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생이닷컴-해외 네티즌 반응 커뮤니티


HOME

 - 커뮤니티>동아시아 게시판
메뉴보기
  • 해외반응 -
  • 뉴스 -
  • 영상자료 -
  • 유머/엽기 -
  • 커뮤니티 -
  • 팬빌리지 -

회원

로그인

12월 01일 (화)

[한국사] 진한(辰韓)의 출자(出者)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감방친구 조회 : 570
검색목록 목록
이 고찰문에서는 일부 문제만을 다루었습니다. 

고조선은 제 강역사 연구의 최종 목적지이므로 보다 면밀하고 충실하게 탐구하고자 합니다. 즉, 저의 모든 연구 성과가 고조선 문제에 투입될 것이기에 가급적 고조선 관련 쟁점을 건드리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삼한 문제, 그 가운데에서 진한과 관련한 논쟁이 있어서 그 문제를 중심으로 고찰을 하였습니다. 


1.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


- - -

①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 (생략) 是爲辰韓六部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개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생략) 이것이 진한(辰韓) 6부가 되었다.

②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나라의 속국인데, 근래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도다. 대국을 섬기는 예의가 이렇단 말인가?”

③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 天時和 倉庾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우리나라에 두 분의 성인(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이 출현하면서, 사람은 바르게 되고 하늘은 온화하여,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들은 서로 공경하고 겸양하니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ㆍ낙랑ㆍ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④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 중에 진(秦)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고생하다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마한 동쪽에서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 

- - -

①부터 ③의 내용은 삼국사기에만 있는 것으로서, 삼국사기 사서기자가 우리 옛기록에서 얻은 사실이고,

④의 내용은 사서기자가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바탕으로 해설한 것입니다. 



2. 삼국지 위서 동이전 진한


- - -

①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진한의) 노인들은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나라의 고역(苦役)를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
고 하였다.

② 생략

③ 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秦韓者.

낙랑(樂浪) 사람을 아잔(阿殘)이라 하였는데, 동방(東方)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阿(아)라 하였으니, 낙랑인(樂浪人)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④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진한은) 처음에는 6국(六國)이던 것이 차츰 12국(十二國)으로 나뉘어졌다.

- - -



3. 秦役(진역), 또는 秦亂(진란)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국사편찬위원회의 국역본에서는 2-①에서와 같이 '진(秦)나라의 고역(苦役)'이라고 해석하여 놓았지만 원문에는 秦役(진역)이라고 돼 있습니다. 役(역)은 부역, 노동의 뜻을 지니기는 하지만 보통 전쟁, 전투, 군사행동의 뜻으로 쓰이며 현재 중국과 일본에서 이 뜻으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역(秦役)은 국사편찬위원회의 국역대로가 아니라 '진나라가 일으킨 전쟁'이라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앞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1-④)에서 苦秦亂(고진란), 즉 “진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인한 고통”이라고 나타나 있어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해당 기록을 참고하여 삼국사기의 해당 기술에 반영한 삼국사기 사서기자 역시 지금의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석이 아니라 제 해석과 동일한 이해를 하였다는 것을 교차로써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국 전국시대 말기,
연왕 희(喜)의 아들 태자 단(丹)은 진(秦)이 중원통일의 기세로 연을 위협해 오자 형가(荊軻)와 진무양(秦舞陽)을 보내 진시황을 암살하려 하였습니다. 이 일은 아주 쉽게 실패로 끝나고 진나라는 연나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연나라를 깨트립니다.

이렇게 되자 연왕 희와 태자 단은 요동으로 달아났는데 그곳에서 희는 단의 목을 베어 진나라에 보내서 사죄하였으나 진시황은 요동까지 군사를 보내서 잔존세력을 소탕하였습니다.

이 때가 서기전 226년 경입니다.

이보다 앞서 조(趙)는 서기전 228년에, 제(齊)는 연이 망한 직후인 서기전 221년에 진(秦)에 멸망돼 통합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삼국사기와 삼국지가 적고 있는 秦役(진역)이요 秦亂(진란)입니다. 조선을 비롯한 우리 역사 강역의 서쪽에 인접해 있는 연, 제, 조가 진나라에 의해 차례로 멸망하면서 그 충격파가 우리 역사 강역으로 전달된 것입니다.



