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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월 29일 (금)

[한국사] 고죽국과 화룡성의 위치

감방친구 조회 :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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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학계의 통설은 화룡성을 조양시에 비정합니다. 아래에 도배시러님이 조양시가 아니라 하북성 난하 유역의 옛 고죽국 자리에 모용선비와 후연ㆍ북연ㆍ북위의 화룡성이 있었고 고구려 장수왕이 북위의 함락되기 직전의 화룡성을 구제하여 그 황제 및 지배층, 또 그들의 재물을 고구려 내지로 옮겼던 사실에서 장수왕의 고구려 군사는 지금의 조양시가 아니라 난하까지 왔음을 제시하였는데 수긍하거나 이해하지 못 하는 이들이 있고, 또 있으리라 보여서

요사 지리지, 위서 지형지, 수서 지리지의 관련 기록을 알아보고 이해하기 쉽게 연도까지 찾아서 표시하고 숫자를 달아서 구분하여 편집하였습니다.

논리로써 설명을 하여 완성된 글을 제시하고자 하였으나 그리하면 글이 길어져서 대중 커뮤니티 특성상 가독성이 떨어지고 이에 읽지 않을 듯 하여 사서 기록 정리분 위주로 게시합니다.

순서는 요사 지리지를 먼저 제시하고 뒤에 위서 지형지와 수서 지리지를 제시하여 요사 지리지의 내용이 위서 및 수서의 지리정보와 일치함을 보이고자 배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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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요사 지리지

<남경도>

0. 평주(平州) 영주(營州)

1. 원래 상(商) 고죽국(孤竹國)이다.
2. 진(秦)에서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
3. 한(漢)은 창려군(昌黎郡)으로 삼았었다.
4. 전연(前燕) 모용황(慕容皝)은 이곳에 도읍을 옮겼었다.
5. 북위(元魏)는 영주(營州)를 세우고 창려(昌黎) 건덕(建徳) 요동(遼東) 낙랑(樂浪) 익양(翼陽)  영구(營丘) 등 6개의 군을 다스렸다.
6. 후주(後周)때에는 고보녕(髙寳寧)이 고보령(髙寳寧)이 점거한 곳이었다.
7. 수(隋) 개황(開皇) 년간(581년 ~ 600년)에 주를 설치하였고
8. 대업(大業) 년간(605년 ~ 618년)에 요서군(遼西郡)으로 고쳤다. 9. 당(唐) 무덕(武徳) 원년(618년)에 영주(營州)로 고쳤고
10. 만세통천(萬歳通天) 원년(696년 ~ 697년)에 처음으로 거란의 땅이 되었다.
11. 성력(聖厯) 2년(699년)에는 어양군에 붙여서 다스렸다.
12. 개원(開元) 5년(717년)에 돌아와 유성(柳城)에서 다스렸다.
13. 천보(天寳) 원년(742년)에 유성군(柳城郡)으로 고쳤다.
14. 후당(後唐 : 907년 ~ 960년)에서는 다시 영주(營州)로 삼았다.
15. 태조(太祖)가 정주(定州)의 포로들이 살도록 하였다. 현은 한 개이다.
16-0. 광령현(廣寧縣)
16. 한(漢)의 유성현(柳城縣)인데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 동북쪽으로는 해(奚)와 거란(契丹)과 맞붙어 있다. 만세통천(萬歳通天) 원년에 거란 이만영(李萬營)의 손으로 들어갔다. 신룡(神龍) 원년에 유주(幽州)의 경계로 이주하였다.
17. 개원(開元) 4년(716년)에 다시 옛 땅으로 돌아왔다. 요(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가구수는 3000이다.

