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생이닷컴-해외 네티즌 반응 커뮤니티


HOME

 - 커뮤니티>동아시아 게시판
메뉴보기
  • 해외반응 -
  • 뉴스 -
  • 영상자료 -
  • 유머/엽기 -
  • 커뮤니티 -
  • 팬빌리지 -

회원

로그인

04월 21일 (일)

[한국사] 강동 6주의 위치와 고려의 서북계

감방친구 조회 : 2,214
검색목록 목록
혼자 철령위를 연구하다가 압록강, 내원성, 보주 등의 관련 기록을 요사와 고려사에서 찾는 짓을 일삼아 해오면서 대책 없이 관련됐다 싶은 기록을 긁어다 붙이며 모아두고 있습니다.

이게 뭐 하는 짓일까 싶을 정도로 다크서클까지 장난이 아니네요.

그러다 조금 전에 마구잡이로 복사한 자료를 쭉 훓어보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저보다 박식하신 역사애호가분들이나 전문연구자들께서는 익히 아실 내용일 수도 있겠으나 저는 처음이고 또 이곳의 많은 유저분들께 혹여 도움이 될까 일삼아 내용을 옮겨 봅니다,

고려사 선종 5년의 기록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고려사 세가

선종 5년(1088) 무진년 9월

태복소경(太僕少卿) 김선석(金先錫)을 요나라에 보내 각장(榷場)의 설치를 중지해 줄 것을 간청했는데 그 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람되게 여러 차례 간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으시니, 번거롭게 구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 일이라 두렵기는 하오나 저희들이 바라는 바를 어찌 입 다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과거에는 글을 올려 하소하면 만백성의 딱한 아룀을 들어주셨고, 조정을 향해 애달프게 호소하면 언제나 귀를 열고[四聰] 들어 주셨습니다. 다행으로 지극히 공정한 혜안을 가지신 황제의 치세를 만났으니 우리의 사정을 다시 낱낱이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삼가 살펴보건대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께서 조정에서 섭정하실 때 봉토를 획정해 내려주시니 저희들은 그 문덕에 감화해 복종하였으며 제후로서의 의무와 충성을 다해왔습니다. 이에 태후께서는 저의 충절을 어여삐 여기사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화표주(華表柱)가 있는 요동성 건너 강안(江岸)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옛 고주몽(高朱蒙)이 건넜던 개사수(蓋斯水)로 확정되었습니다. 또한 통화(統和) 12년 갑오년에는 사신으로 갔던 정위(正位) 고량(高良)이 다음과 같은 천보(天輔)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귀국한 바 있습니다. ‘고려국왕 왕치(王治)에게 알리노라.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의 보고를 살펴보고 경이 9월 초에 일꾼들을 동원하여 성책을 수축해 10월 상순에 준공했음을 알았다. 경은 천부적인 재능과 임기응변하는 지혜의 소유자로 상국을 정성으로 섬겨 왔으며 우리 조정에 사신을 보내 제후로서의 예의를 다해왔다. 마침 농한기를 이용하여 일꾼들을 두루 모아서 벌판으로부터 침구해 오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요해지에 진지를 구축했으니 이는 우리 조정의 뜻과도 부합되는 일이며 현재의 정세를 깊이 고려한 것으로 본다. 더군다나 저 여진은 진작 우리의 감화를 받아 귀순했기 때문에 감히 딴 마음을 먹지 못할 것이다. 축성을 속히 완수해 영원한 안정을 누리도록 하라.’
황제가 보내주신 그 간곡한 관심을 어찌 한시라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당시 저의 신하인 서희(徐熙)가 국경을 관장하고 있었던 바, 동경 유수 소손녕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서로 상의한 결과 각자 양쪽 국경을 분담하여 성책들을 축조하였습니다. 때문에 하공진(河拱辰)을 압록강 구당사(勾當使)로 안문(鴈門)에 파견해 낮에는 관문 바깥에서 동편 강안을 감시하고 밤에는 내성으로 들어와 숙영하게 했습니다. 마침내 상국의 위세 덕분으로 적들의 침구가 줄어들었고 그 후로부터는 별다른 대비 없이도 변방의 정세가 더욱 호전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성종께서 보내신 조서의 먹물이 채 마르지 않았고 황태후의 자상한 말씀이 어제 일 같은데, 상국에서는 갑인년 들어 갑자기 교량을 설치하고 배를 만들어 길을 터놓았습니다. 또 을묘년에는 상국의 주성(州城)에서 국경을 넘어 들어와 군사를 배치했으며, 을미년에는 궁구(弓口)를 설치하고 역정(驛亭)을 만들었습니다. 병신년 들어 황제께서는 우리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설물들을 철거하게 하고, ‘기타 잡다한 사안들의 경우에도 항상 규정을 지키도록 지시했다.’는 조칙을 보내셨습니다. 또 임인년에 상국에서 의선군(義宣軍) 남쪽에 매매원(買賣院)을 개설하려 했을 때 우리가 항의하자 시설의 보수를 중단했습니다. 갑인년에는 정융성(定戎城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북쪽에 새로 정찰용 막사를 설치하고는 우리가 항의하자 이미 오래전에 설치한 것이라고 회답해 왔습니다.
본국은 대대로 상국에 충성을 다했으며 해마다 조공을 바쳐왔습니다. 그런데도 사신을 여러 차례 보내 건의를 올렸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군사용 막사와 성책과 교량을 철거하지 않고 있으며 하물며 지금 와서 새로운 시장까지 만들려고 하니, 이는 선대 황제들의 유지(遺旨)와 어긋나는 일이며 저희들의 간곡한 정성을 측은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사신이 부지런히 수천리 길을 왕래했는데도 90년 동안 바쳐온 공물이 아무 보람이 없게 되었으니 모든 사람들이 탄식과 원망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선조의 뒤를 이어 상국의 울타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이 기쁨을 이제 막 더욱 분발시키려는 참에, 무슨 이익이 된다고 그러한 시설들을 설치하려 하십니까? 국경이 상국과 맞닿아 있어 상국에서 베푸는 덕화[灌瓜]를 본받겠다고 맹세하고 있으나 땅이 너무 협소해 춤출 때 소매도 제대로 돌리지 못할 형편입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하소하는 표문을 올렸으나 시설물을 철거하겠다는 허락을 얻지 못해 위로는 하늘이 두려우며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부끄럽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변방을 맡은 신하들의 그릇된 주장을 물리치시고 변방의 제후가 크게 근심하고 있음을 생각하시어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들판에서 마음 놓고 농사를 지어 다시 생업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시고 교역하는 각장(榷場) 시설[榷酤之場]을 금지시켜 새로 만들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그럼으로써 이 두려운 소란을 가라앉혀 주신다면 그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고 보답하리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찾으셨습니까?

