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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19일 (금)

[기타] 조선상고사 2 / 제3편 ‘3조선’ 분립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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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조선’은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이다
 
종래의 각 역사책에 ‘3조선’ 분립의 사실이 빠졌을 뿐 아니라, ‘3조선’이라는 명사까지도 ‘단군’, ‘기자’, ‘위만’의 세 왕조라고 억지 해석을 하였다.
‘3조선’은 ‘신’, ‘불’, ‘말’ ‘삼한’의 분립을 말한 것이니, ‘신한’은 대왕(大王)이요, ‘불’, ‘말’ 두 한은 부왕(副王)이다. ‘삼한’이 ‘삼경(三京)’에 나뉘어 있어 ‘조선’을 통치하였음은, 이미 제 1편에서 말하였거니와, ‘3조선’은 곧 ‘삼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이 통치하는 곳은 ‘신조선’이라 하고, ‘말한’이 통치하는 곳은 ‘말조선’이라 하고, ‘불한’이 통치하는 곳은 ‘불조선’이라 하였다.
‘신’, ‘말’, ‘불’ ‘삼한’은 ‘이두문’으로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 기록된 것이고, ‘신’, ‘말’, ‘불’ ‘3조선’은 ‘이두문’으로 ‘진(眞)’, ‘막(莫)’, ‘번(番)’ ‘3조선’이라 기록된 것이다.


2. ‘한자’와 ‘이두문’에 의한 혼동으로써 ‘3조선’은 잘못 알려졌다

똑같은 ‘신’, ‘말’, ‘불’의 음역(音譯)이, 어찌하여 하나는 ‘진’, ‘마’, ‘변’이라 하고, 또 하나는 ‘진’, ‘막’, ‘번’이라 하여 같지 아니한가?
이는, 남북의 ‘이두문’의 용자(用字)가 달랐기 때문이거나, 혹은 ‘지나인’의 ‘한자’ 음역이 ‘조선’의 ‘이두문’의 용자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에는 고전(古典)이 거의 다 없어졌으므로 ‘3조선’의 유래를 찾을 길이 없으나, ‘지나사(支那史)’에는 왕왕 보인다.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진번조선(眞番朝鮮)’이라 한 것은 ‘신’, ‘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한 것이고, 주(註)에 “‘번(番)’은 오로지 ‘막(莫)’으로 쓴다.[番一作莫.]”고 말한다.
‘진막조선’은 ‘신, ‘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함이니, ‘진막번조선(眞幕番朝鮮)’ 혹은 그대로 써서 ‘신, ‘말, ‘불’ ‘3조선’을 다 말하지 않고, 혹은 ‘막’자를 빼어버리고 ‘진번조선(眞番朝鮮)’이라 하거나, 혹은 ‘번’자를 빼어 버리고 ‘진막조선(眞幕朝鮮)’이라 기록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지나인’이 외국의 인명, 지명 등 명사를 쓸 때에, 매양 문예(文藝)의 평순(平順: 올바른 순서)을 위하여 축자(縮字: 줄인 글자)를 쓰는 버릇으로 그렇게 쓴 것이다.
‘목천자전(穆天子傳)’의 ‘한(韓)’은 ‘신한’을 가리킨 것이요, ‘관자(管子)’의 ‘발조선(發朝鮮)’과 ‘대대례(大戴禮)’의 ‘발식신(發息愼)’은 ‘불조선’을 가리킨 것이요, 오직 ‘말조선’은 ‘지나’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사기’이외에는 다른 책에 보이는 것이 없다.


