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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6일 (금)

[한국사] 현 요하 물줄기를 착각했네요

감방친구 조회 :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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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사람은 계속하여 배우는 존재인가 봅니다

독산님이 발췌인용으로 설명해주신 게 맞네요
제가 그러함에도 잉커우를 본 요하로 생각한 것은
ㅡ 중국역사지도집의 물길
ㅡ 이후에 남의현 교수 강의를 찾아봤는데 이 분도 중국역사지도집 물길이랑 똑같이 본 요하를 잉커우로 빠지게 그려놨기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다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서 기록도 그렇고 고지도들도 그렇고 현 판진 쪽으로 빠지게 묘사했거든요

제가 잉커우를 고집했던 건 잉커우여야지 가탐 도리기 등주해행입고려발해도 코스가 설명이 되겠기에 그랬습니다

저 스스로도 목적에 맞춰 사실을 선택하는 그릇된 행동을 했구나 싶어 반성하게 됩니다

남의현 교수는 가탐 도리기 항로 상의 압록강을 현 요하로 제시하면서도 그 입구를 잉커우로 잡고 있어요

그리고 요택에 대한 설명을 사서 내용과 다르게 하더군요

남의현 교수 강의 영상에서
ㅡ 요택이 현 요하 하류에서 1천리를 뻗었고
ㅡ 폭이 200리

그러니까 당 태종 요택 도하 거리를 요택의 폭으로 설명해버리더군요 그게 아닌데

그리고 당 태종과 거란의 요택을 현 요하 하류로
당 태종이 건넌 요수를 현 요하에, 압록강을 혼하ㅡ태자하 합수 물길로 설명을 해요
이게 뭐여

이건 뭐 현 압록강을 오골강이라 한 식으로 실망을 주네요

지수신 18-05-01 11:43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의 작업은 시론적 연구이기 때문에
모순과 문제점이 많을 수밖에 없을겁니다.

저도 남의현교수 강의 영상을 봤는데
같은 영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예 서두에 틀린 점이 많을 수 있다고 하면서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감방친구님의 연구가 더욱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방친구 18-05-01 12:19
아마 같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분은 명나라와 조선 관계사, 그리고 명 요동사에 권위있는 연구를 진행해 온 분이시더군요

그리고 제 탐문은 최소한 중등교육 과정까지 준수하게 마친 사람이면 누구라도 사서를 찾아 고찰했을 때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독산 18-05-02 01:31
옛 주류主流는 영구를 통해 빠져나가는 것이 맞고요, 반금시로 빠져나가는 것은 원래 양식목하 등 요하 서쪽에 위치한 하수인데 어느 시기엔가 수량이 많은 혼하 태자하의 물길이 덮쳐 요하의 물줄기가 2로 나뉘어졌을 것입니다.
그것을 1958년에 육간방 부근에서 둑을 막아 혼항와 태자하의 물길을 분리시킨 것이 오늘의 모습으로 된 것입니다.
모용황이 모용인의 평곽(고구려 건안성, 지금의 신민 부근)을 공격할 때, 結氷을 기회로 삼아 대릉하를 나와 반금시 하구(옛 마석진)를 통하여 북상하여 기습함으로써 모용인을 참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구시의 하구 부근에 都里해구가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333년 7월), 모용황은 장사長史인  왕제王濟를 보내 동진東晉의 성제成帝에게 모용외慕容廆의 상喪을 보고하였다.

이듬해(334년) 8월, 동진 조정에서는 요동에서 보고를 위해 와 있던 王濟를 보내 『요동공외遼東公廆』를 제사지내게 하고, 또 알자謁者 서맹徐孟으로 하여금 모용황을 『鎭軍大將軍, 平州刺史, 大單于, 遼東公』을 봉배封拜케 하였는데, 마석진馬石津에서 모두 모용인慕容仁에게 억류되었다.

