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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19일 (금)

[한국사] 수 양제의 612 년 고구려 원정 조서 다시 보기

감방친구 조회 : 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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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營州)와 고구려 서계(西界) 추적 13 
ㅡ 5~6 세기 고구려왕이 중원계 왕조로부터 받은 관작을 통한 당대 고구려 서계의 고찰 

A. 5~6 세기 고구려왕이 중원계 왕조로부터 받은 관작 
B. 요해제군사(遼海諸軍事)에서의 요해(遼海) 고찰 
C. 5세기, 바다를 제패하고 북위를 압도한 고구려 
D. 동시대(서기 5~6세기 중심) 사서에서 기술한 고구려 서계, 또는 영역 
E. 수 양제의 612 년 고구려 원정 조서 다시 보기 
F. 요해(遼海)는 바다인가? 





E. 수 양제의 612 년 고구려 원정 조서 다시 보기 



1. 수 양제의 612 년 조서 


영양왕 23년(서기 612) 
23년(서기 612) 봄 정월 임오일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고구려의 하찮은 자들이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발해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과 예맥의 땅을/경계를 (거듭) 잠식하여 왔다. 비록 한나라와 위나라의 거듭된 침입으로 그 소굴이 잠시 허물어졌으나, 그로부터 세월이 오래 지나자 그 족속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지난 세대에는 내와 늪의 물고기나 새처럼 조금씩 모였던 것이 이제는 퍼지고 번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요동ㆍ현도ㆍ낙랑 등의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았는데 이제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지나 죄악이 이미 가득하였다. 

하늘의 도리는 사악한 자에게 화를 내리기에 그들이 패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그들이 도덕을 손상시키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드러나지 않은 흉악한 행동과 속에 품은 간사한 생각이 넘치고 있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임금이 한 번도 직접 받는 일이 없으며, 임금이 나에게 직접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에도 직접 오기를 꺼려하였다. 중국의 반역자들을 수없이 유혹하고, 변방에 척후를 놓아 우리의 봉후들을 자주 괴롭혔다. 이로 말미암아 치안은 안정되지 못하였고, 백성들은 생업을 버리게 되었다. 지난날 문제의 정벌 시에 그들은 잡히지 않고 빠져 나갔다. 이전에 사로잡았을 때에는 죽이지 않은 채 놓아주었고, 뒷날 항복하였을 때도 처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저질러 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바다의 우리 수비병들을 살해하였으며, 말갈의 행동을 본받아 요서를 침략하였다. 또한 온 동방의 나라가 모두 조공을 하고 제후들이 천자를 찾아 아뢰며, 해변 지역의 모든 나라가 하나같이 신년이 되면 축하의 사절을 중국에 보내는데, 고구려는 이때 조공하는 물품을 탈취하고 다른 나라의 사절이 왕래하는 길을 막고 있다. 그들은 죄 없는 자를 학대하며 성실한 자를 해치고 있다. 천자의 사신이 탄 수레가 해동에 갈 때, 칙사의 행차는 속국의 국경을 통과하게 된다. 그런데 고구려는 도로를 차단하고 우리의 사신을 거절하니, 이는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를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행동을 용서한다면 어떤 행동인들 용서하지 못하겠는가! 

ㅡ 하략ㅡ ” 

