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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월 29일 (금)

[한국사] 낙랑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

history2 조회 :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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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낙랑의 유물은 모두 가짜인가? 

낙랑의 정체성을 무엇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a.강단이 말하는 한나라 군현이다 b.낙랑군과는 별도인 낙랑국이다 c.낙랑과 특히 많이 교역하던 한반도 토착민의 무역항이다 d.낙랑이 한반도와 중계무역 하기 위해 설치한 무역거점이다 등) 

                                             <진품 낙랑의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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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낙랑의 이름을 단, 유물 중 진품도 무척 많은 것은 사실이다
(유적관련 상에만 가도 낙랑제품 구하기 쉬움) 그렇기에 가품도 당연히 많다

-> 일제시대 낙랑 붐이 불어 그만큼 가품제작도 일본인의 손에 의해 조작이라는 측면이 아닌, 돈을 위해 중국인, 조선인에 의해 만들어진 정교한 가품도 너무나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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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소장한 한나라식 낙랑유물(위조품으로 생각됨)  

2...유적관련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낙랑군(樂浪郡)의 위치는 고조선의 위치와 직결되는 문제다.  주류 역사학자들은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 낙랑군의 유적과 유물이 대거 발견되었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토성과 고분, 점제현비가 있고, 유물로는 봉니(封泥), 목간(木簡), 기와 등이있다. 

1)낙랑토성: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낙랑군 시대의 유적>에서는 '대동강면  토성'을 낙랑군의 토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한나라 군사를 상대로 1년 동안 항쟁하기에는 너무나 취약한 토성이다.  사기는 우거왕이 군사를 내어 험준한 곳에서 저항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동강 유역에는 그만큼 험준한 곳이 없다. 
조선총독부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다소 고려가 되는 것은 토성이 협소한 구릉에 얕게 쌓여져 있다는 점이다. 사면이 트여 있어 천험(天險)이 없으므로 하루아침에 적의 공격을 받게 되면 방어가 지극히 곤란한 상태에 놓인다는 점이다.”(낙랑치소에서 발견된 한나라 기와 양각양식이고 사실 무제이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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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랑치소에서 발견된 기와는 한무제 이전에 쓰이던 양식이다. 또한 왕검성이 있었다고 볼 만한 어떠한 
  궁궐, 성곽등의 유적이 평양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같은시기 한이 설치한 베트남 군현에서는 발견됨)  
 

2)낙랑고분군: 강단은 대동강 유역 고분 100여 기를 모두 낙랑군의 고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대동강 유역 고분 2600여 기를 발굴하여 연구한 결과 낙랑군과 대방군의 고분으로 알려진 것들이 대부분 낙랑군이 설치되기 전에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북한의 리순진은 정백동 2호와 37호 무덤의 상한은 서기전 7세기까지 올라가고 하한은서기전 1세기로 보았다. 고분은 낙랑군과 관계없이 축조된 것들이며 낙랑군의 설치 이후에는 더 이상 축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한은 일제시대에 발굴한 100여 기의 고분보다 26배나 많은 2600여 기에 달하는 고분을 발굴하여 그 결과를 보고한 것이므로 보다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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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분도 위조도 마다하지 않는 일본인들(고구려식 고분을 한나라 고분으로 위조)


3)점제현 신사비: 1913년 평안남도 온천군에서 일제의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점제현신사비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점제현은 <한서 漢書> (지리지)에 수록된 낙랑군 25개현 가운데 하나이다. 이로써 온천군이 점제현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김교정과 정강철이 신사비의 화강석 성분을 분석한 결과 부근의 화강석과는 크게 다르고, 요하지방의 화강석과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발굴 과정에서 신사비의 기초에 시멘트를 쓴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전 연세대학교 교수 손보기는 신사비가 있는 곳은 2천 년 전에는 물이 들어왔던 곳이므로 비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모두 이 신사비가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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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봉니: 유물 가운데 봉니는 가장 논란이 많은 것이다. 봉니란 문서가 수신자에게 안전하게 전해질 수 있도록 봉함하는 진흙이다. 죽간이나 나무에 글을 쓰고 상자에 넣어 묶은 다음 끈을 진흙으로 봉하고 도장을 찍은 것이다. 1918년부터 1937년 사이에 대동강 유역에서 봉니 200여 개가 발견되었다. 모두 일제시대에 발견된 것들이다. 
그러나 그 이전이나 이후에 발견된 것은 한 개도 없다. 북한에서 1969년에 봉니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하는 곳을 300여 평방미터나 발굴하였으나 단 한 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진품봉니도상당수  발견 됨 )

