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한韓(마한, 진한, 변진)은 산동성과 강소성이었다(삼국지 위서동이전 내용)
■ 사마천 사기 평준서와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따르면
한(마한,진한, 변한)은 산동성과 강소성에 있었다(한을 통합한 것이 백제다)
※주) 산동성과 강소성은 원래부터 동이족 살던 곳이었고,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있었다
1) 사기 평준서에는 예맥조선이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인 북경 동남쪽인 창주시라고 했고,
2) 후한시대(AD 25 ~ 220년)의 중국 역사책인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 한이 예맥조선의 남쪽에 있다고 했으니
한(마한,진한, 변한)은 산동성과 강소성에 있었다
1) 신라와 가야는 한반도에서 시작되었으나
2) 백제는 한(산동성, 강소성)의 소국 1백개를(일백개의 제濟 나라 소국)을 통합하여 번성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 장수왕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수도를 한반도 남부인 웅진으로 옮겼다
3) 한(산동성, 강소성) 남쪽이 왜국이니 왜국은 절강성과 대만에 있었다
■ 정사 삼국지는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했다
■ 예맥국(예맥조선)은 하북성 창주시다
--> 고조선 영토(유방의 한漢나라와 ◐경계선◑은 호지하虖池河:現. 滹沱河):네이버 포스트 글 참조
■ 한韓은 예맥국(穢貊國) 남쪽인 산동성과 강소성이다
※주) 1) 예濊는 예맥국,예맥조선으로 하북성 천진시 아래 창주시滄州市이니, 예濊 나 한韓을 한반도, 고구려를 만주라는 선입관을 버리고, 동쪽 바다를 동해가 아니라 중국동쪽 바다인 황해로 보고..
---> 고구려를 하북성 북부로, 예濊를 중국 동부인 하북성 창주시로, 한韓을 중국 동부나 산동성,강소성으로 상상하고 읽어보시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됩니다(바다는 소양호와 덕주시인 발해호수, 대해는 황해)
2) 동옥저는 高句驪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에 연접하였으며, 북쪽은 挹婁·夫餘와, 남쪽은 濊貊과 접하여 있다. 그 지형이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정도나 된다.
--->개마대산(蓋馬大山)이 당산시와 진황도시 사이의 갈석산으로 보이니, 동옥저는 동북은 좁고 서남이 천리 정도인 요서회랑(진황도시秦皇島市와 호로도시葫蘆島市 사이)이다
○ [역사 편찬자인 陳壽는] 평한다.
『史記』·『漢書』에서는 朝鮮과 兩越註 183을 기록하였고, 東京(後漢)시대에는 西羌에 대해 撰錄하였다. 魏나라 때부터 匈奴가 쇠약해지자, 다시 烏丸과 鮮卑가 나타났다. 이어 東夷에 이르러서는 사신이 늘 왕래하여 사건에 따라 [역사를] 기술하였으니 어찌 凡常한 일이라 하겠는가!
『書經』에 ‘동쪽은 바다(황해)에 닿았고 서쪽은 사막에까지 이르렀다’註 003 하였으니, 九服의 制度註 004 이내에 있는 것은 말할 수가 있으나,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荒域 밖은 여러 번의 통역을 거쳐야 이르게 되어, [漢人의] 발걸음이나 수레가 닿지 않기 때문에, 그 나라의 풍속이 중국과 다른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虞나라로부터 周대에 이르기까지 西戎은 白環을 바쳤고註 005 東夷에서는 肅愼의 조공이 있었으나,註 006 모두 여러 해가 지나서야 도달하였으니 그 머나먼 거리가 이와 같다.
○ 漢나라 때에 張騫을 西域에 사절로 파견하여註 007 黃河의 근원을 찾아내고, 여러 나라를 두루 방문하여 드디어 都護를 설치하고註 008 그들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뒤에는 서역의 사정을 모두 알 수 있게 되어 그 결과 史官도 [西域의 일을] 상세히 기재할 수 있게 되었다.註 009
魏나라가 일어서는 서역의 모든 나라가 다 오지는 않았으나, 그 중의 大國인 龜玆註 010·于寘註 011·康居註 012·烏孫註 013·疎勒註 014·月氏註 015·鄯善註 016·車師註 017 등의 무리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 해가 없었으니, 대략 漢나라 때의 古事와 같았다.
○ 公孫淵의 父祖 三代註 018가 계속 遼東(하북성 중부 형수시)을 차지하자, 천자는 그 지방을 絶域으로 여겨 [公孫氏에게] 海外(창주시 산동성 강소성)의 일로 위임시켰다. 그 결과 결국 東夷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중국과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景初 연간(A.D.237~239; 高句麗 東川王 11~13)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죽이고,註 019 또 몰래 바다(하북성 중부 덕주시에 있었던 발해호수)를 건너가서 樂浪郡과 帶方郡을 수습하였다.註 020 그 후로 해외가 안정되어 東夷들이 굴복하였다.
