臨別, 不忍睽違, 其母曰, 汝勿以一母爲念, 乃裏五穀種以送之. 朱蒙自切生別之心, 忘其麥子. 朱蒙息大樹之下, 有雙鳩來集. 朱蒙曰, 應是神母使送麥子, 乃引弓射之, 一矢俱擧. 開喉得麥子, 以水噴鳩, 更蘇而飛去云云. 沸流王松讓出獵, 見王容貌非常, 引而與坐曰. 僻在海隅, 未曾得見君子. 今日邂逅, 何其幸乎. 君是何人, 從何而至. 王曰, 寡人天帝之孫, 西國之王也. 敢問君王繼誰之後, 讓曰, 予是仙人之後. 累世爲王. 今地方至小, 不可分爲兩王. 君造國日淺, 爲我附庸可乎. 王曰. 寡人繼天之後, 今主非神之冑, 强號爲王, 若不歸我, 天必殛之. 松讓以王累稱天孫, 內自懷疑, 欲試其才. 乃曰願與王射矣, 以畵鹿置百步內射之, 其矢不入鹿臍, 猶如倒手. 王使人以玉指環, 於百步之外射之, 破如瓦解. 松讓大驚云云. 王曰. 以國業新造, 未有鼓角威儀. 沸流使者往來, 我不能以王禮迎送, 所以輕我也. 從臣扶芬奴進曰. 臣爲大王取沸流鼓角. 王曰. 他國藏物, 汝何取乎. 對曰. 此天之與物, 何爲不取乎. 夫大王困於扶余, 誰謂大王能至於此. 今大王奮身於萬死之危, 揚名於遼左. 此天帝命而爲之, 何事不成. 於是扶芬奴等三人, 往沸流取鼓而來. 沸流王遣使告曰云云, 王恐來觀鼓角, 色暗如故, 松讓不敢爭而去. 松讓欲以立都先後爲附庸, 王造宮室, 以朽木爲柱. 故如千歲. 松讓來見, 竟不敢爭立都先後.


 비류 왕 송양이 사냥을 나갔다가 왕의 용모가 남다름을 보고 데려와 함께 자리에 앉아 말했다. “궁벽하게도 바다 귀퉁이에서 지내다 보니 아직까지 군자를 만나 보지 못했소. 이제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오. 그대는 어떤 사람이오? 어디에서 왔소?” 왕이 말했다. “나는 하느님의 손자이며 서쪽 나라의 왕이오. 감히 묻건대 임금은 누구의 후예인가?” 송양이 말했다. “나는 선인의 후예요. 대대로 왕 노릇을 해 왔소. 지금 땅이 몹시 좁아 나누어 두 임금이 될 수가 없소. 그대가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부용국이 되는 것이 좋으리라.” 왕이 말했다. “나는 하느님의 뒤를 이었지만 지금 왕은 신의 자손도 아니면서 억지로 왕을 일컫고 있으니 만약 내게 귀순하지 않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오.” 송양은 왕이 자주 하느님의 후손임을 일컫는 데 대하여 의심하여 그 재주를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이에 말하기를 “왕과 더불어 활을 쏘아 보기를 바란다.” 하고 그린 사슴을 백 보 안에 놓고 쏘는데 그 화살이 사슴의 배꼽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손이 밑으로 처지는 듯했다(힘이 빠지는 듯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옥가락지를 가져다 백보 밖에 매달아 두고 쏘았는데 기왓장 부서지듯 산산이 깨졌다. 송양이 크게 놀랐다.


