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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6일 (금)

[한국사] 1125년 봉사행정록을 통한 고려 전기 서북계 교차 검증

감방친구 조회 : 2,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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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고려 전기 서북계를 고찰하며 
후에 들어선 금나라와 고려의 국경도 그 전과 크게 변화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하였고, 또 그렇게 주장했다 

고려가 요동과 만주 영토를 상실한 것은 몽골의 침입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이 내 견해이다 

그런데 
현 잉커우ㅡ태자하ㅡ혼하 상류ㅡ무순ㅡ개원ㅡ사평ㅡ장춘 라인으로 고증한 본인의 고려 전기 서북계가 
다음의 기록으로 또 다시 교차 검증이 됨을 밝힌다 

송 휘종 선화 7년, 1125 년 금나라 태종의 보위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금나라를 방문한 송 사신단의 일원인 허항종(許亢宗)이 기록한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이 그것으로 이 기록을 통해 전기 고려의 서북계 한계선의 이해에 다가가 보자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 

第二十九程:自咸州四十里至肅州,又五十里至同州。 
離咸州即北行,州地平壤,居民所在成聚落。新稼殆遍,地宜種黍。東望天山,金人雲彩,此新羅山,山內深遠,無路可行。其間出人參、白附子,深處與高麗接界。山下至所行路可三十里。 

平壤은 ‘州地平壤,居民所在成聚落’의 문맥 상 땅이 넓고 평평하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옳다고 판단된다. 

新羅山은 신라의 북계가 이곳까지 이르러서가 아니라 거란과 여진이 고려를 여전히 신라라 칭했던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옳다 

‘深處與高麗接界’ 
함주 북쪽에 넓고 평평한 땅이 있고 그곳에 취락이 형성돼 있는데 그곳 동쪽에 큰 산이 있으니 그 산을 신라산이라고 하며 그 산 깊은 곳이 고려와 금의 접경이라는 기록이다 

함주는 현 철령시 동북쪽 개원시이며 개원시 (동)북쪽은 사평시로 요나라 신주가 이 근방에 있었다 

이 기록은 신주가 고려와 인접한다 한(聖宗以地鄰高麗,開泰初置州,以所俘漢民實之) 요사 지리지 동경도 기록과 일치한다 

1125년 봉사행정록의 가치는 사신이 그 지역을 방문하여 직접 본 것을 그 당대에 기록한 것이라는 데에 있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咸州,安東軍,下,節度。本高麗銅山縣地,渤海置銅山郡。地在漢候城縣北,渤海龍泉府南。地多山險,寇盜以為淵藪,乃招平、營等州客戶數百,建城居之。初號郝裏太保城,開泰八年置州。兵事屬北女直兵馬司。統縣一:咸平縣。唐安東都護,天寶中治營、平二州間,即此。太祖滅渤海,復置安東軍。開泰中置縣。 

信州,彰聖軍,下,節度。本越喜故城。渤海置懷遠府,今廢。聖宗以地鄰高麗,開泰初置州,以所俘漢民實之。兵事屬黃龍府都部署司。統州三,未詳;縣二:武昌縣。本渤海懷福縣地,析平川提轄司及豹山縣一千戶隸之。定武縣。本渤海豹山縣地,析平川提轄司並乳水縣人戶置。初名定功縣。 

<금사 지리지 함평로> 

咸平路,府一,領刺郡一,縣十。 
咸平府,下,總管府,安東軍節度使,本高麗銅山縣地,遼為咸州,國初為咸州路,置都統司。天德二年八月,升為咸平府,後為總管府。置遼東路轉運司、東京咸平路提刑司。戶五萬六千四百四。縣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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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8-05-30 03:51
독산 18-05-30 10:00
함주가 개원에 있게되는 것은 해릉왕 집권 때부터입니다.
원래의 함주는 장춘로에 있던 곳으로 길림합달령 서쪽에 있었습니다.
장춘로는 원래 '춘로'(요사)로 동로東路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발해시기의 장령로의 일부분입니다.
황룡부가 농안으로 옮겨가며 자연히 춘로가 장춘로로 변한 것입니다.

신라산은 '시라'산으로 '白''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압록수가 말갈 白山에서 출원한다는..운운의 백산이 바로 신라산입니다.
그리고 금나라 상경 서쪽에 있었기에 서산(白山)이라 한 것입니다.
지금의 시라무렌(河)은 의미상으로는 백랑수입니다.
지명이 옮겨간 것이지요.
감방친구 18-05-30 10:41
옮겨간 것은 사서 읽으면서 지나치는 깜냥으로 얼핏 알고 있었습니다만
저는 함주가 아니라 개원이 금나라와 원나라를 거치며 목단강께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군요?

시라기ㅡ시라ㅡ금ㅡ백
머리가 세다
서벌ㅡ금성
설을 쇠다, 새벽, 높새바람

님 말씀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백산이 신라산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리고
그 위치가 사평이 아니라 장춘 쪽이고!

