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생이닷컴-해외 네티즌 반응 커뮤니티


HOME

 - 커뮤니티>동아시아 게시판
메뉴보기
  • 해외반응 -
  • 뉴스 -
  • 영상자료 -
  • 유머/엽기 -
  • 커뮤니티 -
  • 팬빌리지 -

회원

로그인

03월 30일 (토)

[한국사] 중국정사외국전 국역 거란/해 관련 기록 발췌 정리1

감방친구 조회 : 2,240
검색목록 목록

수/당 시기 영주와 고구려 서계를 추적하는 과정의 일환으로서 거란(과 해)의 영역과 그 변화상을 여러 사서 기록을 토대로 파악하고자 본인이 직접 해석하던 중에 너무 힘에 부쳐서 고전번역DB 등을 열람하던 중에 동북역사넷 사료라이브러리에 중국정사 외국전이 국역돼 공개돼 있는 것을 발견하여 한숨 돌렸다.


하여 그것을 발췌 정리하였으니 아래와 같다.

ㅡ 동북아역사넷 해석본은 (동)

ㅡ 본인의 해석본은 (본) 또는 ‘본인’

ㅡ 다시 쓰는 유기의 해석본은 ‘다시 쓰는 유기’라 표시하였다.


추적에 동행하고 계시는 역사탐문자 여러분께서 위서에서 요사에 이르는 거란의 위치와 영역 관련 여러 사서 기록을 차분하고도 면밀히 읽어보시며, 또 현 한중 학계 통설 반영 지도를 교차 비교하여 보시며 거란의 위치와 영역에 대한 현 한중 학계 통설의 시시비비, 또는 그 허점을 판단하여 보시기 바란다.


동북아역사넷 관련 자료 주소와 북위~수/당 당시 거란의 위치와 영역 통설 지도 등은 댓글에 제시하였다.


하기 기록들을 사서별로 하나하나 분석, 비판하며 ‘영주의 위치와 고구려 서계’ 추적을 계속하여 가겠다.


한편 동북아역사넷에서 제시한 하기 기록들에 달린 주석을 따로 글을 열어 게시하겠으니 참고하여 보시기 바란다.




1.위서(동)



1)거란


契丹國, 在庫莫奚東, 異種同類, 俱竄於松漠之間. 登國中, 國軍大破之, 遂逃迸, 與庫莫奚分背.


거란국(契丹國)은 고막해의 동쪽에 있고, (고막해와) 다른 갈래이나 같은 종족(異種同類)이며, 송막(松漠)의 사이로 모두 달아났다. 등국(登國, 북위 도무제, 386~396) 중에 나라의 군대(북위)가 이들을 크게 격파하여 마침내 흩어져 달아나 고막해와 나누어 등을 지고 (거주하였다.)


# 해석이 이상한데 정리하자면 북위 도무제 시절 북위가 고막해와 거란을 공격하자 이들 두 부족이 송막으로 모두 달아나서 그곳에서 서로 등을 지고(두 부족은 사이가 나빴다) 살았다는 말이다.


經數十年, 稍滋蔓, 有部落, 於和龍之北數百里, 多爲寇盜.


수십년이 지나 점차 번성하여 부락이 생겼으며, 화룡(和龍)의 북쪽 수백리에서 대부분이 도둑질을 하였다.


眞君以來, 求朝獻, 歲貢名馬.


진군(太平眞君,북위 태무제, 440~451) 이래 조헌(朝獻)을 청하여 해마다 명마(名馬)를 바쳤다.


皆得交市於和龍·密雲之間, 貢獻不絶.


모두 화룡(和龍)과 밀운(密雲)의 사이에서 교역할 수 있게 되었고, 공헌이 끊이지 않았다.


太和三年, 高句麗竊與蠕蠕謀, 欲取地豆于以分之. 契丹懼其侵軼, 其莫弗賀勿于率其部落車三千乘·衆萬餘口, 驅徙雜畜, 求入內附, 止於白狼水東. 自此歲常朝貢.


