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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17일 (수)

[한국사] 정안국을 비롯한 발해부흥운동의 전개 상황

감방친구 조회 :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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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926 년 발해 멸망
발해인들(지배층 중심) 다수 거란 상경임황부, 중경대정부 지역으로 사민

나.
928 년 동단국 수도 천도
ㅡ 동단국의 성격 : 발해의 국체를 그대로 유지한 괴뢰국. 소수의 거란인과 다수의 발해인 구성의 지배체제.
ㅡ 천도 이유 : 활발한 발해 부흥 운동에 따른 반란. 거란과 거리가 멀어서 반란 세력을 토벌, 통제하기 어려웠음
ㅡ 천도 : 홀한성 (천복성) ㅡ> 요양
ㅡ 동단국인 사민 지역 : 현 태자하 일대.

다.
발해 부흥 운동

1) 후발해 (926년~938년)
ㅡ 건국 추정.
ㅡ 대씨
ㅡ 금 건국 시까지 줄기차게 계속된 발해 부흥운동의 시발점으로서의 의의
ㅡ 정보 없음

2) 정안국 (938년~986년)

ㅡ 발해 부흥운동 계승
ㅡ 발해 귀족 열씨, 이어 발해 귀족 오씨가 승계
ㅡ 토벌된 후 역시 상경임황부 등지로 사민
ㅡ 1대 열만화
ㅡ 2대 오현명 (976~986)
ㅡ 원흥은 오현명 재위 시 연호
ㅡ 원흥 6년은 981년

3) 연파국 (975년~995년)

4) 올야국 (995년~996년)

ㅡ 오씨
ㅡ 토벌된 후 999 년 빈주 지역으로 사민
ㅡ 올야국 오소경 처자를 거란에 바친 게 여진족

5) 흥료국 (1029년~1030년)

ㅡ 대연림
ㅡ 거란의 요심 지역에 대한 가혹한 징세가 원인

6) 고욕국 (1115년 2월~7월)

7) 대발해 (1116년 1월~5월)

ㅡ 거란 멸망기
ㅡ 금에 의해 토벌, 흡수됨

라.
정안국과 당시 정세 상황

1) 정안국
ㅡ 요사에는 여진(여직)으로 나타남
ㅡ 요심 지역을 수시로 침입, 약탈

2) 정안국의 외교 활동
ㅡ 970 년 송 태조 개보 3 년 ‘여진 사신’ 편에 표를 올림(열만화)
ㅡ 981년 송 태종 태평흥국 6년(=정안국 원흥 6년) ‘여진 사신’ 편에 표를 올림(오현명)
ㅡ 989년 송 태종 단공 2년 ‘여진 사신’ 편에 표를 올림
ㅡ 991년 송 태종 순화 2년 ‘여진 사신’ 편에 표를 올린 후 더 이상 오지 않음

3) 거란의 대응
ㅡ 970 년대 이후 여진의 요심 지역 약탈, 침입이 심해지자 군사적 대응으로 수시 토벌
ㅡ 984 년 이후 대대적 토벌 감행
ㅡ 특히 986 년 대토벌에서 여진 세력 괴멸시킴(포로 10여 만 명, 말 20여 만 마리 노획. 討女直所獲生口十餘萬、馬二十餘萬及諸物.)
ㅡ 993 년 고려 침략. 여진과 거란의 경계인, 거란의 동쪽의 압록강의 동쪽 땅(여진국의 땅)을 고려에 할양하여 강화협정.

4) 고려의 상황과 대응
ㅡ 934년, 태조 17년

“가을 7월. 발해국 세자인 대광현(大光顯)5)이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해오자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종실의 족보에 올렸다. 또 특별히 원보(元甫) 벼슬을 주어 백주(白州)를 지키면서 집안 제사를 지내게 했다. 따라온 막료들에게는 벼슬을 주고, 군사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겨울 12월. 발해 사람인 진림(陳林) 등 160명이 귀부해왔다. 이 해에 서경(西京)에 가뭄과 누리의 피해가 있었다.”

ㅡ 광종, 재위 949~975년. 거란 동경에서 안북부까지 수백 리 개척.