二十三年 春正月壬午 帝下詔曰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渤碣之間 荐食遼濊之境 雖復漢魏誅戮 巢穴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萃川藪於往代 播寔繁以汔今 睠彼華壤 翦爲夷類 歷年永久 惡稔旣盈 天道禍淫 亡徵已兆 亂常敗德 非可勝圖 掩慝懷姦 唯日不足 移告之嚴 未嘗面受 朝覲之禮 莫肯躬親 誘納亡叛 不知紀極 充斥邊垂 亟勞烽候 關柝以之不靜 生人爲之廢業 在昔薄伐 已漏天網 旣緩前禽之戮 未卽後服之誅 曾不懷恩 翻爲長惡 乃兼契丹之黨 處劉海戍 習靺鞨之服 侵軼遼西 又靑丘之表 咸修職貢 碧海之濱 同稟正朔 遂復敓攘琛賮 遏絶往來 虐及弗辜 誠而遇禍 輶車奉使 爰曁海東 旌節所次 途經藩境 而擁塞道路 拒絶王人 無事君之心 豈爲臣之禮 此而可忍 孰不可容《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高麗小醜,迷昏不恭,崇聚勃碣之間,薦食遼「之境。雖復漢魏誅戳,巢窟暫傾,亂離多阻,種落還集。萃川藪於往代,播實繁以迄今,眷彼華壤,剪為夷類。歷年永久,惡稔既盈,天道禍淫,亡徵已兆。亂常敗德,非可勝圖,掩慝懷奸,唯日不足。移告之嚴,未嘗面受,朝覲之禮,莫肯躬親。誘納亡叛,不知紀極,充斥邊垂,亟勞烽候,關柝以之不靜,生人為之廢業。在昔薄伐,已漏天網,既緩前擒之戮,未即後服之誅。曾不懷恩,翻為長惡,乃兼契丹之黨,虔劉海戍,習靺鞨之服,侵軼遼西。又青丘之表,咸修職貢,碧海之濱,同稟正朔,遂復奪攘琛」,遏絕往來,虐及弗辜,誠而遇禍。輶軒奉使,爰暨海東,旌節所次,途經籓境,而擁塞道路,拒絕王人,無事君之心,豈為臣之禮!此而可忍,孰不可容!《隋書 卷四帝紀第四 煬帝下》 


1)고구려의 서계 

“고구려의 하찮은 자들이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발해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과 예맥의 땅을/경계를 (거듭) 잠식하여 왔다.” 

➊ 발갈지간(渤碣之間) 

《史記 貨殖列傳》 

夫燕亦勃、碣之閒一都會也。南通齊、趙,東北邊胡。上谷至遼東,地踔遠,人民希,數被寇,大與趙、代俗相類,而民雕捍少慮,有魚鹽棗栗之饒。北鄰烏桓、夫餘,東綰穢貉、朝鮮、真番之利。 

연(燕)은 발해(渤海)와 갈석산(碣石山) 사이에 있는 도회지이다. 남으로 제(齊), 조(趙)와 통하고, 동북은 흉노 가장자리이다. 상곡(上谷)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는 지역은 멀고 인민이 적어 자주 침략을 당했다. 조(趙), 대(代)의 풍속과 아주 비슷하다. 인민은 독수리처럼 사납지만 생각이 부족하고, 물고기, 소금, 대추, 밤이 많이 난다. 북은 오환(烏桓), 부여(夫餘)와 이웃해 있고, 동은 예맥(穢貉), 조선(朝鮮), 진번(眞番)의 지리적 이점을 통제하고 있다. 

사기 국역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3432246&cid=62144&categoryId=62250 

(이 수 양제 612 조서의 ‘발갈지간’과 사기 화식열전의 ‘발간지간’ 교차는 이곳 동아게에서 유저 도배시러가 시도한 바 있다. 비록 본인의 이 고찰의 동인과 내용과 과정과 견해가 그 자와 다르다 하더라도 이 글에서 그 자의 선행작업을 언급하는 것은 역사연구자로서 당연한 일이므로 언급하는 바이다. 

그 자 도배시러는 “연나라 영토가 고구려땅”이라는 성급하고 비약적인 결론을 도출하였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7248&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B%B0%9C%EA%B0%88%EC%A7%80%EA%B0%84&sop=or 

위 링크한 도배시러의 게시물에서 다룬 내용은 본인 역시 지난 시간 계속하여 주목하여 다루었던 것들이다 

애초 공조하는 것처럼 굴면서 본인이 고려 전기 서북계를 고찰하며 역순으로 치고 올라갈 때에 도배시러는 영주와 고구려 문제를 탐구하기로 하여놓고는 몇 달을 딴짓거리를 하며 결과물을 안 내놓으며 몰래 블로그를 개설해 본인 블로그에만 글을 올리고, 내 연구와 착안을 훔쳐가고 있었던 건이다. 