4. 진한은 진역(秦役) 당시(BC 3세기)에 이미 경상도 지역에 성립해 있었나?

- - -

①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 중에 진(秦)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고생하다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마한 동쪽에서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 삼국사기 신라본기)

②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역(秦役)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 - -

①의 기술은 ②의 기록을 토대한 사서기자의 설명입니다. 

내용을 비교하여 살펴보면, 

원전이 되는 삼국지의 기록에는 진역(秦役)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온 사람들이 진한(辰韓)을 이루었다고 하였는데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진역을 피해 이주한 사람이 진한의 주체세력이며 이들이 마치 중국인일 수도 있다는 늬앙스를 띱니다.

반면에 

삼국지 기록을 바탕으로 삼국사기 사서기자가 설명으로서 기술한 내용에는 진란(秦亂)을 피해서 동쪽으로 피란을 온 사람들은 중국인들(中國之人)이며 이들 대부분이 이미 한반도 남부 마한의 동쪽에 존재하고 있던 진한에 와서 진한 사람들과 섞여살았다고 돼 있습니다. 

삼국사기 사서기자의 말대로라면 서기전 3세기 말에 진란(秦亂)을 피해서 중국인들(中國之人)이 도망쳐 오기 전부터 이미 마한의 동쪽,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 진한(辰韓)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됩니다.

그런데 사학계 통설의 고고학적 연구를 바탕한 입장은 어떠할까요?

- - -

마한 지역과는 달리 경상도 지방에서는 전체적으로 위씨조선계(衛氏朝鮮系) 청동기·철기문화의 유입, 한(漢) 철기문화의 보급에 수반한 금속제 유물의 수량이 현저하게 증가된다.

다량의 금속기를 소유한 지배자의 출현은 정치집단의 대두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진한 소국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경주·대구 지역에서는 위씨조선계 금속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다량의 청동기·철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한민족문화대백과>

- - -

한민족문화대백과의 상기 기술에서는 “한(漢) 철기문화의 보급에 수반한 금속제 유물”이라고 하여서 마치 중국계 유물이 경상도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으로 오인할 수 있게끔 서술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편 경상도 지역에 뚜렷한 문화가 형성돼 소국가적 단계를 띠는 것은 서기전 1세기부터이며, 이 지역의 하나의 세력으로 점차 통합돼 나타나는 것은 3세기 무렵부터입니다.

고고학계에서는 경상도 지역에서소국가 수준으로 세력이 형성된 시기가 기원전 1세기 경부터라고 하며 이들의 물질문화적 성분을 토대할 때에 위씨조선, 즉 위만조선계통의 문화 양상을 띠므로 

기원전 3세기 경에 중국인들이 무려 5천 리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여 한반도 동쪽으로 이주하였다는 것은 성립 불가능한 가설입니다.

 

5. BC 3세기 이후 조선과 조선의 서쪽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 - -

ⓞ 전국연 진개(秦開)가 동호를 정벌하여 1천 리를 내쫓고(사기 흉노열전), 조선을 공격하여 2천 리를 획득(위략)하였음(서기전 4세기초, 또는 3세기 초)

① 연나라 멸망(서기전 3세기 말) / 연왕 희와 지배층은 요동으로 쫓겨가 있다가 진나라 군대에 소탕되었음(이 때에 요동이라 함은 현 당산과 진황도 일대)

② 진의 멸망(서기전 210년)과 한의 제패(서기전 206년)

③ 요동왕(遼東王) 한광(韓廣)의 반란과 죽음(서기전 206년)

④ 연왕 노관의 흉노 투항과 노관의 부관인 위만의 조선 망명(서기전 195년 경)

⑤ 위만이 조선에 망명했을 때에는 이미 연(燕)과 제(齊) 등지에서 망명한 유민들이 조선의 서쪽 지역에 살고 있었다.(삼국유사 위만조선, 사기 조선열전 등)

⑥ 위만의 조선 역성혁명(기원전 194년, 또는 그 이전)