ㅡ 979 년, 경종 4년

“이 해 발해 사람 수만 명이 투항해왔다”

ㅡ 984년, 고려 성종 3년

“형관어사 이겸의에게 명하여 압록강 기슭에 성을 쌓아 보루로 삼게 했는데 여진(女眞)이 군사를 동원해 저지한 후 이겸의를 사로잡아가니 군대가 궤멸되어 성을 쌓지 못했으며 귀환한 군사는 3분의 1에 불과했다.”

ㅡ 985년, 고려 성종 4년

송나라가 거란(契丹)을 정벌해 연주와 계주지방[燕薊]을 수복하려 하면서, 우리나라가 거란과 접해 있어 자주 침공을 받는다는 이유로 감찰어사(監察御史) 한국화(韓國華)편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보내왔다.

ㅡ 조서 내용 생략 ㅡ

왕이 시일을 끌며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자 한국화(韓國華)가 협박과 회유를 병행하며 설득했다. 왕이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출동시켜 서쪽에서 만나겠다고 약속하자 한국화가 그제서야 돌아갔다. 앞서 거란(契丹)이 여진(女眞)을 칠 때 우리 영토를 거쳐 갔는데 이 때문에 여진은 우리가 거란을 끌어다가 분란을 일으킨 것으로 여기고 송나라에 말을 바치러 가서, 고려가 거란과 합세해 자기 백성들을 납치해 갔다고 무고했다. 한수령(韓遂齡)이 송나라에 가자 송나라 황제는 여진이 올린 급보를 알린 목계(木契)를 꺼내어 한수령에게 보이면서, “본국에 돌아가거든 포로로 잡혀간 여진 사람들을 돌려보내도록 전하라.”고 일렀다.

ㅡ 991년, 고려 성종 10년

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 곳에서 거주하게 했다.

ㅡ 994년, 고려 성종 13년

“작년(993) 거란의 침략 행위를 보복하기 위해 원욱(元郁)을 송나라로 보내 원군을 요청하도록 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북방 국경이 가까스로 평안해진 마당에 경솔한 군사행동은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거절한 후 사신을 후하게 대접만 하고 돌려보냈다. 이 일 이후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ㅡ 994년, 고려 성종 13년

여진을 소탕하여 강동 6주 개척

마.
11세기 거란과 고려의 국경으로서의 고려 서북계

ㅡ 서단 : 현 잉커우 근방(학야현, 또는 암연현)
ㅡ 북단 : 현 장춘 서쪽(신주)

바. 11세기 고려의 북계와 여진국의 위치

ㅡ 고려의 북계 : 현 하얼빈 지역(발해 상경용천부)
ㅡ 여진국 : 현 하벌빈 ~ 흑룡강
ㅡ 당시 여진국의 상태 : 고려의 속국내지 간접지배지. 귀덕장군 직위 세습.

사.
991 년

ㅡ 정안국이 송에 마지막 사신을 보낸 해
ㅡ 고려 성종이 여진족을 내쫓고 압록강 정지 작업을 완료한 해
ㅡ 고려는 이미 여진과 거란 사이의 땅인 혼하 지역을 980 년대, 그러니까 거란의 986 대토벌 이전에 차지하고 있었음

아.
올바른 이해

ㅡ 10 세기 활동한 여진과 발해부흥세력은 특별한 구분이 없이 여진으로 통칭되는 등 구별이 없었음
ㅡ 즉 10 세기 여진은 결국 발해유민(발해 귀족, 발해 지방민, 지방 소수종족 등)이었음

ㅡ 1018 년의 "정안국(定安國) 사람인 골수(骨須)가 도망쳐 왔다."는 기록을 "정안국에서 도망쳐왔다"거나 "정안국에서 사신으로 파견했다"고 말을 바꾸는 것은 왜곡이지 해석이 아니다.
ㅡ 발해 부흥 세력은 여진족에 섞여 있으면서, 혹은 여진족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하면서 기회를 엿보며 끊임 없이, 그것도 발해 멸망 근 200 년 후인 1110 년대까지 발해 부흥 운동을 하였다

ㅡ 1018 년의 정안국 사람 골수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해해야지 마치 이 때까지도 정안국이 일정한 국토와 국도를 지니고, 국체를 지니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그것도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또 못 하면서. 게다가 기록까지 왜곡하면서 하는 주장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ㅡ 오히려 옛 정안국 출신, 또는 정안국의 일종의 임시정부 출신이라고 해석하면 당시 정황에 걸맞는다

