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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8일 (일)

[한국사] 비사성이 현 대련시라는 근거를 알려주세요

감방친구 조회 : 2,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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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서에 적혀 있습니까
요사 지리지, 금사 지리지, 독사방여기요 등의 사서가 공히 아주 콕 찍어서 현 영구시와 안산시 사이의 해성시(해주/징주/해주위)라고 말하고 있는데
대체 어느 사서가 현 대련시를 비사성이라고 합니까

물론 저는 비사성의 위치가 거란 동경도 요주(빛날 요)에 해당하여 판진시에 있다가 요주가 해주의 속주가 되면서 비사성의 연혁이 해주로 옮겨간 것이라 보는 입장입니다

비사성을 안시성과 건안성이 구원하고,
박작성을 안시성과 오골성이 구원했습니다

비사성이 안시성 이틀 거리라고 했습니다
이틀거리면 고대 행군 속도로 60~80리, 길어야 100리 안팎의 거리입니다

부르러 가는 시간까지 고려한 거라면 하루 거리라는 얘기

독산 18-05-06 00:02
감방친구님의 < 현 요하 물줄기를 착각했네요>에 대한 댓글에서 건안성과 안시성의 위치를 설명했는데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수로군이 비사성에서 건안성으로 간 것은 당 태종이 안시성에 도착한 뒤 약 1개월이 지난 7월입니다.

감방친구님이 윗글에서 말하는 2일이란 거리를 혹 '信宿'을 말하는 것이라면 '신숙'은 '2박3일'(連宿兩夜)의 의미도 있고, '3日之間'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쨌든 비사성에 있던 장량은 이미 7월 중에 건안성에 와 있습니다.
본문의 '沙城'은 '비사성'일 가능성이 높지만, 8월의 기사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한 내용의 서술도 당시의 상황과 맞지 않은 점이 많습니다.

당시 당 태종은 고립무원의 상태로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서 고구려의 수도인 장안성을 공격할 처지가 아닙니다.
무려 3개월이라는 기간을 안시성 부근지역에서 高山 지대를 옮겨다니며 물 빠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한반도 압록강 이북의 박작성(파사부, 박색부, 파속부 등 모두 같은 이름)을 공격한 신당서<열전 제19 설만철전>의 내용을 싣습니다. 이 기사에 오골성에서도 구원병이 파견됩니다.
모두 한반도 압록강 이북에 있는 성입니다.
8월의 기사가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빼고, 압록수를 건너 평양을 곧바로 취함...'운운하고 있는 것은 착오이거나 잘못된 기사입니다.
박작성만큼 확실한 위치도 없습니다.
<신당서지리지7하>의 박장성 기사와 비교해 보십시요.
(정관)二十二年,萬徹又為青丘道行軍大總管,率甲士三萬自萊州泛海伐高麗,入鴨綠水百餘里,至泊灼城,高麗震懼,多棄城而遁。泊灼城主所夫孫率步騎萬餘人拒戰,萬徹遣右衛將軍裴行方領步卒為支軍繼進,萬徹及諸軍乘之,賊大潰。追奔百餘里,於陣斬所夫孫,進兵圍泊灼城。其城因山設險,阻鴨綠水以為固,攻之未拔。高麗遣將高文率烏骨、安地諸城兵三萬餘人來援,分置兩陣。萬徹分軍以當之,鋒刃才接而賊大潰.
감방친구 18-05-06 00:47
그러니까 님 말씀은 님이 알고 있는 정보에 한하여 비사성을 대련시 쪽이라 적은 것은 없다는 거고 기록이 아니라 님의 추론이네요?

박작성의 위치도 마찬가지고요

님은 압록강을 현 요하로 보면서 박작성은 현 압록강 쪽으로  보고 있고요
감방친구 18-05-06 00:55
예, 그 글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독산님의 견해에서 중요한 몆  가지가 쟁점입니다
ㅡ 안동도호부의 위치
ㅡ 건안성의 위치
ㅡ 안시성의 위치
비사성의 위치
ㅡ 박작성의 위치
ㅡ 요택의 위치
감방친구 18-05-06 01:02
또 독산님은 가탐 도리기 2도 항로를 묘도군도를 따라 요동반도 남단에 도달 시계방향으로 한반도 서안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보고 있고요

즉 독산님은
ㅡ 마석산 동쪽의 도리진을 마석진으로 보고 그 마석진이 려순/대련에 있었고
ㅡ 도화보, 청니포 역시 요동반도 동안에 있었다고 주장하시는 건데

도리진은 현 산동반도 북안의 대청하와 소청하 사이의 옛 황현 경계에 있었고
도화포 청니포는 난하와 대릉하 사이에 있었습니다

우선 이는 제 가탐 도리기 2도 항로 고찰을 한번 보세요
도배시러 18-05-06 01:16
장황(章潢)의 《도서편(圖書編)》1577년

沙門島 爲解宋寨界 單山 爲黃縣界 桑島 爲馬停寨界 龜島 爲昌邑縣界 歆末島 爲壽光界 都里鎭 爲蒲臺界
靑島 爲利津界 黃島 爲賓州界 直沽口 爲寶低縣界 塔山 爲盧龍衛寨界 ...