⑦ 위만조선, 한(漢)의 요동태수와 협약을 하여 한의 외신(外臣)이 되어 주변국들의 한나라 입조를 막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지키지 않고 진번과 임둔국 등을 복속하여 그 영토가 사방 수천 리에 이름

⑧ 한(漢)에 예(濊君) 남려(南閭)가 투항해 옴(휘하 28만 명)에 따른 창해군(滄海郡) 설치(서기전 128년)과 폐지(서기전 126년)

⑨ 한(漢)의 요동동부도위 섭하 살해(서기전 109년), 조한 전쟁과 위만조선의 멸망(서기전 108년)

⑩ 위만조선 땅에 낙랑, 임둔, 진번군 설치(서기전 108년)

⑪ 예맥의 땅에 현도군 설치(서기전 107년)

⑫ 임둔군과 진번군 폐지(서기전 82년)

⑬ 이맥의 침입에 따라 요동군과 현도군 이전 설치(서기전 75년)

- - -



6. 물질문화와 세력권의 이해


이 정보는 한국고대사학회, 동북아역사재단 등의 논문, 한민족문화백과 등의 백과사전 기술정보를 토대로 하였습니다.

특히 조진선, 오강원, 이후석 등의 연구자 논문이 중심 바탕이 되었습니다.


1) BC 10세기 이후 물질문화

https://i.imgur.com/44OBWji.jpg

보라색 표시가 돼 있는 지역은 사학계에서 고조선의 영역으로 설정한 지역입니다. 사학계 주류설에서는 정가와자 유형을 고조선으로 보고 BC 6세기 경을 고조선의 시작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십이대영자는 동호, 또는 맥으로 봤습니다. 그러나 이후 최근의 경향은 십이대영자를 고조선 주체로 보고서 고조선의 시작을 BC 10세기 전후로 보고 있습니다.

비파형 동검의 시작지를 십이대영자유형 지역으로 보는 설과 정가와자유형 지역으로 보는 설이 양립해 있습니다.

BC 10세 전후로 보자면,
이미 지도상에 보라색으로 표시된 지역뿐만 아니라 길리성, 흑룡강성, 연해주, 한반도 전 지역이 비파형동검 문화권입니다.

연나라는 BC 10세기를 전후하여 현 북경시 방산구 유리하 지역에 상-주 계통의 물질문화 유적을 남기고 있는데 이 지역은 지도상에서 맨 좌측에 표시된 강인 영정하의 남쪽 인근 지역입니다. 그러나 이후로는 이 지역에서의 물질문화가 나타나지 않고 현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서 BC 4세기 전까지 연나라 물질문화가 제한돼 나타납니다.

옥황묘 문화는 산융의 문화입니다.

고죽의 경우 사서를 살펴보면 분명 중국계 세력이 아님에도 중국적 물질문화의 특색을 띤 독특한 문화입니다.


2) BC 4세기 경 물질문화

https://i.imgur.com/4r7SpYp.jpg

지도에 표시된 '철영자/정구자문화'는 문화가 아니라 '유형'입니다. 제가 잘못 표기한 것으로서, '철영자/정구자유형'으로 바로잡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세형동검이 서북한의 청천강 이남, 평안남도와 황해도 일원에 국한돼 나타나다가 이것이 점차 남한 지역으로 퍼졌다고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세형동검은 말그대로 비파형동검이 세형화돼 나타난 것입니다. 비파형 동검의 칼날의 둥근 부분이 약화되고 날렵한 형태를 띠게 된 것이 세형동검으로 이것이 나타나는 것은 BC 6세기 경의 정가와자유형입니다. 세형동검 계통은 하가점상층 지역의 말기, 현 요서와 요동지역뿐만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에서 넓게 나타납니다. 다만 그것의 결합방식이나 장식의 형태, 다른 유물과 출토된 형태 등에 따라서 지역과 유형을 구분할 뿐입니다.

전국연계 물질문화는 BC 4세기가 돼서야 비로소 영정하를 건너 현 북경시와 당산시, 승덕시 일대에서 나타납니다. 

