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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월)

[한국사] 진한(辰韓)의 출자(出者)를 어떻게 볼 것인가 2

감방친구 조회 :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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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동경도 진주(辰州)와 진한(辰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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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辰州 奉國軍 節度, 本 髙麗 蓋牟城.  唐太宗 㑹 李世勣 攻破 蓋牟城, 即此 渤海 改為 蓋州 又改 辰州 以辰韓得名.  井邑駢列最為衝㑹.  遼 徙 其民 於祖州, 初曰 長平軍, 户二千.  隸 東京 留守司, 統縣一, 建安縣 (요사 지리지 동경도 진주)

진주(辰州) 봉국군(奉國軍)이 설치되었으며 절도를 두었다. 본래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이었다. 당나라 태종이 이세적(李世勣)과 만나 개모성을 공파한 곳이 바로 여기이다. 발해는 개주(蓋州)로 고쳤다가 다시 진주로 고쳤으니, 진한(辰韓)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정읍(井邑 : 아홉집이 나누어 경작하는 토지)이 나란 줄지어 모여있다. 요나라가 조주(祖州)에서 백성을 옮겨왔다. 처음에는 장평군(長平軍)이라 하였는데, 호구수는 2,000이다. 동경유사사에 예속되었으며 관할하는 현은 건안현(建安縣) 하나이다.

② 遼置建安縣,蓋循故名耳,非即舊城也。(독사방여기요 산동8)

요가 설치한 건안현은 건안성에서 이름을 딴 것이지만 옛 건안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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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동경도 진주는 지금의 요녕성 개주시에 있었습니다. 

https://i.imgur.com/cQr67MX.jpg


본래 고구려 개모성이라고 적고 있지만 개모성은 현도성, 신성 등과 함께 고구려 서북 방어선에 속해 있던 성입니다. 즉 진주 지역은 본래 고구려 개모성이 있던 곳이 아닌 것이죠. 

사학계 통설은 현 요양시를 고대 요동성(양평성)이자 당나라 안동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고정하여 보고, 신당서 가탐도리기의 기술을 근거로 하여서 요령성 심양시(瀋陽市) 소가둔구(蘇家屯區) 탑산산성(塔山山城)에 개모성을 비정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건안성은 독사방여기요에서 거란 동경도 진주의 건안현은 건안성이 아니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안성으로 비정하였습니다.

어찌됐든 진주가 개모성이었다 한 기술은 어떻게 보든 수긍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기술이 요사 지리지에는 많습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 이러합니다.

이러한 기술의 곡절은 주민을 사민하거나 주를 이치, 또는 교치하면서 생겨난 정보를 체계가 없이 섞어적은 까닭에 있습니다.

즉 진주의 기술내용의 경우도 다른 곳에 있던 개모성, 또는 개주를 진주가 자리한 곳으로 옮겨오면서 개모성의 정보와 진주의 지리연혁이 섞인 것입니다. 

요사 지리지는 개모성을 개주로 고치고, 다시 진주로 고친 주체를 발해라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고려 전기 서북계와 거란 동경도의 실상, 발해 강역사 등을 연구하여 온 제가 판단컨데 발해의 진주 지역으로 거란이 개모성, 즉 개주를 옮겨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리하면,

1) 요사 지리지 기술대로, 발해가 개모성을 개주로 고쳤다가 다시 진주로 고쳤다

ㅡ 개모성이 진주 자리가 될 수 없으므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2) 발해가 개모성, 즉 개주를 진주 자리로 옮겨온 후에 진한의 이름을 따서 진주라고 하였다

ㅡ 본인의 연구에 따르면, 발해는 야율아보기 신책 연간에 대릉하 동쪽-요하 서쪽의 영역을 거란에게 빼앗깁니다 만약 발해가 주체라 한다면 시기는 이 때가 될 것입니다

3) 거란이 개모성, 즉 개주를 발해의 진주가 있는 곳으로 옮겨서 합쳤다

ㅡ 이 경우가 가장 근사하다고 보는데, 이렇다 한다면 가장 근접한 때는 거란이 고려에 대한 2~3차 침략을 완료한 거란 성종 말년에 해당할 것으로, 대략 1020년 전후가 될 것입니다

4) 서로 다른 곳에 위치했던 개주(개모성)과 진주가 발해 또는 거란에 의해 합쳐져서 진주의 자리(현 요녕성 개주)로 옮겨졌다

ㅡ 이렇다 한다면 개주와 진주의 연혁 외에 현 요녕성 개주 지역의 지리연혁이 어떤 식으로든 언급돼야 합니다
ㅡ 거란이 동단국을 거란 요주(본래 발해의 영역이었던 지역) 일대로 옮겨오면서 함께 옮겨서 설치한 숙여진 18주 가운데에 진주는 속해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진주는 본래부터 진주 자리, 즉 현 개주시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본인은 발해가 거란 야율아보기에 의해 현 요하 서쪽, 대릉하 동쪽 지역의 땅을 빼앗기고 난 후에개모성을 비롯한 빼앗긴 지역의 주민 일부를 동쪽으로 옮겨오면서 일부 연혁이 섞였고, 결정적으로 거란이 1020년을 전후한 때에 요하 서쪽 의무려산을 중심한 지역에 있었던 거란 동경 및 주요 주-군-현을 현 요양을 중심한 요하 동쪽으로 옮겨오면서 요하 서북쪽에 있었던 개주(개모성)의 연혁과 지금의 개주시에 있었던 진주의 연혁이 최종적으로 섞이게 되었다고 판단합니다.

