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1125년 봉사행정록을 통한 고려 전기 서북계 교차 검증
감방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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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고려 전기 서북계를 고찰하며
후에 들어선 금나라와 고려의 국경도 그 전과 크게 변화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하였고, 또 그렇게 주장했다
고려가 요동과 만주 영토를 상실한 것은 몽골의 침입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이 내 견해이다
그런데
현 잉커우ㅡ태자하ㅡ혼하 상류ㅡ무순ㅡ개원ㅡ사평ㅡ장춘 라인으로 고증한 본인의 고려 전기 서북계가
다음의 기록으로 또 다시 교차 검증이 됨을 밝힌다
송 휘종 선화 7년, 1125 년 금나라 태종의 보위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금나라를 방문한 송 사신단의 일원인 허항종(許亢宗)이 기록한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이 그것으로 이 기록을 통해 전기 고려의 서북계 한계선의 이해에 다가가 보자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
第二十九程:自咸州四十里至肅州,又五十里至同州。
離咸州即北行,州地平壤,居民所在成聚落。新稼殆遍,地宜種黍。東望天山,金人雲彩,此新羅山,山內深遠,無路可行。其間出人參、白附子,深處與高麗接界。山下至所行路可三十里。
平壤은 ‘州地平壤,居民所在成聚落’의 문맥 상 땅이 넓고 평평하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옳다고 판단된다.
新羅山은 신라의 북계가 이곳까지 이르러서가 아니라 거란과 여진이 고려를 여전히 신라라 칭했던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옳다
‘深處與高麗接界’
함주 북쪽에 넓고 평평한 땅이 있고 그곳에 취락이 형성돼 있는데 그곳 동쪽에 큰 산이 있으니 그 산을 신라산이라고 하며 그 산 깊은 곳이 고려와 금의 접경이라는 기록이다
함주는 현 철령시 동북쪽 개원시이며 개원시 (동)북쪽은 사평시로 요나라 신주가 이 근방에 있었다
이 기록은 신주가 고려와 인접한다 한(聖宗以地鄰高麗,開泰初置州,以所俘漢民實之) 요사 지리지 동경도 기록과 일치한다
1125년 봉사행정록의 가치는 사신이 그 지역을 방문하여 직접 본 것을 그 당대에 기록한 것이라는 데에 있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咸州,安東軍,下,節度。本高麗銅山縣地,渤海置銅山郡。地在漢候城縣北,渤海龍泉府南。地多山險,寇盜以為淵藪,乃招平、營等州客戶數百,建城居之。初號郝裏太保城,開泰八年置州。兵事屬北女直兵馬司。統縣一:咸平縣。唐安東都護,天寶中治營、平二州間,即此。太祖滅渤海,復置安東軍。開泰中置縣。
信州,彰聖軍,下,節度。本越喜故城。渤海置懷遠府,今廢。聖宗以地鄰高麗,開泰初置州,以所俘漢民實之。兵事屬黃龍府都部署司。統州三,未詳;縣二:武昌縣。本渤海懷福縣地,析平川提轄司及豹山縣一千戶隸之。定武縣。本渤海豹山縣地,析平川提轄司並乳水縣人戶置。初名定功縣。
<금사 지리지 함평로>
咸平路,府一,領刺郡一,縣十。
咸平府,下,總管府,安東軍節度使,本高麗銅山縣地,遼為咸州,國初為咸州路,置都統司。天德二年八月,升為咸平府,後為總管府。置遼東路轉運司、東京咸平路提刑司。戶五萬六千四百四。縣八
후에 들어선 금나라와 고려의 국경도 그 전과 크게 변화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하였고, 또 그렇게 주장했다
고려가 요동과 만주 영토를 상실한 것은 몽골의 침입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이 내 견해이다
그런데
현 잉커우ㅡ태자하ㅡ혼하 상류ㅡ무순ㅡ개원ㅡ사평ㅡ장춘 라인으로 고증한 본인의 고려 전기 서북계가
다음의 기록으로 또 다시 교차 검증이 됨을 밝힌다
송 휘종 선화 7년, 1125 년 금나라 태종의 보위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금나라를 방문한 송 사신단의 일원인 허항종(許亢宗)이 기록한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이 그것으로 이 기록을 통해 전기 고려의 서북계 한계선의 이해에 다가가 보자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
第二十九程:自咸州四十里至肅州,又五十里至同州。
離咸州即北行,州地平壤,居民所在成聚落。新稼殆遍,地宜種黍。東望天山,金人雲彩,此新羅山,山內深遠,無路可行。其間出人參、白附子,深處與高麗接界。山下至所行路可三十里。
平壤은 ‘州地平壤,居民所在成聚落’의 문맥 상 땅이 넓고 평평하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옳다고 판단된다.
新羅山은 신라의 북계가 이곳까지 이르러서가 아니라 거란과 여진이 고려를 여전히 신라라 칭했던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옳다
‘深處與高麗接界’
함주 북쪽에 넓고 평평한 땅이 있고 그곳에 취락이 형성돼 있는데 그곳 동쪽에 큰 산이 있으니 그 산을 신라산이라고 하며 그 산 깊은 곳이 고려와 금의 접경이라는 기록이다
함주는 현 철령시 동북쪽 개원시이며 개원시 (동)북쪽은 사평시로 요나라 신주가 이 근방에 있었다
이 기록은 신주가 고려와 인접한다 한(聖宗以地鄰高麗,開泰初置州,以所俘漢民實之) 요사 지리지 동경도 기록과 일치한다
1125년 봉사행정록의 가치는 사신이 그 지역을 방문하여 직접 본 것을 그 당대에 기록한 것이라는 데에 있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咸州,安東軍,下,節度。本高麗銅山縣地,渤海置銅山郡。地在漢候城縣北,渤海龍泉府南。地多山險,寇盜以為淵藪,乃招平、營等州客戶數百,建城居之。初號郝裏太保城,開泰八年置州。兵事屬北女直兵馬司。統縣一:咸平縣。唐安東都護,天寶中治營、平二州間,即此。太祖滅渤海,復置安東軍。開泰中置縣。
信州,彰聖軍,下,節度。本越喜故城。渤海置懷遠府,今廢。聖宗以地鄰高麗,開泰初置州,以所俘漢民實之。兵事屬黃龍府都部署司。統州三,未詳;縣二:武昌縣。本渤海懷福縣地,析平川提轄司及豹山縣一千戶隸之。定武縣。本渤海豹山縣地,析平川提轄司並乳水縣人戶置。初名定功縣。
<금사 지리지 함평로>
咸平路,府一,領刺郡一,縣十。
咸平府,下,總管府,安東軍節度使,本高麗銅山縣地,遼為咸州,國初為咸州路,置都統司。天德二年八月,升為咸平府,後為總管府。置遼東路轉運司、東京咸平路提刑司。戶五萬六千四百四。縣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