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동요하가 압록강일 가능성, 그리고 10세기 여진족의 성분
감방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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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요하가 압록강일 가능성
제 부족한 논설 '고려 전기 서북계 추적 (총 10회)'과 그 전의 몇 차례에 걸친 '강동 6주의 위치'와 '고려 전기 서북계 고찰' 등을 유심히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1) 압록강이 별칭이지 실칭이 아니며
2) 고려, 고구려, 이후 조선 등의 나라의 강역의 변천에 따라 이들 나라의 서북계를 해자 역할을 하며 흐르는 큰 강을 이르는 강을 가리키며
3) 압록이라는 이름은 전 시대 소수 학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오리 머리의 푸른 빛이 아니라) 고대 한어(부여어, 우리 고대어)에서 크다를 나타내던 말인 알/ㅇㆍㄹ(어라하, 으리으리, 아름, 우렁찬, 알지, 알영, 어륙, 어른 등)에서 난 말로 만주의 압자하, 얄루, 아무르 등과 같은 계열의 말이며
또한
고려 전기 서북계를 고찰하며 논설을 통해 계속적으로
4) 강동 6주의 서편을 흐르는 강이자 거란이 2~3차에 걸쳐 도강한 강은 혼하 상류~범하, 청하 등일 가능성이 높다/등이다ㅡ라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주장을 하며 저 스스로 범하와 청하가 혼하로 흘러드는 지류라고 어느 순간부터 착각을 했습니다 (마치 예전에 '살수 이남이 다시 한나라 땅이 됐다'라고 삼국사기 기록을 잘못 기억한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저의 주장은
요양과 심양을 지금 자리에 고정해 두고서 고찰한 것으로
'태자하 하류~혼하 중상류~범하/청하 ' 라인을 고려 전기 압록강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강동 6주의 압록강 라인은 혼하 상류~범하/청하에서 찾아야 하며
여기에 986 여진으로서의 정안국이 있었으며
이미 고려는 980 년대에 거란과 여진 사이에 위치하는 혼하 중상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991에 이 지역에 잔류한 여진인들을 백두산 (저는 길림합달령으로 봅니다) 북쪽으로 쫓아버렸으며
993 강화협정에 의해 할양 받은 이 혼하 상류~범하/청하 지역의 동쪽 땅을 994부터 서희 주도로 개척하여 지금의 개원~장춘 지역을 개척하였다고 본 것입니다
즉 저는 강동 6주 서편의 압록강을 혼하 상류, 범하, 청하 등으로 추정했지 확정하지 못 했습니다
애초에 거란이 할양 (실제로는 거란이 실효지배하지 못한, 여진, 즉 정안국의 땅)한 강동 6주는 겨우 180리였습니다
그런데 거란의 예상(거란의 목적은 고려가 자신들의 조공국이 된 마당이니 이이제이로서, 고려를 시켜 골칫거리 여진족들을 쫓아버리고 동시에 고려의 힘을 빼놓은 후에 그 땅과 그 동쪽의 여진족들이 설치는 땅을 도로 빼앗고 되찾는 것이었습니다)과 달리 고려가 너무 손쉽게 여진족을 처리하고 길림합달령과 용강산맥 사이의 서쪽 입구인 이 지역을 넓게 개척하여 틀어막으니 아예 노골적으로 강동 6주를 내어놓으라며 2~3차의 대규모 침략을 강행한 것입니다
즉 강동 6주 지역은 혼하 상류에서 범하/청하에 이르는 발해 서경압록부 일부와 회원부 일부 지역인 것이죠
요 성종이 고려와 인접하다 하여 이 인근에 신주 창성군을 설치한 것입니다
요사 지리지는 만주 드넓은 지역에 있던, 926부터 그 이후에 계속하여 잃은 주군현을 요심 근방으로 교치한 사실이 11세기 지리정보와 혼재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 따져봐야 하는 것이지 무턱대고 위서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죠 그런 식이면 위서 아닌 사서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 보주ㆍ래원성을 저는 잉커우 근방으로 고찰하였는데 이 이유는 고려의 서계 서단으로서 마주하는 거란의 학야현, 암연현 등이 이 근방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보주ㆍ래원성은 대연림, 고원창, 여진족의 금나라 등과 밀접하고 금과 고려가 경계를 맞댄 지역입니다
