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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4일 (수)

[한국사] 고수전쟁의 영웅 강이식 장군이 수나라 원수(元帥) 출신(?)

history2 조회 :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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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부 사서에 등장하는 영양왕 재위 시절의 장수. 진주 강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정사에는 그의 기록이 없으며, 야사에는 고구려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강씨 족보나 조선시대 기록에는 원래 나라의 元帥公의 직에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명장 강감찬의 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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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의 명장 강감찬의 조상이다. 강이식의 후손은 고구려 멸망 후 신라 남부로 이주했고 신라 말기 경주에 머물다 태조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의 아들이 바로 강감찬이다.


임유관 전투의 용장: 598년 대병력을 이끌고 요서(遼西)로 나아가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沖)과 접전하다가 임유관(臨硝關: 현 산해관의 남서 지역)으로 거짓 후퇴하였다. 이에 수나라의 문제(文帝)30만 대군을 들어 한왕(漢王) 양량(楊諒)을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임유관으로 보내고, 주나후(周羅糉)를 수군총관(水軍總管)으로 삼아 바다로 출행시키면서 평양으로 출전한다고 성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략은 양선(糧船)을 이끌고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량의 수나라 대군에게 군량을 공급해주려는 속임수 전략이었다.

 

병마원수인 강이식은 이를 간파하고 수군으로 바다에 나아가 주나후의 군량선을 격파하였다. 이어 군중(軍中)에 벽루(壁壘)를 지키라고 명하여 출행하지 않으니 수나라 군사들은 양식이 점차 떨어지고, 그때가 마침 6월 장마철이라 기아·질병으로 인하여 수군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 때를 기회로 강이식은 총공격을 가하여 수나라 군사들을 거의 섬멸하고, 군자(軍資기기(器機) 등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강이식이 진두 지휘한 임유관 전투의 대승리로 인하여 수나라 문제 정권은 몰락하였다.

 

1. 출생에 대한 논란

 

a) 야사에 따른 그의 출생

시랑 강철상의 아들 강이식 장군은 나이 15세 때는 구십척짜리 철퇴를 마상에서 구사하고 진법을 이루었다고 한다. 서기 573(평원왕 15) 나이 24세 때에 동명 대회에서 장원했다고 한다. 따라서 강이식 장군은 서기 550년에 태어났다고 추리된다. 그 후 강이식 장군은 부친의 뜻을 받아 서부 총관부에서 벼슬하며 돌궐과 계단(거란), 또 말갈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갔었다고 한다.

 

그 뒤 동명 대회에서 장원한 후 아직 보직을 받지 않은 을지문덕 장군이 서기 592(고구려 영양왕 3) 8월 하순 요동성 서부 총관부의 총관 강이식 장군을 찾아와 총관부에서 같이 일하게 되었고,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공()으로 강이식 장군은 병마 도원수, 을지문덕 장군은 서부 총관으로 각각 승진되었다라고 한다.

이후 고수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수문제가 조공을 바치고 신하 국가가 되라는 국서를 날리자 칼로 대화하는 것 말곤 답이 없다라 주장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수 문제의 국서에 화가난, 고구려는 강이식이 5만 병력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요서 지역과 영주를 공격하였고, 나중에는 6만 병력을 거느리고 임유관도 공격하였다고 한다.

 

b).조선조에 편집된 강이식에 출신에 대한 기록(문집과 족보 등)

남양희(강렬묘비), 강익문(당암집), 최산두(강렬행록), 진주강씨 일축보 등 시조 강이식은 수나라 원수로서 수나라가 장차 어려워 질 것을 알고 이로 인하여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즉 강이식은 수나라의 元帥公으로 동국에서 나와서 진양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2.실존 인물인가? 에 관한 논란

 

삼국사기를 비롯한 '정사'라 할 수 있는 사료에는 강이식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며, 신채호의 저서인 조선상고사는서곽잡록(西郭雜錄)대동운해(大東韻海)에 올라와 있는 기록을 참고했다고 하였으나 둘 다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그 외에는 강이식의 후손으로 알려진 진주 강씨 족보에 남아있는 짤막한 기록과 야사들이 전부일 따름이다.

(참고: 강이식 장군의 무덤은 중국 심양현 봉길선 원수림역(元帥林驛)에 위치하고 있어서, 진주 강씨 종친회에서 제사를 지내러 간다. 진주 강씨 종친회에서는 이미 1930년대에 현지를 방문해 강이식 장군묘의 묘비를 확인했고, 또한 강위원 교수가 중국 랴오닝(遼寧)성 푸순(撫順) 시내에서 30가량 떨어진 고려촌의 포도밭에 비석이 유실된 채로 방치된 거북좌대를 확인했다나이 많은 인근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비석은 일제 시대에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데, 문화 대혁명 때 비석이 파괴되었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유적이 확실히 남아있어 사학계의 연구가 더 필요하다.)

영류왕 시기에는 너무 늙어서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군부의 원로로 젊은 장수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으며, 주인공 연개소문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대당 평화 정책을 펼치던 영류왕의 계속되는 굴욕 외교에 계속하여 불만을 드러내었고, 급기야 영류왕이 전승 기념물인 경관을 허물려고 하자 고령의 나이임에도 단식 투쟁을 하다 기력이 다해 죽었다. 강이식의 죽음으로 군부는 영류왕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고, 결국 이는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이어졌다고 한다(드라마)


6시내고… 18-03-24 20:45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강이식, 을지문덕, 양만춘 장군들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되면 좋겠습니다
history2 18-03-25 20:34
감사합니다...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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