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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월 29일 (금)

[한국사] 현 요동지역의 고대 해안선과 서안평의 위치

감방친구 조회 : 7,655
검색목록 목록

서안평1.jpg


서안평2.jpg



본인의 예전 게시글을 다시 훑어보던 중에 고대 해안선을 고려 했을 시 고대 압록강(현 동요하~요하)의 입해처와 한 요동군 서안평으로 요사와 독사방여기요에서 설명한 호주성의 위치가 일치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도 위에 시각화하여 게시합니다


감방친구 18-06-18 15:58
1. 안시성
0) 당ㆍ송 역대 사서 ㅡ 한나라 안시현 근방
1) 무경총요 ㅡ 현 북진시 근방
2) 요사 지리지 ㅡ 동경 남쪽 70리
3) 독사방여기요 ㅡ 개주위(요양 서남쪽 240리) 동북쪽 70리

2. 안시현
1) 대요수가 안시현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한서 지리지)
2) 대요수, 소요수, 마자수(압록수)가 모두 안시 일대에서 바다로 들어간다(신당서 지리지)
3) 안동도호부이자 옛 평양성이 금주시 근방에 위치(조양시 동남쪽 270리, 무경총요)/안시성 거란 동경과 함께 북진시 근방에 위치(무경총요)
4) 이적은 요수 상류를 통해 북쪽 루트로 요동성에 도달, 당 태종은 영주에서 요택을 지나 요수를 건너 남쪽 루트로 요동성과 안시성에 도달(신당서/통전/자치통감/삼국사기)
5) 당 태종이 건넌 요택 200리(신당서/통전/자치통감/삼국사기)/영주~연군성-여라수착 200리(가탐 도리기 제 2도/황화사달기)

3. 개주위
1) 요사 지리지/주해도편/독사방여기요 근거 현 판진시
2) 현지명 근거 잉커우시 남쪽 현 개주시
감방친구 18-06-18 16:19
고구려의 서안평 공략사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다음의 기록들을 보십시오

○ 태조대왕 94 년 (서기 146),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 동천왕 16년(서기 242), 임금이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 미천왕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ㅡ 遼東西安平縣
ㅡ 遼東西安平
ㅡ 遼東西安平
감방친구 18-06-18 16:25
학계 주류가 주도한 삼국사기 국역에서는
태조대왕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공격했다고 해석을 해놓고 있습니다만
원문 자체로 보면 서쪽 안평현이 아니라 서안평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왜 그러느냐
ㅡ 고구려는 지속적으로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략하고 있었고
ㅡ 서안평이 아니라 요동군 서쪽 안평현이라면 고구려가 뭔 수로 요동군 서쪽을 공략합니까? 학계 통설을 따르자면 말이죠 즉 서안평이 아니라 서쪽 안평현이라고 주류학계가 해석하는 것은 자가당착,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죠

고대 해안선을 토대로 서안평의 위치를 복원하였을 때에
한-공손씨-위-모용씨에게, 그리고 고구려에게 저 위치가 어떤 의미인지 분명해집니다
감방친구 18-06-18 20:09
게다가 한 요동군 속현에 안평현이 있습니까
감방친구 18-06-18 16:29
즉 저 위치가 요동군 서쪽 안평현이 아니라 서안평이어야
대방태수를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노략질 한 게 설명이 가능합니다
ㅡㅡㅡㅡㅡ
태조대왕 94 년 (서기 146),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ㅡㅡㅡㅡ
감방친구 18-06-18 20:14
즉 이 기사는
서쪽 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죽이고 낙랑~노략질한 1개 장소의 사건이 아니라

3개의 연쇄 사건의 기록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1)요동군 서안평을 습격했고
(나아가서)
2) (대방군을 습격해) 대방의 수령을 죽였고
3) (낙랑군을 습격해) 낙랑의 처자를 납치했다