본인은 한 낙랑군, 고구려 평양과 압록강 위치 등의 문제를 계속하여 이곳 가생이닷컴 동아게를 토대로 추적하여 왔다.) 

➋ 요동과 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여 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삼국사기 국역본에서는 ‘荐食遼濊之境’을 ‘요동과 예맥의 땅을 잠식하여 왔다’로 해석해 놓고 있다. 그러나 한자를 잘 모르는 이들은 한자사전(https://hanja.dict.naver.com/search/keyword?query=%E8%8D%90%E9%A3%9F%EF%A7%83%E6%BF%8A%E4%B9%8B%E5%A2%83&mflag=1) 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이 문장은 이 뜻이 아니라 ‘요동과 예맥의 경계를 거듭하여 잠식하여 왔다’로 해석해야 옳다 

이렇게 해야 대구를 이룬 ‘발갈지간(渤碣之間)’과 ‘천식요예지경(荐食遼濊之境)’의 의미가 합치하는 것이다. 

학계통설을 대변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국역본은 원문을 통설에 유리하게 의역하는 경향을 종종 띤다. 따라서 중요한 문장은 항상 원문과 대조하여 읽어야 한다. 

➌ 즉 이 문장(수 양제의 발언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渤碣之間 荐食遼濊之境)의 뜻하는 바는 문장 표현 그대로 

고구려가 요동과 예맥의 경계를 거듭하여 잠식하여 왔는데 그 잠식한 곳이자 고구려 세력이 뻗어있는 곳이 발갈지간(渤碣之間), 즉 발해와 갈석 사이의 땅이라는 말이다. 

앞에서 본 사기 화식열전에서 전국연의 영토를 발갈지간(夫燕亦勃、碣之閒一都會也。《史記 貨殖列傳》)이라 한 것을 확인하였다. 발해는 현 산동 북안에서 천진시 앞 바다까지도 포함하므로, 또한 갈석이 현 진황도시 무령현에서 더 동쪽으로 비정될 수 없는 점에서 전국연의 영토를 발해와 갈석 사이라고 표현한 것은 합당하다. 

그러나 사기 소진열전에서 전국연의 영토를 기술하며 북쪽으로는 임호ㆍ누번과 접경하고 남쪽으로는 호타수와 역수가 있다(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嘑沱易水《史記 卷六十九 蘇秦列傳 》)라고 한 기술에서 보이듯, 게다가 같은 소진열전의 아래 기술에서 갈석을 전국연의 남쪽 지역(南有碣石鴈門之饒)이라고 적고 있는 바 고구려가 전국연의 전 영토를 잠식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또한 수나라는 건국초에 북위/북제의 남영주(하북성 보정시 서수현 일대)에 영주를 설치했다가 (북)영주자사였던 고보녕(과 돌궐)의 반란을 진압한 후 고보녕이 있던 그 영주지역에 새롭게 영주를 설치하였다. 이 영주가 당나라 고구려 침략기까지의 영주이다. 수나라 영주와 유성현은 다른 곳이었음을 앞에서 살핀 바 있다.(이 사실은 북위의 실제 기능 영주 역시 수당 영주와 동일 위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수나라는 고보녕의 반란과 돌궐의 유주지역 남침을 저지하며 현 북경지역에 수많은 진을 설치하였다. 

즉, 현 하북성 보정시와 석가장은 물론이거니와 북경 지역이 고구려 영역이었다 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따라서 수 양제 612 조서의 ‘발갈지간(渤碣之間)’과 ‘천식요예지경(荐食遼濊之境)’이 가리키는 지역은 수나라의 어양군과 북평군에 해당하는 현 당산시와 진황도시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하겠다. 

이들 지역의 앞 바다가 바로 고구려 역대왕이 북조로부터 받은 관작 가운데에 하나인 ‘요해제군사’의 요해(遼海)에 해당한다는 것을 앞에서 깊이 고찰하였다. 

