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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19일 (금)

[한국사] 동요하가 압록강일 가능성, 그리고 10세기 여진족의 성분

감방친구 조회 : 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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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요하가 압록강일 가능성

제 부족한 논설 '고려 전기 서북계 추적 (총 10회)'과 그 전의 몇 차례에 걸친 '강동 6주의 위치'와 '고려 전기 서북계 고찰' 등을 유심히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1) 압록강이 별칭이지 실칭이 아니며
2) 고려, 고구려, 이후 조선 등의 나라의 강역의 변천에 따라 이들 나라의 서북계를 해자 역할을 하며 흐르는 큰 강을 이르는 강을 가리키며
3) 압록이라는 이름은 전 시대 소수 학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오리 머리의 푸른 빛이 아니라) 고대 한어(부여어, 우리 고대어)에서 크다를 나타내던 말인 알/ㅇㆍㄹ(어라하, 으리으리, 아름, 우렁찬, 알지, 알영, 어륙, 어른 등)에서 난 말로 만주의 압자하, 얄루, 아무르 등과 같은 계열의 말이며

또한
고려 전기 서북계를 고찰하며 논설을 통해 계속적으로
4) 강동 6주의 서편을 흐르는 강이자 거란이 2~3차에 걸쳐 도강한 강은 혼하 상류~범하, 청하 등일 가능성이 높다/등이다ㅡ라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주장을 하며 저 스스로 범하와 청하가 혼하로 흘러드는 지류라고 어느 순간부터 착각을 했습니다 (마치 예전에 '살수 이남이 다시 한나라 땅이 됐다'라고 삼국사기 기록을 잘못 기억한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저의 주장은
요양과 심양을 지금 자리에 고정해 두고서 고찰한 것으로

'태자하 하류~혼하 중상류~범하/청하 ' 라인을 고려 전기 압록강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강동 6주의 압록강 라인은 혼하 상류~범하/청하에서 찾아야 하며
여기에 986 여진으로서의 정안국이 있었으며
이미 고려는 980 년대에 거란과 여진 사이에 위치하는 혼하 중상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991에 이 지역에 잔류한 여진인들을 백두산 (저는 길림합달령으로 봅니다) 북쪽으로 쫓아버렸으며
993 강화협정에 의해 할양 받은 이 혼하 상류~범하/청하 지역의 동쪽 땅을 994부터 서희 주도로 개척하여 지금의 개원~장춘 지역을 개척하였다고 본 것입니다

즉 저는 강동 6주 서편의 압록강을 혼하 상류, 범하, 청하 등으로 추정했지 확정하지 못 했습니다

애초에 거란이 할양 (실제로는 거란이 실효지배하지 못한, 여진, 즉 정안국의 땅)한 강동 6주는 겨우 180리였습니다

그런데 거란의 예상(거란의 목적은 고려가 자신들의 조공국이 된 마당이니 이이제이로서, 고려를 시켜 골칫거리 여진족들을 쫓아버리고 동시에 고려의 힘을 빼놓은 후에 그 땅과 그 동쪽의 여진족들이 설치는 땅을 도로 빼앗고 되찾는 것이었습니다)과 달리 고려가 너무 손쉽게 여진족을 처리하고 길림합달령과 용강산맥 사이의 서쪽 입구인 이 지역을 넓게 개척하여 틀어막으니 아예 노골적으로 강동 6주를 내어놓으라며 2~3차의 대규모 침략을 강행한 것입니다

즉 강동 6주 지역은 혼하 상류에서 범하/청하에 이르는 발해 서경압록부 일부와 회원부 일부 지역인 것이죠

요 성종이 고려와 인접하다 하여 이 인근에 신주 창성군을 설치한 것입니다

요사 지리지는 만주 드넓은 지역에 있던,  926부터 그 이후에 계속하여 잃은 주군현을 요심 근방으로 교치한 사실이 11세기 지리정보와 혼재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 따져봐야 하는 것이지 무턱대고 위서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죠 그런 식이면 위서 아닌 사서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 보주ㆍ래원성을 저는 잉커우 근방으로 고찰하였는데 이 이유는 고려의 서계 서단으로서 마주하는 거란의 학야현, 암연현 등이 이 근방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보주ㆍ래원성은 대연림, 고원창, 여진족의 금나라 등과 밀접하고 금과 고려가 경계를 맞댄 지역입니다