이렇게 해석해야 옳은 것이죠

습격한 대상은 요동군 서안평만이 아니라
ㅡ 요동군 서안평
ㅡ 요동군 서안평을 통해 대방군, 낙랑군
이렇게 3곳을 습격한 것이죠
감방친구 18-06-18 16:31
본 게시글에 제시한 고대 해안선과 서안평의 위치를 고려하여 앞서 게시한 기원전 1세기 경 낙랑군ㅡ요동군ㅡ현도군의 형국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감방친구 18-06-18 16:34
현 요하 유역의 해안선이 전한 시대부터 고구려 말기까지 근 8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충적지가 형성이 돼 고구려 말기에는 본문 지도 상의 4 위치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감방친구 18-06-18 16:39
요사 지리지 상경임황부에서는 상경임황부 땅에 한 서안평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본래의 한 요동군이 고구려 세력과 모용선비의 활동에 의해 서진과 북위 시대에 적봉 근방까지 후퇴한 것을 나타낸다 하겠습니다

서진 말기(4세기 초)에 평주가 서쪽으로 교치되는데 그 평주에 속한 낙랑군이 현 노룡ㅡ창려 일대로 교치된 사실로 볼 때에 역시 평주에 속한 요동군이 적봉 근방으로 교치됐던 것이죠
도배시러 18-06-18 17:23
수경주 대요수 백랑수가 생각나네요.
우북평 백랑현을 나오자 말자... 요서 유성, 요동 창려가 튀어나옵니다.

백랑수의 위치는 대릉하가 아니라 노합하 Laoha 로 보입니다.
백랑수는 동북으로 흐르는 노합하, 대릉하는 동남으로 흘러가는 하천

백랑수는 동북으로 흐르다가 다시 동남으로 흘러 안시성을 거쳐서 바다로 들어가죠.
감방친구 18-06-18 16:47
당 태종의 군대는 육군 1진인 이세적은 요수 상류를 통해 북쪽으로
당 태종은 현 조양시와 의현을 거쳐 남쪽으로 진군해 들어왔습니다

즉 현 의무려산을 기준하여 고구려 요동성이자 한 양평성은 의무려산 북쪽에 있었던 것입니다

요동군 양평성은 연장성의 끝인 양평(현 창평/북경시 동북쪽)인데 진한 세력이 동진함에 따라 요동군을 동쪽으로 움직여 범주하면서 나타난 것으로 현 조양ㅡ북표ㅡ부신 일대에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감방친구 18-06-18 16:58
역사 탐구를 하면 할수록 무서운 것은
한사군이 현 요하 동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 하북성, 즉 북경과 난하 일대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계속 강화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두고(허용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예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도배시러 18-06-18 17:24
백랑수를 노합하로 가정하면... 북위 낙랑의 위치는 시라무렌강 주변이 되지요.
감방친구 18-06-18 17:26
요 며칠 뭐하고 계셨어요?
공조자가 없으니 역사탐문하는 맛이 나야 말이죠 ㅎㅎ
도배시러 18-06-18 17:28
지금 때가 어느때인데 이러십니까 ?
월드컵 할때는 잠시 쉬어도 됩니다. ㅋ
감방친구 18-06-18 17:31
ㅋㅋㅋㅋㅋ
감방친구 18-06-18 20:27
모용외는 269년 모용부의 대인(大人)인 모용섭귀(慕容涉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283년에 모용섭귀가 죽자 그의 동생 모용내(慕容耐)가 정권을 장악하고 모용외를 죽이려 하였으나 모용외가 요동으로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285년에 모용내가 국인(國人)에 의해 살해되자 모용외가 대인으로 추대되었다.