都里鎭 爲蒲臺界 : 도리진都里鎭 위치는 포대현蒲臺 경계에 있다고 하는데,
靑島 爲利津界 명나라 당시에 이진현利津 우측에 포대현이 있었네요.
해안 지역의 섬지역 명칭은 긴세월 명칭이 자주 안바뀐듯 합니다.
감방친구 18-05-06 01:20
그러네요 제가 착각했습니다
沙門島為解宋寨界單山為黄縣界桑島為馬停寨界龜島為昌邑縣界歆未島為夀光界都里鎮為蒲臺界青島為利津界黄島為賔州界直沽口為寳坻縣界㙮山為盧龍衞界

都里鎮為蒲臺界

황현이 아니라 포대

현 대청하와 소청하 사이

제가 고증하고도 제가 잘못 기억했네요 ㅎㅎ
도배시러 18-05-06 01:27
萊州泛海伐高麗,入鴨綠水百餘里,至泊灼城,... ,賊大潰。追奔百餘里,於陣斬所夫孫,進兵圍泊灼城。
압록수로 백여리 들어가니 박작성에 이르렀다.
맞서 싸운 박작성주 소부손(泊灼城主所夫孫)을 백여리 추격하여 참살하고 더나아가 박작성을 포위
=> 압록수 입구 ~ 百餘里 + 百餘里 추격 ~ 박작성
압록수 입구 ~ 박작성까지 2백여리가 되는 것인가요 ?
감방친구 18-05-06 01:34
박작성까지 100여 리라는 말로 보입니다
이는 가탐 도리기의 130리 박작구와 얼추 일치합니다
도배시러 18-05-06 01:47
단둥시에서 20KM 50리 떨어진 호산을 박작성으로 추론하는게 통설인듯한데...
위성지도로 보면 단둥/신의주 도 그 당시에는 바다 해수면 아래에 있었으리라 보입니다.

5세기 요하나 혼하 해안선에서 추적한다면... 박작성의 위치는 요중 혹은 요양일듯 하네요
백리 40KM 기준
감방친구 18-05-06 01:54
저는 요중으로 일단 보고 있습니다
너무 고려 전기 서북계에 집중하다 보니
고구려를 다뤄서 내려와 맞춰 봐야 하는데
도배시러님이 분발해주세요 ㅋㅋ
저는 당분간 먹고 사는 문제 탓에
도배시러 18-05-06 02:01
요즘 사서를 가끔 보다가 다시 집중해서 보고 있습니다. 새롭습니다 ^^
감방친구 18-05-06 02:03
제 성격 탓도 있습니다
한 번에 여러 개가 안 되고 하나에 꽂히면 그거만 핏불테리어처럼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라 ㅋㅋㅋ
감방친구 18-05-06 02:02
요중이라기보다는 그 근방이죠
독산 18-05-06 02:44
저는 분명히 압록수(강)는 3개라고 했습니다.
수당의 고구려 침공 시의 압록수는 2개가 나옵니다. 다른 하나는 광개토왕 시의 동요하를 말합니다.
하나는 한반도의 압록수, 다른 하나는 오늘날의 寇河(언젠가 청하라고 한 것음 잘못)입니다.
박작성은 한반도 압록강과 애하가 만나는 곳, 즉 안평구에서 애하 서안에 있었습니다.
도리해구(=도리진)를 저는 지금의 요하구, 마석진은 지금의 쌍태자하구로 설명드렸습니다.

가장 확실한 박작성의 위치를 가지고 시비를 논하면, 더 이상 할말이 없습니다.