 잠시 仁에게 억류되었던 王濟 등은 이듬해(335년)에 억류가 풀려 돌려보내지는데(본문은 『南還』) 해도海道를 통해 극성棘城으로 가다가 왕제王濟는 바람을 만나 이르지 못하였으나 서맹徐孟 등은 棘城에 간신히 도착하여 조명朝命을 전할 수 있었다고 기록한다(《자치통감》<晉紀, 333년-335년> 참조.).
徐孟 등이 해로를 통해 棘城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대릉하구大凌河口를 통해 북상하는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감방친구 18-05-02 03:27
이것 참 어렵군요 역사공부라는 게

저는 도리해구를 판진시 쪽으로 보는데 독산님은 잉커우 쪽으로 보시는군요
그런데 그러면 박작성 위치가 애매해지는데요
도리해구가 600, 박작이 700인데 저는 박작을 합수머리 북안으로 보거든요

그리고
마석진과 마석산 동쪽 도리진은 다른 곳입니다

1) 가탐 도리기 2도의 항로와 도서편, 주해도편의 마석산 동쪽 도리진은 황현의 동쪽 경계, 그러니까 산동의 대청하와 소청하 지역이고요

2) 가탐 도리기 1도의 도리해구는 요동성 남서쪽 600 지점으로 현 판진해구로 저는 보고요 또 이 지역에 고려 보주, 내원성, 흥화진이 있었고, 또 북쪽 인접해서 요(빛날 요)주가 있었고 그래서 이 쪽을 비사성으로 저는 비정하는 것이고요

3) 마석진은 태평환우기를 시초로 자치통감주, 독사방여기요에서 가탐/황화사달기 2도 항로 상의 마석산 동쪽 도리진을 현 잉커우시 바위취안~개주 쪽 바닷가에 비정하였던 것이고요

2)의 경우는 의무려산과 그 산자락들을 수산, 마수산 등으로 불렀고(마석산으로 불렸는지는 이 글을 쓰는 지금 기억에 없네요) 도리라는 말은 동명이처로 봐야 합니다
감방친구 18-05-02 03:32
판금시가 마석진으로 불렸나요?
어느 사서에서 찾을 수 있나요?

독사는 자치통감주를 이어서
현 잉커우 개주시 치소를 평곽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교치의 전후 사실의 시시비비는 떠나서
마석진으로 비정된 것은
가탐 항로 경유지를 송나라 때에 묘도군도를 따라 요동반도 서안으로 가서 그 서안에 마석진을 비정하고 이를 모용씨의 사적과 연결시켜 설명하면서 꼬인 문제로 보이는데요?
감방친구 18-05-02 03:34
신민시를 평곽이자 건안성으로 보는 건 어느 기록에 근거하신 건가요?
감방친구 18-05-02 03:37
건안이 신민시면 안시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안시가 북, 건안이 안시 남쪽 아닙니까


안시ㅡ건안ㅡ비사
안시ㅡ오골ㅡ박작

이 구성선 상에 있어야 하는데요
감방친구 18-05-02 03:54
가탐 도리기 2도 항로상의 도리진이 요동반도에 비정되게 된 내력

(여기에는 빠져 있으나 무경총요도 가탐 도리기 항로를 묘도군도~요동반도로 보고 있다)

1) 낙사(樂史, 930년 ~ 1007년)의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登州
州境
東西四百九十五里,南北一百六十三里。

四至八到
西南至東京一千九百五十里;西南至西京二千三百七十里;西南至長安三千里;東至文登縣界大海四百九十里;南至萊州昌陽縣二百一十里;西至大海四里,當中國往新羅、渤海大路;北至大海三里;東南至海州四百六十里;西南至萊州四百里;正北微東至海北岸都裏鎮五百三十里。


ㅡ 정북에서 다소 동쪽으로 치우친 530리 거리의 바다 북안에 도리진이 있다(正北微東至海北岸都裏鎮五百三十里。)

烏湖戍,在縣北海中二百六十里,置烏湖島上。唐貞觀二十年,為伐東夷,當要路,遂置為鎮,至永徽元年,廢。

ㅡ 오호수가 등주 북쪽 바다 260리 지점 오호도에 있다. 당 태종 20 년에 고구려를 정벌하며 이 길이 필요하여 병영을 설치했다

大謝戍,在縣北海中三十里,周回百二十步,亦唐太宗征高麗時,與烏湖戍同時置。

ㅡ 대사수(대사도)가 등주 북쪽 바다 30리 지점에 있다. 둘레가 120 보이다

咸泉池,其泉咸,百姓取之為鹽。牟平故城,漢為縣,理於此,在縣東南九十里故城是也。高齊天保七年,移於今黃縣東七十三里馬嶺山南置,隋廢,唐武德三年又置,貞觀元年又廢。


2) 호삼성(胡三省, 1230년 ~ 1302년)의 자치통감 주(1285년 완성)