모용외는 선비족의 우문부(宇文部)와 사이가 좋지 않아 공격하려 하였으나 서진(西晉)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서진과 적대하게 된 모용외는 유주(幽州) 일대를 공격하여 노략질하였다. 서진 무제(武帝)는 모용외를 공격하여 격파하였으나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또한 서기 285년 부여(扶餘)를 공격하여 부여왕 의려(依慮)를 xx하게 하였다. 서진은 부여에 원군을 파견하여 모용외를 격파하였으며, 모용외는 289년에 서진에 복속하였다. 서진은 모용외를 선비도독(鮮卑都督)에 임명하였으며, 모용외는 우문부, 단부(段部)의 침입을 피해 도하(徒河)의 청산(靑山)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294년에는 다시 본거지를 극성(棘城)으로 옮겼다.

307년, 모용외는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였으며, 혼란에 빠진 서진에서 유민들이 모용외에게 귀부하여 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을 크게 키웠다. 이에 서진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유민들에게 돌아올 것을 종용하였으나 유민들이 듣지 않자 모용외가 억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318년에 우문부, 단부, 고구려(高句麗)를 끌어들여 모용외를 협공하게 하였는데 모용외는 삼국의 군사를 이간질시켜 위기를 벗어나고 우문부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최비는 모용외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결국 319년에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 모용외는 요동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모용외는 고구려와 적대하여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320년에 동진(東晉)은 모용외를 안북장군·평주자사(安北將軍平州刺史)로 삼았으며, 이후 모용외는 동진에 충성하여 후조(後趙)와 대립하였다. 321년에는 동진에서 모용외에게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거기장군·평주목·요동공(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車騎將軍平州牧遼東公)을 제수하였다. 325년에는 후조에 복속하였던 우문부가 석륵(石勒)의 명령에 따라 모용외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으며, 오히려 반격을 당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333년에 사망하였다.

https://ko.m.wikipedia.org/wiki/%EB%AA%A8%EC%9A%A9%EC%99%B8
감방친구 18-06-18 20:34
모용선비 3세기부터 4세기 초까지의 이동
1) 대흥안령 남부
2) 현 하북성 동북 ㅡ 유주공격, 부여 공격
: 유주를 공격하고 부여를 공격하고 서진이 부여를 구원하려면 서진이 부여를 구원하러 가는 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3) 우문부를 피해 도하 청산으로 이동
: 2의 위치보다 남쪽이어야겠죠
4) 극성으로 이동
: 서진의 평주지역을 차지하고 고구려와 갈등을 겪기 시작, 고구려의 서쪽과 가까운 지역이라는 말이죠
5) 용성으로 이동

학계 통설에서 도하는 호로도시, 극성은 금주, 용성은 조양 비정
감방친구 18-06-18 20:35
서기 293~296년, 고구려 봉상왕, 모용외의 침입과 화친(침략지 북부 신성, 고국원)
감방친구 18-06-18 20:39
"307년, 모용외는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였으며, 혼란에 빠진 서진에서 유민들이 모용외에게 귀부하여 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을 크게 키웠다. "

서진이 평주를 교치한 것은 모용외가 평주 지역을 차지하고 스스로 대선우라 칭한 307 년 이후, 그리고 서진이 실질적으로 망한 312년, 늦어도 316 년 전으로 봐야 합니다

혹은 국가의 기능을 상실했으나 모용외의 제거를 모의하다 평주자사 최비가 고구려에 망명한 319 년 이전이어야 합니다
감방친구 18-06-18 20:42
모용선비가 4세기 초에 차지한 요동은 현 요하 동쪽의 요동이 아닙니다

전한 bc1세기 이후 계속하여 서쪽으로 축소, 후퇴한 요동군입니다
현 대릉하 지역으로 봐야 하는 것이죠

이 시기에 고구려는 이미 이 근방까지 진출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감방친구 18-06-18 20:43
"321년에는 동진에서 모용외에게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거기장군·평주목·요동공(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車騎將軍平州牧遼東公)을 제수하였다. "
감방친구 18-06-18 20:47
40.
서기 291~306년, 팔왕의 난

41.
서기 307~312년, 영가의 난

42.
서기 293~296년, 고구려 봉상왕, 모용외의 침입과 화친(침략지 북부 신성, 고국원)