하여 저는 고려 전기 고려와 거란의 경계로서의 고려 서북계의 압록강은 하나의 강이 단출하게 빠지는 게 아니고 여러 강을 이르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그 서단에 태자하 하류, 중단에 혼하, 동북단에 범하, 청하 등을 두는 것입니다

제가 지도 제작을 미루고 있는 이유는 고찰의 엄밀성을 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여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어서 1 월 말 이후로는 연구를 못 하고 있습니다

제 연구 원칙은 아무리 유명하고 권위 있는 학자, 역사블로거의 선행연구가 있다 하더라도 사서와 다이렉트로 맞부딪혀 고찰하는 것입니다

제 잠정 결론은
1) 동요하가 고려 전기 압록강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2) 그러나 그 지류인 범하, 또는 청하가 압록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3) 그리고 여진족이 거란과 고려에 의해 동북으로 쫓겨 위치하면서 압록의 위치도 동북으로 이동했을 가능성 역시 보유한다

입니다

2. 10 세기 여진족의 성분

금나라가 건국되기 직전 거란군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둘 때 여진족 군사 수는 겨우 몇 천 명이었습니다

건국주체 완안여진은 저들 스스로 남긴 기록에 솔직히 적었듯이 글도 모르고 법도도 없는 말그대로 야만에 가까웠습니다 이들을 규합한 바탕의 힘이 김함보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고려 귀덕장군이던 아골타의 숙부 영가에 이르러 세력이 커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갑옷도 없는 (갑옷 만드는 기술도 없는) 소수의 무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건국하기 백 수십 년 전, 986의 여진은 거란이 이들을 깨뜨렸을 때에 포로가 10만, 말이 20 만일 정도로 거대했습니다

986의 여진과 금나라 건국 시기의 여진이 같다고 보입니까

당시 송화강의 여진은 목단강의 여진과 마찬가지로 옛 흑수말갈 등의 후예요 발해에 예속돼 살던 소수 부족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발해유민이 섞여들며
'발해유민 + 옛 흑수말갈 등의 여러 소수 종족'이 여진이라는 이름으로 요사와 고려사, 송사 등에서 통칭된 것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생각합니다

정안국은 송나라에 계속 여진의 사신을 통해 표문을 올렸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여진이 곧 발해유민인 것이죠

아골타의 여진은 송화강 유역에서 고려에 반 예속돼 있었고, 또 수시로 거란의 괴롭힘을 당하며 1세기를 지나며 다른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고주몽과 비류국왕 송양의 대면에서
송양이 자신을 선인 (단군) 의 후손이라고 하자
고주몽이 자신을 천제지자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고주몽은 이 나라를 합방하고 다물주라 이름하였습니다

그 수많은 발해인들이 다 어디로 갔겠습니까
땅으로 꺼지거나 공중으로 흩어졌겠습니까

발해인들, 요즘으로 치면 서민이요 촌사람인 발해 일반 백성들은 그냥 제 살던 데서 계속 살았습니다

지배층을 중심한 일부만 사민된 것이죠

발해 인구가 얼마나 됐겠습니까
겨우 수십만으로 그 광대한 영토를 꾸렸겠습니까

고구려 멸망시기로 가보겠습니다

고구려는 176여 개의 성이 있었고 그 가운데에 언급 (삼국사)된 것은 평양성 포함 32곳 뿐입니다

<668 년 고구려 멸망 시 상황>

당에 함락되거나 항복한 성 총 14곳
ㅡ 함락된 성 4곳 : 혈성, 은성,사성, 평양성
ㅡ 평양성 함락 후 스스로 항복한 성 10곳  : 양암성, 목저성, 수구성, 남소성, 감물주성,능전곡성, 심악성, 국내주, 설부루성, 후악성, 자목성

항복하(함락되)지 않은 성 총 18 곳
ㅡ 끝까지 저항하여 함락되지 않은 성 11곳 : 북부여성. 절성,  풍부성, 신성, 도성, 대두산성, 요동성, 옥성, 백석성, 다벌악주성, 안시성
ㅡ 패전하거나 위세에 밀려 주민들이 도망한 성 7곳 : 연성, 면악성, 아악성, 취악성, 적리성, 목은성, 이산성

(저는 사실 이것 때문에 고구려 멸망기 평양성을 환도성, 지금의 평양, 또는 평안북도 어드메 등으로, 차안으로서 염두하고 있습니다)