慕容仁自稱平州刺史、遼東公。
秋,八月,王濟還遼東,詔遣侍御史王齊祭遼東公廆,又遣謁者徐孟策拜慕容皝鎮軍大將軍、平州刺史、大單于、遼東公,持節承制封拜,一如廆故事船下馬石津
〔自建康出大江至於海,轉料角至登州大洋;東北行,過大謝島、龜歆島、淤島、烏湖島三百里,北渡烏湖海,至馬石山東之都裏鎮;馬石津,即此地也。〕皆為慕容仁所留。


ㅡ 마석진이 요동에 있는데 이 마석진은 가탐 도리기 항로 상의 도리진이다(北渡烏湖海,至馬石山東之都裏鎮;馬石津,即此地也。)

烏胡鎮將古神感〔烏胡鎮當置於海中烏胡島。自登州東北海行,過大謝島、龜歆島、淤島而後至烏湖島;又三百里北渡烏湖海。姓譜,周太王去邠適岐,稱古公,因氏焉。〕將兵浮海擊高麗,遇高麗步騎五千,戰於易山,破之。〔「易山」,新書作「曷山」。將,即亮翻。麗,力知翻。騎,奇奇翻。〕其夜,高麗萬餘人襲神感船,神感設伏,又破之而還。〔還,從宣翻,又如字。〕

ㅡ 오호진의 장수 고신감이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역산에서 싸웠는데 이 오호진은 가탐 도리기 항로 상에 있는 오호도이다. 역산은 신당서에서는 갈산(曷山)이라 적었다


3)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1461 년)

沙門島在府城西北六十里海中凡海舟渡遼者必迫此以避風宋時嘗流放罪人於此其相聮属則有鼉磯牽牛大竹小竹凡四島皆紫翠巉絶出沒濤中

ㅡ 사문도는 등주 서북쪽 바다 60 리에 있는데 요동으로 가고자 하는 배가 바람을 피하던 곳으로 송나라 때에는 범죄자들을 이곳에 유배 보냈다
ㅡ 사문도를 비롯하여 여러 섬들이 무리를 지어 있는데 타기도, 견우도, 대죽도, 소죽도 등 네 섬이 그것으로 모두 물결 위로 들쑥날쑥 솟아있다

髙麗戍在萊陽縣西南九十里司馬懿討遼東於此置戍故名土人訛為髙麗山

ㅡ 고려수는 래양현 서남쪽 90 리에 있는데 사마의(위, 179~251)가 요동을 토벌할 때에 병영을 설치하며 이름을 얻었으나 주민들이 잘못 알고 고려산이라 부른다

大謝戍在府城東北三十里
烏胡戍在府城北海中二百五十里烏胡島上
二戍皆唐太宗征髙麗時所築

ㅡ 대사수는 등주 동북쪽 30 리에 있고 오호수는 등주 북쪽 바다 250리의 오호도에 있다.


4) 고조우(顧祖禹, 1631 년 ~ 1692 년)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1678 년 완성)

산동 7

府僻在東陲,三面距海,利擅魚鹽,且北指旅順,則扼遼左之噤喉;南出成山,則控江淮之門戶,形險未可輕也。範氏曰:自古海道有事,登、萊為必出之途,而密邇遼左,尤為往來津要。三國吳嘉禾初,遣使通公孫淵,還至成山,為魏人所邀殺。宋元嘉九年,朱修之自雲中奔和龍,泛海至東萊初,修之守滑臺,城陷,為魏所執。梁普通初,高句麗遣使入貢,詔使者江法盛授高麗衣冠劍佩,魏光州兵就海中執之送洛陽。隋開皇十七年,伐高麗,別將周羅自東萊泛海趨平壤時郡境皆屬東萊也,遭風,船多飄沒,師還。大業七年,下詔討高麗,敕元弘嗣往東萊海口造船。八年,遣來護兒等分兵自海道趣平壤。九年,復遣護兒出海道伐高麗。唐貞觀十八年,伐高麗,遣張亮自萊州泛海趣平壤。二十一年,復伐高麗,命牛進達等乘樓船自萊州泛海而入。明年,復遣薛萬徹自萊州泛海擊高麗。顯慶五年,蘇定方自成山濟海伐百濟。開元二十年,勃海自海道寇登州。宋建隆初,女真自海道趨登州貢馬,後馬政亦由此通女真。元行海運,道出登、萊。明初遣馬雲、葉旺等撫定遼東,亦由登、萊渡海駐金州,繼亦由此以轉輸遼、薊。而遼東隸於山東,亦以登、萊海道也。正德中,禁遏海道,而遼東形援益孤。後嘗議由此通運,不果。