43.
서기 298년, 백제 책계왕, 가을 9월, 한(漢)나라가 맥인(貊人)들과 합세하여 침범하였다. 임금이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44.
서기 302년, 고구려 미천왕,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김


45.
서기 304년, 5호 16국 시대 시작( ~ 439년)

46.
서기 304년, 백제 분서왕, 봄 2월, 몰래 병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현(西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47.
서기 311년, 고구려 미천왕,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음

48.
서기 311년, 서진의 실질적 멸망(유총에 의한 낙양 함락, 서진 군사 10만여 명 몰살)
 
49.
서기 313년, 고구려 미천왕,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음


50.
서기 314년, 고구려 미천왕, 대방군(帶方郡)을 침공

51.
서기 315년, 고구려 미천왕,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음

52.
~ 서기 319년, 고구려 미천왕, 진나라(진나라는 이미 망한 상태) 평주자사 최비와 공모하여 우문선비, 단선비와 연합해 모용선비의 극성을 공격하려다 실패, 모용선비의 장통이 고구려 침략

53.
고구려는 계속하여 모용선비의 요동지역을 공격

54.
서기 339년, 고구려 고국원왕, 모용황(慕容皝)이 침입하여 그의 병사가 신성에 이르렀다. 임금이 동맹을 요청하자 그들이 곧 돌아감


55.
서기 342년, 고구려 고국원왕,
봄 2월,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음,
가을 8월, 임금이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김,
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김,
11 월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입해)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궁궐 창고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보물을 훔쳤으며,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운 뒤에 환도성을 무너뜨리고 돌아감

56.
서기 345년, 고구려 고국원왕,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에게 우리나라를 침공케 하여 남소(南蘇)를 무너뜨린 후 수비군을 남겨두고 돌아감

57.
서기 346년, 부여, 백제의 공격을 받은 뒤 서쪽으로 모용선비 영역 근처로 이동

58.
서기 346년, 모용황의 부여 공격(부여왕 현을 포함 5만여 명이 전연으로 끌려가고 사실상 부여 붕괴)

59.
서기 355년, 고구려 고국원왕, 모용선비와 화친, 모용선비는 고구려왕에게 이전과 동일하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의 작호를 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함

60.
서기 366년, 백제 근초고왕, 가야 정벌, 마한의 실질 정복(전남권까지 지배력 확대)

61.
서기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 백제의 치양(雉壤) 침략(고구려와 백제의 사상 최초의 군사충돌)

62.
서기 369년, 백제 근초고왕, 왜왕에게 칠지도 하사
감방친구 18-06-18 21:04
모용선비는 룡성에서 계 (현 북경)으로 이동하기 전 2가지 일을 합니다

1) 고구려 공격 ㅡ 미천왕 무덤 도굴, 궁궐의 금은보화 노략질, 포로 5만여 명 획득
2) 부여 공격 ㅡ 부여왕 현, 부여인 포로 5만여 명 획득

이는 북경으로 이동하기 전에 인적ㆍ물적 자원을 확보하고 후방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치 거란이나 여진족이 고려, 조선을 침략한 것처럼 말이죠

그런 다음에 한창 전성기인 355년 고구려와 화친하며
고구려왕에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의 작위를 그 전과 같이 줍니다

그 후에 396에 룡성으로 돌아오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광개토대왕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결국 나라가 망하죠
망한 뒤에는 고구려 괴뢰국이라 할만한 북연이 들어섭니다
감방친구 18-06-18 21:08
이 4세기 후반이 근초고ㅡ근구수에 이르는, 백제의 전성기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이 시기는 동진 말기에 해당합니다

남조 사서가 진말~약유요서라 한 바로 그 시기이며
통전이 북평과 유성 사이에 백제가 요서군, 진평군을 두었다 한 그 시기입니다
감방친구 18-06-19 00:27