정읍(井邑)은 정전(井田)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상-주 시대의 제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고대 중국의 제도가 꼭 아니라 하더라도 이 자체로서 고대에 비교적 체계적인 토지구획이 이루어졌고, 이를 근거로 그 지역이 일정한 국가나 세력의 왕경이나 도읍이거나 적어도 그 중심지였을 것이라 하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의 다음의 기록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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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耀州 刺史, 本 渤海 椒州, 故縣五, 椒山 貂嶺 澌泉 尖山 巖淵, 皆廢, 户七百, 隸海州.  東北 至 海州 二百里, 統縣 一, 巖淵縣.  東界 新羅, 故平壤城在縣西南, 東北至海州一百二十里. (요사 지리지 동경도 해주)

요주(耀州)에는 자사를 두었다. 본래 발해의 초주(椒州)이며 옛 현은 초산(椒山), 초령(貂嶺), 사천(澌泉), 첨산(尖山), 암연(巖淵) 등 다섯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700이며 해주(海州)에 예속되었다. 동북쪽 200리에 해주가 있다. 관할 현은 하나로 암연현(巖淵縣)인데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하고 있다. 옛날 평양성이 암연현 서남쪽에 있다. 동북쪽 120리에 해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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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주(耀州)가 고구려의 비사성으로서, 본래는 현 판진시 일대의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다가 927년 거란이 숙여진 18주를 편성하면서 발해의 초주(椒州) 지역 백성을 사민해 오면서 연혁이 섞였고, 다시 1020년을 전후한 때에 현 잉커우시 다스차오(대석교) 지역으로 주를 이치해 온 까닭에 “동북쪽 200리에 해주”, “동북쪽 120리에 해주” 하는 식의 방위와 거리수치에 있어서 착오가 생겼다고 판단합니다. 즉  “동북쪽 200리에 해주”, “동북쪽 120리에 해주” 는 본래의 요주가 현 판진시 지역에 있을 때의 지리정보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지난 날 본인이 거란 동경의 이치와 요주 문제를 연구하면서 무경총요의 기록과 교차하여 밝혀낸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을 잘 보세요.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하고 있다. 옛날 평양성이 암연현 서남쪽에 있다.”

여기에서 신라는 고려를 가리킵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이 “옛날 평양성이 암연현 서남쪽에 있다(故平壤城在縣西南)”한 기록입니다. 만약 이 지리정보가 요주가 현 판진시 일대에 있었을 당시의 정보라 한다면 그곳에서 서남쪽이므로 현 대릉하 하류 지역이 될 것입니다. 실제 본인은 이렇게 보고서 현 금주시 북쪽의 의주(의현)이 안동도호부가 있던 평양성이라 한 무경총요의 기록을 교차하여 평양성을 의주 일대로 비정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무경총요의 해당 기술은 통전의 기술을 그대로 따오면서 생긴 착오로서(이 역시 본인이 분석으로써 밝혔습니다) 대릉하 하류 서안, 의주 지역에 고구려 평양이 있었다 한 지난 날 본인의 주장을 고수할 수 없게 됐습니다.

반면에 
“옛날 평양성이 암연현 서남쪽에 있다(故平壤城在縣西南)”한 요사 지리지의 기술이 현 다스차오와 잉커우 일대에 요주가 완착한 이후의 지리정보라 한다면
요주 암연현의 서남쪽에 있다 한 옛 평양성이란 곳은 
거란 동경도 진주, 즉 현 개주시 일대에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https://i.imgur.com/WOKTeXx.jpg


이를 도식화 하여 간단히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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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辰州) - 진한(辰韓) - 정읍(井邑) - 옛 평양성(故平壤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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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다시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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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辰州)는 옛 평양성(故平壤城)이 있던 곳으로서, 정읍(井邑)의 유적이 있고, 그 이름은 진한(辰韓)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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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옛 평양성이 고조선의 수도, 즉 왕검성을 가리키는지 여부는 속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 요녕성 개주시 일대가 진한에 속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타진할 수 있습니다.