烏湖島府東北二百五十里海中。與大謝戍俱為伐東夷之要路。唐貞觀十八年,征高麗,置烏湖鎮,亦曰烏湖戍。二十二年,鎮將古神感浮海擊高麗,破之於曷山。曷山在高麗界,或作易山。《新唐志》:自登州東北海行,至大謝島、龜歆島、淤島,而後至烏湖島三百里。北渡烏湖海,至馬石山東之都裏鎮二百里。

ㅡ 오호도는 등주 동북쪽 250 리 바다에 있으며 대사수와 더불어 고구려를 정벌하던 요충로이다
ㅡ 오호진의 장수 고신감이 이곳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갈산을 공격하였는데 갈산은 고구려 경계에 있다. 갈산은 역산이라고도 한다

大謝島,在府東北三十里海中。唐貞觀中擊高麗,置大謝戍於此。又長山島,在府北三十里海中,東西長四十餘里。又有島、虎島、半洋島,皆與長山島相近。

ㅡ 대사도는 등주 동북쪽 30 리 바다에 있다
ㅡ 장산도는 드주 북쪽 30 리 바다에 있는데 동서 길이가 40여 리이다
ㅡ 또 유도, 호도, 반양도 등이 있는데 모두 장산도와 가깝다

沙門島府西北六十里海中。又西北七十里為鼉磯島。與鼉磯相對者為欽島,相距三十里。又高山島,在沙門島北百餘里。

ㅡ 사문도는 등주 서북쪽 60 리 바다에 있다
ㅡ 타기도는 등주(혹은 사문도) 서북쪽 70 리에 있다
ㅡ 타기도와 마주 보는 섬은 흠도로 타기도와 30 리 거리이다
ㅡ 고산도가 있는데 사문도 북쪽 100여 리에 있다

산동 8

蓋州衛司西南二百四十里。

海(蓋州)衛西十里。又西十里為歸洲。又西南百十里曰葦子套,波濤險惡,不利行舟。《志》云:(蓋州)衛南海口有馬石津,晉咸和九年,遣使者由海道致命於慕容,船下馬石津,皆為慕容仁所留,時在棘城,路由平郭始達也。《新唐書》:自登州大洋東北行,過大謝、龜歆等島,北渡烏湖海,至馬石山東之都裏鎮。所謂馬石津,當即此處也。