언급된 32곳 가운데 무려 18곳이나 함락되지 않았고 요동성, 신성, 안시성 등 주요 성도 포함돼 있습니다

당이 안동도호부를 요동성, 신성 등에 설치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다른 곳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죠

아무튼 항복한 14 곳 성 외의 다른 성, 다른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됐겠습니까 증발했을까요? 그냥 거기에서 계속 살거나 동쪽으로 이주해 살았겠죠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요동지역 뿐만 아니라 요서지역도 제대로 장악을 못 했습니다

거란, 고구려 유민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위쪽에는 돌궐이 압박했습니다

고구려 멸망기 인구가 69만 호라 하는데 호당 x 5~x 7이므로 최소 300 만, 최대 500 만여 명이 됩니다

그런데 웃긴 것은
1) 멸망기 백제 인구가 76만 호로 30~50 만여 명이 더 많습니다
2) 고구려 멸망하기 7~800 여 년 전 위만조선 자리에 설치한 한나라 요동ㆍ현도ㆍ낙랑 인구만 근 100만이었습니다
3) 항복한 성은 평양성 포함 겨우 14곳이었습니다

하니 고구려 전체 인구 69만 호가 납득이 가십니까?
즉 69만 호는 전체 인구가 아니라 함락된 성을 중심한, 고구려 중심지 인구로 봄이 타당합니다

즉 고구려 전체 인구는 최소 500만 내외로 봐야 하는 것이죠

당에 끌려간 고구려인 숫자가 28,200호로 최대 20만입니다 나머지 최소 300만 내외 최대 400 만 이상의 고구려인은 어디로 증발했겠습니까?

또 끌려간 고구려인들 가운데 일부는 돌아와 발해를 건국하는 주체세력이 됩니다

즉 발해 초기 발해 인구는 4~500 만 명 대로 봐야 합니다

발해 멸망 후를 살펴 볼까요?

발해 멸망 후 발해 지배층들은 상경부, 중경부로 사민됩니다

중경부에는 인호수가 나오지 않으나 상경부 기록만 볼 때에 34,500여 호가 발해인들로 조성된 호수이며 인구로 보면 최대 24 만여 명입니다

상경부에 끌려간 것만 24만여 명입니다

동경부 호구수는 23800 호 내외로 인구로 따지면 20만여 명 내외입니다 역시 대부분 발해인들이죠

이렇게 수십만이 끌려가고도 어떻게 요사 986~987 여진 정벌에서 보이듯 10만여 포로, 20만여 말 획득이 가능했겠습니까 동단국이 천복성에서 요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도 발해인들의 반란을 통제할 수 없었기에 그렇습니다

발해인들 대다수는 그냥 살던 땅인 만주에서 계속 살았던 것이고 예속에 벗어난 흑룡강 및 연해주, 북만주 지역의 종족들이 남하해 와 살았던 것이죠

고구려 시대 말갈 인구는 얼마나 됐을까요
정병이 3,000을 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남성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병사이기도 한 이들 특성상 적게 수만 명, 많게 잡아야 수십만입니다
고구려 전체 인구에서 1/10이 안 되는 규모였습니다
이들 역시 수백 년 고구려 백성으로 살았고요

금 건국 직전 요와의 전쟁에 동원한 군사수가 겨우 몇 천 그리고 요를 무너뜨릴 때 동원한 군사수가 역시 겨우 2만

2만 명으로 70만 명 거란군을 초토화시키며 강자로 자리잡는데

원시에 가까웠던 여진족이 어떻게 이렇게 성장했겠습니까

결론은 여진족은 발해유민+발해 소수종족

고려와 거란이 만주의 발해인들을 여진으로 통칭해 부른 이유는
ㅡ 고려 입장에서는 발해인들의 부흥을 돕지 않고 오히려 망명자들을 수십만 받아들이고 그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을 내쫓은 것에 대한 자기 합리화
ㅡ 거란 입장에서는 발해를 무너뜨리고도 결국 발해의 서쪽 일부만 차지한 것에 대한 자기 합리화

의 정서논리가 작용했다고 저는 추정합니다

그리고 어쨌거나 여진족 대부분은 10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백수십 년을 고려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이러니 금태조조차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한 것입니다