이 표문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요와 고려가 각각 성곽을 짓고 마주보며 함께 여진을 방비하기로 하였는데 요나라 측에서 교량을 설치하고 정찰용 막사를 짓는 등 수상하게 구니까 항의하는 내용의 표문인데요

때는 서희가 담판에 의해 강동 6주를 넘겨받은 이후로 고려땅이 된 지 오래 된 때입니다.

저는 이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이 아닌 요하거나 그 지류일 것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기록을 찾아 읽고 있던 차에 이 기록도 복사를 해둔 것이죠

고려사의 요와의 경계에 있는 압록강은 푸를 록과 맑을 록이 섞여 있는데 요사에는 제가 확인한 바로는 다 맑을 록 자를 쓰는 압록강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보십시오.

"이에 따라 우리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화표주(華表柱)가 있는 요동성 건너 강안(江岸)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옛 고주몽(高朱蒙)이 건넜던 개사수(蓋斯水)로 확정되었습니다. "

졸면서 훓어보다가 정신이 번쩍 드는 게 아니겠습니까

"당시 저의 신하인 서희(徐熙)가 국경을 관장하고 있었던 바, 동경 유수 소손녕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서로 상의한 결과 각자 양쪽 국경을 분담하여 성책들을 축조하였습니다." 라는 말이 뒤에 있는 것으로 보아

요나라로부터 고려 땅으로 확정 받았다 하는 땅은 서희의 강동 6주와 관련된 것임이 틀림 없어 보입니다

그 확정 받은 고려의 땅은
화표주가 있는 요동성의 강 건너부터 개사수까지입니다

자 그러면 '화표주가 있는 요동성'과 개사수가 어디인지 따져봐야 하겠지요?