ㅡ 개주위 서남쪽 110 리에 위자투가 있는데 물결이 거칠어 배가 다니기에 험하다
ㅡ 명일통지에서 이르길 개주위 남쪽 해구에 마석진이 있다 했으니(실제 본인이 명일통지에서 찾아봤으나 찾지 못 함) 이곳이 그곳으로, 가탐 도리기 항로 상의 도리진이 마땅히 이곳이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8083&sca=&sfl=mb_id%2C1&stx=cellmate&page=7
독산 18-05-02 15:47
옛 양평에 대한 위치 확인이 먼저입니다.
개원시 북쪽 노성 부근이 옛 양평이고요, 박작성은 압록강과 애하가 만나는 곳(옛 안평구) 부근에 있었습니다.
후에 파사부, 박색부, 파속부 등으로 바뀌지만 모두 같은 의미(山陰)의 이름일 것입니다.
그곳에서 북쪽 700리에 양평이 있었고, 도리해구는 양평에서 서남쪽 600리에 있었습니다.
양평에서 서쪽 300리에 건안(옛 평곽)이 있는데 대략 신민 부근이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북쪽에 안시성이 있었고 안시성과 건안성 사이로 옛 양평로가 있었을 것입니다.
안시성의 바로 서쪽에 소요하(지금의 유하)가 있었고 유하 서쪽, 세하 동쪽 사이에는 요택이 있었습니다.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약 3개월을 지체하는데, 역사 기록은 이 3개월 동안의 행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바로 요택이 귀환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당 태종은 백암성 전투를 끝내고 요동을 떠납니다.
이미 철수가 시작된 것이지요.
그러나 사서는 3개월 후인 9월에 가서야 회군을 정식으로 기록합니다.
안시성이 강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당태종은 안시성에 도착하면서 이미 요하 서쪽에 있었고, 이를 추격하는 고구려군 40만이 소요수와 대요수 사이에 있으며 우기를 만난 것입니다.(계속)
독산 18-05-02 16:29
때문에 당태종은 안시성 북쪽 산으로 옮김니다.
안시성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은 물이 어느 정도 빠진 뒤였을 것입니다.
당시 요하의 서쪽으로 넘어 올 때는 지금으로 치면 양력 7월 경이었을 것입니다.
원정 시작 시점부터 조기에 닥친 우기는 황급히 요수를 건너게 하였으나, 소요수 서쪽 요택의 상황으로 인하여 안시성에서 요택의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이 빠진 3개월 후의 상황조차 '우마불통牛馬不通'이라 할 정도였으면 3개월 전 안시성에 도착할 즈음에는 물바다였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당 태종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이른바 주필산에 올라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옥을 경험했던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온 뒤에, 고구려 공략에 대한 전술을 바꿉니다.
직접 정공법으로 나아가지 않고 변방을 공략하여 고구려를 피폐케 하는 전략을 실행키로 한 것입니다.
이세적과 거란군이 북쪽 시라무렌하를 나가 동진하여 남소성(지금의 동요하부근)을 공략하거나, 설?? 장군이 한반도의 압록강으로 들어와 그 북쪽의 박작성을 공격하거나 하는 등의 변방두드리기가 계속되며 결국은 내부 분란으로 고구려는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당 태종의 원정 당시 비사성(요동반도 남단)에 있던 수군은 고립된 당군을 구하기 위해 물바다가 되었을 요하를 거슬러 올라 건안성으로 합류합니다.
이는 물론 고구려 추격군의 도하를 막기위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당 태종은 6월에 요동을 떠나 안시성에 도착할 때는 이미 요동성과 개모성의 인민과 식량을 약탈하여 대동하고 있었습니다.
각종 사서를 대조하여 보면, 동종의 사실이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 잘 드러납니다.
당태종의 원정길이나 귀환길에 소요수(지금의 유하)와 대요수(지금의 요하)를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그러나 사서는 각각의 귀환길에 단지 한번의 '요수'를 건너게 됩니다.
원정길에는 '渡遼澤東'이라고 하여 요택의 동쪽에 있던 소요수의 존재를 누락시키고, 귀환길에는 대요수를 건너 안시성으로 가야함에도 안시성 서쪽의 소요수를 건널 때 '渡遼水'라고 하여 마치 대요수를 건넌 것처럼 조작합니다. (계속)
독산 18-05-02 17:01
'渡遼澤東'이라고 하면 '요택을 건너 동쪽으로 가다'로 해석할 수도 있고 '요택 동쪽을 건너다'로 해석할 수도 있는 애매한 문장입니다.
역사 기록에 이러한 문장은 거의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귀환길에 안시성에서 다시 요동성으로 향한 다음 요수를 건너는 행로로 조작됩니다.
이미 6월에 요동을 떠나면서 요동성(개모성 등을 포함)의 인민과 식량을 가지고 요하를 건너 서쪽의 안시성으로 향했던 당 태종이 다시금 요동성을 거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 모두는 당 태종이 대요수와 소요수 사이에 3개월이란 긴 시간을 갇혀있던 곤궁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후대 역사가들의 조작에 의한 것입니다.

사서는 고연수 등의 추격군 40만을 안시성 구원군으로 묘사했습니다.
이는 요동성이 함락될 때의 국내성에서의 구원군과 비교하면 그 숫자의 터무니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6월 중순 당태종이 요동을 떠나면서 북쪽 신성로에 있던 장검張儉 을 불러 연개소문이 요동에 나오지 못하도록 요로에 배치시킵니다.(<신,구당서>장검전 참조) 

즉 장안성(지금의 요양)에 있던 고구려 병사들의 북상을 요격하도록 지시한 것입니다.
당 태종이 요하 서쪽의 안시성에 도착할 즈음에 요하 동쪽에서 추격군을 저지하던 장검張儉 은 요하를 건너 건안성으로 달려가 수천의 고구려군을 격패시킵니다.

바로 이 기사가 건안성이 요하 서쪽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新城은 당연히 요하 동쪽에 있고 백암성 전투를 마치고 요동을 떠나는 당 태종이 요격하라고 한 고구려군 역시 요하 동쪽의 군대입니다.
잠시 고구려군의 추격을 지체시킨 후 장검은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향합니다.
이는 바로 요하 이동에서 요하 이서로의 '渡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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