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생이닷컴-해외 네티즌 반응 커뮤니티


HOME

 - 커뮤니티>동아시아 게시판
메뉴보기
  • 해외반응 -
  • 뉴스 -
  • 영상자료 -
  • 유머/엽기 -
  • 커뮤니티 -
  • 팬빌리지 -

회원

로그인

03월 28일 (목)

[한국사] 요해(遼海)는 바다인가?

감방친구 조회 : 2,328
검색목록 목록

영주(營州)와 고구려 서계(西界) 추적 13 
ㅡ 5~6 세기 고구려왕이 중원계 왕조로부터 받은 관작을 통한 당대 고구려 서계의 고찰 

A. 5~6 세기 고구려왕이 중원계 왕조로부터 받은 관작 
B. 요해제군사(遼海諸軍事)에서의 요해(遼海) 고찰 
C. 5세기, 바다를 제패하고 북위를 압도한 고구려 
D. 동시대(서기 5~6세기 중심) 사서에서 기술한 고구려 서계, 또는 영역 
E. 수 양제의 612 년 고구려 원정 조서 다시 보기 
F. 요해(遼海)는 바다인가? 



북위가 장수왕과 문자명왕 등에게 제수한 관작 가운데에 요해제군사의 의미에 대해서 강단 주류학계에서 고구려사 관련하여 대중적 글쓰기를 활발히 해온 축(서길수, 김용만 등)은 현 요하와 그 아래 바다에 대한 제해권, 또는 거란에 대한 지배권&지두우 분할 등으로 보인 대흥안령 지역으로의 고구려 영향력 확대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는 요해가 그 당시에는 전혀 현 요하를 가리키는 말도 개념도 아니었다는 것을 이미 살폈다. 

그렇다면ㅡ 요해는 단순히 천진시와 당산시와 진황도시가 끌어안은 바다만을 의미하는가? 

요해는 바다만을 가리키는가? 

이 질문에 답하며 영주와 고구려 서계 추적을 계속하고자 한다. 



F. 요해(遼海)는 바다인가? 


1. 통전에 기술된 목간가한 때의 돌궐 영토 

木杆可汗 (土門之子,名俟斤,一名燕尹。) 
狀貌奇異,面廣尺餘,其色甚赤,眼若琉璃,性剛暴而多智。西破蠕蠕、缁噠,東走契丹,北并契骨,威服塞外諸國。其地東自遼海以西,西至西海萬餘里,南自沙漠,北至北海五六千里,皆屬焉。《通典 邊防十三 突厥上》 

그 땅은 동쪽은 요해의 서쪽으로부터 서쪽은 서해까지 만여 리, 남쪽은 사막으로부터 북쪽은 북해까지 오륙 천 리(其地東自遼海以西,西至西海萬餘里,南自沙漠,北至北海五六千里) 

목가가한 시절이 돌궐의 전성기로, 수나라의 이간책에 의해 서돌궐과 동돌궐로 쪼개져서 동돌궐은 수나라에 신복하게 된다 

학계 통용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튀르크(Türk)의 음을 따서 한자화한 말로, 처음에는 철륵(鐵勒:예니세이강 상류, 바이칼호 지방에 살았던 튀르크 종족)의 한 부족으로서 알타이산맥 방면에서 유연(柔然:몽골지방의 고대 유목민족)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중 한 씨족인 아사나씨(阿史那氏)의 족장 토문(土門:만인의 長이라는 뜻)이 유연·철륵을 격파하고 독립하여 일리가한[伊利可汗]이라 칭하였다(552). 
이 무렵부터 그의 아우 디자불로스는 서방으로 진출하였고, 3대 목간가한(木杆可汗) 때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에프탈을 멸망시켰다(563∼567). 그 결과 돌궐은 동쪽으로는 중국 둥베이[東北:만주],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까지 세력이 미쳤으나 동족간의 다툼으로 583년 분열하여 동돌궐은 몽골고원, 서돌궐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였다. 동돌궐은 수(隋)나라 말기에서 당(唐)나라 초기에 걸친 중국 내부의 혼란을 틈타 중앙집권화를 도모하여 그 세력이 강대해졌으나, 당나라의 공격과 철륵 제부족의 독립 등으로 630년 멸망하고 당나라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 <두산백과 돌궐족>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083731&cid=40942&categoryId=31642 ] 

상기 학계 통설에 따르면 이 시기 돌궐의 영역이 동쪽으로 북만주를 거쳐 연해주까지 이른 것으로 돼 있다. 