즉 이 사실을 수 양제 612 조서 상의 ‘고구려의 하찮은 자들이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발해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과 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여 왔다.(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渤碣之間 荐食遼濊之境)’한 발언과 같이 놓고 보라. 

또한 거듭 소개하는 바 되는, 독사방여기요 북직 8의 다음 기록을 이어서 보라. 

“선비족이 다투어 일어나니 노룡의 사방이 전장터가 되었고 중국의 말과 가르침이 다시는 평주와 영주에 도달하지 못 했다. 수나라가 비록 주현을 설치했으나 황폐히 버려두고 다시 고쳐 경영하지 못 했다 
(及鮮卑競起,盧龍四境皆為戰地,中國聲教不復達平、營者數百年。隋雖置州縣,而荒略未改。《讀史方輿紀要 卷十七 北直八 永平府》)” 


# '발갈지간'이라는 표현은 <요사 지리지 상경도 서설>에서도 보인다. 

幽州在渤、碣之間,並州北有代、朔,營州東暨遼海。 

"유주는 발해와 갈석의 사이(渤、碣之間)에 있으며, 병주 북쪽으로는 대주와 삭주가 있고, 영주는 동쪽으로 요해에 닿는다." 


2) 고구려의 본토 

“요동ㆍ현도ㆍ낙랑 등의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았는데 이제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다” 

전한의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 땅이 고구려 영토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3) 동아시아 세계에서의 고구려 사대조공외교의 실상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임금이 한 번도 직접 받는 일이 없으며, 임금이 나에게 직접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에도 직접 오기를 꺼려하였다.” 

임금이 직접 조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칙을 내리는 사신조차 임금이 직접 맞지 않았다는 말이다 


4) 중국 역대 왕조의 동북지역에 대한 지속적 타격과 잠식 

“중국의 반역자들을 수없이 유혹하고, 변방에 척후를 놓아 우리의 봉후들을 자주 괴롭혔다. 이로 말미암아 치안은 안정되지 못하였고, 백성들은 생업을 버리게 되었다.” 

역대 중국 왕조의 동북방을 끊임 없이 유린해왔다는 말로 그 유린의 방법과 그로 인한 동북방(유주, 평주 등) 지역의 피폐상을 언급하고 있다 

“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바다의 우리 수비병들을 살해하였으며, 말갈의 행동을 본받아 요서를 침략하였다.” 

이는 수 문제의 제 1차 고구려 원정을 야기하였다. 
고구려는 이후 605 년에도 수나라 영주를 거란을 시켜 타격하였는데 이 때에 수나라는 영주를 잃고 급기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5)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의 고구려의 실질 위상 

“또한 온 동방의 나라가 모두 조공을 하고 제후들이 천자를 찾아 아뢰며, 해변 지역의 모든 나라가 하나같이 신년이 되면 축하의 사절을 중국에 보내는데, 고구려는 이때 조공하는 물품을 탈취하고 다른 나라의 사절이 왕래하는 길을 막고 있다.” 

“천자의 사신이 탄 수레가 해동에 갈 때, 칙사의 행차는 속국의 국경을 통과하게 된다. 그런데 고구려는 도로를 차단하고 우리의 사신을 거절하니, 이는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는 것이다.” 

고구려가 수나라 당시(뿐만 아니라 5세기 이래) 바다와 육지를 장악하고 동북아시아에서 종주국 행세를 했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라, 모든 전쟁은 결국 존망의 극한 위기나 돈 때문에 발생하고, 또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도 역시 천문학적인 돈이 든다. 수나라는 존립 40 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연인원 수백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무려 4차례나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학계 통설대로 현 요하를 서한계선으로 하는 작은 국가였다면 수나라가 이렇게 무리하여 원정을 하고 결국 이로 인해 나라가 망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겠는가! 



2.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18 년 기사 

영양왕 
18년(서기 607), 초기 수 양제(煬帝)가 계민(啓民)의 막부에 행차하였을 때, 우리의 사신이 마침 계민과 함께 있었다. 계민이 우리의 사신을 감히 숨길 수 없어서, 우리의 사신과 함께 양제를 참배하였다. 이때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裴矩)가 양제에게 말했다. 