하여 저는 고려 전기 고려와 거란의 경계로서의 고려 서북계의 압록강은 하나의 강이 단출하게 빠지는 게 아니고 여러 강을 이르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그 서단에 태자하 하류, 중단에 혼하, 동북단에 범하, 청하 등을 두는 것입니다
제가 지도 제작을 미루고 있는 이유는 고찰의 엄밀성을 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여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어서 1 월 말 이후로는 연구를 못 하고 있습니다
제 연구 원칙은 아무리 유명하고 권위 있는 학자, 역사블로거의 선행연구가 있다 하더라도 사서와 다이렉트로 맞부딪혀 고찰하는 것입니다
제 잠정 결론은
1) 동요하가 고려 전기 압록강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2) 그러나 그 지류인 범하, 또는 청하가 압록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3) 그리고 여진족이 거란과 고려에 의해 동북으로 쫓겨 위치하면서 압록의 위치도 동북으로 이동했을 가능성 역시 보유한다
입니다
2. 10 세기 여진족의 성분
금나라가 건국되기 직전 거란군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둘 때 여진족 군사 수는 겨우 몇 천 명이었습니다
건국주체 완안여진은 저들 스스로 남긴 기록에 솔직히 적었듯이 글도 모르고 법도도 없는 말그대로 야만에 가까웠습니다 이들을 규합한 바탕의 힘이 김함보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고려 귀덕장군이던 아골타의 숙부 영가에 이르러 세력이 커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갑옷도 없는 (갑옷 만드는 기술도 없는) 소수의 무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건국하기 백 수십 년 전, 986의 여진은 거란이 이들을 깨뜨렸을 때에 포로가 10만, 말이 20 만일 정도로 거대했습니다
986의 여진과 금나라 건국 시기의 여진이 같다고 보입니까
당시 송화강의 여진은 목단강의 여진과 마찬가지로 옛 흑수말갈 등의 후예요 발해에 예속돼 살던 소수 부족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발해유민이 섞여들며
'발해유민 + 옛 흑수말갈 등의 여러 소수 종족'이 여진이라는 이름으로 요사와 고려사, 송사 등에서 통칭된 것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생각합니다
정안국은 송나라에 계속 여진의 사신을 통해 표문을 올렸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여진이 곧 발해유민인 것이죠
아골타의 여진은 송화강 유역에서 고려에 반 예속돼 있었고, 또 수시로 거란의 괴롭힘을 당하며 1세기를 지나며 다른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고주몽과 비류국왕 송양의 대면에서
송양이 자신을 선인 (단군) 의 후손이라고 하자
고주몽이 자신을 천제지자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고주몽은 이 나라를 합방하고 다물주라 이름하였습니다
그 수많은 발해인들이 다 어디로 갔겠습니까
땅으로 꺼지거나 공중으로 흩어졌겠습니까
발해인들, 요즘으로 치면 서민이요 촌사람인 발해 일반 백성들은 그냥 제 살던 데서 계속 살았습니다
지배층을 중심한 일부만 사민된 것이죠
발해 인구가 얼마나 됐겠습니까
겨우 수십만으로 그 광대한 영토를 꾸렸겠습니까
고구려 멸망시기로 가보겠습니다
고구려는 176여 개의 성이 있었고 그 가운데에 언급 (삼국사)된 것은 평양성 포함 32곳 뿐입니다
<668 년 고구려 멸망 시 상황>
당에 함락되거나 항복한 성 총 14곳
ㅡ 함락된 성 4곳 : 혈성, 은성,사성, 평양성
ㅡ 평양성 함락 후 스스로 항복한 성 10곳 : 양암성, 목저성, 수구성, 남소성, 감물주성,능전곡성, 심악성, 국내주, 설부루성, 후악성, 자목성
항복하(함락되)지 않은 성 총 18 곳
ㅡ 끝까지 저항하여 함락되지 않은 성 11곳 : 북부여성. 절성, 풍부성, 신성, 도성, 대두산성, 요동성, 옥성, 백석성, 다벌악주성, 안시성
