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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8일 (일)

[한국사] 영주(營州)와 고구려 서계(西界) 추적 1/3차 정리

감방친구 조회 : 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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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598년 고구려는 말갈과 거란을 이끌고 수나라 요서와 바닷가 근처 병영을 타격하였다

1. 여기에서 요서는 요서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수나라 요서현(수는 건국 직후 용성현을 유성현으로 개명하였는데 이 유성현은 그 이름이 요서현과 혼용돼 사용됐다)이다

2. 이 요서현에 수나라 영주가 있었다 고구려의 요서 타격 시 영주총관 위충이 맞섰다

3. 이 요서현은 이름만 옛 요서군에서 따왔을뿐으로 위치는 한나라 시대 요서군과 다르다

4. 이 요서현은 요서군, 유성군, 유성현 등으로 혼용돼 불렸다

5. 이 요서현, 즉 유성현은 한나라 요서군 서부도위가 있던 유성현, 조조가 오환을 격파한 유성현과 다른 곳이다. 즉 동명이처이다.

6. 598년에 고구려는 수나라의 바닷가 병영을 공격했는데 이곳은 진주강씨 족보와 신채호의 의견에 따르면 임유관으로 보인다

7. 이들 기록이 후대에 쓰여졌음을 고려할 때에 임유관으로 특정하기보다는 현 난하유역인 수나라 북평군(평주) 지역으로 판단할 수 있다

8. 605 년, 또는 604 년에 거란이 수나라 영주를 타격했다

9. 거란의 수나라 공격은 598 년에 의해 두 번째로 수서는 거란이 돌궐에 복속돼 있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거란은 4세기 말/5세기 초 광개토대왕 시절부터 고구려에 복속돼 있었음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타나며

10. 598년 고구려에 의해 거란이 수나라를 공격한 사실이 수 양제 612년 조서에 나타나고, 비록 수 건국 시기에 수 나라를 공격했으나 돌궐은 수 양제 시절에는 이미 수나라 지배질서에 들어가 있던 상황이었는데 그 시기인 604/605 년에 돌궐의 지배를 받았다는 거란이 수나라 영주를 공격함은 사실 맥락에 부합하지 않는다

11. 거란의 수 영주 공격은 수나라로 하여금 거란 본영을 공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12. 수나라는 돌궐 군사 2만 기를 빌려 고구려 국제시장이 있는 유성현으로 가는 상단인 척하며 국경을 넘은 후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13. 이 사실은 늦어도 605 년의 유성현이 고구려 땅이었음을 증언한다 또한 수나라 영주와 유성은 다른 곳이었음을 증언한다

14. 학계 통설에서는 이를 두고 수 문제 1차 침략 실패 후 유성이 고구려 땅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15. 그렇다면 학계 통설에서 유성으로 비정하는 현 조양시까지 고구려 강역으로 표시해야 함에도 씨부랄 것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현 요하~동요하를 고구려의 서한계로 지도에 표시하고 있다

16. 수나라 요서군의 인구와 그 강역은 지극히 비상식적이다. 수나라 당시 돌궐은 쪼개져 수나라 지배질서에 들어와 있었으나 요서군을 맞댄 거란과 고구려는 수나라를 수차례 타격하고 또 수나라의 연인원 수백만 병력의 총 4차에 걸친, 수나라 시대 내내, 대침략 전쟁이 벌어진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한, 수나라 지배력이 전혀 미치지 못한 지역이 학계 통설이 버젓이 선 그어 놓은 수 요서군이다

17. 수나라 북평군의 실제 영역은 현 진황도시 산해관까지가 아니라 현 청룡하와 난하가 동한선이었다

18. 수나라 임유현은 현 당산시 동쪽, 난하 서쪽에 있었다

19. 수나라 임유궁은 임삭궁으로 현 북경시 서남쪽에 있었다

20. 수나라는 북평군(평주)을 설치하기만 했지 실제로는 제대로 경영하지 못했다



“선비족이 다투어 일어나니 노룡의 사방이 모두 전장이 되었고 중국의 말과 가르침이 영주와 평주에 다시 도달하지 못 하길 수백 년이 되었다. 수나라가 비록 주현을 설치하였으나 황폐하게 두고 다시 경영하지 못했다.”

及鮮卑競起,盧龍四境皆為戰地,中國聲教不復達平、營者數百年。隋雖置州縣,而荒略未改。

<독사방여기요 북직 8 영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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