태화(太和, 북위 효문제) 3년(479), 고구려(高句麗)가 몰래 연연(蠕蠕 유연)과 모의하여 지두우(地豆于)를 취해서 나누고자 하였다. 거란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그 막불(莫弗) 하물우(賀勿于)가 그 부락을 인솔하여 수레 3천승, 무리 1만 여 명과 여러 가축을 몰고 복속해 들어올 것을 청하고, 백랑수(白狼水)동쪽에 머물렀다. 이 해(479)부터 항상 조공하였다.


朝貢至齊受禪常不絶.


조공은 북제가 (동위를) 선양하기에(受禪)이르러서도 항상 끊이지 않았다.


# 북제가 들어설 때까지 조공이 계속됐다는 말



2) 고막해


庫莫奚國之先, 東部宇文之別種也. 初爲慕容元眞所破, 遺落者竄匿松漠之間.


고막해국(庫莫奚國)의 조상은 동부(東部)우문(宇文)의 별종(別種)이다. 일찍이 모용원진(慕容元眞)에게 격파되자 흩어져 남은 자들이 송막(松漠)의 사이로 달아나 숨었다.


登國三年, 太祖親自出討, 至弱洛水南, 大破之, 獲其四部落, 馬牛羊豕十餘萬.


등국(登國, 북위 도무제) 3년(388), 태조(太祖)가 친히 토벌하러 나가 약락수(弱洛水) 남쪽에 이르러 이들을 대파하고, 그 4개 부락과 말, 소, 양, 돼지 10여 만 마리를 얻었다.


旣而車駕南還雲中, 懷服燕趙.  十數年間, 諸種與庫莫奚亦皆滋盛.


이후 황제가 남쪽 운중(雲中)으로 돌아가니, 연(燕)과 조(趙) (지역이)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십수년 동안 여러 종족과 고막해 또한 모두 번성하였다.


乃開遼海, 置戍和龍, 諸夷震懼, 各獻方物.


요해(遼海)를 열고 화룡(和龍)에 수자리를 설치하니, 여러 오랑캐들이 놀라 두려워하며 각각 토산물을 바쳤다.


太和四年, 輒入塞內, 辭以畏地豆于鈔掠, 詔書切責之.


태화(太和) 4년(480), (고막해가) 갑자기 새내로(국경 안으로) 들어와 지두우(地豆于)가 약탈하는 것이 두렵다고 하소연하니, 조서로 그들(지두우)을 엄히 질책하였다.


二十二年, 入寇安州, 營燕幽三州兵數千人擊走之. 後復款附, 每求入塞, 與民交易.


태화 22년(498), 안주(安州)에 도적(고막해)이 들어왔는데, 영주(營州), 연주(燕州), 유주(幽州) 3개 주의 병사 수천명이 이들을 공격하였다. 후에 다시 진심으로 복종하고, 매번 새내에 들어와 (북위의) 백성들과 교역할 것을 청하였다.


世宗詔曰: 「庫莫奚去太和二十一年以前, 與安營二州邊民參居, 交易往來, 並無疑貳. 至二十二年叛逆以來, 遂爾遠竄. 今雖款附, 猶在塞表, 每請入塞與民交易. 若抑而不許, 乖其歸向之心; 聽而不虞, 或有萬一之警. 不容依先任其交易, 事宜限節, 交市之日, 州遣上佐監之.」 自是已後, 歲常朝獻, 至於武定末不絶.


세종(世宗)이 조를 내려 말하기를, “고막해가 태화 21년(497) 이전까지는 안주, 영주 2개 주의 변경 사람들과 뒤섞여 살면서 교역(交易)이 오고 갔으며, 또한 두마음을 갖고 의심한 적이 없었다. (태화) 22년에 이르러 반역한 이래로 마침내 너희는 멀리 달아났다. 지금 비록 진심으로 복종한다고 하나 여전히 변방 바깥에 있으면서 매번 새내로 들어와 백성들과 교역하기를 청한다. 만약 억누르고 허락하지 않으면 그 복종하려는 마음을 어그러뜨릴 것이고, 허락하고 걱정하지 않는다면 혹여 만일의 동요가 생길 것이다. 그 교역을 먼저 맡았던 자에게 의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일이 있으면 마땅히 부절[을 갖고 있는 자에게만] 한정할 것이며, 교역하는 날, 주(州)에 상좌(上佐)를 보내 감독하라.”고 하였다. 이후로부터 매해 항상 조헌(朝獻)이 (동위 효정제 : 孝靜帝) 무정(武定) 말(550)까지 끊이지 않았다.