<중경도>

18-0. 興中府(흥중부).
18. 옛날 孤竹國(고죽국)이며
19. 漢의 柳城縣(류성현)의 땅이다.
20. 慕容皝(모용황)이 柳城(류성)의 북쪽과 龍山(룡산)의 남쪽을 福徳(복덕)의 땅이라고 하여 龍城(룡성)을 쌓고 궁궐과 사당을 만들고 류성을 고쳐 龍城縣(룡성현)이라 하고 드디어 도읍을 옮겼고 和龍宫(화룡궁)이라고 불렀다.
21. 慕容垂(모용수)가 돌아와 거하였지만 후에 馮跋(풍발)에게 멸망당하였다.
22. 북위(元魏)가 취하여 遼西郡(요서군)이라고 하였다.
23. 隋나라가 髙保寧(고보녕)을 평정하고 營州(영주)를 두었다.
24. 수양제가 주를 폐하고 柳城郡(류성군)을 두었다.
25. 唐(당국) 武徳(무덕) 초기에 營州總管府(영주총관부)로 고치고 얼마 안있어 都督府(도독부)라고 하였다.
26. 만세통천 년간(696년 ~ 697년)에 李萬榮에게 함락당하였다.
27. 神龍(신룡)초기 (705년~)에 도독부를 유주로 옮겼다.
28. 開元(개원) 4년(716년)에 다시 돌아와 柳城(류성)에서 다스렸다.
29. 8년에 서쪽으로 漁陽(어양)으로 옮겼다.
30. 10년에 류성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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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위서 지형지

평주(平州) 요서군(遼西郡)

1.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537이며 인구수는 1905명이다.
2. 비여현(肥如縣), 두 한(漢)과 진(晉)에 속했다. 고죽산사(孤竹山祠)와 갈석(褐石)과 무왕사(武王祠)와 영지성(令支城)과 황산(黄山) 유하(濡河)가 있다.
3. 양락현(陽樂縣), 두 한(漢)과 진(晉)에 속했다. 진군(真君) 7년에 영지(令支)와 영자(令資)를 병합하여 속하게 하였다. 무력산(武歴山)과 복주산(覆舟山)과 림유산(林榆山)과 태진산(太真山)이 있다.
4. 해양현(海陽縣), 두 한(漢)과 진(晉)에 속했다. 횡산(横山)과 신부산(新婦山)과 청수(清水)가 있다.

영주(營州)

5. 영주(營州), 화룡성(和龍城)에서 다스린다. 태연(太延) 2년에 진(鎮)이 되었고 진군(真君) 5년에 고쳐서 설치하였다.
6. 영안(永安) 말(528~530 북위 효장제)에 함락되어 천평(天平) 초(534 ~ 동위)효정제에 다시 회복했다.

남영주(南營州)

7. 남영주(南營州), 효창(孝昌) 년간(525~528 효명제)에 영주(營州)가 함몰되었고, 영희(永熙) 2년(533 효무제) 설치하였다.
영웅성(英雄城)에 맡기어 통치하였다.
8. 창려군, 요동군, 건덕군, 영구군, 낙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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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수서 지리지 기주(冀州) 요서군(遼西郡).

1. 옛날에 영주(營州)를 설치하였는데 개황(開皇) 초(581 ~)에 총관부(總管府)를 두었고, 대업(大業) 초(605 ~)에 폐하였다. 다스리는 현은 1개이고 가구수는 751이다.
2. 류성현(柳城縣)
북위(北魏)에서 영주(營州)를 화룡성(和龍城)에 설치하여 건덕군(建德郡) 기양군(冀陽郡) 창려군(昌黎郡) 료동군(遼東郡) 낙랑군(樂浪郡) 영구군(營丘郡) 등을 다스렸고 룡성현(龍城縣) 대흥현(大興縣) 영락현(永樂縣) 대방현(帶方縣) 정황현(定荒縣) 석성현(石城縣) 광도현(廣都縣) 양무현(陽武縣) 양평현(襄平縣) 신창현(新昌縣) 평강현(平剛縣) 류성현(柳城縣) 부평현(富平縣) 등을 다스렸다.
3. 북제(北齊)는 오직 건덕군(建德郡)과 기양군(冀陽郡)을 남겨놓고 영락현(永樂縣) 대방현(帶方縣) 룡성현(龍城縣) 대흥현(大興縣) 등을 다스렸는데 그 나머지는 모두 폐하였다.
4. 개황(開皇) 원년에 오직 건덕군의 룡성현만을 남겨놓고 그 나머지는 모두 폐하였고 또한 군도 폐하였으며 현을 룡성현으로 바꾸었다가 18년에 류성현으로 고쳤다.
5. 대업 초(605~ )에 요서군을 설치하였다. 대방산(帶方山)과 독려산(秃黎山)과 계명산(雞鳴山)과 송산(松山)이 있다. 유수(渝水)와 백랑수(白狼水)가 있다.

감방친구 17-11-10 04:06
A-0
ㅡ 평주(平州)에 영주(營州)를 설치한 것입니다. 영주 (營州)는 營이 있는 州를 말합니다. 북방 및 동북방 이민족 및 이국가와 마주한 행정지역에 설치합니다.

