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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18일 (토)

[기타] 조선시대 환도 패용법

관심병자 조회 : 5,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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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칼(환도) 차는 방법은 상당히 특이합니다. 하지만 그 특이함에 비해 불가사의할 정도로 알려져 있지 않죠.(제길, 이게 다 TV 때문입니다. 어설프게 허리띠에 칼집 푹 꽂고 나타나는 꼬락서니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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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포청대장을 찍은 사진.
 
기본적으로 조선의 환도는 끈을 이용해서 칼자루가 뒤로 가도록 찹니다. 칼을 차는 군인은 군복 아래 굵은 베로 만든 소매 없는 속옷을 입습니다. 이 옷의 왼쪽 옆구리에는 굵은 베를 겹쳐 만든 고리가 달게 되는데, 이 고리를 군복 왼쪽 옆구리에 낸 구멍을 통해 내고 여기에 칼집을 연결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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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 초량왜관에서 일본 사절을 접대하는 장면을 그린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 -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의 일부. 일본인과 한국인의 서로 다른 패도 방식이 잘 묘사되어 있다.
자연히 칼집도 약간 특이하게 생기게 되는데, 바로 띠돈이라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왼쪽 옆구리에 있는 고리와 칼집을 연결하기 위한 장치 되겠습니다. 이 띠돈에 의해 환도를 돌리기가 쉬어져 칼자루가 뒤로 오게 칼을 차더라도 간단하게 칼자루를 앞으로 돌린 뒤 발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아래아래 사진에 칼자루를 앞으로 돌린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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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환도의 부분별 명칭. 띠돈, 끈목, 칼집고리가 보인다. 띠돈과 끈목은 없어진 경우가 많지만 칼집고리의 경우 웬만한 칼집에는 남아 있다.
이렇게 특이한 패검 방식을 유지한 이유는 바로 조선군의 특성 때문입니다. 조선군의 주력은 갑옷을 입고 활로 무장한 중무장 기병이었습니다.(조선 전기 군대의 절반이 기병-_-) 말을 타는데 일본도 하듯이 허리띠에 칼을 꽂아 넣으면 말을 타다가 칼이 빠져 나오게 됩니다. 게다가 활까지 찬 마당에 칼자루를 앞으로 해서 찬다면 말 탈 때 심히 걸기적거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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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와 기병용 궁시일체인 동개를 패용한 조선 기병 완전군장.(무예24기 최형국 관장)
만주족 역시 기병을 주력으로 했다는 점에서 조선군과 어느 정도 비슷한 군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청나라 무사들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 조선처럼 칼자루가 뒤로 가도록 패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띠돈은 없고 비슷한 장치가 칼집에 달려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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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무사를 찍은 사진
이상이 기본적인 조선 환도의 패용법입니다. 다만 이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이야기고, 솔직히 조선 전기에 환도를 어떻게 찼는지는 아직 잘 모릅니다. 유물 자체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인데, 관련된 기록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세종실록 의례 군례서례 병기편>에 묘사된 환도 그림이 남아 있기는 한데, 여기에는 띠돈이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띠돈만 없이 끈으로 묶어서 차지 않았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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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그 그림
임금을 경호하는 운검 등의 직책이 착용한 검의 경우에는 칼을 사용하는 환경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 말을 타지 않습니다 - 칼을 차는 방법도 다릅니다. 따라서 위에 장황하게 설명한 칼의 패용 방법은 일반적인 경우지, 전부 다 그런 것도 아니라는 거죠.

* 아래 그림들은 조선 후기의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 -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의 일부입니다. 환도 패용 방법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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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naver.com/ar3/633

피의숙청 17-04-26 18:10
오... 그렇군요 잘읽었습니다
사랑투 17-04-26 18:23
말을 탈 때나 활을 쏠 때도 손잡이가 앞으로 있으면 불편해서 저렇게 손잡이가 뒤로 가야 되죠.

기병과 궁병 위주 문화권의 칼 패용법입니다.

조선시대 무과시험을 보면 죄다  말 타면서 활이나 칼, 둔기를 사용하는 마상무예 시험이죠.
그노스 17-04-26 19:45
잘 읽었습니다.

조선의 환도는 칼의 휘임각이 보통 중국과 일본의 중간 정도라고 하며, 칼자루가 등 뒤로 향하도록 칼을 차는 가장 큰 이유는, 동개를 착용하고 있는 경우에 활을 활집에서 꺼내고 활을 당겨 쏠때 배꼽 높이로 돌출된 칼자루가 상당한 불편을 초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선 초기에는 목장의 말이 7만 필이었으나 점차 줄어 중종 시기에 3만 필, 명종 시기에는 목장의 말이 1만 필로 급격히 감소했으므로 저런 식의 패용법을 중•후기에도 유지한 것은 기병을 위한 것이었다기 보다는 궁수나 조총병을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해주신 띠돈 이전에는 2개의 끈목을 하나의 원형고리에 묶어서 칼을 앞뒤로 쉽게 돌릴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먼저 고안되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조상님들의 지혜).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띠돈매기와 더불어 등 위의 허리띠에 칼을 찔러넣고 칼집 중간의 끈 목 안쪽으로 전대를 통과시켜 환도가 빠지지 않게 고정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앉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사격해야 하는 조총수들의 동작을 편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정조의 원행을묘정리의궤)





조선 초기의 환도는 규격이 없었고, 문종 시기에 환도의 규격이 정해졌는데 조선왕조 실록에 따르면 그 규격이,

보병용 칼날 1.73척 + 칼자루 2권 = 73.63cm
기병용 칼날 1.6척 + 킬자루 1권 3지 = 65.6cm

당시에는 갑주를 입은 적을 상대해야 했으므로 베기보다는 찌르기 위주로 공격을 했으므로 직선형의 짧은 칼날이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 왈, 그러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며 일본도에 대항하기에는 조선의 환도가 너무 짧다는 약점이 드러나서 조선 후기의 환도 길이가 점차 길어졌다고 합니다.
'무예도보통지'에 따르면, 조선 후기의 환도 규격은,

칼날 3척 3촌 + 칼자루 1척 = 90.3cm
무게 1근 8냥 = 963g

이런 환도가 말기에 다다르면, 대다수 조선군이 조총수이거나 궁수였으므로 환도는 무기의 의미보다는 일종의 의장품이 되면서 보통 50cm 로 짧아지거나 아예 칼날을 대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니, 올려주신 구한말 포청대장의 사진 중에 보이는 작은 환도인 소환도도 실전용이 아니라 의장용일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추측하건데).



설민석 17-04-26 20:24
우리나라 사극에서는 환도 안쓰고 일본도 쓰는데 ㅋㅋ
자기자신 17-04-27 02:12
조선초기때 환도는 길이가 짦아서 보조무기였죠 무게도 가볍고 그렇다가 임진왜란때 일본도 카타나에 철저히 밀렸다고 백병전에서 전쟁이 끝난후에 조선조정에서 환도가 너무 짦다고했어 1m이상으로 길어졌다가 조총과 대포때문에 또다시 짦아졌어 장식용정도로밖에 안되었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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