ㅡ 패전하거나 위세에 밀려 주민들이 도망한 성 7곳 : 연성, 면악성, 아악성, 취악성, 적리성, 목은성, 이산성
(저는 사실 이것 때문에 고구려 멸망기 평양성을 환도성, 지금의 평양, 또는 평안북도 어드메 등으로, 차안으로서 염두하고 있습니다)
언급된 32곳 가운데 무려 18곳이나 함락되지 않았고 요동성, 신성, 안시성 등 주요 성도 포함돼 있습니다
당이 안동도호부를 요동성, 신성 등에 설치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다른 곳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죠
아무튼 항복한 14 곳 성 외의 다른 성, 다른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됐겠습니까 증발했을까요? 그냥 거기에서 계속 살거나 동쪽으로 이주해 살았겠죠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요동지역 뿐만 아니라 요서지역도 제대로 장악을 못 했습니다
거란, 고구려 유민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위쪽에는 돌궐이 압박했습니다
고구려 멸망기 인구가 69만 호라 하는데 호당 x 5~x 7이므로 최소 300 만, 최대 500 만여 명이 됩니다
그런데 웃긴 것은
1) 멸망기 백제 인구가 76만 호로 30~50 만여 명이 더 많습니다
2) 고구려 멸망하기 7~800 여 년 전 위만조선 자리에 설치한 한나라 요동ㆍ현도ㆍ낙랑 인구만 근 100만이었습니다
3) 항복한 성은 평양성 포함 겨우 14곳이었습니다
하니 고구려 전체 인구 69만 호가 납득이 가십니까?
즉 69만 호는 전체 인구가 아니라 함락된 성을 중심한, 고구려 중심지 인구로 봄이 타당합니다
즉 고구려 전체 인구는 최소 500만 내외로 봐야 하는 것이죠
당에 끌려간 고구려인 숫자가 28,200호로 최대 20만입니다 나머지 최소 300만 내외 최대 400 만 이상의 고구려인은 어디로 증발했겠습니까?
또 끌려간 고구려인들 가운데 일부는 돌아와 발해를 건국하는 주체세력이 됩니다
즉 발해 초기 발해 인구는 4~500 만 명 대로 봐야 합니다
발해 멸망 후를 살펴 볼까요?
발해 멸망 후 발해 지배층들은 상경부, 중경부로 사민됩니다
중경부에는 인호수가 나오지 않으나 상경부 기록만 볼 때에 34,500여 호가 발해인들로 조성된 호수이며 인구로 보면 최대 24 만여 명입니다
상경부에 끌려간 것만 24만여 명입니다
동경부 호구수는 23800 호 내외로 인구로 따지면 20만여 명 내외입니다 역시 대부분 발해인들이죠
이렇게 수십만이 끌려가고도 어떻게 요사 986~987 여진 정벌에서 보이듯 10만여 포로, 20만여 말 획득이 가능했겠습니까 동단국이 천복성에서 요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도 발해인들의 반란을 통제할 수 없었기에 그렇습니다
발해인들 대다수는 그냥 살던 땅인 만주에서 계속 살았던 것이고 예속에 벗어난 흑룡강 및 연해주, 북만주 지역의 종족들이 남하해 와 살았던 것이죠
고구려 시대 말갈 인구는 얼마나 됐을까요
정병이 3,000을 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남성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병사이기도 한 이들 특성상 적게 수만 명, 많게 잡아야 수십만입니다
고구려 전체 인구에서 1/10이 안 되는 규모였습니다
이들 역시 수백 년 고구려 백성으로 살았고요
금 건국 직전 요와의 전쟁에 동원한 군사수가 겨우 몇 천 그리고 요를 무너뜨릴 때 동원한 군사수가 역시 겨우 2만
2만 명으로 70만 명 거란군을 초토화시키며 강자로 자리잡는데
원시에 가까웠던 여진족이 어떻게 이렇게 성장했겠습니까
결론은 여진족은 발해유민+발해 소수종족
고려와 거란이 만주의 발해인들을 여진으로 통칭해 부른 이유는
ㅡ 고려 입장에서는 발해인들의 부흥을 돕지 않고 오히려 망명자들을 수십만 받아들이고 그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을 내쫓은 것에 대한 자기 합리화
ㅡ 거란 입장에서는 발해를 무너뜨리고도 결국 발해의 서쪽 일부만 차지한 것에 대한 자기 합리화
의 정서논리가 작용했다고 저는 추정합니다