양량(楊諒)에게 군사를 주어 출동시켰으나 그가 어리석고 못나서 공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는 폐하의 시대인데 어찌 그들을 정벌하지 않고 예절의 땅이 오랑캐의 소굴로 변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但楊諒不肖 師出無功 當陛下之時 安可不取 使冠帶之境 遂爲蠻貊之鄕乎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이는 수서(隋書)에도 그대로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는 우리나라 사서만을 토대한 것이 아니라 당시까지의 중국의 거의 모든 사서를 교차분석하여 편찬한 것으로 삼국사기 내용은 중국 역대사서와 교차가 가능하다. 


矩因奏狀曰:「高麗之地,本孤竹國也。周代以之封於箕子,漢世分為三郡,晉氏亦統遼東。今乃不臣,別為外域,故先帝疾焉,欲征之久矣。但以楊諒不肖,師出無功。當陛下之時,安得不事,使此冠帶之境,仍為蠻貊之鄉乎?今其使者朝於突厥,親見啟民,合國從化,必懼皇靈之遠暢,慮後伏之先亡。脅令入朝,當可致也。」《隋書 卷六十七列傳第三十二》 

수 문제의 제 1차 고구려 침략은 장마로 인한 군량수송 차질과 전염병 창궐로 인해서 실패했다고 수서를 비롯한 여러 사서는 적고 있다. 이로 인해 30만 명이 출병해서 그 가운데에 8~9할, 즉 약 24만 명에서 27만 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대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이 지역에서 30만 명 중에 27 만 명이 죽는 질병이면 동북아에 유럽의 페스트에 비견되는 대재앙이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물론 수서에서는 이 원정 직전의 기사에서 민가에 전염병이 돌아서 많은 이가 죽었다는 기술을 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 원정의 참패를 전염병 탓으로 돌리고자 하는 밑밥이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다. 

607년, 계민가한의 막부에서 황문시랑 배구가 수 양제에게 하는 발언을 잘 들어보라 

“양량(楊諒)에게 군사를 주어 출동시켰으나 그가 어리석고 못나서 공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 발언 어디에 전염병이니 질병이니 하는 말이 있는가? 

수 문제의 30만 대군은 전염병이나 풍랑 때문에 몰사한 것이 아니라 결국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대참패하며 죽은 것이다. 이게 진실이다. 



3. 당 태종의 644년 친필 조서 


보장왕 3년(644) 

(당 태종은) 친필로 천하에 조서를 내려 발표하였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하니 인정상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이제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등지를 돌아서 요동과 갈석(碣石)에서 죄를 물을 것이니, 행군 도중에 군영이나 숙소에서는 백성에게 수고를 끼치거나 백성의 재물을 낭비하지 말라.” 

又手詔諭天下 以高句麗蓋蘇文 弑主虐民 情何可忍 今欲巡幸幽薊 問罪遼碣 所過營頓 無爲勞費《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학계 통설에서는 이 요갈(遼碣)을 요동과 갈석으로 해석학 있다. 당 태종의 발언대로 유주와 계주를 돌아가면 그곳은 현 당산시와 진황도시에 해당하는 당시 어양군과 북평군(평주)이다. 

만약 이 요갈의 요가 요동이라면 전통적 개념으로서의 요동 즉, 현 천진만 북안에 해당하는 곳이다 

한편 이 요(遼)는 요동이 아니라 요해(遼海) 
로 볼 수가 있다. 이렇게 보면 요갈은 수 양제 612 조서의 발갈(渤碣)과 같은 맥락으로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고 판단이 가능한 것이다. 

ㅡ 수 양제 612 조서의 발갈지간(渤碣之間)과 당 태종 644 조서의 문죄요갈(問罪遼碣) ㅡ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나라가 망했고 그 혼란을 수습하며 당나라가 들어섰으니 

결국 당나라 영토 역시 발해, 즉 요해와 갈석 사이에서 한 치도 고구려로 나아가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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