독산 18-03-09 12:38
고구려의 수도
소제 이후의 현토군(왕망에게 縣侯로 강작되기 전까지)-국내성(무순시 북, 고구려 서부가 공손씨에게 투항할 때까지)-환도(환인현)-평양(한반도 평양)...환도와 평양을 오고감... 양평(지금의 철령시 노성 북쪽, 광개토왕과 장수왕 초기)-평양(한반도, 장수왕 중기 이후)-장안성(지금의 요양시, 수당과의 전쟁을 맞은 수도)
수나라의 일차 침공 시 장안성으로의 천도를 미처 알지못한 수나라 수로군은 한반도 평양으로 들어오는 뻘짓을 벌임.
2차부터는 요동반도 남단의 비사성으로 상륙, 북진하여 장안성(요양시-옛 조선현)으로 향할 계획이었음.
우문술이 건넌 압록수는 지금의 청하로 평양 30리 못미치는 지점부터 살수를 거쳐 450리를 도주하는데 그 살수는 지금의 혼하 상류인 소자하(蘇子河)로 비정됨.
이곳은 명청교체기에 싸르허 전투로 유명한 곳이며, 당시 둑을 막았다가 터트려 명나라 군사와 물자가 수장되기도 하였음.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야사(野史)나 시문(詩文)에 전해지는 바로는 살수의 둑을 막았다가 터트리는 양상과 매우 흡사함.
고대의 도하(渡河)는 평상시에는 하류로도 배를 이용하여 건널 수 있으나, 대규모 군사작전은 대안(對岸)의 저항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폭이 좁고 수심이 낮은 상류쪽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
요하는 고대에도 동서로 많은 지류들이 유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철령시 이남은 요해(遼海)로 불릴 정도로 넓고 깊었음(명사지리지 삼만위 참조).
<지리지>에 보이는 '..入海'의 '海'는 반드시 바다로 들어간다는 의미는 아님.
서안평에 이르러'..入海'를 안평(단동시 부근)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안평이 서안평과 같을 수는 없고, 역시 이곳의 海는 고대의 요해(遼海)로 보아야 함.

따라서 고대 도하처로 유명한 요대(遼隊, 遼隧)도 동요하와 서요하가 합류한 지점에서 조금 내려오는 곳(철령시 통강구 부근, 通海口라고도 함)이 될 수밖에 없고 그 이남은 청하, 혼하, 서쪽에서는 유하 등이 쏟아져 들어와 수심이 깊어지고 강폭이 넓어져 대규모 군사의 도하처가 될 수 없다.
또한 요양시를 옛 양평으로 비정하지만 양평은 상류에 있는 도하처(遼隧) 북쪽에 있으므로  어울리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증빙자료가 있으나 모두 밝힐 수수는 없고, 대체로 지금의 철령시 노성(老城)북쪽에 있엇다는 점만 밝혀둔다.

덧붙이고 싶은 점은 집안시를 국내성으로 비정하는 점에 관한 것인데.
'단단대령'은 지금의 천산산맥이며 그 이서의 영동7현 중의 '불내'가 집안 지역에 있었습니다.
낙랑군 조선현을 한반도로 비정하는 양수경은 무구검비의 쌍비(雙碑)설을 주장하여 이를 인용한 이병도를 비롯한 후세의 학자들을 오도하고 있으나, 위진(魏晉) 시대나 신라의 금석문을 보면, '刻而書'(깎고 적는다)는 일반적인 서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무구검비는 '환도산의 돌을 깎아 불내에 새김'이란 의미 외의 것이 아니다.
즉, 무구검비가 발견된 곳이 불내인 것이다.
집안이 불내인 방증은 그밖에도 무수히 들 수 있으나 생략한다.
낙랑군 한반도설은 동천왕의 평양 천도(遷導)기사 자체만으로도 이미 부정되어야 했으나, 자국의 기록을 거들떠보지 않는 사이비 학자들에 의해 아직까지 연명되고 있을 뿐이다.
감방친구 18-03-09 12:42
여기에도 쓰셨군요
좋은 견해 감사합니다
이렇게 풍부하고 활달한 견식을 갖기까지 그 노고가 상상되기에 존경스럽고 부럽습니다
history2 18-03-09 12:46
* 님이 빨리 연구성과를 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절대 비난이나 다른의도가 아닙니다....미력이나마 답을 구하시면, 자연지형을 검토해서 님에게 알려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사서로나 자연지리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이론으로 정립되고, 여러가지로 혼란스러운 주장이 난무하는 가운데, 군계일학 같은 이론이 되어 학술지에 실리기를 기원합니다
감방친구 18-03-09 12:54
아직 사서를 다 안 봤습니다
사서 ㅡ> 고지도&실지형 ㅡ> 유적유물 ㅡ> 학계(주류&비주류&역사블로거) 주장 ㅡ> 재검증