먼저 화표주가 있는 요동성의 위치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遼史』卷38 志8 地理志2 東京道 東京遼陽府


동경(東京) 요양부(遼陽府).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죄수에서 풀어주고 조선으로 가자 그대로 그 땅에 봉하였다. … 북위[元魏] 태무제(太武帝)가 사신을 보내어 그가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이르게 하니, 요(遼)의 동경은 본래 이곳이다. 당(唐)의 고종(高宗)이 고구려[高麗]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 뒤에 발해의 대씨(大氏) 소유가 되었다. 대씨는 처음에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지키고 있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 만세통천(萬歲通天 : 695~696) 연간에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에게 핍박을 받았는데,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자가 요수(遼水)를 건너 스스로 굳건히 지켰다. 측천무후가 진국공(震國公)으로 봉하였다. 아들 대조영(大祚榮)에게 전하니, 도읍을 세우고 진왕(震王)이라고 자칭하였다. 발해 북쪽을 병탄하여 지방이 5천 리가 되고 군사의 숫자는 10만이었다. 중종(中宗)이 그 도읍에 홀한주(忽汗州)란 이름을 하사하고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하였다. 12세(世) 대이진(大彝震)에 이르러 황제라고 참칭하고 연호를 정하였으며[改元], 궁궐을 본떠서 짓고 5경(京)·15부(府)·62주(州)를 보유하게 되어 요동(遼東)의 성대한 국가가 되었다. 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인데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라고 불렀다. 태조(太祖)가 건국하고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을 함락시키고 그 왕 대인선(大諲譔)을 포로로 잡아 동란왕국(東丹王國)으로 만들고, 태자 야율도욕(耶律圖欲)을 인황왕(人皇王)으로 삼아서 그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다. 신책(神冊) 4년(919)에 요양(遼陽)의 옛 성을 수축하고 발해와 한인(漢人) 민호로 동평군(東平郡)을 세워 방어주(防禦州)로 삼았다. 천현(天顯) 3년(928)에 동란국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고, 승격하여 남경(南京)으로 하였다. … 천현 13년(938)에 남경을 고쳐서 동경으로 삼고 부(府)는 요양이라 하였다. 호수는 40,604이며, 주(州)·부(府)·군(軍)·성(城) 87개를 관할하고 현(縣) 9곳을 통할한다.
요양현(遼陽縣). 본래 발해의 금덕현(金德縣) 땅이다. 한(漢)의 패수현(浿水縣)이며, 고구려[高麗]가 고쳐서 구려현(勾麗縣)이라 하였는데, 발해가 상락현(常樂縣)으로 하였다. 호수는 1,500이다.
선향현(仙鄕縣). 본래 한의 요수현(遼隊縣)인데 발해가 영풍현(永豐縣)으로 하였다. 『신선전(神仙傳)』에서 말하기를, ‘선인(仙人) 백중리(白仲理)가 능하게 신단(神丹)을 정련하는데, 황금을 만들어서 백성을 구하였다.’라고 하였다. 호수는 1,500이다.
학야현(鶴野縣). 본래 한의 거취현(居就縣) 땅인데, 발해가 계산현(雞山縣)으로 하였다. 예전에 정령위(丁令威)가 이곳에 집을 지었는데, 집을 떠난 지 천년 만에 학으로 변해서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내려앉아서 부리로 화표주에 새겨 말하기를,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지 천년 만에 이제야 돌아왔구나. 성곽은 비록 그대로이나 사람은 아니니, 어찌하여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이 즐비한가?’라고 하였다. 호수는 1,200이다.
석목현(析木縣). 본래 한의 망평현(望平縣) 땅인데, 발해가 화산현(花山縣)으로 하였다. 호수는 1,000이다.
자몽현(紫蒙縣). 본래 한의 누방현(鏤芳縣) 땅이다. 뒤에 불날국(拂涅國)이 동평부(東平府)를 설치하고 몽주(蒙州) 자몽현(紫蒙縣)을 거느리게 하였다. 뒤에 요성(遼城)으로 옮겼다가 황령현(黃嶺縣)에 합병되었다. 발해가 다시 자몽현을 설치하였다. 호수는 1,000이다.
흥요현(興遼縣). 본래 한의 평곽현(平郭縣) 땅인데, 발해가 고쳐서 장녕현(長寧縣)으로 하였다. 당(唐) 원화(元和 : 806~820) 연간에 발해왕 대인수(大仁秀)가 남쪽으로 신라(新羅)와 〈국경을〉 정하고 북쪽으로 여러 부(部)를 공략하여 군읍(郡邑)을 설치할 때 마침내 지금의 이름을 정하였다. 호수는 1,000이다.
숙신현(肅愼縣). 발해의 민호로 설치하였다.
귀인현(歸仁縣).
순화현(順化縣).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찾으셨습니까?
화표주는 요나라 동경요양부 학야현에 있습니다.
그런데 '화표주가 있는 요동성 강안'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화표주는 연행길에 올랐던 조선시대 문인의 시문에도 등장하는 바와 같이 요양ㆍ심양 일대를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즉 고려가 확정 받은 땅의 서쪽 끝은 동경요양부가 있는
 요하 근방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심장이 두근거리십니까?
제 딴에는 엄청난 발견을 한 것 같아서 소름까지 끼칩니다.
순전히 저 혼자의 연구로 알게 된 것이니까요

다음은 개사수입니다.
이것은 훨씬 쉽습니다.