a.역사학자 정인보 (鄭寅普, 1893년 출생 1950년 납북)는 봉니의 보존상태가 너무 좋고 서체가 비슷하며 발견사례가 너무 많다는 점 등을 들어 조직적인 조작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재야사학자 이덕일은 일제시대에 발견된 봉니가 모두 한나라것이라는 점을 들어 의문을 표한다. 낙랑군은 전한, 신, 후한, 삼국시대, 진, 오호 16국 시대에 걸쳐 존재하였는데 오로지 한나라것만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봉니의 위조는 일반인이 돈을 목적으로 위조봉니를 만들다보니, 이런일이 생긴게 아닌가 싶다, 상당수는 진품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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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북한의 박진욱은 관직명이 당시 관직제도와 맞지 않고 크기가 제각각이라는 점 등을 들어 봉니가 위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봉니의 위조는 일반인이 돈을 목적으로 위조봉니를 만들다보니, 이런일이 생긴게 아닌가 싶다, 상당수는 진품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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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목간: 대동강 유역의 한 무덤에서 낙랑군의 호구와 인구수를 적은 목간이 발간되었다. 소위 주류 역사학자들은 이를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물은 어디나 갈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정창원에 신라장적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 신라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강 하구, 평야 지역이, 강 상류 즉 산악 보다 인구가 적은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적혀있어서, 목간에 적힌 지역의 재 조사가 정밀히 필요하다)

9) 단국대학교 교수 윤내현은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된 중국계 유물이 낙랑군이 설치된 전한(前漢) 때의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 후한(後漢) 때의 것이라는 점을 들어 낙랑군의 유물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제작연대가 표시된 기와나 벽돌 중에는 낙랑군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한 이후인 서기후 353년과 405년에 제작된 것도 있다.(서기 후 300년 이후는 이미, 강단에서도 낙랑군이 요동으로 교치된 상황을 인정하고 있으니, 평양에서 낙랑관련 유물이 나오면 안된다) 


반론) 중요한 것은 평양 말고 낙랑군 유물이 발견된 곳이 있냐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요동이나 요서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하는데 요동이나 요서에서 낙랑군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된 적이 없다역사학에서는 기록보다도 유물유적을 더 중요시한다마치 삼국사기에는 마한이 서기 9년에 멸망했다고 나오지만 마한 관련 유물유적 때문에 마한이 5세기까지도 존재했다는 게 인정 받는 것처럼 말이다.

 

요서나 요동에서 낙랑군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 지역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인정될리가 없다이에 대해 낙랑 요서설을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 중에선 평양을 방문하여 낙랑군 조사를 한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한국 역사학계를 평가절하 하는데물론 평양이 북한의 수도가 되어버린 지금 방문 조사 및 현지 발굴이라는 귀중한 기회를 얻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전하는 문헌 자료 및 발굴 자료 만으로도 사료적 적합성을 확인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도배시러 18-03-24 06:50
후대에 낙랑 유물이 나와야 하는 지역
1.  낙랑군이 교치된 전연, 후연, 북연의 낙랑지역 유물 ? 313~436년
2.  낙랑군 조선현 사람 한현도의 무덤이 북경에서 나왓으니... 북위 의 북평군 조선현은 유사유물 1건
3.  북위의 영주 낙랑군 유물은 ~533년 ?
4.  동위, 북제 시기의 남영주 낙랑군 유물 ?

4지역 모두 추가 낙랑 유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 사서의 기록은 전부 개구라로 처리하고 묻어도 되는가 ?
유물이 나올때까지 후벼파던가... 안나오면 관련 사서의 기록불신론을 주장해야 하는가 ?
도배시러 18-03-24 07:01
낙랑군의 유민이 교치되었다면 해당 교치지역에서 평양 유물과 동일한 유물이 쏟아지는가 ?

가장 심각한 부분이죠.
주류사학의 대동강 평양 유물과 이후 교치된 낙랑지역 유물의 일관성이 있느냐 ?
일관성이 없다면... 서로 다른 문화를 영위한 다른 세력.

대동강 평양 유물과 일치하는 유물이 많이 발견되는 지역은 북경인데...(일제시절 낙랑유물의 출처)
전연의 모용씨에게 귀부한 낙랑 유민의 거주지는 북경인가 ?
그리되면 유성 화룡성의 위치는 난하의 서쪽에서 찾아야 할텐데 ?