요사 지리지는 동경요양부 지역이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동경요양부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대릉하의 동안까지, 북으로는 현 북류 송화강의 남안까지, 동쪽으로는  대체로 현 단동까지, 남쪽으로는 현 대련까지에 해당합니다. 이는 1020년 이후의 영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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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東京遼陽府 本 朝鮮之地。周武王釋 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作八條之教, 尚禮義, 富農桑, 外户不閉, 人不為盜.  傳四十餘世, 燕 屬 真番 朝鮮, 始 置吏 築障.  秦 屬 遼東 外徼.  漢初 燕人 滿 王 故空地.  武帝元封三年, 定 朝鮮 為 真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後漢 出入 青幽二州, 遼東 玄菟 二郡 沿革 不常. (요사 지리지 동경도)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고, (무왕은) 이로 인해 그를 봉해 주었다. (기자는)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만들어 베푸니, (백성들이)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로 부유해져 바깥 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40여세를 전하여 연(燕)나라가 진번(眞番) 조선(朝鮮)을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관리를 두고 요새를 설치하였다. 진(秦)나라 때 요동의 바깥 요새에 속하였다. 한(漢)나라 초기에 연나라 사람 만(滿)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 4군(郡)을 설치하였다. 후한(後漢) 때에 청주(靑州)와 유주(幽州)에 출입하였다. 요동군과 현도군은 연혁이 일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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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교차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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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辰州) - 진한(辰韓) - 정읍(井邑) - 옛 평양성(故平壤城) - 현 요녕성 개주시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朝鮮)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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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고학계에서는 경상도 지역에서 진한의 소국들이 BC 1세기부터 점차 성립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질문화는 위만조선계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1) BC 3세기 이후 전국연계 물질문화의 잠식

https://i.imgur.com/AZz3isH.jpg
https://i.imgur.com/tyNU0yP.jpg


2) BC 3세기 이후 물질문화상

https://i.imgur.com/L1Iaqzc.jpg


3) BC 1 세기 ~ AD 4세기 물질문화의 한 단면

https://i.imgur.com/7sh6kcF.jpg

백제 적석총이라 함은 고구려계 적석총으로 점차 백제적 특성을 띠게 된 것을 이릅니다. 즉 초기 고구려적 특성을 지닌 것까지를 일러 백제 적석총이라 합니다.

백제는 이미 3세기(서기 200년대)에 이르러서 경기도, 강원도 일부, 충청남도와 충청북도 일부까지 그 문화상이 나타납니다.

사실 고구려계 적석총은 서북한과 경기도, 강원도 일원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납니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의 서북한과 경기도 북부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하는 그 시기에 말입니다.

마한은 전라남북도에,
진한과 변한은 한 범주로서 경상도, 낙동강 중하류의 동서에 그 문화상이 나타납니다.

▶ 백제 적석총 관련 정보 : 한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6133

▶ 평양에서 발굴된 3세기 고구려 벽화고분 관련 정보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3&oid=421&aid=0002955700








  


포테이토… 20-09-10 13:17
고조선과 삼한시대까지 올라가면 머리가 깨질것 같다는........
감방친구 20-09-10 13:28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죠
전문 연구자들은 특정 시대든 특정 주제든 특정 시대의 특정 주제든 하나만 가지고 평생을 파는 사람들이죠
그리고 자기 전문분야 아닌 것은 다른 학자들의 연구나 통설을 인용하는 것으로써 가름합니다

반면에 우리 같이
강역사를 통채로 다루는 사람은 수백 가지의 사료, 몇 천, 몇 만 페이지의 기록과 정보를 머리 속에 넣고 계속 돌리면서
그것을 분석하며 소화를 시켜야 하니

미칠 노릇이죠

램이 딸리고 랙에 걸리고 다운이 되고 바이러스에 걸리고
뭐 이런 식 ㅎㅎ
신서로77 20-09-10 21:34
무식해서 무슨말인지 도통이해 안될때도있고 어렵지만 읽어보려고 노력합니다...오늘은 최소한 그런가보다하고 읽었는데 다른때보단 어렵지 않네요...항상어려움을 토로하시는 부분을 작게라도 이해합니다...이런 수고로움이 언젠가는 빛을 봤으면하는 바램입니다...
감방친구 20-09-10 22:45
감사합니다
뽀로록 20-09-11 00:14
내용은 복잡하지만 요동에 우리 민족의 혼이 있었다는 느낌이 듦..
보리스진 20-09-12 13:39
『遼史』卷39 志9 地理志3 中京道 高州
삼한현(三韓縣). 진한(辰韓)은 부여(扶餘)가 되고,
(중략)
성종이 고려를 정벌하고 3국의 유민[遺人]을 포로로 잡아서 현을 설치하였다.

<동문선 박인량 표전>
압록강의 형성된 것은 우리나라 영토의 한계가 되는데, 강을 따라 여러 곳에 부여의 옛 성이 아직도 남아 있고, 그 땅을 하사하신 높은 은혜는 태조의 말씀 그대로 영토가 준수되어 왔습니다.
鴨綠之成形 劃鯷岑而作限 沿江列址 扶餘之古戍猶存 賜履爲恩 大后之前言不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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