감방친구 18-06-19 23:58
거란과 고려 전기 서북계의 각 지리의 위치도 10~11세기 해안선인 판진시 라인을 따라 수정해야 한다

계속 드는 의문은 과연 현 요양이 11세기 거란 동경이 맞느냐 하는 것이다
감방친구 18-06-19 05:24
자, 일단은 수리 표시를 다시 제대로 하자
감방친구 18-06-19 05:31
라마동 유적 고인골을 토대로 그 유적의 주인이 부여, 즉 모용선비에 의해 끌려간 부여인들, 혹은 부여계로 지명할 수 있는 고대 한국인으로 밝혀진 지 오래이다

이를 토대로 하여 그 전에 가야의 북방계통 문화의 원적지로 선비족을 지목하는 게 통설이었던 것이 부여계통으로 역시 수성되고 있다

http://m.egloos.zum.com/lyuen/v/5577997

사실 3세기 말과 4세기 중엽에 끌려간 부여인들은 모용선비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한 게 아니었다 모용선비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하였다

라마동의 위치인 북표현은 조양시 동북쪽, 부신시 서북쪽에 해당한다

이곳의 무덤군은 부여계통만 있는 게 아니다
당연히 선비계통도 있다

이는 당시 모용선비의 중심지에 대한 힌트를 준다 말할 수 있다
감방친구 18-06-19 05:48
이는 꼭 부예계통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고구려인 역시 5만여 명이 끌려갔고
또 한편으로 고구려는 이들 지역을 영토로 삼았으므로
도배시러 18-06-19 06:33
★ 삼국유사 ★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B.C 59)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의 의주(醫州) 부근에 있다.]에 내려왔는데, ★
다섯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왔다.
대요(大遼)의 의주(醫州) => 요사지리지의 려주로 추정
閭州。羅古王牧地,近 醫巫閭山。在遼州西一百三十里 요사 지리지1
감방친구 18-06-19 06:35
여주는 무려성, 즉 북진시 동북쪽에 있습니다
도배시러 18-06-19 06:51
려주는 아닌가보네요.
지리지를  뒤져도 요/거란 醫州는 안보이는데... 어딜까요 ?
도배시러 18-06-19 06:55
북진시는 遼州 부근인것 같습니다만...
감방친구 18-06-19 07:01
북진시 동쪽/동북쪽이 요주입니다, 무경총요 상에서는
도배시러 18-06-19 07:02
흘승골성(訖升骨城) [대요(大遼)의 의주(醫州) ] 찾아주세요.
감방친구 18-06-19 07:10
의무려산과 분명 관련이 있어 보이고

연군성인 의주일 가능성이 있어보입니다

宜州,按《皇華四達記》:營州東北八十里,凡九遞至燕郡城,自燕郡東經汝羅守捉,渡遼州十七驛,至安東都護府,約五百里。

東至醫巫閭山,西至霸州二百里,南至錦州九十里。<무경>

의주는 영주(흥중부) 동북쪽 80리에 있는데 연군성(이 있던 곳)이다.
황화사달기에 따르면 동쪽으로 안동도호부까지 약 500리이다.

동쪽에 의무려산이 있고, 남쪽으로 금주까지 90리이다.

顯州,本渤海國,按《皇華四達記》:唐天寶以前,渤海國所都顯州,後為契丹所並。又有集康二州,並撥屬本州。東至遼州九十里,又三百九十里至東京,西至宜州百二十里,南至乾州七里,北至醫巫閭山。<무경>

현주에서 서쪽으로 의주까지 120리이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70533&sca=&sfl=mb_id%2C1&stx=cellmate&page=6
감방친구 18-06-19 07:11
현주는 북진시입니다
동단국 초대 왕인 야율아보기 큰아들 무덤인 현릉이 있어서 현주
도배시러 18-06-19 07:13
요/거란 916~1121~1123
삼국사기 1145 / 삼국유사 1281

거란 멸망후에 작성하면서 김부식과 일연이 의주醫州 를 언급한 이유를 모르겠네요.
金史에 나올려나 ? 금사에도 없는 단어...