이 말하였다. “나라의 기업이 새로 만들어져 아직 북과 나발의 위엄이 없다. 비류국의 사자가 오가는데 내가 왕의 예로써 맞이하고 보내지 못하니, 때문에 나를 업신여기겠지.” 시종하는 신하 부분노가 나아가 말했다. “제가 대왕을 위하여 비류국의 북과 나발을 가져오겠습니다.” 왕이 말했다. “다른 나라가 비장하고 있는 물건을 네가 어떻게 가져오겠느냐.” 부분노가 대답하기를 “이는 하늘이 준 물건입니다. 어찌 가져오지 못하겠습니까? 대왕께서 부여에서 곤욕을 당하고 계실 때에는 누가 대왕이 여기까지 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습니까. 지금 대왕께서는 만 번 죽을 고비가 있는 위급한 지경을 떨치고 나와 요동에서 이름을 날리고 계십니다. 이는 하느님이 시켜 그리 되는 것인데 무슨 일을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부분노 등 세 사람이 비류국으로 가서 북을 가져왔다. 비류국 왕이 사신을 보내 이러쿵저러쿵하는데 왕이 (비류국 쪽에서) 북과 나발을 와서 볼까 두려워하여 북과 나발의 색을 어둡게 해 옛 물건인 것처럼 해 놓으니 송양이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송양이 도읍을 세운 선후를 따져 부용을 정하려 하니 왕이 궁실을 지을 때 썩은 나무로 기둥을 세웠다. 덕분에 천 년은 된 것 같았다. 송양이 와서 보고 끝내 감히 도읍을 세운 선후를 다투지 못하였다.

서쪽으로 순수 나갔다가 흰 사슴을 잡았다. 해원에서 거꾸로 매달아 놓고 저주하였다. “하늘이 만약 비를 내려 비류국의 왕도를 물바다로 만들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로 너를 놓아주지 않으리라. 이 고난을 벗어나고 싶다면 너는 이제 하늘에 호소하라.” 그 사슴이 슬피 우니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 장맛비 온 지 이레 만에 송양의 왕도가 물바다가 되었다. 왕은 갈대 밧줄로 물길을 횡단하고 오리와 말을 타고 다녔으며 백성들도 모두 그 밧줄을 잡고 있었다. 주몽이 채찍으로 물을 그으니 물이 곧 줄어들었다.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받들어 와서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2. 유리왕 시절 정복 기록

十一年 夏四月 王謂群臣曰 鮮卑恃險 不我和親 利則出抄 不利則入守 爲國之患 若有人能折此者 我將重賞之 扶芬奴進曰 鮮卑險固之國 人勇而愚 難以力鬪 易以謀屈 王曰 然則爲之奈何 答曰 宜使人反間入彼 僞說 我國小而兵弱 怯而難動 則鮮卑必易我 不爲之備 臣俟其隙 率精兵從間路 依山林以望其城 王使以羸兵出其城南 彼必空城而遠追之 臣以精兵走入其城 王親率勇騎挾擊之 則可克矣 王從之 鮮卑果開門出兵追之 扶芬奴將兵走入其城 鮮卑望之 大驚還奔 扶芬奴當關拒戰 斬殺甚多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王念扶芬奴功 賞以食邑 辭曰 此王之德也 臣何功焉 遂不受 王乃賜黃金三十斤 良馬一十匹

재위 11년 여름 4월, 임금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선비(鮮卑)는 그들의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로다. 만약 이들을 없애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큰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말하였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수비가 견고한 나라이지만 사람들이 용감하기만 하고 어리석습니다.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임금은 말하였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 부분노가 대답하였다.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보내 거짓말을 하되,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많아 움직이기 어렵다.’라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쉽게 생각해서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 틈을 기다렸다가 정예병을 이끌고 사잇길로 들어가 수풀에 숨어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이때 임금께서 군사를 그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신은 정예병을 이끌고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임금께서는 친히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양쪽에서 협공을 한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임금은 그 의견에 따랐다. 

선비는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출동시켜 뒤쫓았다. 이때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 들어왔다. 부분노는 성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수많은 선비들의 목을 베어 죽였다. 

