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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월 28일 (목)

[한국사] 수/당 시기 영주(유성군)의 위치 고찰

감방친구 조회 : 3,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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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당영주.jpg


수당영주.jpg


거란이만영.jpg



갈수록 태산으로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거 하루에 10시간 이상 투자, 1년을 꼬박 매진해야 정리가 될 사안입니다

윤곽은 잡히는데 글로써, 또 글로서 논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이유는 다루며 따져봐야 할 내용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입니다



도배시러 18-06-27 14:02
엄청 방대해요. 심증은 가지만 논증 하기에 분량이 너무 많음요
감방친구 18-06-27 14:05
알파고가 절실!
감방친구 18-06-27 14:12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長城起於此山今騐長城東截遼水而入髙麗遺址猶存[按尚書云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髙麗中為左碣石]

지금 석성현으로 비정된 곳이 통전의 위 기록에서 말한 북평군 위치

북평군 남쪽 20리에 갈석산이 있다고 했는데
실제 북평군은 그 치소를 수나라 무덕 2년에 석성현(옛 임유현)에 뒀다가 노룡현(비여현)으로 옮겼다

수당 시기에 이리저리 교치되고 이름을 바꾸고 하면서 꼬여버린 지리정보가 통전에 위와 같이 기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1) 임유관은 현 산해관 위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고
2) 노룡현 또한 오히려 석성현 비정지 쪽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도배시러 18-06-27 14:21
고대해안선을 고려하면,
한 비여현[노룡]은 지금의 산악지대인 첸시현 부근이어야 합니다.
그 남쪽은 바닷속 지형
감방친구 18-06-27 14:24
제 얘기가 그 얘깁니다
도배시러 18-06-27 14:27
그 때문에 문제가 벌어지는거죠.
옛 지명을 그대로 두자니 그 아래로 해안선이 사라지면서 광대한 육지가 생성되고....
감방친구 18-06-27 14:31
본문 지도에도 덧붙인 얘기
감방친구 18-06-27 14:19
진황도 갈석은 따질 것도 없이 듣보잡 갑툭튀 갈석이다

북평군은 사기꾼 집단인 한중사학계가 기를 쓰고 왜곡하려 해도
현 북평군 비정지에서 더 동쪽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즉 이들 역사 사기꾼들에게는 현 위치에 수당 북평군을 비정하는 게 최선이다

하면 북평군 갈석과 요수를 사이에 두고 동쪽에 위치하는 좌갈석은, 난하가 고중세로부터 청나라 시대까지 대대로 요수로 불려 왔음으로

빼도 박도 못 하게 현 난하까지 고구려 영토였던 것이 되며

이에 따라 도미노처럼 자동적으로 고구려 멸망 전의 수당 북평군은 서쪽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ㅡ
적어도 그 빌어먹을 우갈석은 황하의 하류 근처에 있어야 하거든!
도배시러 18-06-27 14:24
여기서 유물로 보는 북평군 => 조선현 한현도
> 북위 북평군 北平郡〈秦置。〉領縣2 戶四百三十 430  口一千八百三十六 1,836
朝鮮〈二漢、晉屬樂浪,後罷。432延和元年 徙朝鮮民 於肥如,復置,屬焉。〉  
新昌〈前漢屬涿,後漢、晉屬遼東,後屬。有盧龍山。〉

전한 탁군 신창현, 후한 요동군 신창현 => 위치는 북경  서남쪽
감방친구 18-06-27 14:26
신창현을 이번에 추적하고 있는데
쫌 복잡합니다
현 하북성 보정시에서 감숙성 방면도 뜨고
이 신창현이 교치된 흔적도 있어요
도배시러 18-06-27 14:26
북경[신창]과 조선현의 거리가 가까워야 북평군으로 묶을수있는데...
비여[노룡]과 북경의 거리는 너무 멀다.
감방친구 18-06-27 14:29
이게 평주가 진ㅡ북위ㅡ북제 등을 거치며
나중에는 보정시까지 내려가고
그에 따라 소속 군현들이 같이 따라 내려가며 이름을 남깁니다
도배시러 18-06-27 14:31
일단 북위시대의 북경 명칭은 신창현 => 유물로 확정 [북경=신창현]
조금더 과격하게 하면... 당시의 북경 명칭은 북평군 조선현 => [북경 == 비여]
감방친구 18-06-27 14:30
즉 동명이처의 신창현에 주의해야 합니다
감방친구 18-06-27 14:21
따라서 지난 봄에 고찰한 오호도 고신감이 침략한 고구려 국경의 역산(=갈산=갈석산)은 현 노룡~창려의, 본 게시글 첫번째 사진에서 2번 갈석산이 되는 것이다
감방친구 18-06-27 15:33
통전은 거리 기록에서 오류를 여실히 보여준다
위아래로 나란하게 있는 북평군과 유성군 기술에서 다음과 같이 오류가 나타난다

