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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월 29일 (금)

[한국사] 수/당 영주 위치 추적 잠정 중단

감방친구 조회 : 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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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대 사서들의 기술 방식이 앞의 사서 기술을 그대로 받아서 교묘하게 적기 때문에

확실한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고, 확실한 위치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제 생업을 포기하고 하루에 10시간 이상, 수 년을 매달려 집중해야 할 수준으로 복잡하고, 또 그 분석대상의 량이 방대합니다

영주를 추적하는 것은 지난 해 겨울부터 올 봄까지, 그리고 이 번에 이르기까지 세 번인데

먼저는 가탐 도리기 제 1도의 영주 위치를 찾고자 했으나 현 조양시 비정을 일단 받아들이고 현 조양시를 중심으로 연군성과 여라수착성을 현 의현과 그 근방에서 찾아서 고구려 말기 요수와 각 성의 위치를 비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수/당의 고구려 침략 당시 수/당의 동쪽 영역이 현 조양시까지 이를 수가 없다는 기록과 정황이 있으므로 다시 붙잡고 파고들어 앞의 두 번의 탐문 때보다는 수확을 얻었으나 확실한 위치를 잡기 어려웠고, 시간을 더 투자하면 명확해질 것이라 분명히 확신하나 이렇게 되면 제 먹고 사는 일상이 너무 망가져서 더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 잠정 중단하고, 이번 고찰을 토대로 하여 향후 다시 도전하기로 하였습니다


<북위 6진의 난 당시 6진의 위치와 남영주 교치>

북위남영주.jpg


<수/당 시대 영주 추적 : 수서, 구당서, 신당서, 통전 교차 분석 정리>


A. 신당서 지리지 유주범양군(幽州范陽郡) 유도현(幽都縣).


본래 계현(薊縣)의 땅이다. 수국(隋國)에서는 영주(營州)의 지경의 옛 여라성(汝羅城)에 료서군(遼西郡)을 설치하고 항복한 속말말갈(粟末靺鞨) 사람들이 살게 하였다. 무덕(武德) 원년에 연주(燕州)라 하였고 3개의 현을 다스리는데 료서군(遼西郡)과 로하군(瀘河郡)과 회원군(懷逺郡)이다. 토산물 조공품으로는 표범 꼬리가 있다. 이해에 로하현(瀘河縣)을 없앴다. 6년에 영주(營州)로부터 유주(幽州)의 성(城) 가운데로 옮겼으며, 우두머리(首)로 세습하여 자사(刺史)가 되도록 하였다. 정관(貞觀) 원년에 회원현(懷逺縣)을 없앴다. 개원(開元) 25년에는 유주(幽州) 북쪽에 도곡산(桃谷山)으로 옮겨 다스렸다. 천보(天寳) 원년에는 귀덕군(歸德郡)이라고 하였다. 가구수는 2045이고 인구수는 1603명이다. 건중(建中) 2년에 주함(朱淊)에게 소멸당하였으므로 폐하여 현으로 하였다.



B. 구당서 지리지 연주(燕州)

수국(隋國)의 요서군(遼西郡)으로 영주(營州)에 붙여 다스렸다. 무덕(武徳) 원년 연주총관부(燕州總管府)로 고치었고 요서현(遼西) 로하현(瀘河) 회원현(懷遠)을 다스렸다. 그 해에 로하현(瀘河縣)을 폐하였다. 6년에 영주(營州)로부터 남쪽으로 옮기어 유주(幽州)의 성내에서 붙여 다스렸다. 정관(貞觀) 원년 도독부를 폐하고 또한 회원현(懷逺縣)을 없앴다. 개원(開元) 25년에 치소를 유주의 북쪽 도곡산(桃谷山)으로 옮기었다. 천보(天寶) 원년 귀덕군(歸徳郡)으로 고쳤고 건원(乾元) 원년에 다시 연주(燕州)라고 하였다. 옛날에 다스리는 현은 1개이고 실제로 차지한 땅은 없으며 다스림을 받는 자들은 속개말갈(粟皆靺鞨, 속말말갈)의 별종이며 가구수는 500이다. 천보 년간에 가구수는 2045이고 인구수는 1,1603명이다. 경사와 동도까지의 거리는 유주와 같다.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2520리에 있으며 동도(東都) 까지 1600리이다.) 요서현(遼西). 연주(州)의 치소이다.


C-1. 수서 지리지 기주(冀州) 요서군(遼西郡)
옛날에 영주(營州)를 설치하였는데 개황(開皇) 초에 총관부(總管府)를 두었고, 대업(大業) 초에 폐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1개이고 가구수는 751이다.