제2장. ‘3조선’의 위치와 범위





1. ‘한(韓)’은 왕이란 뜻이다

‘한(韓)’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왕이란 뜻이니, ‘삼한’이란 ‘3조선’을 나누어 통치한 세 대왕을 말함이고, ‘3조선’이란 ‘삼한’ 곧 세 왕이 나누어 통치한 세 지방임은 물론이다.
그 세 도읍의 위치와 강역(疆域)의 범위도 기술할 수 있을까?
‘삼한’의 도읍은 제1편에서 말한, ‘스라’-지금의 ‘합이빈’, ‘알티’-지금의 ‘개평현(蓋平縣)’ 동북쪽 ‘안시(安市)’ 옛 터, ‘펴라’-지금의 ‘평양’, 이 셋이다.
‘3조선’이 분립하기 전에는, ‘신한’이 온 ‘조선’을 통치하는 대왕이 되고, ‘불’, ‘말’ 두 ‘한’이 그 부왕(副王)이었으므로, ‘신한’이 ‘스라’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말’, ‘불’ 두 ‘한’은 하나는 ‘펴라’에, 하나는 ‘알티’에 머무르고, ‘신한’이 ‘알티’ 혹 ‘펴라’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불’, ‘말’ 두 ‘한’은 또한 다른 두 서울을 나누어 지키다가, ‘3조선’이 분립한 뒤에는 ‘삼한’이 각기 ‘삼경(三京)’의 하나를 차지하고, ‘조선’을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2. 전쟁의 세상에 고정된 국경은 없는 법이다

이때의 ‘삼한’이 차지한 부분을 상고하건대, ‘만주원류고(滿洲源流告)’에, “‘한서지리지’에 ‘요동’의 ‘번한현(番汗縣)’, 지금의 ‘개평’ 등지가 ‘변한(弁韓)’의 고도(古都)이다.” 라고 했는데, ‘번한’과 ‘변한’이 음이 같으니 ‘개평’ 동북쪽의 ‘알티’가 ‘불한’의 옛 서울일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마한(馬韓)’은 ‘평양’의 ‘마읍산(馬邑山)’으로 이름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마한’으로 인하여 ‘마읍산’이 이름을 얻은 것이요, ‘마읍(馬邑)’으로 인하여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니나, ‘마한’은 곧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남쪽으로 옮겼음이 사실이니, ‘평양’ 곧 ‘펴라’가 ‘말한’의 옛 서울일 것이요, ‘신한’은 비록 상고할 곳이 없으나 ‘알티’와 ‘펴라’이 두 서울이 ‘불’, ‘말’ 두 ‘한’을 나누어 점령하였으니, ‘삼한’이 ‘합이빈’ 곧 ‘ᄋᆞ스라’에 도읍하였을 것이 의심 없다.
이에 ‘3조선’의 강역의 윤곽도 대개 그릴 수 있으니, 지금 ‘봉천성(奉天省)’의 서북과 동북(開原 이북, 興京 이서)과 지금 ‘길림(吉林)’, ‘흑룡(黑龍)’ 두 성(省)과 지금 ‘연해주(沿海州)’의 남쪽 끝은 ‘신조선’의 소유이고, ‘요동반도(遼東半島: 開原 이남, 興京 이서)’는 ‘불조선’의 소유이며, ‘압록강’ 이남은 ‘말조선’의 소유였다.
그러나 전쟁의 세상에 고정된 강역이 있을 수 없으니, 시세를 따라 ‘3조선’의 국토가 많이 늘었다 줄었다 하였을 것이다.


제3장. 기록상 ‘3조선’을 구별할 조건





1. ‘3조선’은 역사적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이제 역사를 읽는 이들이 귀에 서투른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놀랄 것인데, 하물며 ‘전사(前史)’에 아무 구별 없이 쓴 ‘조선(朝鮮)’이란 명사들을 가져다 구별하여, 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신조선’이라 하고, 을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불조선’이라 하고, 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말조선’이라 하면, 믿을 사람이 누구랴?
그러나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고구려본기’에 동, 북 두 ‘부여’를 구별치 않고 다만 ‘부여’라 쓰고, ‘신라본기’에는 크고 작은 다섯 ‘가야(伽倻)’를 구별치 않고 다만 ‘가야’라 씌어 있으니, 만일 ‘전사(前史)’에 구별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구별치 아니하면, 두 ‘부여사’나 다섯 ‘가야사(伽倻史)’의 본 면목을 회복할 날이 없을 것이 아닌가?
하물며 ‘3조선’의 분립은 ‘조선고사(朝鮮古史)’에 있어서 유일한 큰일이니, 이를 구별치 못 하면 곧 그 이전에 ‘대단군왕검’의 건국의 결론을 찾지 못 할 것이요, 그 이후에 동북 ‘부여’와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의 문화적 발전 서론(緖論: 머리말)을 얻지 못 할 것이니, 어찌 습견(習見: 습관적 견해)에 젖은 이의 두뇌에 맞추기 위해 ‘3조선’의 사적(事蹟: 일의 실적)을 구별하지 않으랴?


