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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16일 (화)

[한국사] 요택 : 소택지(늪&습지)에 대한 전향적 이해

감방친구 조회 :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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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이라 하면
보통 우포늪이나 순천만 생태습지, 중국의 경우는 쌍대자하 하류 반산소택지 같은 것을 떠올리기 쉬운데

말하자면 온통 뻘과 수렁으로 이루어져서 들어가면 깊이 빠지고 배를 타고서야 지날 수 있는 그런 환경 말이다

그런데
645년 당 태종과 그 군사는 요택을 진군과 퇴군 시에 걸어서 건넜다

물론
진군 시에는 장작대장의 지휘 아래 길을 내며 건넜고
퇴군 시에도 풀을 베거나 온갖 것을 대어 길을 내면서 건넜다

우리가 통념으로 알고 있는 늪이라 한다면
애초에 아예 그런 식으로 건널 엄두조차 내지 못 하였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통념으로서 알고 있는 그러한 환경의 늪이라면
그곳을 관통하기 위해 엄청난 전력을 소비해야 한다
그런데 진군 시에 행군 속도를 보면 평시의 속도와 다를 바 없이 이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통념으로서 알고 있는 그러한 늪이라 한다면
그곳에 들어가 있는 것 자체가
덫에 걸린 쥐 신세가 되는 것으로
전략전술적으로 매우 위험한 선택이다

사학계 통설에서는 지금의
흑산현 동쪽, 태안 서쪽, 반산 북쪽의 연안습지를
645년 당 태종이 건넌 요택이라 하고 있고
이곳을 관통하여 현 요하를 건너서 통설이 요동성으로 비정한 현 요양시로 왔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본인의 645년 요택 연구 영상을 본 분은 아시겠지만
본인이 역대 사서의 관련 기술을 교차 분석한 결과
요수에서 요동성까지는 1일 거리로서
당시 당 태종 이동속도에서
최대로 잡아도 50리 안팎이다

반면에 무경총요, 요사, 명일통지, 독사방여기요 등의 기록을 보면 하나 같이 현 요하와 현 요양시의 거리는 150리라 적고 있다

첫째, 당 태종이 남쪽이나 북쪽의 보다 순탄한 경로를 선택하지 않고 무리하여 현 흑산과 태안 사이의 소택지 가운데를 관통해 행군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10세기부터 조선후기 연행사신들까지 이 지역을 통과한 모든 이들이 북쪽이나 남쪽을 통행로로 선택하였다

둘째, 645년 당 태종 진군 및 퇴군 기사에서 요수와 요동성의 거리는 1일 거리, 최대 50리 안팎이었는데 현 요양시와 요하의 거리는 150리이다

셋째, 현 흑산과 태안 사이의 소택지를 지나 현 요양으로 오려면 요하의 중상류가 아니라 태자하와 혼하가 현 요하와 합수한 하류의 폭 1키로가 넘는 물을 통과해야 한다 만약 합수지점이 아닌 보다 북쪽에서 건넜다 하여도 다시 혼하를 건너야 한다

역대 중국사서에서 소택지는 저(沮), 요(潦), 택(澤), 습(濕), 윤(潤)  등으로 표현됐는데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아는 통념적 늪(이를테면 흑산과 태안 사이의 반산소택지), 항시적 늪을 가리키기만 한 것이 아니다

물을 머금고 풀이 우거져서 통행에 불편이 있는 땅, 또는 때때로 그러한 상태가 된 땅을 가리키고 뜻했다

팔구십 년대 이후에 출생했거나
도시에서 태어나 줄곧 산 사람은
지금 관개정리가 잘 돼 있어서 모르겠지만

관개정리가 잘 돼 있지 않았던 과거의
남한강이나 낙동강 유역을 떠올려 보면
비만 내리면 강이 범람하고 강 주변 저지대가 침수되고
강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지류들 역시 범람하고
새로운 시내와 계곡이 땅을 어지러히 뭉개놓고는 하였다

이것이 칠팔십 년대의 모습인데
조선시대, 나아가 일천 년 전, 일천 수백 년 전은 어떠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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