《魏書 列傳第八十八 高句麗百濟勿吉失韋豆莫婁地豆於庫莫奚契丹烏洛侯》




2. 수서(동)



1)거란


契丹之先, 與庫莫奚異種而同類, 並爲慕容氏所破, 俱竄於松·漠之間. 其後稍大, 居黃龍之北數百里.


거란(契丹)의 선조는 고막해와 다른 부족이나 같은 종족이며, 모두 모용씨에게 격파당하여 송막(松漠)의 사이로 모두 달아났다. 그 후 점차 강대해졌으며 황룡(黃龍)의 북쪽 수백리에서 살았다.


當後魏時, 爲高麗所侵, 部落萬餘口求內附, 止于白貔河.


북위(北魏) 때가 되어 (거란은) 고구려(高麗)의 침입을 받아 부락 1만 여 구가 내부(內附)하기를 청하고 백비하(白貔河)에 머물렀다.


# 백비하 : 장소는 미상이나 학계 통설에서는 요녕성 경계, 즉 대릉하와 소릉하의 상류지역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수서의 이 기록은 상기 위서의 기록과 교차가 됨으로 ‘백비하’는 ‘백랑수 동쪽’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즉 백랑수 동쪽의 백비하 일대에 머무른 것이다.


其後爲突厥所逼, 又以萬家寄於高麗.


그 후 돌궐의 위협을 받아 또 (거란인) 만가(萬家)가 (스스로) 고구려에 의탁하였다.


開皇四年, 率諸莫賀弗來謁. 五年, 悉其衆款塞, 高祖納之, 聽居其故地.


개황(開皇) 4년(584) (거란이) 여러 막하불(莫賀弗)을 인솔하여 내알(來謁)하였다. (개황) 5년(585), 모든 그 무리가 새내(국경, 장성)를 두드리니 고조(高祖)가 이를 받아들이고, 그 옛 땅에서 살도록 허락하였다.


六年, 其諸部相攻擊, 久不止, 又與突厥相侵, 高祖使使責讓之. 其國遣使詣闕, 頓顙謝罪.


(개황) 6년(586), 그 여러 부락들이 서로 공격하기를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고, 또 돌궐과 서로 침략하니 고조가 사신을 보내 그들을 꾸짖었다. 그 나라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 (수나라) 궁궐에 도착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其後契丹別部出伏等背高麗, 率衆內附. 高祖納之, 安置於渴溪那頡之北.


그 후 거란의 다른 부락 출복(出伏) 등이 고려를 배반하고 무리를 인솔하여 내부하였다. 고조가 그들을 받아들이고, 갈계나힐(渴溪那頡)의 북쪽에 안치시켰다.


開皇末, 其別部四千餘家背突厥來降. 上方與突厥和好, 重失遠人之心, 悉令給糧還本, 勑突厥撫納之. 固辭不去.


개황 말, 그 다른 부락 4천여 가가 돌궐을 배반하고 항복해왔다. 상께서 바야흐로 돌궐과 화합하려는데, 먼 곳 사람 (돌궐인)의 마음을 잃을까봐 걱정되어, 모두 식량을 주어 본래 (거주지)로 돌아가도록 하고, 돌궐에게는 그들 (거란인)을 위로하여 불러들이라는 칙을 내렸다. (거란인이) 굳게 거절하고 가지 않았다.


部落漸衆, 遂北徙逐水草, 當遼西正北二百里, 依託紇臣水而居. 東西亘五百里, 南北三百里, 分爲十部. 兵多者三千, 少者千餘, 逐寒暑, 隨水草畜牧.


부락이 점점 많아지자 마침내 북쪽으로 옮겨가 물과 풀을 좇아 요서 정북쪽으로 2백 리에 있는 탁흘신수(託紇臣水)에 의지하여 살았다. 동서로 5백 리, 남북으로는 3백 리에 걸쳐 있었고, 10부로 나뉘었다. 병사는 많은 경우 3천, 적은 경우는 천여 명이었으며, 춥고 더움을 좇고, 물과 풀을 따라 목축을 했다.


