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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0일 (토)

[한국사] 서기 1~3세기 요동/한반도 정세의 재구성

감방친구 조회 :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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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가 낙랑 멸망케함(서기 37)

2. 낙랑인 5천여 명 신라 망명(서기 37)

3. 화려/불내현이 신라 침입했으나 맥국이 막아섬(서기 40)

5. 백제가 마한을 병합

6. 백제사에서 낙랑 증발

7. 신라사에서 낙랑이 사라지고 낙랑을 대신해 백제 등장

8. 낙랑이 한나라 땅이 됨(서기 44)

9. 삼국사 고구려본기에는 한나라가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차지하여 살수이남이 한나라 땅이 되었다고 돼 있으나 후한서에는 이러한 군사행동을 한 기록이 없고 다만 한국의 염사 사람 소마시가 한나라 낙랑군에 찾아와 조공을 바치자 한 광무제가 한염사읍군에 봉하고 낙랑군에 예속시키고 사철마다 입조케 했다ㅡ하는 기록이 있음(서기 44)

10. 당시 한나라는 후한서, 무경십요, 삼국지 위서 등으로 볼 때에 왕망 이후 북경 동쪽은 오환 등의 이민족에게 수비를 맞겨두고 방치가 돼 도로가 끊길 정도로 상태가 말이 아니었고, 곧 모용씨가 세를 잡고 난하 동쪽은 모용씨 천하가 되어갔다

11. 고구려 모본왕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서기 49)

12. 고구려 태조대왕 요서에 10 개 성 축성(서기 55)

13. 고구려 태조대왕 동옥저 정벌, 국경 개척, 동으로 창해, 남으로 살수(서기 56)

14. 고구려 태조대왕 한나라 요동의 6개 현 약탈(서기 105)

15. 고구려 태조대왕 예맥과 함께 한나라 현도군 습격, 화려성 공격(서기 118)

14. 고구려 태조대왕 121~122 한나라와 고구려 전쟁(서기 121~122)
ㅡ 한나라 참가군 유주자사, 요동태수, 현도태수, 부여 위구태
ㅡ 고구려 참가군 고구려군, 예맥, 마한, 선비족

15. 고구려 태조대왕 한나라 요동군 서쪽 안평현/서안평현 침입하여 대방태수를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노략질(서기 146)

16. 고구려 신대왕 재상 명림답부의 좌원대첩, 침략한 한나라군 수천 명 척살(서기 172)

17. 고구려 고국천왕 왕자 계수의 좌원대첩, 침략한 한나라군 수천 명 척살(서기 184)

18. 동한 멸망기 수십 년 동안 수많은 한나라 사람들 고구려 망명(서기 197~217)

19. 고구려 동천왕 요동군 서안평 습격하여 깨뜨림(서기 242)

20. 원위 명제가 비밀리에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한국에 파견하여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를, 읍차에게는 읍장의 표식을 주어 그 수가 천여 명에 달함 (서기 240 전후)

21. 이렇게 진한 8국을 분할해 낙랑에 예속시키는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하여 소위 기리영 전투 발생하여 한국을 멸망시킴(서기 240 전후)

22. 고구려 동천왕 신라 북쪽(마두책) 침입(서기 245)

23. 원위 관구검의 침입, 낙랑태수 유무, 삭방 (대방) 태수 왕준도 같이 현도군에서 나와 고구려 침입(서기 246)

24. 백제 고이왕 이틈을 타서 진충을 시켜 낙랑군 변경 습격하여 백성 약탈(서기 246/백제사에 낙랑이라는 이름 240여 년만에 다시 등장한 시점)

25. 고구려 동천왕, 신라가 사신을 보내오매 서로 화친함(서기 248)

26. 백제 책계왕,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함에 대방이 구원을 요청하여 응하였으나 고구려가 원망하여 침입할 것이 두려워 아차성과 사성 보축 후 침략 대비

27. 한나라가 맥인과 함께 백제를 침입하여 책계왕 살해(서기 298)

28. 고구려 미천왕, 현도군 침입하여 백성 8천여 명 약탈(서기 302)

29. 백제 분서왕, 낙랑군의 서현/서쪽 현을 침략해 빼앗았으나 이후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숨짐(서기 304)

30. 고구려 미천왕, 서안평 습격하여 빼앗음(서기 311)

31. 고구러 미천왕, 낙랑군 습격하여 백성 2천여 명 약탈(서기 313)

32. 고구려 미천왕, 대방군 공격(서기 314)

33. 요동 사람 장통의 모용외 귀부(서기 314)

33. 고구려 미천왕,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림(서기 315)

34. 모용외의 장수 장통이 고구려 침입(서기 319)