醫州 를 검색하니 지명 추적은 포기하고 홀승골성은 오녀산성으로 비정된다는둥...
딴소리만 잔뜩 늘어놨네요. ㅠㅠ
감방친구 18-06-19 07:16
금사에 없습니다 찾아봤는데
감방친구 18-06-19 06:37
廣寧衛司西四百二十里。
無慮城今衛治。本漢之無慮縣,屬遼東郡。

閭州城在衛東北。遼置。《志》云:以近巫閭山而名。在遼州西百三十里,西北至上京臨潢府九百五十里,金廢。

豪州城,在衛東北二百二十里。《遼志》:漢遼東西安平地也,遼置州,西北至臨潢七百二十里,金廢。

<독사방여기요 산동8>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1309&sca=&sfl=mb_id%2C1&stx=cellmate&page=20
감방친구 18-06-19 09:10
의주, 무로(무려)성, 여주

얘네 이름을 보면 아시겠지만
다 의무려산의 이름을 따고 있어요
감방친구 18-06-19 10:45
10~11세기 현 요하 지역 해안선은 판진시까지였습니다
금주 동쪽 충적지를 2/3 깍으며 반원으로 판진을 지나 해성시와 대석교(다스차오) 앞쪽을 지나는 해안선이었습니다

고대의 해안선은 북쪽으로는 요중 안팎, 동쪽으로는 요양, 서쪽으로는 북진시 근방까지였습니다

고구려 중후기의 해안선은 현 요중과 판진 사이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이곳은 요택이 아니라 바다, 습지가 아니라 뻘에 가까웠던 것이죠
청동기 및 초기 철기시대 유적 분포도 이 고대 해안선과 대체로 일치합니다

제가 무경총요로 고찰해드린 바와 같이
현 난하~의무려 지대가 요택이었습니다
감방친구 18-06-19 10:46
당 태종이 영주에서 출발하여 고구려 중심지 쪽으로 오는 남쪽 길은 대릉하를 따라 의무려산의 남쪽을 돌아 오는 길밖에는 없었습니다
삼바 18-06-19 18:02
고대 해안선에 대하여 한말씀 드립니다.
2번 해안선의 경우 여러 시대에 해안선 변화가 그러 하였다, 생각됩니다.
1번 해안선의 경우. 서안평현이 있던 한나라 시대를 상정한 것이라면, 해안선 관련 연구의 너무 옛날 연구를 참고하신듯 합니다. 이미 태안현(台安縣)의 경우 기원 전후 성곽과 유물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그러니 그시기에는 해안선이 태안현 이남에 존재 하는 것이 확실하며, 태안현 유물 발견 이전의 연구는 해안선 연구로의 의미가 상실된 것입니다.
1번 해안선의 경우 구글 홍수지도에서 살펴보면 대략 15m 전후 해수면이 상승 했을때 가능 한데, 이정도 해수면이 상승하면 산동 반도는 섬입니다.
제가 살펴본 기원전후 해수면은 현재의 해수면의 + 3m 전후입니다.
도배시러 18-06-19 21:17
이미 태안현(台安縣)의 경우 기원 전후 성곽과 유물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 절대연대 분석인가요 ?  해당 유물의 편년을 기준으로 하는 방법인가요 ?
고대 해안선 은 조개패총을 이용해 절대연대가 나옵니다.
감방친구 18-06-19 23:29
영구 지역의 들고 남이 있을 뿐 물질 문화상의 분포상도 고대 해안선과 대체로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독사방여기요와 물질문화상, 고대해안선을 근거한 서안평 위치에 대한 제 주장은 성립 가능하다고 봅니다

즉 서안평은 현 북진시 동(북)쪽 신민시와 요중 사이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죠
감방친구 18-06-19 23:42
태안현은 요하 물줄기가 아닌 요중과 판진을 이은 선의 바깥에 위치합니다

잉커우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옛 해안선의 외곽선을 유적이 다소 침범하고 있는 양상은 나타납니다