학계 통설에 근거하면 통전의 요해는 연해주 동쪽 바다가 된다 

여기에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➊ 이 지역은 삼림지역으로 숙신ㅡ읍루ㅡ물길ㅡ흑수말갈의 활동지이다. 목간가한 시절에는 물길이 흥했으나 1세기가 안 되어 흑수말갈이란 이름으로 고구려에 복속됐다 

이들 만주(연해주 포함) 지역을 차지하려면 고구려와 맞서야 한다. 맞서서 뺏어야 한다. 

다음 기록을 보자. 

양원왕 7년(서기 551) 
가을 9월, 돌궐(突厥)이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임금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병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신라가 침공하여 10개의 군을 빼앗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그 중 한 씨족인 아사나씨(阿史那氏)의 족장 토문(土門:만인의 長이라는 뜻)이 유연·철륵을 격파하고 독립하여 일리가한[伊利可汗]이라 칭하였다(552)” 

아직 목간가한의 시대가 오기 전인 551 년에 돌궐은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대패하였다. 그 이후 수나라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를 침략했거나 싸운 기록적 사실이 없다. 

돌궐과 고구려는 당 태종 당시까지 거란을 중유 세력으로 삼았고 거란은 고구려에 복속돼 있으면서 동시에 돌궐에 신복해 있었다. 

상기 통전의 기술 가운데 돌궐의 영역을 기술한 것 바로 앞의 문장을 보자. 

“西破蠕蠕、缁噠,東走契丹,北并契骨,威服塞外諸國。” 

“동쪽으로는 거란을 패주시켰다(東走契丹)” 

거란은 수당 시대에 대흥안령 남쪽 기슭, 현 시라무렌 강 상류의 북안, 파람좌기ㅡ우기 일대에 있었다. 

바린 좌기 
중국 내몽골 자치구 츠펑 시 
https://goo.gl/maps/XGaBmuUfYQJ2 

즉 통전의 “그 땅은 동쪽은 요해의 서쪽으로부터 서쪽은 서해까지 만여 리, 남쪽은 사막으로부터 북쪽은 북해까지 오륙 천 리(其地東自遼海以西,西至西海萬餘里,南自沙漠,北至北海五六千里)”의 요해(遼海)는 연해주 동쪽 바다가 될 수 없다. 

이 문장에서 북해(北海)는 바이칼 호수를 가리킨다 할지라도 요해(遼海)와 서해(西海)의 海는 바다를 가리킨다 보기 어렵다 

서해가 카스피해라는 말인가? 목간가한의 돌궐이 징기스칸의 몽골에 필적하는 대제국이었다는 말인가? 

통설에서는 海를 바다라 끼워 맞춰서 아예 돌궐을 그렇게 지도에 표시하고 있다. 

터키 교과서에 실린 돌궐의 최전성기 영역도 
https://blogfiles.pstatic.net/20140814_156/ohyh45_1408002694581hBfO1_JPEG/1.jpg 

요해가 연해주 동쪽 바다가 될 수 없음을 따져보았다. 요해에 대해서는 명청 시대 이전까지는 현 난하와 역수, 영정하, 조백하 등이 흘러드는 발해가 고대 중국에서 말하는 요해였음을 지난 글에서 깊이 고찰하였다. 

목간가한의 돌궐이 현 당산시, 진황도시까지 영역으로 삼았다는 말인가? 