아니면, 유물과 사서의 기록이 일치하니... 둥둥둥...
낙랑군이 최초 교치된 지역은 북경이다 ?  그러면 고구려의 위치는 어디야 ?
history2 18-03-24 07:11
전, 일단 평양이 험독의 조건에 안맞고, 고조선에 어울리는 성곽과 왕궁이 없어서 무조건,,,평양 고조선설은 부정하는 입장입니다.....그러니 낙랑의 치소가 평야에 있을리가 없지요.....낙랑의 치소는 반드시 요서에 있을 것 입니다..그런데 문제는 현재 우리의 영역이 아니니, 발굴이 잘 될 가능성이 없지요...그러기에 먼저 이 낙랑의 유적에 대해 엄정한 대처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북한-중국 공동 낙랑무덤 발굴에서 또, 중국식 묘제라는 논문이 나왔던데,,,그런것 부터 또 검증하여, 무너뜨려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도배시러 18-03-24 07:17
주류사학의 주장이 맞다고쳐도 다음 세대에서 맥이 풀려버리죠.
낙랑군은 평양에서 출생해서 사망했다고 우겨야지... 교치되었다고 하면서 전부 꼬이는거죠.

교치되었다면... 교치이후의 낙랑유물이 많이 발견되는 곳은 어디 ?
교치지역 유물과 대동강 낙랑유물의 유사성은 조사해봤나 ?
history2 18-03-24 07:16
<한서 漢書> (지리지)에 따르면 낙랑군에는 25개현이 있었는데, 그 수현(首縣)이 조선현이다. 후한(後漢)의 학자인 응소(應劭)는 조선현을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봉했던 곳이라고 설명하였다. <진서 晉書> (지리지)에도 “조선현은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땅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기자조선의 도읍지가 낙랑군의 수현인 조선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전 195년경에 연나라의 위만(衛滿)은 기자조선으로 망명한 후 정변을 일으켜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위만조선을 세웠다. 위만조선의 도읍지는 왕험성(王險城)이다. 왕검성(王儉城)이라고도 한다. 왕험성은 기자조선의 도읍지와 같으므로 낙랑군 조선현에 위치하였을 것이다.

응소는 요동군 험독현(險瀆縣)에 대해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다. 물이 험한 것에 의지하므로 험독이라고 한다.”고 설명하였다. <사기> 주석에서 서광(徐曠)은 험독현이 창려에 있다고 했다.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하북성 창려현에 있었다고 본 것이다. 창려현에 갈석산이 있으므로 위만조선의 왕험성은 갈석산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요서지역이다. 윤내현은 북대하(北戴河)에서 발굴된 고대의 궁궐터를 왕험성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

<위서 魏書>에 “조선현은 전한과 후한 시대로부터 진 시대에 이르기까지 낙랑군에 속해 있다가 폐지되었다. 서기후 432년에 조선현의 주민들을 비여현으로 이주시켜 조선현을 다시 설치하고 북평군에 속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축출당하자 북위가 조선현을 비여현으로 옮기고 북평군에 소속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비여현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다. 조선현의 원래 위치가 난하의 동쪽 부근이었음을 알 수 있다.
history2 18-03-24 07:17
중국의 고고학자 복기대는 대릉하(大凌河) 유역을 주목한다. 조양(朝陽) 부근에 금서시(錦西市)가 있다. 1997년 요녕성 금서시 연산구(連山區)에 있는 고성(古城) 터에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이라고 쓴 봉니(封泥)가 발견되었다. 금서시는 지금의 호로도시(葫蘆島市, 중국명 후루다오시)로서 요녕성 서쪽에 위치한다. 복기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봉니와 함께 수습된 유물들에 대한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해준다. 즉, 제3기층의 제2단에서 토착문화로부터 한문화로 크게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지배계층이 사용했던 유물이 많이 수습되었다. 이것은 지금의 요녕성 금서시 연산구 여아가 태집둔 소황지 지역에서는 제3기층 후반기인 중국의 전한시대에 와서 한의 지배계층이 많이 이주하여 거주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토착문화, 즉 고조선문화가 있었는데 그 후 한문화가 대거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부근의 고분에서는 고조선 유물인 비파형동검이 출토되고 있다.