그리고 어쨌거나 여진족 대부분은 10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백수십 년을 고려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이러니 금태조조차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한 것입니다
제 부족한 논설 '고려 전기 서북계 추적 (총 10회)'과 그 전의 몇 차례에 걸친 '강동 6주의 위치'와 '고려 전기 서북계 고찰' 등을 유심히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1) 압록강이 별칭이지 실칭이 아니며
2) 고려, 고구려, 이후 조선 등의 나라의 강역의 변천에 따라 이들 나라의 서북계를 해자 역할을 하며 흐르는 큰 강을 이르는 강을 가리키며
3) 압록이라는 이름은 전 시대 소수 학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오리 머리의 푸른 빛이 아니라) 고대 한어(부여어, 우리 고대어)에서 크다를 나타내던 말인 알/ㅇㆍㄹ(어라하, 으리으리, 아름, 우렁찬, 알지, 알영, 어륙, 어른 등)에서 난 말로 만주의 압자하, 얄루, 아무르 등과 같은 계열의 말이며
또한
고려 전기 서북계를 고찰하며 논설을 통해 계속적으로
4) 강동 6주의 서편을 흐르는 강이자 거란이 2~3차에 걸쳐 도강한 강은 혼하 상류~범하, 청하 등일 가능성이 높다/등이다ㅡ라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주장을 하며 저 스스로 범하와 청하가 혼하로 흘러드는 지류라고 어느 순간부터 착각을 했습니다 (마치 예전에 '살수 이남이 다시 한나라 땅이 됐다'라고 삼국사기 기록을 잘못 기억한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저의 주장은
요양과 심양을 지금 자리에 고정해 두고서 고찰한 것으로
'태자하 하류~혼하 중상류~범하/청하 ' 라인을 고려 전기 압록강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강동 6주의 압록강 라인은 혼하 상류~범하/청하에서 찾아야 하며
여기에 986 여진으로서의 정안국이 있었으며
이미 고려는 980 년대에 거란과 여진 사이에 위치하는 혼하 중상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991에 이 지역에 잔류한 여진인들을 백두산 (저는 길림합달령으로 봅니다) 북쪽으로 쫓아버렸으며
993 강화협정에 의해 할양 받은 이 혼하 상류~범하/청하 지역의 동쪽 땅을 994부터 서희 주도로 개척하여 지금의 개원~장춘 지역을 개척하였다고 본 것입니다
즉 저는 강동 6주 서편의 압록강을 혼하 상류, 범하, 청하 등으로 추정했지 확정하지 못 했습니다
애초에 거란이 할양 (실제로는 거란이 실효지배하지 못한, 여진, 즉 정안국의 땅)한 강동 6주는 겨우 180리였습니다
그런데 거란의 예상(거란의 목적은 고려가 자신들의 조공국이 된 마당이니 이이제이로서, 고려를 시켜 골칫거리 여진족들을 쫓아버리고 동시에 고려의 힘을 빼놓은 후에 그 땅과 그 동쪽의 여진족들이 설치는 땅을 도로 빼앗고 되찾는 것이었습니다)과 달리 고려가 너무 손쉽게 여진족을 처리하고 길림합달령과 용강산맥 사이의 서쪽 입구인 이 지역을 넓게 개척하여 틀어막으니 아예 노골적으로 강동 6주를 내어놓으라며 2~3차의 대규모 침략을 강행한 것입니다
즉 강동 6주 지역은 혼하 상류에서 범하/청하에 이르는 발해 서경압록부 일부와 회원부 일부 지역인 것이죠
요 성종이 고려와 인접하다 하여 이 인근에 신주 창성군을 설치한 것입니다
요사 지리지는 만주 드넓은 지역에 있던, 926부터 그 이후에 계속하여 잃은 주군현을 요심 근방으로 교치한 사실이 11세기 지리정보와 혼재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 따져봐야 하는 것이지 무턱대고 위서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죠 그런 식이면 위서 아닌 사서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 보주ㆍ래원성을 저는 잉커우 근방으로 고찰하였는데 이 이유는 고려의 서계 서단으로서 마주하는 거란의 학야현, 암연현 등이 이 근방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보주ㆍ래원성은 대연림, 고원창, 여진족의 금나라 등과 밀접하고 금과 고려가 경계를 맞댄 지역입니다