A-3
ㅡ 후한 말기부터 조위시대를 이릅니다
ㅡ 여기는 여전히 요서군입니다
ㅡ 요서군은 진나라부터 그 이후로 전근대까지 계속 하북성 연나라/고죽국이 거점이며 그것이 동으로 확대되거나 줄어들었습니다
ㅡ 한나라 요서군도 이곳입니다 한서 지리지에 기록돼 있습니다
감방친구 17-11-10 04:23
한서 지리지 유주

요서군(遼西郡)

요서군(遼西郡),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작은 강들이 48개이고 모두 합쳐 3416리를 흘러간다. 유주(幽州)에 속한다. 가구수는 7,2654이고 인구수는 35,2325명이다. 현은 14개이다.
ㅡ차려현(且慮縣), 고묘(高廟)가 있다. 왕망은 서려(鉏慮)라고 하였다.
ㅡ해양현(海陽縣), 룡선수(龍鮮水)가 동쪽으로 봉대수(封大水)로 들어간다. 봉대수(封大水)와 완허수(緩虚水)는 모두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염관(鹽官)이 있다.
ㅡ신안평(新安平), 이수(夷水)가 동쪽으로 새(塞) 밖으로 들어간다.
ㅡ유성현(栁城縣), 마수산(馬首山)이 현의 서남쪽에 있다. 참류수(參栁水)가 북쪽으로 海로 들어간다.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린다.
ㅡ영지현(令支縣), 고죽성(孤竹城)이 있다. 망(莽)은 령씨정(令氏亭)이라고 하였다.
ㅡ비여현(肥如縣), 현수(玄水)가 동쪽으로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유수(濡水)는 남쪽으로 해양현(海陽縣)으로 들어간다. 또한 로수(盧水)가 있어 남쪽으로 현수(玄水)로 들어간다. 왕망은 비이(肥而)라고 하였다.
ㅡ빈종현(賔從縣), 망(莽)은 면무(勉武)라고 하였다.
ㅡ교려현(交黎縣), 유수(渝水)가 상류에서 새(塞) 밖에서 만나서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린다. 왕망은 금로(禽虜)라고 하였다.
ㅡ양락현(陽樂縣),
ㅡ호소현(狐蘇縣), 당취수(唐就水)가 도하현(徒河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ㅡ도하현(徒河縣), 망(莽)은 하복(河福)이라 하였다.
ㅡ문성현(文成縣), 망(莽)은 언로(言虜)라 하였다. ㅡ임유현(臨渝縣), 유수(渝水)가 상류에서 백랑수(白狼水)를 받고 동쪽으로 새(塞) 밖으로 들어간다. 또한 후수(侯水)가 있는데 북쪽으로 유수(渝水)로 들어간다. 왕망은 풍덕(馮徳)이라 했다.
ㅡ류현(絫縣), 하관수(下官水)는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또한 갈석수(揭石水)와 빈수(賔水)가 있는데 모두 남쪽으로 하관수(官)로 들어간다. 망(莽)은 선무(選武)라 했다.
감방친구 17-11-10 04:32
1. 진나라의 요동군은 실제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2. 진나라의 요서군은 그 영역이 작았습니다
3. 진나라의 요동군의 크기는 한나라의 요동군보다 작았는데 한나라의 요동군은 지금의 대릉하에서 요하 사이입니다
4. 한나라의 요동군은 한사군 설치 후 조금 더 동으로 확장된 듯 보입니다
5. 3과 4는 현 통설에 비추어 최대한 소극적으로 해석을 했을 경우입니다
6. 후한시대에 동쪽의 한군현은 고구려 등의 활동으로 서쪽으로 이동합니다
7. 후한말기에 가면 요동군과 그밖의 동쪽 군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합니다
감방친구 17-11-10 04:39
B-5~8
ㅡ 북위는 6진의 난으로 촉발된 내분으로 지금의 난하 이동에 대한 통제력을 한동안 잃습니다
ㅡ 영주의 화룡성을 잃자 지금의 하북성 보성시 수서현에 남영주를 설치하고 군현을 교치합니다
ㅡ 이 때 6개 군 가운데 성주군을 뺀 5개군만 교치됩니다

B-2. 평주 요서군의 동쪽은 비여현입니다 유수는 지금의 난하로 비정됩니다

B-1. 한나라 요서군과 북위 요서군은 같은 위치입니다
감방친구 17-11-10 04:49
그런데 한나라 요서군과 북위 요서군의 인구 차이를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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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지리지

요서군(遼西郡), 진(秦)에서 설치하였다. 작은 강들이 48개이고 모두 합쳐 3416리를 흘러간다. 유주(幽州)에 속한다. 가구수는 7,2654이고 인구수는 35,2325명이다. 현은 14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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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요서군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537이며 인구수는 1905명이다."