자.
정안국의 위치

ㅡ 이는 상식적 수준의 이해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ㅡ 송나라에의 외교활동, 요사와 고려사의 기록이 서로 교차되므로
ㅡ 정안국은 요사와 고려사의 여진으로서 압록강 중상류 지역에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으며
ㅡ 거란의 986 여진 토벌
ㅡ 고려의 여진족 소탕과 압록강 정지 작업 완료 해인 991년 이후에 더 이상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않았으며

ㅡ 이 지역과 이 지역의 동쪽인 여진국의 땅을 고려에 할양해 고려가 또 여진족을 소탕하며 개척하여 고려의 땅으로 삼았고
ㅡ 또 이후 여진족의 거의 모든 인원이 직접 고려 백성이 되거나 고려에 빌붙어 살았으므로

ㅡ 이러한 사실의 교차를 통하여 정안국은 혼하 중ㆍ상류에 있었다가 986 토벌 후 그 일부가 혼하 상류 지대에 남아 있었고
ㅡ 다시 991 고려의 압록강 정지 작업이 완료되며 동북으로 쫓겨난 것이다

비좀와라 18-03-04 16:10
지명의 변천과정을 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것이 동진 한다는 것이죠.

마늘의 원산지는 많은 설이 있지만 파미르 고원이라 추정하는 학설이 우세하고 유럽 특히 러시아에 마늘을 전달한 것이 몽골족 입니다. 알다시피 몽골족은 후일 생성된 종족으로 원래는 고구려의 방계로 고조선 계열이라 봐야 타당 하다고 봅니다.

고조선은 원래 파미르나 티벳지역에 성립이 되었다고 봐야 하는 것이 산해경에 조선천독이라 나오고 다시 천독과 천축(인도)는 같은 말이다 라고 하였단 말이죠. 초기 고조선은 천축지방에 설립이 되었다고 봐야하고 천축지방이 굉장히 넓어서 인도 / 네팔 / 부탄 / 사천 카자흐 지방등을 모두 포함 한단 말이죠. 이 지역이 전부 천축지방 입니다.

김정민씨가 주장하는 것은 고조선은 지금 티벳의 라사지방에서 설립되었고 지금도 저 지역에는 장당경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고 하죠. 고조선은 서쪽 어디엔가 설립 되어서 동진 하였다고 봐야 합니다.

얼마전 티브이 에서 재미있는 말을 알게 되었는데 발트해가 저쪽 말로는 동해라 하더군요. 여기서 트는 자주 생략되는 말이니 발해가 불러도 아무 이상이 없죠. 지금 발해라는 지명도 동해라는 뜻을 가졌을 것이 발해는 해동성국이라 불렸습니다. 해동과 동해는 같은 말이죠.

지금은 한반도의 동쪽을 동해라 하니 이 역시 지명이 동진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신라 역시도 해동국이라 불렸으니 결국은 발해와 신라는 같은 계열이고 신라의 원래 첫 출발지는 지금의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발해지역 즉 요동지역 입니다. 발해의 말갈족은 신라인들을 말하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카자흐스탄의 역사를 보자면 자신들은 원래 만주지역에 있다가 거란의 공격에 패해 망하고 두번의 부흥운동도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 몽골고원으로 이동하고 케레이트족이 되었다고 하죠. 이들은 확실히 발해유민이 맞긴 한데 이들이 정안국 계열이냐 아님 본 발해의 계열이냐는 좀 더 확인해 봐야 함요.
감방친구 18-03-04 23:57
김정민 씨 얘기는 다 들어봤는데 2/3는 걸러 들으셔야 합니다

다만
발해유민들이 초기에 상경, 중경 지역으로 사민돼 그곳 대다수 구성의 주민을 형성했으며

정안, 올야, 대요 등의 발해부흥운동 세력들도 상경, 중경, 그리고 올야는 다시 동경부 빈주 지역으로 사민되는 등의

요사 기록에 근거해 볼 때에

몽골 형성기의 그 주체세력 가운데 하나가 발해 유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겠습니다

몽골은 금나라를 아주 증오했죠
감방친구 18-03-04 23:59
저는 전원철 박사의 주장이 오히려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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