하여 저는 고려 전기 고려와 거란의 경계로서의 고려 서북계의 압록강은 하나의 강이 단출하게 빠지는 게 아니고 여러 강을 이르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그 서단에 태자하 하류, 중단에 혼하, 동북단에 범하, 청하 등을 두는 것입니다
제가 지도 제작을 미루고 있는 이유는 고찰의 엄밀성을 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여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어서 1 월 말 이후로는 연구를 못 하고 있습니다
제 연구 원칙은 아무리 유명하고 권위 있는 학자, 역사블로거의 선행연구가 있다 하더라도 사서와 다이렉트로 맞부딪혀 고찰하는 것입니다
제 잠정 결론은
1) 동요하가 고려 전기 압록강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2) 그러나 그 지류인 범하, 또는 청하가 압록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3) 그리고 여진족이 거란과 고려에 의해 동북으로 쫓겨 위치하면서 압록의 위치도 동북으로 이동했을 가능성 역시 보유한다
입니다
2. 10 세기 여진족의 성분
금나라가 건국되기 직전 거란군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둘 때 여진족 군사 수는 겨우 몇 천 명이었습니다
건국주체 완안여진은 저들 스스로 남긴 기록에 솔직히 적었듯이 글도 모르고 법도도 없는 말그대로 야만에 가까웠습니다 이들을 규합한 바탕의 힘이 김함보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고려 귀덕장군이던 아골타의 숙부 영가에 이르러 세력이 커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갑옷도 없는 (갑옷 만드는 기술도 없는) 소수의 무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건국하기 백 수십 년 전, 986의 여진은 거란이 이들을 깨뜨렸을 때에 포로가 10만, 말이 20 만일 정도로 거대했습니다
986의 여진과 금나라 건국 시기의 여진이 같다고 보입니까
당시 송화강의 여진은 목단강의 여진과 마찬가지로 옛 흑수말갈 등의 후예요 발해에 예속돼 살던 소수 부족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발해유민이 섞여들며
'발해유민 + 옛 흑수말갈 등의 여러 소수 종족'이 여진이라는 이름으로 요사와 고려사, 송사 등에서 통칭된 것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생각합니다
정안국은 송나라에 계속 여진의 사신을 통해 표문을 올렸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여진이 곧 발해유민인 것이죠
아골타의 여진은 송화강 유역에서 고려에 반 예속돼 있었고, 또 수시로 거란의 괴롭힘을 당하며 1세기를 지나며 다른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고주몽과 비류국왕 송양의 대면에서
송양이 자신을 선인 (단군) 의 후손이라고 하자
고주몽이 자신을 천제지자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고주몽은 이 나라를 합방하고 다물주라 이름하였습니다
그 수많은 발해인들이 다 어디로 갔겠습니까
땅으로 꺼지거나 공중으로 흩어졌겠습니까
발해인들, 요즘으로 치면 서민이요 촌사람인 발해 일반 백성들은 그냥 제 살던 데서 계속 살았습니다
지배층을 중심한 일부만 사민된 것이죠
발해 인구가 얼마나 됐겠습니까
겨우 수십만으로 그 광대한 영토를 꾸렸겠습니까
고구려 멸망시기로 가보겠습니다
고구려는 176여 개의 성이 있었고 그 가운데에 언급 (삼국사)된 것은 평양성 포함 32곳 뿐입니다
<668 년 고구려 멸망 시 상황>
당에 함락되거나 항복한 성 총 14곳
ㅡ 함락된 성 4곳 : 혈성, 은성,사성, 평양성
ㅡ 평양성 함락 후 스스로 항복한 성 10곳 : 양암성, 목저성, 수구성, 남소성, 감물주성,능전곡성, 심악성, 국내주, 설부루성, 후악성, 자목성
항복하(함락되)지 않은 성 총 18 곳
ㅡ 끝까지 저항하여 함락되지 않은 성 11곳 : 북부여성. 절성, 풍부성, 신성, 도성, 대두산성, 요동성, 옥성, 백석성, 다벌악주성, 안시성
ㅡ 패전하거나 위세에 밀려 주민들이 도망한 성 7곳 : 연성, 면악성, 아악성, 취악성, 적리성, 목은성, 이산성