이 인구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다 죽었을까요? 교치되며 사민됐을까요?

수나라/당나라 때까지, 당나라가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전까지 난하, 즉 유수 근방까지 고구려 땅이었던 것입니다
감방친구 17-11-10 05:07
A-4~5
ㅡ 313 년에 모처의 낙랑군이 모용외에 의해 모처로 교치됩니다(장통, 왕준 기사)
ㅡ 당연히 동에서 서로 교치가 됐습니다
ㅡ 그런데 그렇게 교치되면서 3만여 가에서 1,000여 가로 인구가 1/30로 줄었습니다
ㅡ 평주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에서 한나라의 우북평군 지역에 설치가 되었습니다
ㅡ 한의 우북평군과 요서군은 지금의 난하로 비정되는 유수를 함께 끼고 있는 지역입니다
ㅡ 위나라는 즉 지금의 난하 유역에 동이교위를 설치하고 요동ㆍ창려ㆍ현도ㆍ대방ㆍ낙랑 5개 군국으로 평주를 설치합니다
ㅡ 즉 A-5의 기사는 이렇게 교치된 군들입니다
ㅡ 난하를 전후하여 요서와 요동을 비롯한 여러 군이 있는 것이죠
ㅡ 북주를 멸하고 수나라가 들어섰을 때에 수의 요서ㆍ요동이 얼마나 동진했겠습니까?
ㅡ 수의 요서ㆍ요동도 다 하북에서 멀리 가야 난하, 조금 더 가서 대릉하 근처입니다
ㅡ 대릉하 근처에는 수나라 병사들의 해골로 쌓은 승전탑이 있었습니다
ㅡ 즉 수ㆍ당의 군대가 지금의 북경지역에서 진군한 것으로 볼 때에 당시 고구려의 서쪽 경계는 난하 근방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ㅡ 수서 지리지(상기 C-1~3에 그 정황이 잘 기록돼 있습니다
ㅡ 수는 류성현 자리의 요서군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 했습니다 그 전의 나라인 북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ㅡ 이러함에도 대체 무슨 양심으로 지도 상에 영토를 그렇게 그린단 말입니까?
ㅡ 수서 지리지는 수의 요서군을 지금의 대릉하로 비정되는 백랑수(白狼水)까지 구획해 놓고 소속현을 지금의 난하 근처 고죽국 자리인 류성현 달랑 하나에 가구수가 751입니다
ㅡ 이게 무슨 장난입니까? 남한 정도의 크기의 땅에 호수가 751호, 인구누 겨우 3~4,000 명입니다
ㅡ 즉 백랑수(白狼水)가 있다고 했을 뿐 실제 수나라의 요서군은 난하에서 멈춘 것입니다
감방친구 17-11-10 05:22
이렇게 사서 교차검증을 통해 확인해 본 지리 고증은
고조선, 위만조선의 강역과 위치에 대한 학계의 통설까지 자연스럽게 의심하게 만듭니다

학계는 기원전 4~3 세기 이후로 중원계 물질문화가 지금의 요서와 요동(요양) 일대로 파급되는 것을

진개의 2,000 리 탈취에 맞물려서
ㅡ 연ㆍ진의 영역과 고조선ㆍ위만조선의 위치를 비정하는 데에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국시대에 중원에서 고조선으로 전란을 피해 이주해온 사람들,
그리고 위만 역시 연나라 사람으로서 연과 고조선의 국경지대이면서 고조선의 공지인 상하장에 머물며 망명자들로 세력을 규합해 쿠테타를 했다는 것을 간과합니다

아니 그 사람들이 패수를 넘자마자 그때까지 쓰던 중원계 의식주. 중원계 무덤, 중원계 무기를 다 버렸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상상이지요
도배시러 17-11-10 04:18
수고하셨습니다 ^^
감방친구 17-11-10 04:23
고맙습니다
제가 품앗이 좀 했습니다 ㅋㅋ
감방친구 17-11-10 05:34


