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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19일 (금)

[한국사] 백제의 중원 지배 근거: 북위와의 전쟁

위구르 조회 : 2,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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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88년과 490년(단기 2823년)에 있었던 백제와 북위의 전쟁은 두 가지 의의가 있다. 첫 번째는 국력을 회복해나가던 시기에 가해진 막대한 위협에 당당히 맞서서 기념비적인 대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그 승리로써 백제의 중원 지배를 뒤받침하는 기록이 남았다는 점이다. 백제의 대륙 점유는 관련한 수많은 사서 기록이 있고 백제와 북위의 전쟁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를 탐구하는 입장에서 하나라도 놓칠 수가 없으며 백제와 북위의 전쟁이란 주제를 가지고 여러 쓰레기같은 억측과 소설을 만들어가며 백제의 대륙 영유를 부정하려는 학자들의 시도를 꺾음에도 의미가 있어서 탐구해볼만 하다. 이 전쟁이 백제의 대륙 영유의 증거임을 부정하는 주장들의 전제는 크게 두 가지다. 전장이 현 대한민국이라는 전제와 중원이라는 전제다. 

이 중 첫 번째를 보면 북위가 수군을 동원해서 쳐들어왔다는 주장이 주를 이룬다. 그에 대해서 반론자들은 북위는 기마민족이 세운 나라로 수군이 약했으므로 불가능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 선비족이 중원을 장악한지 꽤 된 시점에서 수군 운용도 못하는 나라였다고 취급함은 몰이해적인 시각이라는 반론으로 또 맞서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무식한 주장은 북위가 서해보다 훨씬 건너기 쉬운 양자강을 건너는 일조차 못해서 남조와 대치를 지속하고 있었던 당시 상황을 무시한 결과다. 여기에 대해서 남조인 남제가 방비를 철저히 했기에 건너지 못했을거라고 반박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백제는 방비를 하지 못했기에 침략을 허용했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있다. 해안 방비도 제대로 못한 백제가 어떻게 수십만 대군을 막겠는가. 고구려군 삼만 명도 막지 못하고 참패해서 건길지가 전사한지 불과 십 년 남짓 지난 상태에서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수십 만 기병의 상륙을 허용한다면 결과는 패배 뿐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전장이 백제 본토였다는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남제에 보낸 국서에서 목간나 장군이 면중후에 봉해지면서 나오는 공적이다. 목간나 장군이 큰 공을 세웠다면서 대방(臺舫)을 격파했다는 것이 그 내용으로 나오는데 臺舫은 루선을 뜻한다고 해석된다. 즉, 배를 동원했기에 수군으로 쳐들어왔다는 말인데 이는 루선의 뜻을 모르기에 나오는 주장이다. 루선은 누각을 세워놓은듯 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부러 높은 누를 세워서 운용했다. 많은 병사와 물자를 싣고 적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는데 이는 강이나 해안가에서 운용할 때의 얘기고 바다를 가로질러 나아가는 원양 항해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높이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전함들 중에서 움직일 때 특별히 불안정했던 종류의 배인데 안그래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원양 항해에 루선을 동원한다는 것은 자멸행위나 나름 없다고 보인다. 북위 선비족이 아무리 수군에 대해 무식했어도 그런 도박을 택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또 臺舫이라는 말은 루선으로 많이 해석하지만 따로 보아서 돈대와 배라고 볼 수가 아예 없지는 않다. 

따로 볼 경우에는 목간나 장군의 실제 전공이 짐작이 된다. 북위의 수군이 백제 대륙 영토의 후방으로 침투하면 싸움아 끝장날 판에서 특공대를 이끌고 발해만에 있었을 북위의 수군 기지를 순회하며 모두 격파함으로써 가능성을 봉쇄하였을 것이다. 그 때 파괴한 것은 등대(臺)와 전함(舫)이었을 것이다. 그냥 樓船이라고 했다면 명확히 해석함이 가능한데 굳이 臺舫이라고 표기했기에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다만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백제가 중원 동부에서 싸웠다는데에 불리하지가 않다. 즉, 臺舫이란 말은 백제의 중원 영유를 부정하긴 커녕 긍정하는 근거이다. 그런데 이 臺舫을 루선으로 해석하면서 전장을 백제 본토로 설정할 방법이 없지 않다. 그것은 쳐들어온 나라를 고구려로 비정하는 것이다. 해석의 문제가 또 나오는 대목이 흉리匈梨와 험윤獫狁이다. 남제서 백제전에 나온 백제의 국서에 나온, 침략 주체를 일컫는 단어 세 가지 중 위로魏虜를 제외한 나머지 두 가지가 흉리와 험윤인데 거기에서 또 트집을 잡아서 하는 주장은 이와 같다. 