감방친구 18-06-01 15:05
두 시간 동안 담배 한 갑 태우며 이 거 정리하고 앉았네요
서북한 지역의 1~3세기 성격을 조망을 통해 이해하고자 정리해 봤습니다
감방친구 18-06-01 15:16
상기 정리본 20~21항을 보십시오
다음의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서북한이 낙랑/대방이었으면 왜, 그것도 비밀리에, 그것도 바다를 건너 낙랑/대방 태수를 파견했는가?
2) 진한을 멸하는 대규모 군사행동인데 왜 고구려/백제/신라사에는 등장하지 않는가?
3) 진한을 멸하고 낙랑/대방 이남의 한국의 소국들을 병합할 군사사태라면 그 병력은 어디서 왔는가?
4) 그러한 병력이 서북한에 있었다면 왜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 때 현도와 서북한에서 양공작전을 펼치지 않고 낙랑/대방 태수가 관구검과 함께 현도에서 출정했는가?
5) 위나라 군대는 왜 낙랑을 거쳐/낙랑에서 물러났는가? 서북한이 낙랑/대방이면 자기네 땅인데 왜 물러남?
6) 태조대왕의 37년 낙랑 정벌 이후 신라사에서는 어찌하여 낙랑과 대방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가?
7) 낙랑/대방이 서북한이면 태조대왕이 146년에 요동군 서쪽 안평현을 습격할 때에 왜 거기에 대방태수가 있고 낙랑태수의 처자식이 있는가? 대방태수는 거기까지 출장간 것인가? 낙랑태수는 기러기 아빠고, 낙랑태수의 처는 요동군 서쪽 안평현으로 유학간 자식내미 밥해주러 따라가서는 대방태수랑 눈맞아 바람이라도 났는가?
감방친구 18-06-01 15:18
참고로 소위 기리영 전투는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만 기술돼 있음
감방친구 18-06-01 15:35
현도군은 소위 한사군 가운데에 가장 동쪽에 위치하여 군사적 기능을 담당했다고 보여진다

위만조선 멸망 후 한반도의 제국들의 경제/문화 교류 창구는 위만조선에서 낙랑군으로 대체되었고, 서북한의 낙랑국은 낙랑군을 비롯한 중국 지역과 한반도 지역의 중개자 역할을 하며 위세하였다 판단된다

그러나
대무신왕 37 년 낙랑 정벌 후 무역창구가 사라지면서 후한서 44 년 기록의 한국인 소마시로 대표되는 한반도 지역의 대중국 창구 재건의 요구가 낙랑군 조공과 입조 행위로 나타났다고 보인다

즉 한나라가 바다를 건너 군사행동으로써 살수이남을 차지했다는 고구려본기의 기사는 당사자의 역사서신 후한서와 교차  결과 전체적으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며 일부 소집단이 낙랑군에 자처하여 예속됐다고 판단될 뿐이다

44년에 대한 삼국사기 기술은 삼국사기 사서기자의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근거한 역사이해에서 비롯한 과장이라고 본인은 판단하며

삼국사기 편찬 당시인 고려중기는 이미 왕건으로부터 현 평양을 고구려 평양=낙랑군 치소=왕검성이라는 프로파간다가 안착돼 보편인식이 된 상황이므로

살수이남이라는 기술 역시
'고구려 평양=낙랑군 치소=왕검성'이라는 인식하에서
기술된 오류라고 판단할 수 있다
감방친구 18-06-02 05:45
3세기 한반도 상황은 삼국사와 삼국지 위서의 기록이 서로 배치하는데
한국 통설에서는 삼국사가 아닌 삼국지 위서 기록을 채택하면서
소위 삼국사 초기 불신론을 보편론으로 삼고 있다
이 삼국사 초기 불신론은
ㅡ 북한은 4세기까지 중국 땅
ㅡ 남한은 5세기까지 일본 땅
이라는
일제 식민사관과 궤를 같이 한다

삼국사 기록에는 이미 서력 기원을 전후하여
한반도에 백제, 신라, 가야가 자리를 잡고 있음에도
삼국지 위서는 마치 한반도 발전단계를 원시적 수준의 소집단 난립으로 기술하고 있다
6시내고… 18-06-02 23:30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지수신 18-06-10 14:21
이른바 기리영전투는 위나라 관리와 한(진왕백제)의 臣智들이 협상을 하는 와중에 통역 오류로 인해 일어난 해프닝을 적어놓은 것이죠. ㅎㅎ
당대의 사건이고 '통역 오류'때문에 무력충돌까지 벌어진 상황이니, 삼국지 편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우선적으로 기록해야 할 큰 사건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보는 관점이 그와 같을 수는 없겠죠.

기록이 원체 희소한 시대이다보니 작은 기록에도 턱없이 큰 의미가 부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리영전투가 대표적이죠.
강단 주류에선 그거 가지고 별에 별 기상천외한 해석들이 만발합니다 ㅎㅎㅎㅎ
지수신 18-06-10 14:34
기리영전투 기사에서
'대방태수 궁준이 전사했으나 결국 한을 멸하였다'는 문장은
표현이 너무나 간략하기 때문에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는, 일종의 '늪'입니다.
거기에 의미부여하기 시작하면 안드로메다로 간다는 것이죠.
강단주류 아재들처럼.

한을 멸했다는 것이
4천여리에 걸쳐 78국을 거느린, 당시 동이의 최강대국 한연맹을 멸했다는 건지
그 78국중 1국을 멸했다는 건지
통역오류로 잘못 전해진 말에 빡쳐서 쳐들어와 궁준을 죽여버린 한의 병력을 섬멸했다는건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때 정말 위나라가 한연맹을 멸했다면 그건 사실상 동이족을 정복한 것과 다름없는 엄청난 대사건이고
당연히 쌍방간에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고 관구검-동천왕 전쟁 이상의 대전투가 벌어졌을 것인데
꼴랑 '결국 한을 멸하였다'라고 쓰고 끝날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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