北平郡
東至柳城郡七百里南至海一百里西至漁陽郡三百里北至塞百八十里東南到臨榆闗一百八十里西南到馬城縣一百八十里西北到石城縣一百四十里東北到柳城郡七百里去西京四千三百二十里去東京三千五百二十里戶三千三十一口一萬三千七百七十

북평군
동쪽으로 유성군까지 700리,
남쪽으로 바다까지 100리,
서쪽으로 어양군까지 300리,
북쪽으로 새까지 180리,
동남쪽으로 임유관까지 180리,
서남쪽으로 마성현까지 180리,
서북쪽으로 석성현까지 140리,
동북쪽으로 유성군까지 700리,
장안까지 4,320리,
낙양까지 3,520리

柳城郡
東至遼河四百八十里南至海二百六十里西至北平郡二百里北至契丹界五十里東南到安東府二百七十里西南到北平郡三百七十里西北到契丹界七十里東北到契丹界九十里契丹衙帳四百里去西京三千里去東京四千一百一十里戸八百七十四口三千

유성군
동쪽으로 요하까지 480리,
남쪽으로 바다까지 260리,
서쪽으로 북평군까지 200리,
북쪽으로 거란계까지 50리,
동남쪽으로 안동도호부까지 270리,
서남쪽으로 북평군까지 370리,
서북쪽으로 거란계까지 70리,
동북쪽으로 거란계까지 90리,
거란 아장(왕이나 추장이 거주하는 곳)이 400리,
장안까지 3,000리,
낙양까지 4,110리
감방친구 18-06-27 15:36
1) 북평군 ~ 유성군 700리
2) 유성군 ~ 북평군 200리
감방친구 18-06-27 15:40
유성군, 즉 영주가 어양으로 교치됐던 적이 있다
구당서 지리지 기준
705년과 720년

또한 안동도호부가
북평군이 있는 평주 지역으로 옮겨 가 있었던 시기가 있다
714년 ~ 743년

북평군 ~ 어양군 300 리
유성군 ~ 안동도호부 270

안동도호부의 위치 변천
감방친구 작성일 : 18-05-12 13:34 조회 : 436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71422&sca=&sfl=mb_id%2C1&stx=cellmate&page=4
감방친구 18-06-27 15:43
이 유성군(영주) ~ 안동도호부 270리를 후대 사서인 무경총요가 그대로 받는다
"東南至安東都護府二百七十里,號平壤城"

[興中府,營州地,漢末烏桓鮮卑所居,唐平盧軍節度使泊所,今號興中府。

東至遼河三百里,西至中京三百里,西南至建州六十里,北至湟水四百里(舊契丹界),西北至松陘嶺百里,東南至安東都護府二百七十里,號平壤城,東北至白川州七十里。 ]


무경총요로 본 안시성과 거란 동경의 위치
감방친구 작성일 : 18-04-22 13:59 조회 : 652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70412&sca=&sfl=mb_id%2C1&stx=cellmate&page=7
감방친구 18-06-27 15:52
여기서도 모순이 나타난다

흥중부 (영주) 동쪽 요하 300리 ㅡ 무경총요
유성군 (영주) 동쪽 요하 480리 ㅡ 통전

영주를 현 조양시라 한다면 300리 동쪽 요하는 대릉하 본류(의현에서 금주 동쪽 해구로 빠지는)에 해당한다

그러나 현 요하는 대릉하 본류에서 400 리 가량 더 가야 한다
따라서 480리 요하는 성립하지 않는다

더구나 요하라는 말 자체가
통전 유성군 기술 조에 유독 쓰이고 있는데
상당히 의심스럽다
감방친구 18-06-27 23:38
사실 현 조양과 대릉하 본류라 할 의현ㅡ금주 물길까지의 거리는 조양ㅡ의현이 약 200리(180리)이므로 영주 동쪽 300리와 거리가 있다

현 조양 동쪽 300리에는 무경총요/독사방여기요 근거 북진시가 있다
감방친구 18-06-27 15:53
1)북평군에서
장안까지 4,320리,
낙양까지 3,520리

2) 유성군에서
장안까지 3,000리,
낙양까지 4,110리
감방친구 18-06-27 16:03
장안은 낙양 서쪽 900여 리에 있다
이 거리는 역대 사서 공통이다

유성군에서 장안이 낙양보다 1,110리 가깝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통전에 적혀 있다

만약 낙양과 장안의 거리가 뒤바뀐 것이라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유성군이 북평군보다 더 서남쪽에 있는 게 되니까
감방친구 18-06-28 00:06
6~8세기 영주 (유성국)의 교치 상황