실제로는 흉리와 험윤이란 말이 고구려를 비하하는 말로 그것이 국서에 실려서 남제 조정에 전해졌는데 그걸 그 쪽에서는 북위라고 해석하여 위로魏虜라는 단어를 첨가하여 남은 것이 남제서 백제전의 국서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 엉터리같은 주장의 문제점은 1. 명백히 옛 훈 제국의 이름에서 유래하여 북방 민족을 비하하는 데에 쓰여온 흉노와 근원이 같은 흉리와 험윤이란 말이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뜬금없이 주장하면서 2. 당시 남제의 조정이 실제로 백제와 싸운 나라가 어디였는지도 탐지를 못하는 멍텅구리의 집단이었다는 전제를 깔았으며 3. 고려 땅 안에서 일어난 싸움은 그 위치를 비정하고 자세히 기술한 삼국사기에 그 전쟁의 주체를 고구려가 아닌 魏라고 기술하면서 그 위치를 비정조차 안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는 백제의 대륙 경영 사상 전성기였던 근초고건길지의 초기 21년에 대해서 아무런 기술을 하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이 백제의 해외 활동에 대해서는 문외한으로 노릇하면서 기술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 경우에서 '북위가 군을 보내왔으니 우리에게 패했다'라며 짤막하게 기술하고 말았던 것은 침략자가 고구려가 아니었고 전장이 당시 고려의 경내에 있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보면 백제가 싸운 곳은 중원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나온 설이 용병설이다. 그러나 이 또한 문제가 있다. 북위의 대군을 맞아 싸워줄려면 대군을 보내야 하는데 당시 백제의 상황으로 보아 가능한 일이 아니다. 남제가 상상을 넘는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것이 있다면 아마 영토 할양 말고는 떠오르지가 않지만 그리 약속했다 하더라도 위험 부담 때문에 어렵다. 백제가 북위군에 전멸당한다면 국방에 큰 구멍이 생기는 셈이다. 반대로 승리를 거둔다 해도 남제가 약속을 어기고 퇴로를 끊어 백제군을 자국의 군대에 편입시키고 보상을 주지도 않는다면 길이 남을 헛짓거리를 한 셈이 된다. 백제 조정이 그것도 모르는 바보라서 용병을 보냈겠는가. 병력이 남아있었다면 그걸로 고구려를 치는게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관해서 백제의 중원 지배를 반박하는 주장이 있다.

백제가 중원 동부를 경략할 힘이 있다면 어째서 신라와 가야를 치지 않았겠냐는 주장이다. 백제의 중원 지배를 상식으로 부정하는 셈이다. 그 주장이 통할려면 한 의문에 답을 해야 한다. 주변국보다 국력이 강하면 무조건 정복을 해야 하는가. 답은 不다. 一. 실익이 적고 二. 국력의 우열과 별개로 국토의 지형이 험준하고 三. 주변국이 간섭할 수 있고 四. 정복한 후의 후유증이 예상되고 五. 양국 간의 동질성이 있거나 六. 이미 서로 싸웠다가 피해를 입은 적이 있어 두려움을 간직한 경우가 있어서 그러하다. 신라는 국토는 좁아도 험준한 지형이 많고 백성이 강인해서 외침에 맞섰다. 그래서 얻을 경제적 이익이 적고 침공하기 어렵고 정복에 성공한다 해도 항쟁이 일어날 것이 확실하며 초기에도 서로 맞서 싸우면서 쌍방에 피해가 컸던 적이 있기에 백제가 아무리 힘이 남는다 해도 쉽게 침공할 수 없다. 거기에 가야나 고구려가 백제의 패권 획득을 보고만 있을 리가 없으니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백제 후기 의자건길지의 맹공은 고구려의 협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럼 중원은 어떠한가. 一.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해서 한 번 점령하고 영유권을 확보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다름 아니다 二. 평탄한 지형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공격하기 쉽다 三. 백제의 중원 진출은 인접한 신라와 가야, 고구려에게는 평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간섭을 받을 가능성이 낮다 四. 한족은 누가 지배자가 되든 먹고 살게 해주면 복종하는 족속이라 탄압을 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투쟁에 직면할 일이 없게 된다 五. 백제와 한족은 동질감이 전혀 없다 六. 백제는 전에 한족과 싸운 적이 별로 없었겠지만 처음 중원에 진출하던 당시(3세기)에 한족은 대내외적으로 어지럽고 존망의 위기를 맞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점들로 보면 백제가 신라나 가야를 놔두고 중원을 침공해서 영토를 확보한 사실이 납득이 되고 결코 무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로 백제가 힘이 있으면 신라를 먼저 쳐야 했다는 반박은 틀렸다.

