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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25일 (목)

[한국사] 왕검성과 낙랑군은 고고물질문화가 난제

감방친구 조회 :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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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기록은 소위 비주류계가 설득력이 있는데
문제는 고고물질문화에 있습니다
뻔히 발굴된 저 많은 것들을 어찌 볼 것인가 하는 것이죠

사람이 이동하면 그들이 향유하던 물질문화ㅡ식기류, 제기류, 무기류, 피복류, 무덤양식 등ㅡ이 같이 따라갑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무려 700~1,000여 년 간 건너간 소위 야요이인들이 남긴 고고물질문화는 한반도의 것과 같고, 또 한반도의 문화가 발전개창될 적에도 저들은 이미 후진이 된 문화를 향유하다 남겼죠

뒤이어 넘어간 가야와 고백신 출신자들도 열도에 저들의 물질문화를 남겼고요

우리만 이런 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유럽인들도 각자 저들의 출신지에서 지녀오고 가져온 물질문화를 남겼죠 심지어 마을과 도시의 명칭도 가져왔지요

그렇다면 중원계와 흉노계 이주자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상거의 사례로 충분히 유추가 가능한 일 아닙니까

이후석 박사로 위시되는 소위 주류기득권계는 중원계 물질문화의 확산을 무조건적으로 중원계 국가의 성장과 고조선계 국가체의 쇠퇴로 해석을 합니다 여기서 서로 대화가 막히는 것이죠

류쿠왕국은 일본에 복속된 후에도 수백 년간 표면적으로 명청의 제후국으로 조공체제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에 예속된, 말그대로 복속국이었죠

이 류쿠는 이 기간 동안 의복도 전반 문화도 일본과 달랐습니다 이들의 의복을 보자면 오히려 조선전기나 고려말의 우리것과 유사한 반면 일본과는 이질적이었죠

저는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으나 합리적 사고, 논리적 사고를 추구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주류니 비주류니 강단사학이니 재야사학이니 한쪽을 맹목적으로 편들거나 추종할 생각이 없습니다

문청하고 독서하여서 참을 헤아려갈뿐입니다

저는 비록 활달하게 이 방면의 지식을 펼칠 재주는 없으나 역사를 좋아하고 특히 국사를 좋아하여 근 30 년을 하루에 한두 시간이라도 꼭 역사관련 독서를 하고 탐문을 해온 사람입니다

사서기록이 먼저다 1차 사료가 먼저다
또는
고고물질문화, 유물, 유적이 자명하다
하는 식으로 대립할 것이 아니라

비주류 사학의 주장으로 저 물질문화 현황을 어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옳소ㅡ하며 뒷짐지고 헛기침 할 것이 아니라 치밀한 논리로 설득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후석 박사의 금년 상고사 토론회 발표 영상을 한번 보시지요

https://youtu.be/vIIyInQfN_Q

카노 17-05-01 16:11
아래 링크책을 참고하세요.
낙랑 유물은 이미 결론이 난지 오래입니다.

"평양일대의 락랑무덤에 대해 다룬 책. 구조형식과 껴묻거리 갖춤새에 따라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나뉘는 락랑무덤의 자료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면서 그에 기초하여 <한 나라 락랑군시대>에 한인들이 남긴 것이거나 한 문화의 영향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고조선과 그 후신국인 락랑국의 정치세력이 남긴 우리 민족의 고유하고 우수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강단 식민빠들과 그 추종자 나부랑이들만 아몰라 안들려를 시전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3438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66566
감방친구 17-05-01 16:21
이후석 박사의 영상은 낙랑유물을 다룬 게 아니라 기원전 8세기에서 3 세기에 이르는 시기의 요서와 요동의 고고물질문화 전개를 다룬 겁니다

그러나 아무튼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Marauder 17-05-01 16:44
제가하고싶은 말을 적으셨네요
꼬마러브 17-05-01 18:05
음 고고학은 문외한입니다만

제가 알기로 평양지역의 무덤은
전한 대까지는 토착계통의 것이 주류를 이루다가
후한 대부터 중국계통이 것이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알고 있습니다.

이의 이유로 저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제시하고 싶군요

대무신왕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여기서 나오는 낙랑은 최리의 낙랑국으로
추측하기에, 당시 한나라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 산하에 있었던 낙랑국을 군사를 보내 독립을 도와준 것으로..보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같은 시기 후한서의 기록을 보면


건무(建武) 20년(서기 44년), 한국(韓國)의 염사(廉斯) 사람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군(樂浪郡)에 배알하고 조공을 바쳤다. 광무제는 한염사읍군(漢廉斯邑君)에 봉하고, 낙랑군(樂浪郡)에 복속시켜 사철마다 입조(入朝)시켰다.

여기에서 나오는 '한국의 염사' 가 낙랑국일 겁니다.

즉, 당시 낙랑국은 고구려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한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한나라는 고구려의 후방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를 보내 낙랑국의 독립을 도와준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한나라가 군현으로 삼았다고 보기에는 힘듦
낙랑군이 2개라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기에.)

물론 낙랑군은 당연히 요서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평양지역에 중국계 무덤들이 출토된 것으로..생각되는군요.
중국 한나라의 도움으로 독립을 쟁취했으니
당연히, 한나라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그것이 평양에 중국계유물이 발굴되는 시기가
후한시대 이후인 것의 이유가 되겠군요

그렇다면 모든 것이 설명되지요.
꼬마러브 17-05-01 18:12
또한 우리 주류사학계가 '중국 고고학의 식민지' 라고 불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을 해보면..

모든 문명은 각자 저 마다의 독특한 형태와 속도가 있는 것이고
우열을 가릴 수가 없는 것인데

우리 사학계는
한반도,만주에 나오는 유물들을 무조건 중국과 연결시키는..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식의 유물분류법에 따르면..당연히 한반도,만주의 것이
중원의 것보다 발전속도가 느린..양상을 보일 수 밖에 없지요.

무조건 중원은 선진문명이고
한반도,만주는 중원문명의 아류문명이라는..
그러한 인식이 주류사학계에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런 주류사학계는, 중국에서 수입한 이런 기괴한 유물분류법의 마술을 부림으로서
그들의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합리화시키지요.

이런 상황에서 중국사학계는 우리를 우습게 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동북공정은 가속화되는 것이지요.
꼬마러브 17-05-01 18:17
오히려,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해보면
신석기유물이나 청동기유물이나 모두

만주-한반도의 것이
중원의 것보다

조금 더 오래되었다고 나옵니다.

'제주도 고산리 유적'이 바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이지요.
Marauder 17-05-01 20:45
항상 고견 잘보고갑니다.
정욱 17-05-01 18:37
식민빠.닙뽕.중빠: 오 이건 중국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이런 고대선진 유물이 없으무니다. 역시 중국에서 드려옴. 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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