서안평의 위치는 마자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감방친구 18-06-19 23:49
바로 위에 제가 쓴 댓글입니다

감방친구 18-06-19 10:45 답변 수정 삭제
10~11세기 현 요하 지역 해안선은 판진시까지였습니다
금주 동쪽 충적지를 2/3 깍으며 반원으로 판진을 지나 해성시와 대석교(다스차오) 앞쪽을 지나는 해안선이었습니다

고대의 해안선은 북쪽으로는 요중 안팎, 동쪽으로는 요양, 서쪽으로는 북진시 근방까지였습니다

고구려 중후기의 해안선은 현 요중과 판진 사이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이곳은 요택이 아니라 바다, 습지가 아니라 뻘에 가까웠던 것이죠
청동기 및 초기 철기시대 유적 분포도 이 고대 해안선과 대체로 일치합니다

제가 무경총요로 고찰해드린 바와 같이
현 난하~의무려 지대가 요택이었습니다
감방친구 18-06-20 00:05
홍수만 상정하시면 곤란하죠
역사시대를 통해 충적지 형성과 취락에 의한 해안선 전진을 고려해야죠

확실한 것은 10~11세기 해안선은 판진시 위쪽이었고
17세기까지도 판진시에서 바다쪽 라인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서안평은 기원전 2~1세기입니다
그 후 고구려가 공략하는 4세기까지의 서안평은 이 본래 위치에서 큰 움직임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위치는 광녕위 치소인 무로성 동북쪽 220리에 있는 호주성이 옛 서안평이라 한 독사방여기요 기술과 부합하고
마자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 서안평이라 한 한서 지리지 기술과 부합하는 것이죠
이게 제 주장의 골자입니다
삼바 18-06-20 09:51
역사 연구를 하실때는 기본적인 지구과학에 위배되는 주장을 하시면, 지구과학에 필패하십니다. 해안선은 과학적인 주장들을 먼저 참고하셔야지 어떤 역사서를 읽고  서안평이 그 위치이고 서안평이 바닷가에 있으니 해안선이 거기다 ????? 라고 주장하면 곤란합니다.
독사방여기요가 서안평 시대의 사서입니까??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이미 태안현에는 기원전후 유물이 존재합니다.
게다가 해수면이 지금보다 15M 정도 높은 정도를 상정하면 산동반도가 섬이 됩니다.
그시대 산동반도가 섬입니까????
이런 것들은 옛날에는 잘 알수 없었기에 기원 전후 해안선이 선양 인근이라고 연구된것들도 있으나, 그런 예전 추정에 의한 연구는 요즘에는 잘못된것으로 알고 있지요.
제가 홍수지도를 언급한것은 요즘은 구글지도를 이용한 홍수지도를 여러 싸이트에서 제공합니다. 원하는 해수면을 설정하면 전지구의 침수범위를 바로 알수 있습니다.
예) 홍수 지도
http://www.floodmap.net/
http://flood.firetree.net/
감방친구 18-06-20 10:28
이분 참 왜 이렇게 사람의 말을 부정적으로 곡해하여 감정적인 말을 섞는지 모르겠습니다
심바님, 누가 태안 지역의 유적을 무시한답니까?
제가 같은 댓글을 두 번이나 달았지 않습니까?
본문에 지도로서 제시한 고대 해안선이 아니라 요중현 근방이라고 수정했지 않습니까?
바이두백과를 참고해서요
그거 안 읽으셨어요?
본인의 첫 댓글 바로 위에 달았고,
본인의 첫 댓글에 답댓글로 또 달아드렸잖아요?
요중이면 태안현 바로 동쪽 옆 아닙니까?
거기까지 고대 해안선으로, 17세기까지는 판진까지라고 학자들이 연구한 것이
님 기분을 상하게 하기라도 했습니까?
요중까지 해안선이었다고 해서 거기가 바로 무슨 동해바다처럼 찰랑찰랑 거리는 깊이 푹 빠지는 바닷물이 들어왔답니까?
그 근방이었다는 정도이고 저도 그런 식으로 말한 거 아닙니까?