안동도호부는 1)장안성(요양)-2)요동성(개원시 북쪽 노성)-3)신성(요동성 동북쪽)...무경총요의 안동도호부(수나라 회원진 동쪽의 요동군, 후에 연군성부근)
건안성은 신민시, 안시성은 북쪽의 창무현.
고구려 침공시 요택은 지금의 유하-세하의 사이
험독은 망우하와 세하의 사이.
만번한은 세하(옛 沛水) 상에 있었고,
열수(고조선과의 경계)는 지금의 대릉하, 열구는 지금의 대릉하구,
3수의 합이란 대릉하 망우하 세하의 3水를 말하는 것임.
건안성은 평곽으로 남부 발해연해지구의 자염(煮鹽, 해수를 달여 소금을 만듬)의 집산지로 염관이 설치되어 있었음.
모용황이 모용인을 토벌할 때, 대릉하구를 빠져나와 쌍태자하구로 북상한 것임.
모용외의 상을 치루러 가던 사신이 해로로 북상하여 오호해를 건너 도리진을 거쳐 서쪽의 대릉하구로 향하던 중 마석산(津인가? 쌍태자하구)에 나와 있던 모용인의 병사에게 사로잡힌다 등등이 관련된 역사적 사실일 것입니다.
물론 비사성은 단지 추정일뿐이지만 비사성의 위치는 단지 해로로 장안성으로 향하는 적선을 방어할뿐 아니라 한반도로 진입하여 북상하는 수로군을 방어하기 위해서도 요처의 곳입니다. 

그리고 옛 한나라 요동군의 속현 중에 요하 이동에 위치한 약 6-7개현은 모두 요대현(철령시 통강구 부근) 이북에 있었습니다.
요동반도 쪽은 금나라 해릉왕 이후(세종)에나 식량 수운輸運의 필요성에 의해 각광을 받았을 뿐 그 이전에는 주로 獵地였습니다.
고대에도 금주시錦州시 등 발해 연안의 지역과 요동반도로 이어지는 띠모양의 집합이 대방군이란 이름의 연원일 것으로 공손씨가 대방군을 설치하기 이전에는 황지화荒地化되었던 곳입니다.
'都里'는 우리나라의 명량(울돌), 노량(노들)의 '梁'일 것으로 추정되는 음차자音借字로 고유명사는 아닐 것입니다.
산동반도 인근지역에 도리진이 소재하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신당서지리지>가 양평성에서 서남쪽으로 600리라는 거리를 감안한다면, 비정의 대상이 될 수없는 것은 당연하지요.
중국학계에서는 요동반도 남단을 한 요동군 답현, 고구려 비사성, 도리해구, 요나라 鎭東해구 등 온갖 지명이 모두 이곳에 있었던 양  비정하지만, 고구려 비사성만이 타당성이 있을뿐 나머지는 모두 잘못된 비정입니다.
감방친구 18-05-06 03:03
저도 압록강을 여러 곳으로 보고 있고요
일단은 정리하자면
가탐 2도 항로 상의 마석산 동쪽 도리진은 현 황하 근처 소청하와 대청하 사이의 포대현 경계의 도리진이고
가탐 1도의 도리해구와는 다른 곳이며
태평환우기ㅡ자치통감주ㅡ독사방여기요의 마석진은 가탐 항로 상의 도리진을 요동반도 서안, 즉 명나라 개주위 남쪽 60리 위자투(요동의 대청하 근방)로 잘못 비정하면서 생긴 것으로 명백히 오류

저 역시 가탐 1도의 도리해구의 도리를 우리말 돌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견해를 보유하고 있으며 현 판진해구 쪽으로 보고 있습니다
감방친구 18-05-06 03:06
그러니까 독산님은
가탐 2도의 압록강을 현 압록강으로, 박작구를 현 학계 비정 애하 쪽으로 보고 계신 거네요

또 요양은 장안성이고 고구려 말기 수도는 현 평양이라 보는 것이고요
도배시러 18-05-06 03:13
여기서는 도리진의 한자를 주로 都里鎭 이라 하지만,
판본에 따라 都裏鎭 으로 표기되기도 합니다.
감방친구 18-05-06 03:13
마석진은 호삼성이 태평환우기의 가탐 항로 도리진 비정을 그대로 받아 모용씨의 사적을 연결시켜 요동반도 서안에 비정하면서 생긴 것으로 또 고조우가 독사방여기요에서 이를 받아서 개주위 남쪽 60리 위자투를 마석진으로 비정하면서 생긴 것으로

가탐 2도 항로 상의 '마석산 동쪽 도리진'이 '마석진'으로 둔갑, 잘못 비정되면서 생긴 명백한 오류입니다

당연히 도리해구와 도리진은 다른 곳
감방친구 18-05-06 03:14
정확한 위치를 알려달라고 여쭈는 게 아닙니다
딱 떨어지는 게 있으면 모두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도움을 청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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