# 탁흘신수 : 장소는 미상이나 바이두백과에 근거할 시 중국 학계에서는 서요하의 2개의 큰 지류 가운데 하나인 로합하(다른 지류는 시라무렌강)로 보고 있다.


有征伐, 則酋帥相與議之, 興兵動衆合符契. 突厥沙鉢略可汗遣吐屯潘垤統之.


정벌이 있으면, 우두머리들이 서로 의논하였으며, 병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동원할 때는 부계(符契)를 합쳐 (일치해)야 했다.
돌궐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이 토둔(吐屯) 반질(潘垤)을 보내 그들을 통솔하였다.



2) 해


奚本曰庫莫奚, 東部胡之種也. 爲慕容氏所破, 遺落者竄匿松·漠之間.


해(奚)는 본래 고막해(庫莫奚)라 하고, 그 선조는 동부호(東部胡)의 (별)종(別種)이다. 모용씨(慕容氏)에게 격파당하여 흩어져 남은 자들이 송막(松漠)의 사이로 달아나 숨었다.



《隋書 卷八十四列傳第四十九》




3. 구당서(동)



1)거란


契丹, 居潢水之南, 黃龍之北, 鮮卑之故地, 在京城東北五千三百里. 東與高麗鄰, 西與奚國接, 南至營州, 北至室韋. 冷陘山在其國南, 與奚西山相崎, 地方二千里.


거란(契丹)은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에 살았는데, (이 곳은) 선비(鮮卑)의 옛 땅으로 (당나라) 경성(京城)에서는 동북으로 5,300 리 (떨어) 있다. 동쪽으로는 고려(高麗)와 이웃하였고 서쪽으로는 해국(奚國)과 접했고 남으로는 (당나라) 영주(營州)에(까지) 도달하고 북쪽으로는 실위(室韋)에 도달했다. 냉형산(冷陘山)은 그 나라의 남쪽에 있었는데 해의 서산(西山)과 서로 (이어져 있어) 산길이 험준하였고 (그 길이 지나는) 지방은 이천 리였다.



2)해

奚國, 蓋匈奴之別種也, 所居亦鮮卑故地, 卽東胡之界也, 在京師東北四千餘里. 東接契丹, 西至突厥, 南拒白狼河, 北至霫國. 自營州西北饒樂水以至其國.


해국(奚國)은 대개 흉노(匈奴)의 별종이고 (그들이) 살던 곳은 또한 선비(鮮卑)의 옛 땅이자 곧 동호(東胡)가 (살던 곳과) 접하고 있고, (당의) 경사(京師)에서는 동북쪽으로 4,000여 리에 있었다. (그들의 영역은) 동쪽으로는 거란(契丹)과 접했고 서쪽은 돌궐(突厥)에 도달했고 남쪽은 백랑하(白狼河)가 가로막고 있고 북쪽은 습국(霫國)에 도달했다. 영주(營州) 서북쪽의 요락수(饒樂水)로부터 그들 나라에 도달하게 된다.



3) 습


霫, 匈奴之別種也, 居于潢水北, 亦鮮卑之故地, 其國在京師東北五千里. 東接靺鞨, 西至突厥, 南至契丹, 北與烏羅渾接. 地周二千里, 四面有山, 環繞其境.


습(霫)은 흉노(匈奴)의 별종(別種)으로 황수(潢水) 북쪽에 거주하는데 또한 선비(鮮卑)의 옛 땅이며, 그 나라는 경사(京師) 동북쪽으로 5,000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말갈(靺鞨)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돌궐(突厥)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거란(契丹)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오라혼(烏羅渾)과 접한다. 땅의 둘레는 2,000리이고, 사면으로 산이 있어 그 경계를 둘러싼다.