글의 본질과 핵심은 서안평의 위치를 사서와 고대 해안선을 교차하여 제시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사람 기분을 건드리면서 말씀하세요?
제가 언제 님 기분 상하게 했습니까?

물음표 참 좋아하시네요??? 예???
뭐가 그렇게 기분이 언짢으세요???? 예???
참내 이해가 안 가네
감방친구 18-06-20 10:31
그러면 심바님이 보기에 기원 전후의 현 요하지역 해안선이 어디인지 견해를 말씀하시면 될 일을 ???? 물음표를 이런 식으로 써가며 사람을 잡을 듯이 바보로 만들며 댓글을 다셔야 겠어요?

적어도 17세기까지는 판진시까지였던 것이 확실하고
님이 보기에, 혹은 님이 가지고 있는 자료가 있으면 공유를 하면 될 일을 저러시네
감방친구 18-06-20 10:36
//이런 것들은 옛날에는 잘 알수 없었기에 기원 전후 해안선이 선양 인근이라고 연구된것들도 있으나, 그런 예전 추정에 의한 연구는 요즘에는 잘못된것으로 알고 있지요. //

요중 인근이라고 댓글을 2개나 달았잖아요
본문 지도상의 심양까지 올라가는 해안선이 아니라
요중이라고
감방친구 18-06-20 10:38
감방친구 18-06-19 23:49

답변 수정 삭제 
 
바로 위에 제가 쓴 댓글입니다

감방친구 18-06-19 10:45 답변 수정 삭제
10~11세기 현 요하 지역 해안선은 판진시까지였습니다
금주 동쪽 충적지를 2/3 깍으며 반원으로 판진을 지나 해성시와 대석교(다스차오) 앞쪽을 지나는 해안선이었습니다

고대의 해안선은 북쪽으로는 요중 안팎, 동쪽으로는 요양, 서쪽으로는 북진시 근방까지였습니다

고구려 중후기의 해안선은 현 요중과 판진 사이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이곳은 요택이 아니라 바다, 습지가 아니라 뻘에 가까웠던 것이죠
청동기 및 초기 철기시대 유적 분포도 이 고대 해안선과 대체로 일치합니다

제가 무경총요로 고찰해드린 바와 같이
현 난하~의무려 지대가 요택이었습니다
감방친구 18-06-20 10:34
//홍수만 상정하시면 곤란하죠
역사시대를 통해 충적지 형성과 취락에 의한 해안선 전진을 고려해야죠 //

이 말이 기분이 상하셨어요?
누구라도 님 견해에 상이한 의견을 내면 기분이 상하십니까?
요하 하류의 해안선이 전진한 것은 충적지 형성에 의해서인데
산동이 섬이었다는 만 수천년 전 시절 얘기를 왜 하세요?
물질문화상 지도도 제가 댓글로 보여드리며 말씀드렸잖아요

뭐가 그렇게 기분이 상하셨는데요?
님 기분 상하게 할 의도도 그런 댓글도 쓰지를 않았습니다

왜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몰아세우며 바보로 만드시는지, 왜 화를 그리 내시는지 해명을 해주세요
삼바 18-06-20 10:43
물음표 때문에
화가 나셨습니까
최송합니다.
다시는 님을 화나게 하는 댓글을 달지 않곘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감방친구 18-06-20 10:46
아니 대체 왜 이런 식으로 하시는데요?
태안에 유적이 있으면 고대, 그러니까 기원전후 해안선을 판진 방향으로 움직여 놓고 고찰해 보면 될 일 아닙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감방친구 18-06-20 10:48
//다시는 님을 화나게 하는 댓글을 달지 않곘습니다. //

왜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데요?
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한테 이러십니까?
혼자서 수십 개 사서 원문 찾아가며 애쓰는 게 님이 보시기에 우스워서 그러세요?
서로 도움이 되어야지 이러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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