제가 본 사서는
신당서, 삼국사기, 통전, 자치통감, 요사, 원사, 금사, 고려사, 명일통지, 명사, 동국통감, 도서편, 만주원류고, 성경통지, 성경강역고, 길림통지, 독사방여기요 등이며

이들 사서를 다시 검토해야 하고
다른 사서들을 또 봐야 합니다
history2 18-03-09 12:51
사실, 진입장벽이 너무 높은 사학계다 보니, 저도 열심히 사업을 해서 하버드 동양사학과 대학원 과정이나 그외 초빙에 진학을 하려고 생각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학술대회에서 말한마디 못하겠더군요(기회도 안주지만)........(사실 윤내현 교수님도 그런 케이스 입니다. 사학을 위해 본인이 번 돈을 가지고, 본인돈으로 책을 쓰고 모든 주장을 하셨지요...결국 교수직으로 버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았다고 항상 얘기를 하셨습니다,,,누구도 지원을 안해주니....''주류가 아니면 연구재단 + 학교 어디도 지원을 안해줍니다''  사학을 함이 오히려 가진 돈을 모두 써 버리는 결과가 된다는 현실이 안타깝더라고요) 
저는 학원장의 자격으로 몇번 참석을 했지만, 옵저버 취급도 못받기에 억울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제가 사료비판이 상당히 약한데,,,님이 꼭 그런 부분에서 온전한 결과물을 내 놓으시길 진심 기원합니다
history2 18-03-09 12:53
저는 교육학 박사수료를 가지고 있는데,,,전혀 안먹히더군요...저도 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뭐 저야 취미로 이런저런 이론을 취합해 가지고 간 정도였지만,,,, 그런데도 억울했으니 진짜 억울한 사람 많았을 겁니다...윤내현 박사님은 사업으로 성공해서 그런 이론을 냈는데, 이래저래 자금이 부족한 분들은 그저 선배들의 지도에 불응하면 연구비 등 모든 사적영역에서 매장을 당하는게 사학계의 현실입니다.
감방친구 18-03-09 12:56
제가 보기에 님 정도의 재력이면 저는 역사연구에 전적으로 투신하겠습니다

학부ㅡ유학해서 석ㆍ박사
그리고 미국에서 연구하겠습니다
저라면 말이죠
history2 18-03-09 13:01
사실 우리가 쉽게 강단을 욕하지만, 옆에서 보면 정말 불쌍하신 분들(보따리 장사)이고, 안타깝습니다. 또 계속 주위에서 강단쪽 이야기만 하면 어느새 생각이 물들어 버리지요....아무리 청년이라도 ..... 사실 윤내현 교수님은 정말 정말 자금력이 되신 분이셨습니다...그래서 하버드 동양사학과에서 상나라 연구도 하셨구요...참! 가장 순수해야 하는게 역사인데, 그렇지 못합니다..암튼 윤내현 교수님이 평창동 사실 때 정말 놀랬지요...그 저택의 규모에...지금은 보라매공원 쪽 주상복합에 사시지만(이 말씀을 드리는건, 윤교수님을 비난하는게 아니라 그 분도 정말 대단한 의지력과 자신의 자금을 투자할 만한 용기를 가진 분이심을 말씀드리는 것 입니다. 일반 부자와는 다른,,,그리고 또 전형적인 자수성가형입니다...원래 집안은 되게 가난했습니다 ) 저도 그냥 취미로나 해야지 하는게,,,사실은 자금의 부분이 가장 큰 영역 입니다....요새는 사업도 예전같지 않아 제 꿈이 점점 날라가고 있구요
history2 18-03-09 13:05
그놈의 아들 둘 때문에......저도 당장이라도 다 접고 가고 싶네요 ....
history2 18-03-09 13:06
사실 님같은 투지와 지혜가 있으신 분들이 가야지 저는 소양 부족입니다...솔직히
키보드 배틀이나 하는
감방친구 18-03-09 13:12
너무 광범위하게 건드시는 거 같아요
저는 딱 고려 전기 서북계에 집중했습니다
여기에서 위로 뻗어가 발해ㅡ고구려ㅡ고조선으로 갈 계획입니다