《舊唐書 卷二百一十二 鐵勒契丹奚室韋靺鞨渤海靺鞨霫烏羅渾》




4. 신당서(동)



1)거란


契丹, 本東胡種, 其先爲匈奴所破, 保鮮卑山. 魏靑龍中, 部酋比能稍桀驁, 爲幽州刺史王雄所殺, 衆遂微, 逃潢水之南, 黃龍之北. 至元魏, 自號曰契丹. 地直京師東北五千里而贏, 東距高麗, 西奚, 南營州, 北靺鞨·室韋, 阻冷陘山以自固.


거란(契丹)은 본래 동호(東胡)의 (한) 종류로 그 선조가 흉노(匈奴)에게 격파되어 선비산(鮮卑山)에 의지하여 살았다. 조위(魏) 청룡(靑龍) 연간(233~237), 부족의 우두머리(部酋)인 비능(比能)이 조금 사납고 교만했으나 (조위의) 유주자사(幽州刺史) 왕웅(王雄)에게 살해되자 무리는 마침내 쇠잔해져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으로 도망쳤다. 원위(元魏) 때에 이르러 스스로를 거란이라 불렀다. (그들이 살던) 땅은 (당나라)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오천 리에 뻗어 있었고, 동쪽으로는 고려(高麗)와 떨어져 있었고, 서쪽으로는 해(奚), 남쪽으로는 영주(營州),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실위(室韋)와 (인접해 있었고), 냉형산(冷陘山)이 가로막고 있어 스스로를 굳건하(게 지킬 수 있었)다.



2) 해


奚亦東胡種, 爲匈奴所破, 保烏丸山. 漢曹操斬其帥蹋頓, 蓋其後也. 元魏時自號庫眞奚, 居鮮卑故地, 直京師東北四千里. 其地東北接契丹, 西突厥, 南白狼河, 北霫.


해(奚) 역시 동호(東胡)의 종(種)으로, 흉노(匈奴)에게 격파되어 오환산(烏丸山)에 의지했다. 후한(漢)의 조조(曹操)가 그들의 우두머리(帥)인 답돈(蹋頓)을 참수했는데 대개 그의 후예이다. 원위(元魏) 때, 스스로를 고진해(庫眞奚)라 부르고 선비(鮮卑)의 옛 땅에 살았는데 (그들이 살던 땅은 당의)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사천 리 (떨어진 곳에)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던) 땅은 동북쪽으로 거란(契丹)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돌궐(突厥), 남쪽으로는 백랑하(白狼河), 북쪽으로는 습(霫)과 접해 있었다.


其國西抵大洛泊, 距回紇牙三千里, 多依土護眞水. 其馬善登, 其羊黑. 盛夏必徙保冷陘山, 山直嬀州西北. 至隋始去「庫眞」, 但曰奚.


그 나라의 서쪽은 대락박(大洛泊)에 닿았고 회흘(回紇)의 본영[牙]과의 거리는 삼천 리였는데, 토호진수(土護眞水)에 의지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말은 (높은 곳에) 오르기를 잘했고 그들의 양은 검은 색이었다. 한여름에는 반드시 냉형산(冷陘山)으로 옮겨 가 의지했고 (그) 산은 규주(嬀州)의 서북쪽과 마주하고 있었다. 수(隋)에 이르러 비로소 (그들의 이름에서) 고진(庫眞)을 빼고 단지 해(奚)라고만 하였다.


《新唐書 列傳第一百四十四 北狄》




5. 통전(본)



契丹之先與庫莫奚異種而同類并為慕容氏所破俱竄於松漠之間其俗頗與靺羯同父母死而悲哭者為不壯但以其屍置於山樹之上經三年之後乃收其骨而焚之因酹酒而祝曰冬月時向陽食夏月時向隂食若我射獵時使我多得猪鹿其無禮頑嚚於諸夷最甚後魏初大破之遂逃迸與庫莫奚分背經數十年稍滋蔓有部落於和龍之北數百里(和龍今栁城郡)多為寇盜


거란의 선조는 고막해와 더불어 이종동류서 모용씨에 의해 그들이 살던 곳이 파괴됨으로써 송막에 숨어 살았다


북위에 의해 대파된 후 고막해와 더불어 (송막으로) 흩어져 서로 등을 지고 살았다


수십 년이 지나자 그 부락이 점차 덩쿨처럼 늘어났는데 화룡의 북쬐 수백 리 되는 곳에 살며 수시로 침입하여 도적질을 하였다

(화룡은 지금의 유성군이다)


魏太武帝眞君以來歲貢名馬於是東北羣狄悉萬丹部阿大何部伏弗郁部羽陵部日連部匹黎部吐六于部各以其名馬文皮入獻皆得交市於和龍宻雲之間(宻雲今郡)


북위 태무제 진군 이래 해마다 명마로써 조공을 바쳤다.