(저는 사실 이것 때문에 고구려 멸망기 평양성을 환도성, 지금의 평양, 또는 평안북도 어드메 등으로, 차안으로서 염두하고 있습니다)
언급된 32곳 가운데 무려 18곳이나 함락되지 않았고 요동성, 신성, 안시성 등 주요 성도 포함돼 있습니다
당이 안동도호부를 요동성, 신성 등에 설치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다른 곳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죠
아무튼 항복한 14 곳 성 외의 다른 성, 다른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됐겠습니까 증발했을까요? 그냥 거기에서 계속 살거나 동쪽으로 이주해 살았겠죠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요동지역 뿐만 아니라 요서지역도 제대로 장악을 못 했습니다
거란, 고구려 유민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위쪽에는 돌궐이 압박했습니다
고구려 멸망기 인구가 69만 호라 하는데 호당 x 5~x 7이므로 최소 300 만, 최대 500 만여 명이 됩니다
그런데 웃긴 것은
1) 멸망기 백제 인구가 76만 호로 30~50 만여 명이 더 많습니다
2) 고구려 멸망하기 7~800 여 년 전 위만조선 자리에 설치한 한나라 요동ㆍ현도ㆍ낙랑 인구만 근 100만이었습니다
3) 항복한 성은 평양성 포함 겨우 14곳이었습니다
하니 고구려 전체 인구 69만 호가 납득이 가십니까?
즉 69만 호는 전체 인구가 아니라 함락된 성을 중심한, 고구려 중심지 인구로 봄이 타당합니다
즉 고구려 전체 인구는 최소 500만 내외로 봐야 하는 것이죠
당에 끌려간 고구려인 숫자가 28,200호로 최대 20만입니다 나머지 최소 300만 내외 최대 400 만 이상의 고구려인은 어디로 증발했겠습니까?
또 끌려간 고구려인들 가운데 일부는 돌아와 발해를 건국하는 주체세력이 됩니다
즉 발해 초기 발해 인구는 4~500 만 명 대로 봐야 합니다
발해 멸망 후를 살펴 볼까요?
발해 멸망 후 발해 지배층들은 상경부, 중경부로 사민됩니다
중경부에는 인호수가 나오지 않으나 상경부 기록만 볼 때에 34,500여 호가 발해인들로 조성된 호수이며 인구로 보면 최대 24 만여 명입니다
상경부에 끌려간 것만 24만여 명입니다
동경부 호구수는 23800 호 내외로 인구로 따지면 20만여 명 내외입니다 역시 대부분 발해인들이죠
이렇게 수십만이 끌려가고도 어떻게 요사 986~987 여진 정벌에서 보이듯 10만여 포로, 20만여 말 획득이 가능했겠습니까 동단국이 천복성에서 요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도 발해인들의 반란을 통제할 수 없었기에 그렇습니다
발해인들 대다수는 그냥 살던 땅인 만주에서 계속 살았던 것이고 예속에 벗어난 흑룡강 및 연해주, 북만주 지역의 종족들이 남하해 와 살았던 것이죠
고구려 시대 말갈 인구는 얼마나 됐을까요
정병이 3,000을 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남성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병사이기도 한 이들 특성상 적게 수만 명, 많게 잡아야 수십만입니다
고구려 전체 인구에서 1/10이 안 되는 규모였습니다
이들 역시 수백 년 고구려 백성으로 살았고요
금 건국 직전 요와의 전쟁에 동원한 군사수가 겨우 몇 천 그리고 요를 무너뜨릴 때 동원한 군사수가 역시 겨우 2만
2만 명으로 70만 명 거란군을 초토화시키며 강자로 자리잡는데
원시에 가까웠던 여진족이 어떻게 이렇게 성장했겠습니까
결론은 여진족은 발해유민+발해 소수종족
고려와 거란이 만주의 발해인들을 여진으로 통칭해 부른 이유는
ㅡ 고려 입장에서는 발해인들의 부흥을 돕지 않고 오히려 망명자들을 수십만 받아들이고 그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을 내쫓은 것에 대한 자기 합리화
ㅡ 거란 입장에서는 발해를 무너뜨리고도 결국 발해의 서쪽 일부만 차지한 것에 대한 자기 합리화
의 정서논리가 작용했다고 저는 추정합니다
그리고 어쨌거나 여진족 대부분은 10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백수십 년을 고려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이러니 금태조조차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