이 역시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통전 기술의 요해는 대흥안령 동쪽의, 시라무렌 강이 횡단하는 드넓은 초지인 것이다. 그 서쪽까지가 목간가한 당시 돌궐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2. 한 요서군 유성현 

栁城 , 馬首山在西南。 參栁水北入海。 西部都尉治。《한서 지리지 유주》 

“마수산(馬首山)이 현의 서남쪽에 있다. 참류수(參栁水)가 북쪽으로 해(海)로 들어간다.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린다.” 

현 학계 통설에서의 유성현은 현 요녕성 조양시이다. 

차오양 시 
중국 랴오닝 성 
https://goo.gl/maps/H7wN4Bidn842 

학계 통설에서는 현 요하를 요해라 일컫고 있다. 현 요하가 요해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명청 시대부터로 고대의 요해는 현 천진시 앞 바다요 요해와 관련 있는 당시 요수는 현 난하였다. 

대체 현 조양시에 북쪽으로 흐르는 강이 어디 있으며 그 강이 흘러드는 바다가 어디 있는가? 

본인이 판단하는 한나라 요서군 유성현의 위치는 다음의 장소이다. 

닝청 현 
중국 내몽골 자치구 츠펑 시 
https://goo.gl/maps/hLXjzXvP2k82 

이 일대, 이 근방을 본인은 한나라 요서군 유성현이 있던 곳이자 고구려 국제교역시장이 있던 유성이자 수나라 침략군이 유관을 빠져나와 향했던 유성이자 조조가 오환을 격퇴코자 향했던 유성이 있던 곳으로 본다. 

구글지도의 닝청현 앞을 흐르는 강이 보이는가?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가? 북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어디로 흘러가는가? 시라무렌강이 횡당하는 초원으로 흘러들고 있다. 이 강이 바로 참류수요 이 강이 흘러드는 초원이 바로 해(海)인 것이다 

이 강의 이름은 Laoha River, 즉 로합하(老哈河)이다. 



3. 수 양제가 머문 유성현 임해둔 

虞綽辛大德虞綽,字士裕,會稽餘姚人也。父孝曾,陳始興王諮議。綽身長八尺,姿儀甚偉,博學有俊才,尤工草隸。陳左衛將軍傅縡有盛名於世,見綽詞賦,嘆謂人曰:「虞郎之文,無以尚也!」仕陳為太學博士,遷永陽王記室。及陳亡,晉王廣引為學士。大業初,轉為秘書學士,奉詔與秘書郎虞世南、著作佐郎庾自直等撰《長洲玉鏡》等書十餘部。綽所筆削,帝未嘗不稱善,而官竟不遷。初為校書郎,以籓邸左右,加宣惠尉。遷著作佐郎,與虞世南、庾自直、蔡允恭等四人常居禁中,以文翰待詔,恩盼隆洽。從征遼東,帝舍臨海頓,見大鳥,異之,詔綽為銘。其辭曰:維大業八年,歲在壬申,夏四月丙子,皇帝底定遼碣,班師振旅,龍駕南轅,鸞旗西邁,行宮次於柳城縣之臨海頓焉。山川明秀,實仙都也。旌門外設,款跨重阜,帳殿周施,降望大壑。息清蹕,下輕輿,警百靈,綏萬福,踐素砂,步碧沚。《隋書 卷七十六列傳第四十一》 

여름 4월 병자일, 황제(수 양제) 요갈(요동과 갈석, 즉 고구려를 뜻함)의 반란을 진정 시키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오는데(실제로는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요수를 건너지 못하고 유성현 방면으로 후퇴해 요수 도하를 기다리는 상황) 황제의 어가는 남쪽으로 향하고 난새(봉황과 비슷한, 전설상의 새) 깃발(수 양제가 본 큰 새를 비유한 것)은 서쪽으로 멀리 떠 가니 행궁을 유성현 임해둔에 이르러 차렸다.(夏四月丙子,皇帝底定遼碣,班師振旅,龍駕南轅,鸞旗西邁,行宮次於柳城縣之臨海頓焉。) 

임해둔은 바다에 임한 곳의 숙소라는 뜻인데 요수는 본인의 고찰에 근거할 시 북에서 남으로 흘러 대릉하 본류로 흘러드는 Mangniu River, 즉 망우하(忙牛河)인데 여기에서 유성현 방면으로 수 양제의 본대가 후퇴하던 중에 큰 새를 보고 시를 짓게 했다는 것이 위 기록의 대강이다. 