화룡과 밀운(지금의 밀운군이다) 사이에서 교역을 하였다.


其後為突厥所逼又以萬家寄於髙麗隋開皇末有別部落四千餘家背突厥來降文帝方與突厥和好重失逺人之情悉令給糧還本部勅突厥撫納之固辭不去部落漸衆遂北逐水草當遼西正北二百里依廻紇臨水而居東西亘五百里南北三百里亦鮮卑故地分為十部多者三千少者千餘隨水草畜牧


그 후 돌궐이 핍박함에 만여 가가 고구려에 의탁하였다.


북쪽으로 풀과 물을 따라 옮겨다니며 사는데 요서 정북 200 리에 있으며, 동서 500리, 남북 200리 되는 옛 선비의 땅에서 (사람 수가) 많으면 3천, 적으면 1천 되는 10개 부락이 나누어 방목을 하며 산다.


大唐貞觀二十二年十一月契丹帥窟哥率其部內屬以契丹部為松漠都督府拜窟哥為持節十州諸軍事松漠都督於營州兼置東夷都䕶以統松漠饒樂之地罷䕶東夷校尉


당 태종 정관 22년(648) 11월에 거란의 우두머리 굴가가 그 무리를 거느리고 내속하니 거란부를 송막도독부로 삼고 굴가를 지절십주제군사송막도독으로 임명하여 (송막도독부를) 영주에서 관할하게 하였으며 겸하여 동이도호를 설치하고 호동이교위를 폐지하여 송막과 요락의 땅을 통솔하게 하였다


萬嵗通天元年五月窟哥曽孫松漠都督(覊縻松漠都䕶府屬今桞城郡)李盡忠與其妻兄歸誠州刺史孫萬榮殺都督趙文翽舉兵反䧟營州(今栁城)


측천무후 만세통천 원년(696) 굴가의 증손인 송막도독 이진충이 그 처형(처남)인 귀성주 자사 손만영과 함께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켜 영주(지금의 유성)를 함락했다.


《通典 卷二百》




6. 구오대사(동)



契丹者, 古匈奴之種也. 代居遼澤之中, 潢水南岸, 南距楡關一千一百里, 楡關南距幽州七百里, 本鮮卑之舊地也. 其風土人物, 世代君長, 前史載之詳矣.


거란(契丹)은 옛 흉노(匈奴)의 종류였다. 대대로 요택(遼澤)의 가운데 살았고 (그 곳은) 황수(潢水) (주)의 남안(南岸)으로 남쪽으로는 유관(楡關)에서 천백 리 떨어져 있고 유관(楡關)은 남쪽으로 유주(幽州)에서 칠백 리 떨어져 있는데 본래는 선비(鮮卑)의 옛 땅이다. 그 (땅의) 풍토(風土)와 인문환경(人物), 대대로 이어진 군장(君長) 등에 대해서는 전 시대의 역사책(前史)에서 그것을 기재한 것이 상세하였다.


# A 南距 B(장소) C(거리 수치) 는 “A에서 남쪽으로 B가 C만큼 떨어져있다”로 해석해야 한다.


즉 황수 남안에서 남쪽으로 유관까지 1,100 리 떨어져 있고, 유관에서 남쪽으로 유주까지 700 리 떨어져 있다”로 번역해야 함에도 독자의 오해를 야기하도록 이상하게 해석돼 있다.


《舊五代史 卷137 外國列傳 第1》




(앞의 게시글에 이어서 사서 기록을 하기한다)




아마르칸 18-12-03 19:17
좋은 정보네요.ㅎㅎ

목록 PC버전 위로

Copyright © gasen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