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요동(遼東)의 개념에 대한 이해
감방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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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동안 강역사 연구를 하면서 중국 역대 사서를 분석하고 강역사의 여러 쟁점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얻은 요동의 개념을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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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본격적 역사시대는 동주 시대부터이며 역사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춘추시대 말기부터이며
대체로 전국시대를 거쳐 전한 시대에 가서야 인식 체계가 수립됩니다.
동주라 함은 서안(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때부터를 가리킵니다.
요(遼)는 '멀다'는 뜻으로서 일반적으로 북쪽을 가리킵니다. 어느 시대고, 특히 고대의 지리관념은 왕경과 경기를 기준으로 합니다. 춘추시대 초기까지는 현 산서성 북부와 하북 일부를 북적 세력이 차지하고서 권세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춘추전국시대에, 낙양을 기준으로 북쪽에 해당하는 곳은 지금의 산서성 지역, 또는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 일대에 해당합니다.
춘추시대 말기부터 중국 세력의 영역이 북쪽으로 크게 확장되면서 요(遼)의 대체 개념으로서 역시 북쪽을 뜻하는 삭(朔)으로써 당시 북방 세력의 중심지인 현 오르도스 일대를 가리키게 됩니다.
또한 하북지역에서도 요(遼)로 지칭되는 지역이 현 석가장시 일대에서 보정시 일대로 진출하는 양상을 모습을 보입니다.
고대사서와 지도에서 요(潦)와 요(遼)는 혼용돼 쓰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요수가 비교적 처음 등장하는 사서는 산해경으로서, 산해경의 해내동경에 기술돼 있습니다. 그런데 산해경에 주석을 단 서진 사람 곽박(276-324)은 같은 것으로서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전한 시대 상흠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수경의 대요수 기술에서도 산해경의 요수 기술을 받아서 적으면서 요(潦)와 요(遼)를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潦(요) - 遼(요) - 朔(삭) - 遠(원) - 北(북)
산해경에서 말하는 요수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어느 강인지 알 수 없지만 해내동경에 기술된 점으로 볼 때에 현 하북성과 산동성 사이에 존재했던 어떤 강인 것은 분명합니다.
潦水出衛臯東東南注渤海入潦陽
그런데 潦가 물웅덩이를 뜻하는 글자이고, 현 하북성 보정시 동쪽에서 고대의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면서 이 일대에 수 많은 물줄기가 나고, 곳곳에 늪이 형성되었던 사실, 또한 송나라 시대까지도 현 천진시 서북쪽의 패주시 일대가 늪이었다고 한 무경총요의 기록 등을 볼 때에 지금의 대청하에 해당하는 고대 이수(역수), 또는 영정하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것이 아니라면 이 두 강의 사이에 위치한 어느 강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요동과 요서는 애초에 요수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요 지역, 즉 중국 세력이 보는 북쪽의 어느 지역을 기준으로 나눈 개념일 가능성이 더 있으며 요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차차 요수가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기준이 됩니다.
중국 역사에서 당산과 진황도 남쪽, 산동 북쪽, 현 천진시 일대와 그 연안의 바다를 요해라고 불렀으며, 이 요해로 흘러드는 강을 요수라 하였습니다.
역사서에서 확실히 그 위치가 확인 가능한 강은 현 란하입니다. 그러나 이수(현 대청하), 영정하 역시 요수로 불렸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명-청 시대에도 현 천진시 정해구의 북쪽을 요동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제가 예전에 이곳 동아게에 소개한 바 있습니다. 정해구의 북쪽에는 지금 독류감하가 지납니다. 이 강이 기준이 되는 것인데 애초 이 지역이 바다였던 점을 고려할 때에 대청하, 또는 영정하가 요동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이 때에 대청하(옛 이수), 또는 영정하가 요수,
그리고 이들 강의 동북쪽이 요동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현 당산시를 중심한 그 주변 일대가 가장 전통적인 요동입니다.
중국역사, 혹은 우리의 대외관계사에서 나타나는 요동은 크게 다음과 같습니다
① 현 당산시를 중심한 그 주변
② 현 보정시 일대
③ 난하, 또는 임유관, 또는 산해관 동쪽
④ 요동군
⑤ 요동국
애초에 공손씨는 현 하북성 보정시와 당산시, 진황도 일대에서 활동한 족속입니다. 저는 고구려 초기 태조대왕을 위시한 1~2세기에 확보한 현 난하 동쪽, 요하 서쪽의 영역을 2세기 말 발기의 란으로 인해 상실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사기의 연왕 한광(韓廣)이 요동왕으로 좌천된 후 무종(현 계현)에서 살해당한 기사를 검토할 때에 서기전 206년 당시의 요동이 여전히 현 당산시 일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단 사학자 가운데에 권오중 박사는 매우 전향적 인식을 보여주는데 이 지역이 줄곧 요동이었다가 서기전 128년 경에 대릉하 유역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위만조선 멸망 후에 한사군이 설치되는 때가 되어서야 요동군이 옮겨졌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요동군이 옮겨졌다 하여도 당산 지역은 여전히 요동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잘 보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