그리고 제 견해는 사료에 근거한 최하한선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고려 전기 서북계인 잉커우~혼하 중상류~범하/청하~장춘 라인은
사료 교차 비판을 통한 최하한선으로
사료에 근거할 때에 고려 전기 서북계는 이 선 밑으로 내려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 님이나 위의 독산님처럼 더 윗 라인을 고찰하는 분들의 견해는 우리 역사 재정립에 도움이 됩니다
history2 18-03-09 13:16
아마츄어의 한계이고, 또 제 지혜의 한계라고 솔직히 고백합니다....그리고 투지부족....사실 님처럼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하는게 아니라, 힘든 사업의 도피처로 키보드를 두드리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거지요....한때 홍산에 그 유물에 문자만 있다면, 무조건 유물을 구입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해석도 못하는 주제에 그런데 의뢰해도 아무도 해석을 안해주고, 하는 사람도 없다 보니 방치되어 가고...그 유물같이 제 꿈도 그냥 사장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님은 참 젊으신 거에요^^ 생각과 이상과 투지 ....멋집니다. 진심
history2 18-03-09 13:23
조언 감사드립니다...근대 교차검증 정말 어렵더군요....^^ 전 솔직히 남의 검증 베끼다가 자기 모순에 빠지는 정도인데요 ...몇몇 분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그래도 님이 계셔서 여기가 부흥보다 수준이 좀 더 높다 여기고, 남아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저는 그냥 정보 전달자나 하면서 20대 어그로나 끌까하는 생각입니다.
history2 18-03-09 13:25
정말 요새 상황에선, 하버드...그것도 참 멀리간 꿈이 되었습니다...그냥 윤내현 교수 흉내내려 한 겁니다.
진짜 님같은 분들이, 어떻게든 빛을 봐야하는데 안타깝네요...요 며칠의 제 생각이었습니다
독산 18-03-09 13:56
예왕(濊王)과 전왕(滇王)이 창해군과 익주군의 군왕(郡王)이듯이 처음 고구려는 소제가 설치한 현토군의 군왕이었습니다.
당연히 현토군에는 태수가 존재하지 않았음.
왕망의 흉노정벌 출병을 거부한 후 현토군 새외로 나가고 고구려가 있던 곳은 고구려현으로 강등됨.
처음에는 명부 상의 고구려현에 호구가 적을 두고 있었으나, 무순시 북쪽(지금의 청하 상류 북쪽)으로 옮겨있던
고구려는 이내 독립하고 현토군과 절연한다.
그것이 한서 지리지 현토군과 후한서 군국지 현토군의 호구 비교에 잘 트러나 있다.
한서 지리지의 그것은 고구려현을 포함한 3현  2십2만여명이고, 후한서의 그것은 요동군에서 추가로 3현을 끌어왔으나 4만3천에 불과할 뿐이었다.
즉 이 시점은 장부 상으로 잡혀있던 고구려 호구가 완전 탈락되어 부득이 요동군에서 호구를 충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태조대왕 때인가 동으로 개마, 옥저 들을 탈취하고 남쪽으로는 살수(지금의 혼하)까지 세력을 넓힌다.
그 이전에 좀 더 남하했는데, 광무제가 즉위하며 해로로 요동반도로 상륙하여 살수 이남까지 탈환한 것이, 고구려 남쪽 국경이 살수로 되는 배경이다.

한참 세력을 넓히던 고구려는 공손씨의 흥기와 함께 발기 등의 형제분란을 겪으며 서부를 떼어낸채 환도성(지금의 환인지역)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이른바 '갱작신국'(更作新國)이다. 

이 환도성이 있던 환인지역은 요동(즉, 양평)에서 동쪽(정확히는 동남쪽)으로 천리 떨어져 있었다.(遼東之東千里;후한서 고구려, 삼국지 고구려전))
원래 최초의 거주지인 현토군(후의 고구려현)은 환인에서(서북쪽으로) 천리+200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2차 거주지였던 국내성(압록수 북쪽, 즉 청하 상류의 북쪽)까지는 그보다 짧을 것은 당연하다.