2. ‘중국’의 ‘역사서’들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다

‘3조선’의 사적(史的) 재료는 오직 ‘사기(史記)’, ‘위략(魏略)’, ‘삼국지(三國志)’ 등 ‘지나사(支那史)’ 뿐이지만, 저 ‘지나사’의 저작들이 그들의 유전적인 교오병(驕傲病: 교만과 오만의 병)이 있어서, ‘조선’을 서술할 때에 ‘조선’ 그 자체를 위하여 ‘조선’을 계통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오직 자기네와 정치적으로 관계되는 ‘조선’을 서술하였다.
그나마도 왕왕 피차의 성패와 시비를 뒤바꾸어 놓았음이 그 하나요, ‘조선’의 나라 이름, 지명 등을 기록 할 때에 왕왕 ‘조선인’이 지은 본디의 명사를 쓰지 않고 자의로 딴 명사를 지어, ‘동부여(東扶餘)’를 ‘불내예(不耐濊)’라 하고, ‘오열홀(烏列忽)’을 ‘요동성(遼東城)’이라 하는 따위의 필법이 많음이 그 둘이요, ‘조선’은 특수한 문화가 발달하여왔는데, 매양 ‘기자(箕子)’나 ‘진(秦)’나라 유민에게 공을 돌리려 하여 허다한 거짓 증거를 가짐이 그 셋이다.


3. 각종 사료를 종합하여 ‘3조선’의 역사를 구성하다

그러므로 ‘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때에 ‘연(燕)’의 멸망이 오래지 않았으니, ‘연’과 ‘삼조선’에 관계된 사실의 상고할 만한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한무제(漢武帝)’가 ‘조선’의 일부분이요, ‘삼경(三京)’의 하나인 ‘알티’의 문화고도(文化故都)를 점령하였으니, 고대의 전설과 기록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의 ‘조선전(朝鮮傳)’은 ‘조선’의 문화적, 정치적 사실을 하나도 쓰지 않고, 오직 ‘위만(衛滿)’과 ‘한병(漢兵)’의 동침(東侵: 동방 침략)을 썼을 뿐이니, 이는 ‘조선전’이 아니라 ‘위만’의 소전(小傳: 간단한 전기)이요, ‘한’나라의 동방 침략의 약사(略史: 간략한 역사)이다.
‘위략’, ‘삼국지’ 등의 책은 ‘관구검(毌兵儉)’이 실어간 ‘고구려’의 서적을 재료를 삼았으나, 또한 그 폐습의 심리를 가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무엇에 의거하여 저들의 기록에 보인 ‘조선’을 가지고서, 이것이 ‘신조선’이니, ‘말조선’이니, ‘불조선’이니 하는 구별을 내릴 것인가?
‘사기’ ‘조선전’에는 ‘위만’이 차지한 ‘불조선’만을 ‘조선(朝鮮)’이라고 쓰는 대신에, ‘신조선’은 ‘동호(東胡)’라 일컬어서 ‘흉노전’에 넣었다.
그러니 이제 ‘사기’ ‘흉노전’에서 ‘신조선’의 유사(遺事: 전해오는 사적)를, ‘조선전’에서 ‘불조선’의 유사를 초출(抄出: 골라서 뽑아냄)하고, ‘위략’이나 ‘삼국지’의 ‘동이열전(東夷列傳)’의 기록을 교정하여 이를 보충하였다.
‘말조선’은 ‘지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지나사’의 필두에 오른 일은 적으나, ‘마한(馬韓)’, ‘백제(百濟)’의 선대는 곧 ‘말조선’의 말엽의 왕조이니, 이로써 ‘3조선’이 갈라진 역사의 대강을 알 것이다.