1. 6세기 북제/북주 ㅡ 현 하북성 보정시
2. 581년 수 개황 1년 ㅡ 보정시에서 승덕시, 또는 북경시 방면으로 교치

3. 618년 당 ㅡ 영주총관부 설치
4. 699년(705년) 당 ㅡ 어양으로 교치

5. 716년 (717년) 당 ㅡ 유성으로 복귀
6. 720년 당 ㅡ 어양으로 교치
7. 723년 당 ㅡ 유성으로 복귀
감방친구 18-06-28 00:32
幽州以北,遼水二千餘里無州縣,軍行資糧無所取給,卿宜為此使。<구당서 위정 열전>

自幽距遼二千里無州縣,吾軍靡所仰食,卿為朕圖之。<신당서 위정 열전>
감방친구 18-06-28 00:34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북직 4

河間府東至海豐縣三百里,南至山東德州二百五十里,西南至真定府冀州二百三十里,西至真定府定州二百有八里,西北至保定府安州百二十里。自府治至京師四百十里,至南京二千一百四十里。

靜海縣(河間)府東北百八十里。
海在縣東北百五十里,與山東、遼東接境。古名勃海。應劭曰:海之橫出者,曰勃。元行海運,以天津海道為咽喉要地。前朝亦嘗通運於此。嘉靖三十八年,遼撫侯汝翼,以遼東大饑,議移粟天津。其入遼之路,自海口發舟,至廣寧右屯河通堡,不及二百里,中間若曹泊店、月沱、桑沱、姜女墳、桃花島、咸可灣泊,各相去四五十里,無風濤、盜賊之虞。從之。尋復罷。《志》云:天津一隅,東南漕舶鱗集,其下去海不過百里,風帆馳驟,遠自閩浙,近自登、遼,皆旬日可達。控扼噤要,誠京師第一形勝處也。

ㅡ 하간부 정해현 동북 150리는 산동 및 요동과 접경이다
ㅡ 요동에 대기근이 들어서 나눠줄 곡식을 천진에서 운반할 일을 의논했다
ㅡ 천진은 요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길목이다)
ㅡ 천진에서 배를 타고 광녕위 우둔하까지 200 리가 안 된다
ㅡ 천진과 광녕 우둔하 중간에 조박점, 월타, 상타, 강녀분, 도화도가 있는데 모두 정박할 수 있으며 각각 서로 간의 거리가 4~50 리 된다
ㅡ 명일통지에 따르면 천진은 한쪽 모퉁이에 있어서 동남쪽에 선박이 비늘처럼 밀집돼 있으며 그 아래 바다까지 불과 100리밖에 안 되고, 돛에 바람을 받아 빠르게 달리니 멀게는 민저(현 저장, 광둥 일대)로부터, 가깝게는 등주, 요동으로부터 모두 열흘이면 도달한다.


정해현

https://en.m.wikipedia.org/wiki/Jinghai_District



징하이 현
중국 톈진 시
구글지도

https://goo.gl/maps/QKwCJKb8YYr
지수신 18-06-28 13:38
아마추어가 하기엔 너무나 엄청난 일을 하고 계시네요.

얼핏 보기에도 아귀가 딱딱 맞아들어가는게
마치 일도안사의 삼한사를 보는 느낌입니다 ㅎㅎ
감방친구 18-06-29 13:12
보통 일이 아니네요 ㅎㅎ;;
감방친구 18-06-29 13:11
대요수, 소요수 등 요수는

춘추전국시대의 요수관과 요수의 수리적 사실정보가 산해경에 기록되고 이것이 연/진을 거치며 정리

이러한 수리 기록을 후대의 사서들이 계속 받아적으면서 조금씩 변형, 특히 수경/주에서 변형이 가해지고

또 이러한 연/진 시대 요수 정보가 전한/후한의 요동군 지리정보에 합산

이러한 과정이 당/송 시대를 거치며 정형화



황하 주변의 특정 강하인 요수의 수리 정보가
역수, 영정하, 조백하, 난하로 옮겨가며 전래의 기술을 그대로 답습,
시대변천에 따라 대릉하를 거쳐 마침내 현 요하까지 오게 됨

서남으로 흐른다든가 동남으로 흐른드든가
양평의 서쪽을 지난다든가 요대현을 거친다든가 하는 식의
수리 정보는 연/진 시대의 조백하, 또는 난하 수리정보인데

이 수리정보를 계속 대릉하, 요하에 끼워 맞추다 보니
이 지경이 된 것
Attender 18-06-29 14:42
언제나 수고하시는 감방친구님......

저는 언제나 감방친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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