유성현(柳城縣). 북위(北魏)에서 영주(營州)를 화룡성(和龍城)에 설치하여 건덕군(建德郡) 기양군(冀陽郡) 창려군(昌黎郡) 요동군(遼東郡) 낙랑군(樂浪郡) 영구군(營丘郡) 등을 다스렸고 용성현(龍城縣) 대흥현(大興縣) 영락현(永樂縣) 대방현(帶方縣) 정황현(定荒縣) 석성현(石城縣) 광도현(廣都縣) 양무현(陽武縣) 양평현(襄平縣) 신창현(新昌縣) 평강현(平剛縣) 유성현(柳城縣) 부평현(富平縣) 등을 다스렸다. 북제(北齊)는 오직 건덕군(建德郡)과 기양군(冀陽郡)을 남겨놓고 영락현(永樂縣) 대방현(帶方縣) 용성현(龍城縣) 대흥현(大興縣) 등을 다스렸는데 그 나머지는 모두 폐하였다. 개황(開皇) 원년에 오직 건덕군의 용성현만을 남겨놓고 그 나머지는 모두 폐하였고 또한 군도 폐하였으며 현을 용성현으로 바꾸었다가 18년에 유성현으로 고쳤다. 대업 초에 요서군을 설치하였다. 대방산(帶方山)과 독려산(秃黎山)과 계명산(雞鳴山)과 송산(松山)이 있다. 유수(渝水)와 백랑수(白狼水)가 있다.



C-2. 수서 지리지 기주(冀州) 상곡군 수성현


수성현(遂城縣). 옛날에는 무수현(武遂)이라고 하였는데 북위(北魏)가 남영주(南營州)를 설치하였는데 이에 준하여 영주(營州)를 설치하였었다. 군은 5개이고 【현은 11개였다. 룡성현(龍城縣)과 광흥현(廣興縣)과 정황현(定荒縣)은 창려군(昌黎郡)에 속하였고, 석성현(石城縣)과 양무현(陽武縣)과 】 광도현(廣都縣)은 건덕군(建德郡)에 속하였고, 양평현(襄平縣)과 신창현(新昌縣)은 료동군(遼東郡)에 속하였으며, 영락현(永樂縣)은 락랑군(樂浪郡)에 속하였고, 부평현(富平縣)과 대방현(帶方縣)과 영안현(永安縣)은 영구군(營丘郡)에 속하였다. 북제(北齊)에서는 오직 창려군(黎) 한 개만을 남겨 놓았었는데 영락현(永樂縣)과 신창현(新昌縣) 등 2개의 현을 다스렸었는데, 나머지는 모두 없앴다(餘並省). 개황(開皇) 원년에 주(州)를 옮겼고 3년에는 군(郡)을 폐하였고, 18년에는 수성현(遂城)으로 고쳤다. 룡산(龍山)이 있다.



D. 통전 영주(營州)기술 내용 중

ㅡ 수 문제가 고보녕을 평정하고 고보녕 세력이 웅거했던 소처에 영주를 설치함


後魏置營州後周武帝平齊其地猶為髙寳寧所據隋文帝時討平寳寧復以其地為營州煬帝初州廢置遼西郡大唐復為營州或為柳城郡領縣一 柳城

(有龍山鮮卑山在縣東南二百里棘城之東塞外亦有鮮卑山在遼西之北一百里未詳孰是青山石門山白狼山白狼水又有漢扶黎縣故城在東南其龍山即慕容皝祭龍所也有饒樂水漢故徒河縣城和龍城室韋靺鞨諸部並在東北遠者六千里近者二千餘里西北與奚接北與契丹相接)



E. 구당서 지리지와 수당서 지리지 영주상도도북 기술 내용 시대 순 교차 정리


1. 수/당 영주(유성군)의 연혁


수국(隋國)의 유성군(柳城郡)이다. <구>

원래 요서군(遼西郡)이다. <신>

무덕(武徳) 원년(618년)에 영주총관부(營州總管府)로 고쳤고 <구>

다스리는 주는 요주(遼州)와 연주(燕州)이고 <구>

다스리는 현은 유성현(栁城縣)이다. <구>

7년(624년)에 도독부(都督府)로 고쳤고 영주(營州)와 요주(遼州)를 관리하였다. <구>

정관(貞觀) 2년(628년)에 또한 창주(昌州)를 관리하였다. <구>

3년(629년)에는 또한 사주(師)와 숭주(崇) 를 관리하였다. <구>

6년(632년)에는 또한 순주(順州)를 관리하였다. <구>

10년(636년)에는 또한 신주(慎州)를 관리하였다. <구>

지금은 7주를 관리한다. <구>

만세통천(萬嵗通天)원년(696년)에 거란에게 함락당하자 <신>

만세통천(萬嵗通天) 2년(697년)에 거란의 리만영(李萬榮)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구>

