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안동도호부의 위치 변천
※ 학계 주류설(통설)에 근거한 안동도호부의 설치와 그 폐지 시기까지의 국제 정세 정리
1) 668년
평양에 안동도호부 설치
당장 설인귀
규모 9도독부(都督部)·42주(州)·100현(縣)
통치 도독ㆍ자사ㆍ현령 등을 고구려인들에게 위임
계획에 그치고 운영하지 못 함
2) 670년
검모잠을 위시한 고구려 유민과 신라가 연합한 대당 투쟁으로 인하여 신성으로 교치
3) 676년
나당 전쟁에서 패한 당은 도호부를 요동성으로 교치
4) 677년
보장왕에게 요동도독(遼東都督)의 직책을 주고 조선군왕(朝鮮郡王)에 봉하여 요동으로 보내 자치를 허락하게 됨에 따라 도호부가 다시 신성으로 교치됨
5) 696년 5월에 거란족 수장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었고, 이들은 유주(幽州, 지금의 베이징)까지 공격하여 당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이듬해에 겨우 평정되었다. 영주에 함께 거주하던 대조영 집단도 이들에 동조
6) 697년
영주(營州)가 거란인들의 공격으로 함락되자 당의 안동도호부 유지가 어렵게 되었고 더욱이
거란ㆍ해ㆍ고구려 유민이 연합한 반란이 실패하자 고구려유민(말갈)은 영주를 탈출하여 만주가 아니라 고구려 중심지였던 요동으로 몰려듦
거란의 반란은 700 년 경까지 계속돼 당나라는 동북지방에 대한 통제 및 지배력 상실
7) 698년
대조영은 당의 토벌군을 천문령에서 격파
발해(대진) 건국
8) 699년
안동도호부를 안동도독부로 강등
고덕무를 안동도독에 임명
9) 704∼705년경
다시 도호부로 재승격
부치를 714년에 평주(平州)로, 다시 743년에는 요동군으로 옮김
그 임무는 설치 당시의 고구려유민에 대한 감시로부터 말갈족 견제로 변경
차차 도호부 자체의 실권을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에게 빼앗기게 되었음
10) 712년
당나라는 거란과 해(奚)를 공격하였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침공을 받음
11) 713년
당은 거란 문제를 해결하고자 705 년 이후로 발해와 관계 개선 노력
당나라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 및 홀한주 도독으로, 아들 대무예를 계루군왕에 책봉
12) 716년
거란은 돌궐에 복속되어 당과 계속 국지전을 벌여옴
묵철가한 말기에 돌궐이 쇠약해지자
거란, 당에 항복
당은 영주를 이 때에 비로소 회복
이후 돌궐이 세력을 회복하자 다시 돌궐에 복속
13) 720년 9월
당, 발해에 거란 합동 토벌 제의하나 발해가 거절
14) 722년
흑수말갈, 발해에 위협을 느끼고 처음으로 당과 교섭
15) 726년
당나라 흑수주도독부를 설치하고 감독관을 파견(흑수말갈 포섭)
발해 무왕, 흑수말갈 토벌
16) 727년
일본과 국교수립
당ㆍ신라ㆍ흑수말갈 연합에 맞서서
발해ㆍ거란ㆍ돌궐ㆍ일본과 연합
17) 728년
당과 흑수말갈 다시 결탁
당에 숙위로 간 발해 태자 대도리행 의문사
18) 732년 9월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등주(登州)를 공격(수군 2만 5천)
승리
19) 733년
발해 거란, 돌궐과 연합하여 하북 지방을 공격
패배
20) 758년경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계기로 최종 폐지
21) 762년
당나라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승격하여 책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