임금은 깃발을 들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게 되자 계책이 없고 힘이 다해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임금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임금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그는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 삼국사기



三十一年 漢王莽發我兵 伐胡 吾人不欲行 强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宜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 穢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 斬之 傳首京師[兩漢書及南北史皆云 誘句麗侯騶斬之] 莽悅之 更名吾王爲下句麗侯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 寇漢邊地 愈甚 三十三年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十四年 春正月 扶餘王帶素遣使來聘 請交質子 王憚扶餘強大 欲以太子都切爲質 都切恐不行帶素恚之 冬十一月 帶素以兵五萬來侵 大雪人多凍死 乃去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奇計 親率軍 伏于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 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재위 31년(서기 12년) 한나라의 왕망(王莽)이 우리 병사를 징발하여 흉노를 치게 하였다. 우리 병사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니, 모두 변방으로 도망쳐 법을 어기고 재물을 약탈하는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하자 한나라의 주(州), 군(郡)에서는 잘못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왕망에게 아뢰어 말하였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ㆍ군에게 그들을 위로하고 안도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그들에게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응하여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우리가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한 터에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 왕망은 이를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공격을 명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수도로 보냈다. 

《한서》(漢書)와 《남사》, 《북사》(南北史)에서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고 이른다. 왕망이 기뻐하며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고쳐 부르고,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한나라 변경 지방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재위 33년 가을 8월, 임금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14년(기원전 6년) 봄 정월, 부여 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인질 교환을 청하였다. 임금은 부여가 강대한 것을 꺼리며 태자 도절(都切)을 인질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가지 않자 대소가 화를 냈다.

겨울 11월, 대소가 군사 50,000명을 이끌고 침략하여 왔으나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자 곧 돌아갔다.

32년(서기 13년) 겨울 11월, 부여 사람들이 침입하자 임금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통솔하여 막게 하였다. 무휼은 병사가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까 걱정하여 기이한 계책을 썼는데,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리는 것이었다. 부여 병사들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아래에 이르자 숨어있던 병사들을 출동시켜 불의에 공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배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은 병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 삼국사기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모본왕 2년 봄,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 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삼국사기 


漢時賜鼓吹技人,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高句麗令主其名籍。後稍驕恣,不復詣郡,於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歲時來取之,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都於丸都之下,方可二千里,戶三萬。建武八年, 高句驪遣使朝貢, 光武復其王號. 二十三年冬, 句驪 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 二十五年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高句驪,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地方二千里,多大山深谷,人隨而為居

(전한, 서한)때에 북치고 피리 부는 기인을 하사받았다. 항시 조복을 받아갔는데 현도군 고구려 현령이 명부를 관리하였다. 이후 교만해져서 찾아오지 않고 동쪽 경계에 작은성을 축성 했는데, 거기에 조복을 두면 세시에 가져갔다. 고구려는 요동군의 동쪽 천리에 있다. 강역은 방2천리이다.

건무(建武) 8년(32)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므로 광무제[光武]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8 (건무) 23년(47) 겨울에 구려 잠지락(蠶支落)의 대가 대승(戴升) 등 1만여구가 낙랑에 들어와 내속(內屬)하였다. 25년 봄, 구려가 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노략질하자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恩信]로써 부르니 모두 다시 관새(款塞, 관문을 찾아와 복종)하였다.

고구려가 요동의 동쪽 천리에 위치했으며 남으로는 조선,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하며 지방 2000리에 달한다. 그들은 큰 산속 깊은 골짜기에 사람들이 산다.

- 후한서 동이전 고구려





이것 말고도 대륙으로 진출했다는 기록이 더 있을까요? 




아비바스 24-04-23 18:23
PS : 대무신왕이 동부여와 한나라와 전쟁을 펼친 기록 원문 구하기가 힘드네요.

추가 원문도 있으면 달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윈도우폰 24-04-24 13:38
일주일 쉬다 잠시 들어왔더니만...너님 글이 올라와 있네... 유감스럽게도 내용적으로 씹을 만한 것이 없는 그냥 인용된 글이네...남의 글에 출처출처 그렇게 부르짓더니만... 자기 한 말이 있어서인지...퍼온 글에 대한 출처를 달기는 했구먼...