성력(聖歴) 2년(699년)에 어양(漁陽)으로 옮겨 다스렸다가 <신>

신룡(神龍) 원년(705년)에 도독부를 유주(幽州)의 경계로 옮겨 다스렸는데 더하여 어양현(漁陽)과 옥전현(玉田)을 다스렸다. <구>

개원(開元) 4년(716년)에 다시 유성군(栁城)으로 되돌아 왔다. <구>

개원(開元) 5년(717년)에는 다시 돌아와서 류성(栁城)에서 다스렸으며 <신>

개원(開元) 8년(720년)에 다시 어양(漁陽)으로 나아갔으며 <구>

개원(開元) 11년(723년)에 또다시 유성(栁城)으로 돌아왔다. <구>

천보(天寳) 원년(742년)에 이름을 바꿨다. <신>

천보(天寶) 원년(742년)에 유성군(柳城郡)으로 고쳤다. <구>

건원(乾元) 원년(758년)에 다시 영주(營州)라고 하였다. <구>



2. 관할 주

<구당서 지리지> : 최초(연주, 요주) / 총 7주(영주, 요주, 창주, 사주, 승주, 순주, 신주)

<신당서 지리지> : 직접 기술 없음


3. 치소/인구

<구당서 지리지>

옛날에 다스리는 현은 1개(유성현)이고 가구 수는 1031이며 인구수는 4732명이다.

천보 년간(742년~)에는 가구수는 997이고 인구수는 3789명이었다.

<신당서 지리지>

현은 1개(유성현)이다.

가구수는 997이고 인구수는 3789명이다.

4. 위치 정보

<구당서 지리지>

경사에서 동북쪽으로 3589리 떨어져 있고 동도(東都)까지는 2910리이다.

류성현(柳城縣), 한국(漢國)의 현(縣)으로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

실위(室韋)와 말갈(靺鞨)의 모든 부락이 같이 동북쪽에 있는데 먼 것은 6000리이고 가까운 것은 2000리이며 서북쪽으로 해(奚)의 경계를 접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거란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신당서 지리지>

서쪽 480리에는 유관(渝闗) 수착성(守捉城)이 있다.

또한 여라(汝羅)와 회원(懐逺)과 무려(巫閭)와 양평(襄平) 등의 4개의 수착성(守捉城)이 있다.

서북쪽으로 해(奚)와 접하며 북쪽으로 거란과 접한다. 동북쪽의 진(鎮)으로 의무려산사(醫巫閭山祠)가 있다. 또한 동쪽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

5. 기타

<신당서 지리지>

평로군(平盧軍)이 있는데 개원(開元) 초기(713~)에 설치하였다.

동쪽에는 진안군(鎮安軍)이 있는데 본래 연군(燕郡)의 수착성(守捉城)이며 정원(貞元) 2년(786년)에 군성(軍城)으로 하였다.


수당영주위치일단정리.jpg



감방친구 18-07-01 10:36
수/당의 영주가 현 조양시였으면

1) 고구려 정벌군의 출발지를 왜 탁군 (북경)으로 삼았는가?

2) 수 양제의 "발해와 갈석 사이에서 무리를 모으고, 요동과 예맥의 땅을 잠식하였다" 한 발언은 어떻게 가능한가?

3) 당 태종의 "요동과 갈석 사이에서 죄를 묻겠다"한 발언은 어떻게 가능한가?

4) 조양까지 수/당 땅이었으면 어찌하여 군량보급에 애를 먹고 이것이 패전으로 연결되며 당 태종은 2차 정벌의 작전을 국경지대 소요 전술을 통한 압록강 이북 약취로 바꾸고 군량수송을 해군에 전담시켰는가?

5) 조양까지 수/당 영토였으면 수나라 고구려 원정 당시 영주총관이던 위충의 아들 위정과의 대화에서 당 태종의 "유주로부터 요수까지 2천여 리에 (당나라 소유의) 주/현이 없"으니 군량 수송에 만전을 기하라 한 발언은 어떻게 가능한가?

6) 당 영주 관할로 영주 동북쪽에 있었다는 요악도독부의 위치가 현 파림좌기~승덕~적봉 일대인데 현 조양시가 영주였으면 어떻게 그 요악부가 영주의 동북쪽에 있을 수 있는가? 서북쪽인데?

7) 당 연주는 영주 남쪽으로 교치돼어 유주성(幽州城)에 가 붙는데 영주가 현 조양이면 유주인 북경이 현 조양 남쪽에 있는가?
도배시러 18-07-01 15:25
수고하셨습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북위의 지명 비정에 주요 유물은 [조선현 한현도]무덤입니다.
문자그대로 접근한다면, 북위 북평군 조선현과 신창....
현재의 북경이 북위 북평군 조선현이라는것. 그리고 조선현의 다른 이름은 한나라 요서군 비여현...

그리고 북위의 지리는 수경주로 접근이 가능하다는것.
감방친구 18-07-01 15:36
수경주는 지리정보 왜곡의 주범입니다
지금 다시 한번 향고도님 블로그에 가서 송대 이후 중국 고지도를 쭉 살펴보고 오는 길입니다

8세기 가탐 시대에는 이미 영주가 평주 지역에 같이 있었고
지리정보가 특히 왜곡된 계기는 수경에 주를 단 역도원,
그리고 오대ㅡ송 시기, 그리고 명ㅡ청 시대입니다
감방친구 18-07-01 15:41
아, 본문 지도에 그 내용을 표시해야 하는 것을 빼먹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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