저는 이것을 토대로 제 환공이 7세기 중엽에 산융과 고죽을 정벌했다 하는 사서의 기록들이 사실이 아닌, 후대의 일을 제 환공을 높이고자 올려기술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3) BC 3세기 이후 물질문화

https://i.imgur.com/L1Iaqzc.jpg

저는 칠로도산 동쪽과 천산산맥 서쪽에서 나타나는 전국연계 물질문화의 속성이
연나라의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을 침범하여 장악한 결과가 아니라 연나라에서 유이민이 급격히 유입된 결과라고 봅니다.

연나라 진개가 고조선을 침입한 시기는 BC 3세기 초, 연 소왕 시대로서, 이 때가 연나라의 최전성기이나 이 최전성의 시기는 짧았고 곧 이어 약화돼 멸망하였습니다. 연나라가 현 요심 지역까지 고조선의 영역을 빼앗아 통치하였다 하더라도 그 기간은 이삼십 년 안쪽이며, 진나라가 들어섰다 곧이어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서는 등 이 지역에 대한 장악력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위만조선의 위만조차 연나라에서 도망쳐 온 사람으로서, 위만이 고조선의 서쪽 변경을 지키고 있을 때에 이미 그 지역에는 연과 제 등지에서 이주한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즉 이들이 남긴 물질문화가 천산산맥을 동한계선으로 하여 나타난 것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4) BC 3세기 이후 칠로도산 서쪽-천산산맥 동쪽 지역의 물질문화 잠식

https://i.imgur.com/AZz3isH.jpg
https://i.imgur.com/tyNU0yP.jpg




7. 정리

1) 삼국지 위서 동이전 진한

- 진한을 성립한 주체 세력은 진역을 피해 이주한 중국인

2)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

- 진한을 성립한 주체 세력은 진한 유민, 진한 유민은 조선 유민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기록을 바탕으로 편찬자(사서기자)가 진란을 피해 온 중국인이 진한에 들어와서 섞여 살았다는 해설을 덧붙임

3) 고고학계

- 진란, 또는 진역이 있던 때는 BC 3세기

- 경상도 지역에 소국가 형태의 물질문화상이 나타나는 것은 BC 1세기부터

- 문화의 중심 속성은 위만조선계통과 토착계통

- 중국계 물질문화는 BC 3세기 이후 천산산맥을 동쪽 최말선으로 하여 멈추었고, 그 동쪽과 남쪽의 토착문화권에서 다소 유의미한 수준에서 관찰됨

- 심지어 최근의 경향은 서북한으로 비정한 낙랑군의 속성에 대하여 직접적 통치가 아니라 거점을 두고서 토착세력에게 권한을 위임한 간접지배였다는 쪽으로 선회함(그 이유는 물질문화상이 토착문화가 중심이 돼 중국계 문화를 수용한 형태로 관찰되는 까닭)



8. 결론 1

경상도 지역의 진한 세력은 BC 2~1 세기 경 외부에서 이주한 이주민 집단으로서 그 문화적 속성에 위만조선과 전한의 속성이 나타나므로 이들은 현 요동지역에서 어떠한 이유로 이주하여 온 집단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들 집단이 일순에 경상도 지역까지 동진한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동진하였다 한다면 이들의 출발지와 출발 시기는 BC 2세기 경의 현 요동지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 취재한 '진역', 또는 '진란' 관련 기사가 사실이라 한다면 이들의 출발지와 출발시기는 BC 3세기 경 현 요서지역, 즉 대릉하 유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진한은 진한 유민의 이주와 함께 성립한 것으로서 애초부터 마한의 동쪽, 현 경상도 지역에서 성립해 있던 것이 아니므로 이들 집단이 진한 유민, 또는 조선 유민이라 지칭된 이유

즉, 이들이 출자한 곳이자 본래의 조선, 또는 진한이 있던 곳 역시 현 요동, 또는 대릉하 유역이라 볼 수 있습니다.

BC 3세기 경에 진역을 피해 피란한 중국계 유이민들이 대릉하, 또는 현 요동지역에 있던 진한으로 망명하여 왔고, 이들과 함께 섞여 살다가 위만조선의 성립, 또는 위만조선의 전성기, 또는 위만조선의 멸망 즈음에 다시 지금의 경상도 지역까지 이주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목록 PC버전 위로

Copyright © gasen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