4차로 무구검의 공격후 환도성을 쓸 수 없어 한반도 평양으로 이전하는 것이 동천왕 때의 천도이다.
한반도의 평양과과 환도를 오고가던 고구려는 모용씨의 쇠퇴와 함께 평주목으로써 치소를 양평으로 하게된다.
광개토왕 비문의 비려(거란) 정벌을 마친뒤 양평도 거쳐 동쪽으로 귀환한다는 것은 광개토왕의 치소가 양평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또 비문에 '왕이 내려와 평양을 순수하였다'고 하는 점은 한반도의 평양이 결코 당시의 치소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순수'란 변방을 돌아보는데 쓰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왕건군 등은 결코 광개토왕 시대에 고구려가 요동군을 점유할 수 없었다고 강변하지만, 쓰레기 입론일 뿐, 그 근거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장수왕 초기까지 양평에 있던 고구려 왕은 한반도 평양으로 다시 도읍을 옮긴다.
이것은 이오(李敖)라는 북위의 사자가 평양(한반도)을 방문한 것을 위서(고구려전)에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잘못 전해져 요사 지리지(동경도)는 양평=평양이라고 오기하였던 것이다.
원대의 요사 편찬자들에게는 광개토왕이 있던 양평이 곧 북위 사자 이오가 방문한 평양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수왕이 중도에 양평에서 평양으로 옮긴 사실은 삼국사기 외에는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사 지리지가 오전(誤傳)한 전말이다.

아무튼 남진정책을 펴던 고구려는 마지막으로 장안성으로 천도한다.
천남산, 천남천 형제의 비문에 요동의 조선, 또는 요동의 평양이라고 나오는 바로 그곳이며, 지금의 요양 부근지역이다.
이 지역은 명나라 때 요동도지휘사사가 설치되면서, 마치 동경(양평)=요동도지휘사사 인 것처럼 인식되어 양평=지금의 요양으로 비정하는 것이 이제는 통설이 되었지만, 후한 광무제가 낙랑을 탈환하기 위해 요동반도로 상륙하듯이 원명교체기에 명나라도 요동반도로 상륙하여 그 세력을 넓혀가는 것으로 양평이 지금의 요양이 아닌 점은 여기서 밝힐 수없는 수많은 증거들이 있다.
고구려의 장안성은 비록 그 이름이 중국 역대 왕조의 수도였던 장안성과 같지만, 고구려가 천도할 때에는 오직 고구려만이 장안 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후에 당나라도 장안이란 이름의 도읍을 사용했기에 혹 이러한 이유가 장안성을 평양으로도 부르게 된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동 시대에 장안이란 이름의 도읍이 2곳 존재하게 된다면,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장안성을 평양성으로도 부르게 됨으로써(그 이유야 어떠하든) 야기된 혼란은 매우 클 것이다.
우리는 옛 사료를 읽으며 많은 동명이소(同名異所), 압록 평양 한성 패수 조선 등의 장소를 같은 곳으로 이해하려는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잘못 읽게되면, 커다란 오해에 빠지게 된다.
이들 지명의 올바른 비정이야말로 옳은 역사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도배시러 18-03-09 17:09
고구려 남하정책의 증거에 대해 확인을 해보셨는지 ?
관련된 문헌근거가 없는것으로 압니다
history2 18-03-09 18:09
양평위치를 댓글에서는 철령으로 보셨는데,,,이 부분이 너무 궁금하네요 ^^ 일반적으로 양평은 요양 이며, 공손연의 치소였고 등등 인데 그러면 현)철령은 너무 북쪽이 아닌지요? 지도를 보다보니 궁금합니다
history2 18-03-09 18:12
부신시 청하문 요동성은 전한시대 양평이 옮겨온 곳으로 왕망은 창평(昌平)이라고 불렀고, 후한시대 요동속국이 되었던 창려국(昌黎國)이 있던 곳입니다. 또한 요동국왕 공손탁의 도성인 것입니다. 238년 위나라에 포위당하여 3개월 동안 함락당하지 않고, 성의 기아로 인하여 손자인 공손연이 도망 나가다가 잡혀서 멸망했습니다. 