忙牛河大桥 
중국 랴오닝 성 차오양 시 베이퍄오 시 
https://goo.gl/maps/jjBcCebBc892 

요수는 폭이 좁은 작은 강이다.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 때에 이세적도 강이 작은 것을 기이하게 여겨 근처 거란인들에게 요수의 근원을 묻는 대목이 신당서 등에 기록돼 있다. 

수 양제의 행궁지였던 유성현 임해둔의 해(海) 역시 바다로 보기 어렵다. 

해(海)는 시라무렌강이 횡단하는 초원이다. 



4. 위서가 기록한 505 년의 기상현상 

(正始)二年二月癸卯,有黑風羊角而上,起於柔玄鎮,蓋地一頃,所過拔樹。甲辰,至於營州,東入於海。《魏書 靈徵八上 志第十七》 

정시(북위 선무제) 2년(505) 2월 계묘일에 양뿔 모양을 한 검은 바람이 유현진에서 생겨나 높이 솟았는데 1경(약 2만 평)의 땅을 모두 덮는 규모였는데 지나가는 곳의 나무를 뽑아버렸다 . (그 바람은) 갑진일에 영주에 이르러 동쪽으로 해서 바다로 들어갔다. 

본인은 북위의 영주가 학계 통설에서 말하는 현 조양시에 있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한나라 요서군 유성현에 있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한나라 요서군 유성현 땅은 고구려 땅이었다. 

바람이 발생한 유현진은 현 장가구시 서북쪽에 위치했다 

河北省尚义县三工地镇土城子村的一处遗址,经考证为“北魏柔玄镇故址”。<바이두백과> 

https://baike.baidu.com/item/%E6%9F%94%E7%8E%84%E9%95%87%E9%81%97%E5%9D%80/20112105? 

샹이 현 
중국 허베이 성 장자커우 시 
https://goo.gl/maps/PRzpES3w6LD2 

이 위서에서 기록한 검은 바람은 사막지대에서 종종 발생하는 모래폭풍으로 짐작된다. 

모래폭풍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222210&cid=40942&categoryId=32299 

계묘일과 갑진일은 하루(1일) 차이이다. 즉, 계묘일 다음 날이 갑진일이다. 

자, 여기에서 질문을 던져보라. 

➊ 북위 영주가 학계 통설대로 현 조양시라면, 조양시 동쪽에 바다가 있는가? 그 바다가 역시 학계 통설대로 현 요하라면 의무려산과 수많은 하천을 건너서 요하까지 모래폭풍이 진행할 수 있는가? 현 조양시 일대에 모래폭풍을 만들고 지속시킬 사막이 있는가? 

➋ 현 장가구시 서북쪽 상이현에 있던 유현진에서 흑풍,즉 모래폭풍이 발생했다. 이 바람이 단 1일만에 유현진에서 현대 도로에서 가장 빠른 경로로 758km, 리수 단위로 근 2천 리 떨어진 조양시까지 갈 수 있는가? 

➌ 그 758km 사이에 고산준령의 태행산맥과 연산산맥이 있는데도? 

여러분이 대답해 보시라. 
ㅡ 흑풍이 유현진에서 발생해 1일만에 도착한 곳이 현 조양시가 될 수 있는가? 
ㅡ 그게 아니라면 대체 북위 영주의 동쪽에 있던 바다는 실제 바다라고 생각하는가? 
ㅡ 북위 영주는 어디였겠는가? 


