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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월 28일 (목)

[한국사] 서경 우공편의 원조 갈석산

감방친구 조회 :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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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싱(해풍)현과 우디(무체)현에 걸쳐 있는 갈석산이 우공편의 '협우갈석'의 그 갈석산

이칭 ㅡ 무체산, 마곡산, 대산

아래 링크에서 지도 탭을 클릭하세요

http://www.google.co.kr/search?q=%E6%97%A0%E6%A3%A3%E5%8E%BF+%E7%A2%A3%E7%9F%B3%E5%B1%B1%E9%95%87&prmd=mniv&source=lnms&sa=X&ved=0ahUKEwjcsaiL7ZHaAhWHjZQKHc4NDHkQ_AUIECgA&biw=360&bih=574&dpr=3

원조 갈석의 포인트는
ㅡ 황하 하구에 있다고 역대 사서가 적고 있고 역대 지도가 표시하고 있다
ㅡ 바닷가에 있다고 ~적고 있고 ~표시하고 있다
ㅡ 해풍과 무체에 걸쳐 있다고 ~적고 있고 ~표시하고 있다
ㅡ 진한 시기에 그곳까지 바다였다고 해서 하은주 시대에도 거기까지 바다였다고 볼 수 있는가? 또한 바다였다고 해도 주해도편 등의 지도를 보면 섬들을 섬 도자가 아니라 뫼 산자를 써서 표시하고 있다

감방친구 18-03-30 00:52
그러나 무체현 갈석은 한~당ㆍ송에 이르는 시기에 전설이나 다름 없는 우공편 갈석을 당시의 지리 형편에 맞춰 적용한 결과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 시대에 꾸준히 말하여 온 우공갈석은 무체현 갈석이 맞으나 서경에서 말하는 우임금의 갈석은 하북성 남부 보정시에 있는 갈석산이 옳다 하겠다
감방친구 18-03-30 04:16
그러나 이 역시도 확언할 수 없다
황하의 물줄기가 1,000여 년 동안에도 수차례 바뀌었는데
진한 시대를 기준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bc 7세기 이전의 황하 물줄기가 현 하북성 보정시 방향으로 지나고 서경이 편찬된 공자 시대에는 보정시 방향에서 노룡ㆍ창려 방향으로 물줄기 방향이 변하였으므로 실제 협우갈석은 보정시에 있는 갈석이 되겠다

즉 실제 하나라 우임금과 관련된 갈석산이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춘추전국시대의 bc6~5세기에 서경이 편찬되었고 당시의 황하의 하류는 보정시에서 노룡ㆍ창려 방면으로 이동하는 시기이므로 실제 우임금 갈석이 보정시 갈석이 맞느냐와 상관 없이 서경 편찬 당시의 사람들은 보정시에서 우공갈석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하 우임금의 갈석 ㅡ 알 수 없음
서경 편찬 당시 지식인들이 생각한 갈석 ㅡ 하북성 보정시
이후 황하 물줄기 방향이 바뀜에 따라 갈석이 새롭게 비정되었다

한~당ㆍ송 시기의 지식인들이 생각한 우공편의 협우갈석은 산동성 무체현 갈석, 즉 마곡산이다

그러나 여기에 다른 정보가 끼어든다
진서 지리지/태강 지리지에서 낙랑군 수성현에서 진장성이 시작되고, 또 갈석이 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진/태 지리지의 정보는 낙랑군이 노룡ㆍ창려, 또는 진황도ㆍ산해관 방면으로 교치된 당시의 지리정보이다

또 이 시기 지리정보가 북위에 의해 낙랑군이 하북성 보정시로 교치된 이후에도 합산돼 사용되면서 혼란을 야기하였다
감방친구 18-03-30 04:39
이것이 두우의 통전에 이르면 두우의 견해에 의해 좌갈석, 우갈석으로 나뉘며 혼동 모티프의 정점을 찍는다
감방친구 18-03-30 04:42
두우는 당시 황하가 무체현 방면으로 흐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무체현에 갈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서/태강 지리지의 정보를 혼입해서 노룡 갈석을 원조 갈석인 우갈석으로, 또 고구려 경계에 갈석이 있던 사실에서 진황도 갈석을 좌갈석으로 날조
감방친구 18-03-30 04:44
또 이것을 후대인들이 받아서
두우가 말한 요수는 적어도 난하임에도 불구하고 현 요하에 비정해 버리면서 이병도&쪽발이에 의해 평안도까지 만리장성이 들어오고 있지도 않던 갈석을 날조하기에 이른다
감방친구 18-03-30 00:54
문제는 이러한 다양한 사실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진서 지리지/태강 지리지의 내용만을 따져서 사실을 편취하여
애초부터 낙랑군이 하북시 보정시에 있었고 따라서 위만조선이 하북성에 있었다 주장하는 것은 억지나 다름 없다
감방친구 18-03-30 00:57
본인은 고구려 국경에 위치한 역산을
우선 무체현 갈석으로 추정했으며
그 차안으로 창려,
그 차안으로 진황도 갈석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포인트는
고구려 역산 = 갈석 = 고구려 국경에 위치
감방친구 18-03-30 01:11
낙랑군은 최초 현 대릉하와 요하 지대에 있다가
고구려 세력이 성장하며 기원전 1세기 초에 현도군이 요동군으로 교치되는 것을 시작으로 그 요동, 현도군조차 고구려에 의해 서쪽으로 쫓겨가면서 대릉하 일대에 몰리자 여기에 위나라가 동이교위를 설치 군국으로서 존재하다가

진나라 때에 당나라의 북평군에 해당하는 노룡ㆍ창려 지대, 또는 산해관ㆍ진황도 지대로 교치됐다가 북위 때에 현 하북성 남부 보정시로 최종 교치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포인트는 이미 위ㆍ진ㆍ북위 시절에는 이들 지역이 이들 나라 영토가 아니었고 모용선비의 전연, 후연, 북연 등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나라조차 왕망 때부터 만리장성 바깥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이들 지역은 공손씨의 손에 있다가 공손씨가 238에 위와 고구려의 협공으로 평정되고 고구려와 위가 이 지역을 두고 다투다가 관구검의 침입으로 이어지고 다시 모용선비와 고구려가 다투다가 광개토ㆍ장수왕 대에 고구려가 최종승리자가 되어 발해지역을 차지한다
감방친구 18-03-30 01:18
백제본기에서 낙랑은 온조왕 대에 백제 동쪽에 위치하다가 갑자기 240 년 동안 그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고이왕 대에 낙랑군, 대방국 등으로 등장한다

즉 최초의 낙랑은 서북한에 위치했던 우리 나라인 낙랑국이고
이 낙랑이 백제 최초기 백제의 동쪽에 위치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가 최초로 건국한 지역이 요동반도 남부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240여 년이 흐른 후 갑툭튀하는 낙랑군, 대방국 등은 위나라가 설치한 동이교위 관할의 군국으로 이들이 백제의 동편에 위치하는데 이는 고이왕 시기, 또는 그 전 시기에 백제가 난하~대릉하 지간에 영토를 마련했음을 시사한다 하겠다
감방친구 18-03-30 01:47
그러나 한서 지리지가 설명하는 요동, 낙랑, 현도군의 지리정보는 지금의 요하 동서에 적용했을 때에 들어맞는 것 같으면서도 심각하게 모순되므로 확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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