"동쪽으로는 옛 고주몽(高朱蒙)이 건넜던 개사수(蓋斯水)"
라고 적혀 있으니까요

개사수는 주몽이 부여를 탈출해 남쪽으로 건넌 큰 강입니다

보통
엄체수(淹滯水), 엄체수(淹遞水), 엄리대수(奄利大水), 엄호수(奄淲水), 시엄수(施掩水), 엄사수(淹사水)라고 하는 큰 강입니다.

주몽은 물고기와 자라가 놓은 다리로 이 강을 건너 남쪽으로 와서 졸본에 나라를 세웁니다.

졸본(비류곡 홀본)은 환인, 홀승골성은 오녀산성, 또는 그 근방으로 비정됩니다.

그렇다면 개사수, 즉 엄리대수는 어디일까요?

개사수는 일단 압록강 북안과 부여 사이에 위치한 강이어야 하며 동서로 흐르는 강이어야 합니다

엄리대수는 학계에 다음의 설이 있습니다
1.동가강
ㅡ 동가강은 비류수, 비류곡으로 비정되기도 하는 강인데 그 크기가 대수라 이르기에 작고 부여와 멀며 첫도읍지 졸본에 붙어 있으며 동서로 흐른다고 보기에는 애매합니다. 즉 남쪽으로 건넌다 하는 감각과 거리가 멉니다.

2. 소요수/혼하설
ㅡ 동서로 흐르는 큰 강이긴 하나 이 강을 엄리대수로 하면 부여의 위치, 고구려 초기 도읍지의 위치를 재비정해야 합니다
ㅡ 무엇보다 요하와는 남북으로 위치해서 고려사 상기 기록의 개사수와 맞지 않습니다

3. 송화강설
ㅡ 학계에서 가장 유력하게 보는 강입니다
ㅡ 송화강은 남에서 북으로 만주 땅을 구불구불 흐르며 흑룡강으로 흘러드는 아주 큰 강입니다
ㅡ 수많은 지류가 있으며 남북으로 흐르기도 하고 동서로 흐르기도 합니다
ㅡ 부여와 고구려 초기 도읍지인 압록강 중류 북안의 사이에 위치하며
ㅡ 만주에서 대수라 이를만한 유일한 강입니다

<<정리>>

ㅡ 서희가 담판을 통해 요나라로부터 넘겨 받아 고려가 영토로 확정한 땅은 현 학계의 통설인 평안북도 압록강 남동안의 땅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ㅡ 위 기록을 이와 같이 검토한 바 강동 6주는  요양 근처로부터 송화강 근처까지의 땅입니다.
ㅡ 그 지역은 요나라로부터 확정 받은, 고려의 분명한 강역으로
ㅡ 강동 6주라는 명칭에 적합합니다.
ㅡ 또한
ㅡ 고려와 요나라의 경계는 푸를 록을 쓰는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맑을 록을 쓰는 압록강으로
ㅡ 위 기록 내용을 토대하여 보건데 지금의 요하거나 요하의 큰 지류로 볼 수 있습니다.

감방친구 17-11-04 03:05
아, 기분이 되게 좋다
돌이켜 보면 10 대 시절 꿈이 역사선생님이었다
역사를 정말 좋아해서 따로 공부를 안 해도 늘 100 점이었지
고등학교 때 뒤늦게 사춘기가 들어서 문학으로 선회, 전향했지만
역사는 여전히 내가 아는 가장 재미있는 분야이다.

문학도 영화도 청춘도 나를 홀대하여 이렇게 시들게 만들었지만
역사의 유혹만은 허기를 잊을 만큼 달콤하다.