이상으로 도배시러님 밥상에 숟가락 징하게 얹은 논증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ㅡ 요약 ㅡ

화룡성(aka 용성)은 고죽성이 있던 자리인, 난하 인근 류성현과 그 북쪽 용산 사이에 있었다
도배시러 17-11-10 06:25
힌트를 하나 더 드리면... 조양은 漢 양평 입니다. 좀더 추적해보고 올리죠~
감방친구 17-11-10 06:37
예, 그 소리는 여러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사 지리지에 근거하다 보면 중경도와 동경도의 많은 지역이 햔나라 양평ㆍ망평과 걸치는데 특히 동경도의 지리는 지금의 요동 요ㆍ심 지역과 일치하여서 조양ㅡ양평으로는 생각을 할 틈이 없더군요

게다가 요사 지리지는 안시성이 있던 안시현을 동경 남쪽 60리에 있다가 적고 있으니 이상하더군요
도배시러 17-11-10 06:44
아마 알게되면 요사지리지가 양반으로 보일 겁니다. ㅋ
일본서기 보다야 요사지리지가 훨 가치있죠.

요사지리지의 양평은 요중 부근인데...
더 서쪽에 양평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서가 있으니...ㅋ

뭐... 후한서 주석에 나오는
노룡현 서남에 있다는 양평이 확실히 서쪽이기는 합니다만.

주석문이 아니라 사서 원문에 나오는 양평 중에는 가장 서쪽이라능...
감방친구 17-11-10 07:08
한서 지리지, 수경, 요사 지리지를 다시 봤는데

요하, 즉 요수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린 거 같아요

대릉하도 그 물줄기가 합쳐지는 게 요수 묘사와 유사한 게 있죠

하지만 요나라 시대에 오면 양평을 조양시로 볼 때에 아주 복잡해지는 거 같습니다
감방친구 17-11-10 06:39
예, 올려주시면 저도 시비를 가려 논증을 해보겠습니다
감방친구 17-11-10 06:43
한나라 양평현은 왜 이렇게 넓은지ㅡ

한나라 양평현

ㅡ 탕주(湯州) 본래 한나라 양평현(襄平縣)으로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영봉(靈峰)•상풍(常豐)•백석(白石)•균곡(均谷)•가리(嘉利) 등 다섯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구수는 500이며 동경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져 있다.

ㅡ 귀덕주(貴德州) 영원군(寧遠軍)이 설치되었고 하급으로 절도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양평현(襄平縣)이 있던 곳으로 공손탁(公孫度)이 점거하였다.

ㅡ 귀덕주(貴德州) 귀덕현(貴德縣) 본래 한나라 양평현(襄平縣)이며 발해 때는 숭산현(崇山縣)이다.

ㅡ 광주(廣州) 방어(防禦)를 두었다. 한나라 때 양평현(襄平縣)에 속하였고 고구려 때는 당산현(當山縣)이며 발해 때는 철리군(鐵利郡)이었다. 태조가 발해인을 옮겨 거주시키며 철리주(鐵利州)를 세웠다.

ㅡ 동주(同州) 진안군(鎭安軍, 진원군逺)이 설치되었으며 하급으로 절도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양평현(襄平縣) 지역이며 발해 때는 동평채(東平寨)이다. 태조가 주를 설치하고 군 이름을 진동(鎭東)이라 하였다가 나중에 이름을 바꾸었다.

ㅡ 동주(同州) 동평현(東平縣) 본래 한나라 양평현 지역이다. 철 산지라 300호를 징발하여 채취와 단련 작업을 시켰고 그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였다.
도배시러 17-11-10 07:59
동주(同州) 동평현(東平縣)은 전한 요동군 평곽(平郭) 이네요. 철광석 산지
도배시러 17-11-10 06:47
그냥 키워드 하나를 가지고 모든 사서에서 검색추출해서 검토만 하면 되는것인데...
주류사학은 그런거는 관심없고  부족한 기록으로 만든 논문이나 후벼파고 있으니...

시대가 변했습니다. 키워드 하나로 모두 검색이 가능한 세상이죠.
부족한 사료는 탈탈 긁어 모아서 비교 할수있는 시대인데...
아직도 안하고 옛날 소설 논문에 의지하는게 안스럽네요.
감방친구 17-11-10 07:08
맞는 말입니다 클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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