그 뒤 高句麗가 배반하므로 또 다시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면서註 021 지극히 먼 지방까지 추격하니, 烏丸註 022과 骨都註 023를 넘고 沃沮를 거쳐 肅愼의 王庭을 짓밟고 동쪽으로 大海(황해)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의] 長老가 ‘얼굴이 이상한 사람이 해가 돋는 근처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 드디어 여러 나라를 두루 관찰하고 그들 나라의 법령과 습속을 수집하여 나라의 크고 작음의 구별과 각국의 명칭을 상세하게 기록할 수가 있었다.
[그 나라들은] 비록 오랑캐의 나라이기는 하지만 俎豆註 024를 쓰는 예절이 남아 있으니, ‘중국이 禮를 잃으면 四夷에게서 구한다’註 025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나라들을 순서대로 찬술하고 그 같고 다른 점을 열거하여 前史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다.
○ 濊註 133(하북성 중부 창주시)
濊註 134는 남쪽(산동성)으로는 辰韓과, 북쪽으로는 高句麗·沃沮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大海(황해)에 닿았으니, 오늘날 朝鮮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戶數는 2만이다.
일찍이 箕子가 朝鮮에 가서 八條의 敎를 만들어 그들을 가르치니, 문을 닫아 걸지 않아도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그 뒤 40여世를 지나 朝鮮侯 準이 참람되게 王이라 일컬었다.註 135 [秦나라 말년에] 陳勝註 136 등이 起兵하여 온 천하가 진나라에 반기를 드니, 燕·齊·趙지역의 백성 수만인이 조선으로 피난하였다. 연나라 사람 衛滿이 북상투를 하고(魋結), 오랑캐의 복장으로 [조선에] 와 그 王이 되었다.
漢 武帝는 조선(하북성 형수시 무강현의 위만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四郡을 설치하였다. 이 뒤로부터 胡族과 漢族 사이에 점차 구별이 생겼다.註 137
○ [濊에는] 大君長이 없고註 138 漢代 이래로 侯·邑君·三老註 139의 관직이 있어서 下戶를 통치하였다. 그 나라의 노인들은 예부터 스스로 일컫기를 ‘[高]句麗와 같은 종족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의 성질은 조심스럽고 진실하며 욕심이 적고 廉耻가 있어, 남에게 구걸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언어와 예절 및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지만 의복은 다르다. 남녀가 모두 曲領註 140을 입는데, 남자는 넓이가 여러 치 되는 銀花를 옷에 꿰매어 장식한다.
○ 單單大山領의 서쪽은 樂浪에 소속되었으며, 領의 동쪽 일곱 縣은 [東部]都尉가 통치하는데 그 백성은 모두 濊人이다. 그 뒤 都尉를 폐지하고 그들의 우두머리(渠帥)를 封하여 侯로 삼았다. 오늘날의 不耐濊는 모두 그 종족이다. 漢末에는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그 나라의 풍속은 山川(하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각기 구분이 있어註 141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同姓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註 142 꺼리는 것이 많아서 병을 앓거나 사람이 죽으면 옛 집을 버리고 곧 다시 새 집을 지어 산다. 삼베가 산출되며 누에를 쳐서 옷감을 만든다.註 143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안다.註 144 珠玉은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
○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추니 이를 ‘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神으로 여겨 제사지낸다.註 145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면 벌로 生口와 소·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責禍’라 한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게 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길이가 3丈이나 되는 창(矛)을 만들어 때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서 사용하기도 하며, 步戰에 능숙하다. 樂浪의 檀弓註 146이 그 지역에서 산출된다. 바다에서는 班魚의 껍질註 147이 산출되며(DB주석 : 班魚皮가 나고), 땅은 기름지고 무늬있는 표범이 많다(DB주석 : 땅에서는 文豹가 아주 많다). 또 果下馬註 148가 나는데 [후]한의 桓帝 때 獻上 하였다.
○ 正始 6년(A.D.245; 高句麗 東川王 19) 에 樂浪太守 劉茂와 帶方太守 弓遵은 [單單大]領 동쪽의 濊가 [고]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正始] 8년(A.D.247; 高句麗 東川王 21)에는 [魏나라의] 조정에 와 조공하므로, 不耐濊王으로 봉하였다. [不耐濊王은]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註 149 계절마다 郡에 와서 朝謁하였다. 二郡에 戰役이 있어 租稅를 거둘 일이 있으면, [濊의 백성에게도] 供給케 하고 使役을 시켜 마치 [郡의] 백성처럼 취급하였다.
○ 韓註 150
韓註 151은 帶方註 152의 남쪽(산동성, 강소성)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동쪽바다는 황해, 서쪽 바다는 소양호)를 삼고, 남쪽은 倭(오나라 월나라 대만)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註 153 둘째는 辰韓,註 154 세째는 弁韓인데, 辰韓은 옛 辰國이다.註 155
○ 馬韓은 [三韓 中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은 土著生活을 하고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綿布를 만들었다. [나라마다] 각각 長帥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邑借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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