금세 50 이 될 터인데
다시 대학에 가서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자가 되는 꿈을 꾸곤한다.
도배시러 17-11-04 05:16
화이팅 하셔요
도배시러 17-11-04 05:07
눈에 띄는 대목
때문에 하공진(河拱辰)을 압록강 구당사(勾當使)로 안문(鴈門)에 파견해 낮에는 관문 바깥에서 동편 강안을
감시하고 밤에는 내성으로 들어와 숙영하게 했습니다. 마침내 상국의 위세 덕분으로 적들의 침구가 줄어들었고
 그 후로부터는 별다른 대비 없이도 변방의 정세가 더욱 호전되게 되었습니다.
=> 안문(鴈門)은 전국시대 대代의 북쪽, 대택의 남쪽이죠.  동쪽에는 동호가 있던 곳이고요.
여기에는 어쩐 일로 갔던것인지...
도배시러 17-11-04 18:32
북방 변경은 아니죠. 안문으로 파견 간것이...
자국 고려 변경으로 파견 나갔다는 의미로 하기에는 모순이 있네요.
남의 나라지역으로 파견된 문장으로 보입니다.
우리땅이라 주장할까봐 너무 방어적으로 해석한듯

하공진이란 인물이 요나라 사람이라면 안문(鴈門)은 고려 변경이 되겠죠
감방친구 17-11-09 21:31
하공진은 고려사람입니다
저 기록의 안문은
압록강의 거란쪽에 있는 곳입니다
도배시러 17-11-04 05:19
김부식의 주장을 참고하면 주몽-추모왕 졸본의 위치는 의무려산 북쪽 부근입니다.
비좀와라 17-11-04 07:59
요하는 황하 하류를 말하는 것 입니다. 실제로 지금의 요하는 황하 하류 이고요.

이 황하가 쭉 서에서 동으로 가로 질러서 흐르다가 요하 부근에서 동남쪽으로 뚝 떨어져서 흐릅니다. 이래서 요동과 요서로 구분해서 부르는 것 이에요. 지금도 지도를 확인 할 수 있는 물리적인 내용 입니다.

요동에 있는 것이 동경 그리고 요서에 있는 것이 서경이고 지금 경상도 경주가 동경인데 그러면 낙동강 동쪽에 있었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낙동강과 요하는 같은 말이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만일 평양이 서경이라면 대동강 서쪽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요.

한양은 한수(지금의 한강은 아닐 것 같은데...)의 남쪽 즉 강남이라는 말이고요.

그냥 현재의 지명을 현재의 위치에 놓고 본다면 과거의 조상들은 무식쟁이란 말 밖에 안된단 말이죠.

이런 것이 조선 후기 실학자 특히 정약용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란 말입니다.

대륙의 지명을 억지로 한반도로 끌고와서 새로 작성할려고 했고 이것을 일제가 교묘히 이용해 먹은 것이죠.

정약용은 자신이 저서에 말했듯이 조선의 행정구역을 개혁하고자 명칭을 바꾸자고 했지만 결과물은 조선이 축소됨의 변명 밖에 안되었죠. 그리고 그런 짓이 지금도 햇갈리게 만들고 있단 말입니다.
징기스 17-11-04 09:12
님처럼 훌륭하신 분이 왜 혼자서 연구하십니까? 요즘 고려 국경선 관련해서는 인하대 연구팀이 적극적으로 활동중이던데요. 거기에 힘을 보태시면 큰 성과를 거두실 것 같네요
장진동 17-11-04 11:55
강동 6주 위치는 고려때 평양위치만  파악하면 바로 정답이 나올겁니다.요즘 젊은 역사학자들이 고려시대때 평양위치를 무지막지하게 연구중이랍니다.고려때 평양이 현재위가 맞다면 서경이란 단어가 나올수 없죠 북경이라 해야 정답입니다 그리고 강동6주는 강남6주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감방친구 17-11-05 04:02
맞는 말씀입니다
지금의 평양은 개경의 북쪽이지 서쪽이 아니죠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신라(新羅)를 동주(東州) 낙랑부(樂浪府)로 삼아 동경(東京), 백제(百濟)를 금주(金州)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아 남경(南京), 평양(平壤)을 진주(鎭州)로 삼아 서경(西京)이라고 부르는데, 서경(西京)이 제일 번성하였다. ㅡ 송사
북극의곰 22-11-26 18:05
아이쿠 잘 읽었습니다.
너무도 소중한 연구 감사합니다.
주류 역사학자들도 못하는 일을 하시는 듯 싶습니다!!!

이러한 해석을 주위에 널리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다른 카페에도 알려도 되겠지요?

목록 PC버전 위로

Copyright © gasen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