청하문 요동성은 당나라 요동성주를 거쳐 발해 동평부 이주 관할이었고, 요나라 때는 이 양평성에 탕주를 두었다가 요동반도로 옮기고, 대신 성주 동창현(同昌縣)을 둡니다. 현재, 청하문시를 흐르는 강이름이 탕두하인데 탕주하(湯州河)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삼한비기(三韓秘記)에 당나라 요동성은 창료(昌遼)였다고 했습니다.
도배시러 18-03-09 18:18
후한의 양평은 노룡현 서남에 위치합니다.
후한의 요동군 신창현의 위치는 북경 베이징이죠
history2 18-03-09 18:13
요동성이나 양평성이 같은 성이었다는 사료는 의외로 <삼국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위.진시대에 고구려가 수복하고 양평성을 요동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구려 최대의 성이 되었으나 수.당과 싸워 패한 후 당나라시대에 평양성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옮긴곳이 이곳이다.
연암 박지원은 요동을 지나가면서 요동성의 연혁에 대한 아래와 같은 설명을 남겼다. “고구려의 요동성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요동벌 중간에 있다. 원래 조선의 땅이었다.
중국 전국시대(BC 5세기-221) 7웅 중 하나인 연(燕)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이곳을 차지한 후 양평(襄平)성을 축조하고 요동군부(遼東郡府)의 중심지로 삼았다.
서한(西漢) 왕망(王莽) 시기에 이 성을 창평(昌平)성으로 고친 적이 있지만, 이후 600년 동안 양평성으로 불려왔다. 404년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후 그 성을 요동성이라 불렀다.”
도배시러 18-03-09 18:24
연나라 양평과 한나라 양평은 달라요.
춘추시대의 요동은 황하 하류인 청주입니다.
요동을 언제 청주라고 했는지 추적이 필요하죠
history2 18-03-09 18:18
『광개토왕비』 영락 5년(395)조에 보이는 길 이름이다. 요양(遼陽)을 한나라 때에 양평이라 불렀다. 따라서 양평도는 요양에서 고구려에 이르는 길이다. 당시 국내성(國內城)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북도로서 북으로 노령산 입구에서 서쪽으로 환인을 가로질러 가는 것으로 이 길은 지세가 평탄하여 왕래가 비교적 용이한 곳이다. 또 하나는 남도로써 순판분령을 따라 남하하여 패왕조산성을 거쳐 환인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산길로 험하여 넘기 힘들다.

두 길은 모두 환인을 거친 이후 다시 남북으로 갈린다. 북도는 현재의 무순에 이르게 되며 남도는 현재의 요양에 이르게 된다. 북도를 현도도라 하며 수나라가 고구려를 쳐들어 올 때 좌군(左軍)의 진군로였다. 양평은 오늘날의 요양이다.

따라서 양평도란 남도를 가르키는 말이며, 수양제가 고구려를 쳐들어 올 때 우군(右軍)이 이 길로 진군했다. 광개토왕과 비려(碑麗)의 싸움은 태자하(太子河) 상류에서 벌어졌고 이곳은 바로 두 길의 중간지점으로 양평도에서 몇 십리 밖에 안 된다.

양평도는 비교적 평탄하여 전쟁 후 호태왕과 군대는 그 많은 생구(生口)와 수를 셀 수 없이 많은 우마군양을 데리고 이 길로 귀환하였다.

환인에 이른 후에도 같은 이유 때문에 반드시 북도를 통과했다. 그 많은 소와 양을 끌고 우마가 넘기 힘든 준령, 즉 남도를 광개토왕의 군대는 이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history2 18-03-09 18:27
도배시러님 제가 드리는 말씀은 독산님이 양평을 철령으로 비정을 하셔서요...물론 여기서는 요양으로 되어 있네요 ...사실 양평 위치도 제게는 큰 위미가 있는 곳이어서요
도배시러 18-03-09 18:37
연나라 양평의 위치는 저의 집중탐구영역이죠
history2 18-03-09 20:56
도배시러님의 말씀은, 찾을 수 잇는데, 양평이 철령이라는 건 아무리 교치가 많이 되었어도 처음듣는거라..... 사실 이 교치 때문에 전 정말 미치겟거든요.....암튼 철령이 양평이 될 가능성이 있나요?
도배시러 18-03-09 21:34
전한의 양평은 아직 답이 없네요. 찾지 못했네요
history2 18-03-09 21:43
아 네,,,그럼 저는 요나라 행정구역과 발해행정구역, 금나라 행정구역 이나 더 공부하려고요.....신주가 두개가 있고, 교치가 되고,제대로 된 지도도 없고 알아야 이론을 펼칠텐데 너무 힘드네요
도배시러 18-03-10 01:28
[수경] 요수, 양평
大遼水出塞外衛白平山, 東南入塞, 過遼東襄平縣西.
대요수(大遼水)는 새(塞) 밖의 위(衛) 백평산(白平山)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새(塞)로 들어간 후
요동군(遼東郡) 양평현(襄平縣) 서쪽을 지난다.

===> 요양의 서쪽을 지나가는 하천은 ? 태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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