5. 북위 태무제의 북연 정벌과 요해 

乃開遼海, 置戍和龍, 諸夷震懼, 各獻方物.《魏書 列傳第八十八 高句麗百濟勿吉失韋豆莫婁地豆於庫莫奚契丹烏洛侯》 

"요해(遼海)를 열고 화룡(和龍)에 수자리를 설치하니, 여러 오랑캐들이 놀라 두려워하며 각각 토산물을 바쳤다. " 

위서 외국열전의 고막해 관련 내용에 있는 기술이다. 학계 통설에는 이 '요해를 열고'를 '北燕을 멸망시키고(436) 遼河 유역을 차지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요해에 대해서는 '범칭으로는 遼河 유역 및 그 以東 지역 혹은 遼河 上流 일대만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요하가 요해로 불리게 된 것은 요금을 거쳐 명청시대에 나타난 것이며 그 이전 시대에는 현 발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을 이미 고찰하였다. 

학계 통설에서는 북연의 화룡성을 현 조양시에 비정하고 있으나 그 후 고구려가 요해제군사라는 작위를 받은 것에 볼 수 있듯이, 또한 유연과 지두우 분할을 모의한 것에서 나타나듯이 고구려의 서계는 이미 현 조양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본인은 이 요해를 바다를 가리킬 때는 현 발해를, 땅을 가리킬 때에는 현 시라무렌강이 관통하여 서요하로 흘러드는 대평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줄곧 주장하였다. 

즉 고구려는 이미 북연 시대에 조양시 일대까지 진출해 있었고 
북연은 현 로합하와 적봉 일대에 위치해 있었으며 
북위는 북연을 멸망시킨 후 적봉, 또는 근처인 화룡에 화룡진을 설치, 영주를 운영하였으나 

고구려에 의해 북위의 동계가 점차 잠식됨에 더 서쪽, 또는 남쪽으로 영주 관할 치소를 이동시켰다고 보는 게 나의 판단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위 위서 고막해전에서 '요해를 열었다'는 표현은 북연 정벌로 인하여 북위가 시라무렌강ㅡ서요하의 대평원으로 가는 길이 열렸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으며 

학계 통설을 수용할 경우에 '요해'는 서요하 일대의 대평원을 가리키는 말인 것은 분명하다 하겠다. 

자, 이 뭍의 바다를 가리키는 다른 기록을 더 살펴보자. 



6. 거란의 바다 

上京,太祖創業之地。負山抱海,天險足以為固。地沃宜耕植,水草便畜牧。金齪一箭,二百年之基,壯矣。《遼史 卷三十七志第七 地理志一 上京道》 

"상경(上京)은 태조(太祖)가 창업한 땅이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안고 있어 지세가 험한 것에 만족하고 굳건히 하였다. 토지는 비옥하여 경작하기에 좋으며 물과 풀들이 목축을 편하게 한다. 金齪一箭하여 200년의 웅거함이 장대하다. " 

상경 지역은 북쪽으로 대흥안령 산맥, 남쪽으로 시라무렌강과 서요하를 그 영역으로 두고 있다. 

바다는 중경 지역의 남쪽에 있지 상경 지역의 남쪽에 있지 않다. 

負山抱海 
산을 등지고 바다를 안고 있다 

자, 여기에서 바다는 무엇을 가리키겠는가? 
산은 대흥안령이요 
바다는 당연히 그 아래에 펼쳐진 대평원인 것이 아니겠는가! 


# 한편, 요사의 다음 기록은 현 발해 지역이라기보다는 요녕성 남쪽 바다, 나아가 요하 일대를 이르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본다 

遼國左都遼海,右邑涿鹿,兵力莫強焉。 
《 遼史 卷三十四志第四 兵衛志上》 

"요국은 왼쪽으로 요해가 자리하고, 오른쪽으로는 탁록(현 장가구 일대)을 차지하였으며 군사력이 막강하다." 

幽州在渤、碣之間,並州北有代、朔,營州東暨遼海。 

"유주는 발해와 갈석의 사이(渤、碣之間)에 있으며, 병주 북쪽으로는 대주와 삭주가 있고, 영주는 동쪽으로 요해에 닿는다." 

《遼史 卷三十七志第七 地理志一 上京道》 

거란의 성장과 화북 제패는 요해와 요수의 개념을 현 요하 일대로까지 밀어내는 주원인이 되었다.


목록 PC버전 위로

Copyright © gasen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