하지만 ... 글을 올리려면 주제가 명확해야 하는데...도대체 너님의 주장이 뭐임?  결론도 없이 그냥 퍼온 내용 다음에 난데 없이 이 것 말고 대륙으로 진출했다는 기록을 야그? 그리고 원래 그 지역에 살던 사람한테 무슨 진출? 고구려가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진출했다는 야그? 너님은 중국놈인가?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결국 다시 되돌아 가 읽어보면...너님이 인용한 것들이 고구려가 대륙으로 진출했었다는 내용이라는거임?

이런걸 보고 견강부회라고 하는거임... 인용한 내용 자체가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고... 너님이 끝에 내린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도 없는 것을 가지고 마치 너님이 객관적 출처를 밝히면서 의견을 피력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 하지만 뒤에 내린 너님의 글이랑 앞의 인용한 것들과에는 별 관련도 없는... 단지 뒤에 달랑 두 줄의 너님 얘기를 하고자 앞에 관련도 없는 내용을 퍼와 올렸다는 애기가 되네.

우리 나라 고대사 관련된 중국 쪽 사서를 통틀어 몇 권이나 된다고... 추가 원문? 없는 것은 찾는다고 나오는게 아님.., 사기열전이든 삼국사기든 키워드로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나오지도 않는 원문을 왜 찾음? 아니면 찾는 키워드를 잘못 알고 있던지...하지만 찾고 싶은 내용이 그 정도로 방대한 글귀 속에 있는 것도 아닌데...

아마  너님은 못찾아도 다른 사람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인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님이 얼치기라는 것을 증명하는 거임. 너무 어설프게 알아서... 삼국사기의 전체 내용 구성의 흐름도 모른다는 것이...그러니 어딘가 찾아보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듯 한데...삼국사기를 다시 한 번 정독해 보삼...

그리고...원문기록 무단복제? 너님이 원문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갖고 있나? 웬 무단타령? 그런 식이라면 너님이 인용한 것도 무단복제임^^
아비바스 24-04-24 18:07
그럼~ 그럼~~

자료에는 " 출처 " 가 중요해~~

" 출처 " 가 없는 글은 " 정보 " 가 아니라~~

" 소설 " 이라고 해~~
윈도우폰 24-04-24 20:50
그러니까 너님은 소설 좀 읽어봐

너님 글은 소설도 안되걸랑...더욱이 정보하고는 거리가 멀고...잡설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왜냐하면 주장이 없잖아...뭘 주장하려고 관계도 없는 삼국사기 내용을 인용하는거임?

내용이 같잖아서 정보로서의 가치도 없어...그러니 내용에 대해 댓글 쓸 가치도 없지.

그리고 너님이 쓴 내용 역시 출처가 없어...그렇게 출처타령하면서 관계도 없는 삼국사기 등을 긁어온게 바로 출처 제시? 그런거로 생각하는거임?

출처는 주장하는 바와 관련한 내용에 대해 믿어달라고 하는 차원에서 출처를 주기하는 것인데...너님의 글에는 주제가 없잖아...형식적으로는 인용한 것이 맞을 수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너님이 끝에 쓴 것과 관계가 없는 것이니 인용이라고 할 수 없고 그냥 긁어온 내용으로 도배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

너님이 인용한 것이 대륙진출의 예라고 쓴거여? 우리 나라가 섬이야? 고구려가 한반도나 만주가 아닌 어디 섬에 있었나? 말 같지도 않은 주장을 하고 관계도 없는 내용을 긁어다 마친 출처를 댄것처럼 말하는 것은 일종의 기망이야.

기망이라고 아나 모르겠네? 금전적 이익이 걸려 있다면 사기가 되는데...너님 주장은 관계없는 것으로 현혹하여 너님의 주장이 그럴 듯 하게 보이게 하는 짓 ... 그래서 소설보다 못하다는 것이지...그래서 소설이라도 좀 읽어보라는거임.

어쨌든 너님이 똑똑한 체 하기 위하여 관계없는 내용을 긁어오는 것은 사기성 자료 인용이라고도 할 수 있지 ...그런 것이란 생각이 안드나?
아비바스 24-04-28 12:58
우리 폰짱~~

내 글을 굉장히 좋아하는 구나~~

열혈이 뻘글을 달아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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