그렇다면 고려 서북계의 동북 종단점을 장춘으로 추정하고 있는 제 입장으로서는 큰 보탬이 됩니다
감방친구 18-05-30 10:43
님은 지금의 개원을 요동성/양평성으로 보시는 거고요!
감방친구 18-05-30 10:46
님보다는 적은 사서 고찰로 추정한 발해 장령부 위치가 덕분에 얻어 걸린 식으로 얼추 맞춘 게 됐네요 ㅎㅎ



그러면 독산님은 발해 상경을 어디로 보세요?
님도 저처럼 하얼빈, 금 상경 쪽으로 보십니까?
도배시러 18-05-30 13:58
이리되면 요수는 고구려 하천이 될수있을가요 ?

마자수의 말갈 백산 靺鞨之白山은 말갈국 백산이 가능하지만,
서남산 大遼出靺鞨西南山 은 말갈국이 아닌 말갈부락 서남산입니다.

수경주 대요수-백랑수 내용에 단독으로 "서남산"이라 불리는 지명이 있습니다.
말갈 부락이 망명한 위치로 보입니다.
白狼水又東, 方城川水注之. 水發源西南山下, 東流, 北屈逕一故城西, 世謂之雀目城. 東屈逕方城北, 東入白狼水.
독산 18-05-30 13:27
사평시가 아니라 요원시 동쪽에 백산이 있습니다.
함주는 원래 도적들의 산채를 정벌하고 세운 곳으로  최초 황룡부(장춘)와 흥주(무순시)의 사이에 있었고, 그것이 春로입니다.
황룡부가 농안으로 옮겨가면서 장춘까지 연결되어 있던 춘로를 농안까지 '장+춘로'(긴 춘로)라고 한 것입니다.
함주가 개원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은 해릉왕이 연경(북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부터 입니다.
당시 산동과 하북과 요동에 많은 창고를 지어 한쪽에 기근이 들면, 다른쪽의 식량으로 충당하며 해상교통이 발달하고 아울러 요동반도 쪽도 실질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상경의 위치는 현 아성시(區) 남쪽 유지(속칭, 白城)로 보는 설에 따르지만, 좀 더 동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양평 동북- 개모- 신성- 발해장령부(신당서 지리지)에서 양평의 위치를 찾는데 있어 서차구西岔溝 유적의 발굴조사가 상당한 참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 동북방어로서 구려(고구려)는 구로(黑), 唐音으로는 구리입니다.  거란은 키타(北)로 읽어야 될 것입니다.
흔히 거란의 선조는 동호라고 하지만 前身은 산융이고 사서에 소수맥으로 표기되는 족속입니다(지금의 유하, 옛 소요수).
산융이 '융'이란 말에서 볼 때, 서쪽에서 온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란의 장례에서 발견되는 복면습속은 하북에 남아있는 산융유지(옥황묘)에서 발견되는 시신의 얼굴을 덮는 복면습속과 꼭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동호는 칠노도산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누번(후의 오환)과 임호(후의 선비)로 원래는 貉(락)이었습니다.
바로 洛(섬서성 북부)에서 동쪽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춘추(晋나라 북쪽)-전국(趙, 燕의 북쪽)의 시기를 경과하다가 북쪽으로 쫓겨납니다.
원래 고대의 洛은 지금의 낙양 남쪽을 흐르는 것이 아니라 섬서성 북부의 洛河였습니다.
貊이나 貉이나 모두 맥으로 칭하지만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북성 서부의 문화는 산융문화로 이는 이들이 춘추말기에 쫓겨나 하가점 상층문화의 가장 북부 요소(대정문화)를 이룹니다.
하북성 동부는 고죽 문화(후의 고구려)로 쫓겨난 뒤 중부인 남산근 문화를 이루고 가장 남부인 십이대영자가 고조선 문화유적입니다.
오한은 漢대에 이르러 연북장성 내에 있던 위만조선의 서북쪽에 위치하여 흉노의 재 남침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습니다.
그후 점차 요서지역으로 들어오나 망우하를 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요서지역을 전국시기 동호의 유지로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견해입니다. 
후한 요동속국지역을 선비가 장악하기 시작한 이래로 오환은 다시 서쪽으로 쫒기거나 흡수됩니다.
흉노의 경우는 마찬가지로 칠노도산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칠노도산 동쪽에 고조선이 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어>에 선비가 岐山의 회맹 때 등장하는 것은 그들이 섬서성 북부의 洛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거론하는 것은 西岔溝 유지의 발굴의 주안을 국내외 학자들이 오환 또는 흉노의 요하 동부지역 진출의 증거로 보려는 시도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차구 유적은 한나라 소제 때의 양평성 축조를 증거하는 매우 중요한 유적입니다.
감방친구 18-05-31 01:02
일단 따져볼 일입니다
님 글이 길안내서 역할을 할 듯 하네요
잘 들었습니다
감방친구 18-05-31 01:07
동요하, 즉 압록강의 발원지는 요원 쪽이고
이 요원 쪽의 산줄기는 장춘ㅡ길림을 거쳐 동북으로 쭉 이어져서
길림합달령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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