한편 윤내현은 험독(險瀆)은 검독(儉瀆)을 의미하며, 검독은 조선의 옛 도읍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에 터잡아 단군조선의 도읍지로 두 곳의 후보지를 물색하였다. <요사 遼史> (지리지)에 집주회중군(集州懷衆軍)은 한나라 때 험독이었다는 설명이 있다. 집주회중군은 지금의 심양시(瀋陽市) 동남 지역이다. 윤내현은 심양시 동남쪽에 있는 본계시(本溪市)를 지목한다. 본계시에는 조선령(朝鮮嶺)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 <대청일통지 大淸一統志>에 험독 옛성이 광녕현(廣寧縣) 동남에 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곳은 대릉하 동부 연안에 있는 지금의 북진(北鎭) 근처이다. 윤내현의 고증에 따르면 장당경은 지금의 본계시나 북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도배시러 18-03-24 07:19
대동강 평양 유물과 교치된 낙랑군 지역의 유물을 대조해서 유사성을 찾지 못하면...
낙랑군 교치설은 그들이 좋아라하는 유물잣대에 의해 붕괴됩니다.
history2 18-03-24 07:19
아무튼 저는 요서 고조선 위치 및 낙랑설을 지지합니다..... 다만, 현재의 평양에 대한 정체성 부여도 중요하게 생각을 합니다. a.강단이 말하는 한나라 군현이다 b.낙랑군과는 별도인 낙랑국이다 c.낙랑과 특히 많이 교역하던 한반도 토착민의 무역항이다 d.낙랑이 한반도와 중계무역 하기 위해 설치한 무역거점이다 등 이 중 하나가 아닐 지요......a)만 빼고요 ^^
꼬마러브 18-03-24 08:46
한국사학계가 사기 치는 거죠. 평양 가서 발굴한 적 한 번도 없으면서 낙랑군 유물이라 우기는... 정작 직접 발굴한 북한사학계에서는 낙랑국 유물이라고 합니다.

평양에 나오는 중국계 유물?

1. 중국과 무역의 흔적 (봉니 같은 것)
2. AD 44년 광무제의 정벌 이후의 것

으로 볼 수 있겠고

히스토리님이 언급하신 것 중 몇몇은 도리어 낙랑군이 요동이나 요서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적입니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2118&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목&sop=or&page=3

낙랑군 유물이라는 것의 대다수가 이렇습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 이게 왜 낙랑군 평양설의 근거지?" 하는 의문이 나오거든요... 한국사학계는 평양에 뭐가 발견됐다 치면 전부 다 낙랑군으로 구겨 넣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요!
history2 18-03-24 09:49
목간에 대해서는 저도 언급했습니다....위조품이라고요  또한 강 하구, 평야 지역이, 강 상류 즉 산악 보다 인구가 적은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적혀있어서, 목간에 적힌 지역의 재 조사가 정밀히 필요합니다...^^
쇠고기 18-03-24 12:46
오.. 잘 봤습니다!
관심병자 18-03-24 20:52
평양에서 낙랑이라고 찍힌 봉니가 대규모로 발견되었다는건,
그게 진품이라고 할지라도 평양이 낙랑이란게 아닙니다.
봉니란건 중세 서양에서 촛농을 떨어뜨리고 반지의 문장을 찍어서 중간 배달자가 열어볼수 없게 봉인하는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즉, 편지를 쓰고 봉인한후 발신자의 인장이 찍히게 되는거죠.
봉인을 파하고 뜯어낸게 남아있는곳은 편지를 받아본곳이 되는것.
발신자가 미리 봉니를 만들어 놓는게 아니니 발신지에서 대량으로 발굴될수가 없는것이죠.

정리해서,
봉니 유물이 생겨날수 있는 조건은
봉인한후 ~ 수신자가 받은후 떼어낼때 까지 입니다.
즉, 발신자의 위치에서 발신자의 인장이 찍힌 봉니가 대규모로 발굴될수가 없습니다.
history2 18-03-25 19:55
봉니만으로 낙랑의 정체성이 규명되지는 물론 않겠지요..다만, 봉니 중에 상당부분 위조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 진품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데요...진품 가품을 떠나,,,그 가품 혹은 위조품을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나 중국인들이 낙랑 유물 붐을 타고 엄청 만들었다는게 참! 그래서 요새도 그 봉니는 너무 흔하게 구할 수 있으니,,그걸 증거라고 내세우는 강단도 웃기고,,,,정말 봉니는 민감할 가치도 없는 건데,,,제가 말하는 진품의 의미는 낙랑의 증거라는 의미가 아니라, 진품도 있다 하는 말입니다.... 낙랑의 정체성이 꼭 군현이라고 할 수 있나요? 전 한나라 낙랑의 무역거점이 대돋강변에 있다고도 생각합니다(낙랑예관...이것 상점이나 호텔이름 아닌가요? )
history2 18-03-25 19:57
제가 보기엔, 평양에 험독에 어울릴 만한, 궁궐터나 성곽을 못 찾는다면, 강단도 입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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