백제와의 비교 사례는 외국사에 보인다. 이태리 서부에 있었던 제노바 공국은 작은 나라였고 국력이 강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 현 우크라이나 남부까지 진출해서 식민도시를 세워 멀리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노아.png

제노바의 최대 영향력. 빨간 점들이 모두 제노바 공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이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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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건길지 대에 이루어진 백제의 중원 진출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근초고칸.png

백제의 최대 판도

파스크란 22-05-17 01:16
일식 기록도 못믿는 ㅂㅅ 들이 참 많죠.
애초에 황산벌, 백마강도 죄다 중국에 지명이 나오는데...
억지로 한반도에 끼워맞추기...
삼한 22-05-17 02:25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잘 기억해두겠습니다.
신서로77 22-05-17 07:08
일식기록을 중국에서 베꼈다는 개소리는 날씨를 베꼈다는 소리와 동일하죠...그럴이유가 단1도 없잖아요...과학은 반박할수가 없죠...친자확인으로  99.9%가 가족이 맞다는데 아니라고 한다면 미친놈 인증이죠...
seharu77777 22-05-18 17:50
언제까지 대륙진출설을 부정할까? 일본놈들 역사조작을 언제까지 신봉할건지~ 김부식도 모른다는 지명이 과연 한반도에서 못 찾았을까? 그리고 일식기록은 절대 조작이 안됨~ 중국사서에서 베껴올 수도 없고~ 날씨를 누가 위서하나?
구르뫼 22-05-19 11:31
잘 읽었습니다.
한서 후한서 진서 위서의 지리지를 데이터베이스 하여 비교해보면
당나라의 지명이동 패턴을 이해할 수 가 있습니다.
또한 원화군현지에는 하남성과 섬서성 사이에 있는 서악 즉 화산 (현재는 섬서성 동쪽)이
섬서성 서쪽의 오산에서 이동된 지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산은 중국 오악의 서악이었으며 원화군현지가 쓰여진 9세기초에 중국 서쪽의 진산이 되며
서악은 오늘날의 화산으로 이동합니다.
이 이동된 거리만큼 복원하여 고구려 백제를 찾아야 하며
당나라의 지명이동을 밝히지 못하면 역사는 하북성과 산동성에서 맴돌게 될 거라 보입니다.
사라진 오산폐현의 원래 명칭은 화산현입니다.

吳山,在縣西南五十里。秦都咸陽,以為西岳,今為國之西鎮山。《國語》謂之西吳
위구르 22-05-28 18:20
스X게티나 책보고같은 자들의 주장보다는 논리적인듯 합니다
관심병자 22-05-23 01:21
나당연합군의 소정방이 백제멸망 이전에도 종종 백강에서 낚시를 했다고 당서에 적혀있다고 하죠.
여기서 유추해 볼수 있는게
1. 소정방이 한반도에 살았거나
2. 백강이 한반도에 있는 강이 아니거나
둘중 하나입니다.
설마 낚시하려고 바다건너 한반도까지 오지는 않았겠지요.
양철북 22-06-02 23:40
양서,제서,송서에 이미 기록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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