제4장. ‘3조선’ 분립의 시초





1. 기원전 4세기경에 ‘3조선’이 분립했다

‘대단군(大壇君)’의 정제(定制: 규정과 제도)에는 비록 ‘삼한’이 있어 ‘삼경’에 나뉘어 머물렀으나, ‘신한’은 곧 ‘대단군’이니 제사장으로서 겸하여 정치상의 원수가 되고, ‘말’, ‘불’ 두 ‘한’은 ‘신한’을 보좌하는 두 부왕에 지나지 않는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하지만 ‘3조선’이라는 명칭이 아닌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였으므로 ‘3조선’이라는 명칭이 없었는데, ‘삼한’이 분립한 뒤 ‘3조선’이란 명사가 생겼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삼한’이 어느 시대에 분립하였는가?
‘사기’에 보인 ‘진막벌조선’은 ‘전연시(全燕時)’ 곧 ‘연’의 전성시대라고 하였는데, ‘연’의 전성시대는 ‘지나’의 ‘전국시대(戰國時代)’ 초이고, ‘발조선(發朝鮮)’을 기록한 ‘관자(管子)’는 ‘관중(管仲)’이 지은 것이 아니고 ‘전국시대’의 위서(僞書)이며, ‘발숙신(發肅愼)’을 기록한 ‘대대례(大戴禮)’는 비록 ‘한인(漢人)’ ‘대승(戴勝)’이 지은 것이지마는, ‘발식신(發息愼)’을 운운한 것은 ‘제인(齊人)’ ‘추연(皺衍)’이 전한 것인데, ‘추연’은 ‘전국시대’의 인물이다.
‘신’, ‘말’, ‘불’ ‘3조선’의 명사가 이같이 ‘지나’ ‘전국시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3조선’의 분립은 곧 ‘지나’ ‘전국시대’의 일이요, ‘지나’ ‘전국시대’는 기원전 4세기경이니, 그러면 기원전 4세기경에 ‘신’, ‘말’, ‘불’ ‘3조선’이 분립한 것이다.


2. ‘3조선’의 후손들

‘신조선’은 성이 ‘개씨(解氏)’니, ‘대단군왕검’의 자손이라 일컬은 자이고, ‘불조선’은 성이 ‘기씨(箕氏)’니 ‘기자(箕子)’의 자손이라 일컬은 자이고, ‘말조선’은 성이 ‘한씨(韓氏)’니 그 선대의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한(韓)’의 서쪽도 역시 성이 ‘한(韓)’인데, ‘위만(衛滿)’에게 토벌당해 ,바다 가운데로 옮겨가 살았다.[韓西赤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 고 하였으니, ‘한서(韓西)’는 대개 ‘말조선’에 딸린 곳이므로, ‘말조선’은 성이 ‘한씨(韓氏)’인가 한다.
‘위략(魏略)’에, “‘기자(箕子)’의 후손 ‘조선후(朝鮮侯: ‘조선’의 제후)’는, ‘주(周)’가 쇠해지고, ‘연(燕)’이 자존(自尊)하여 왕이 되어서, 동쪽으로 땅을 공략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을 일컫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배후에서 쳐, ‘주실(周室: ‘주’나라 왕실)’을 높이려고 하다가, ‘대부례(大夫禮)’가 간하여 그만두고, ‘대부례’로 하여금 ‘연’을 설득하여 ‘연’은 공격하지 않았다.[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赤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 二尊周室, 大夫禮諫之乃止, 使禮西說燕以之止不功.]” 고 하였다.
‘위략’은 곧 서양의 백인종인 ‘대진(大秦)’, ‘로마(羅馬)’까지도 ‘중국인’의 자손이라 기록한 가장 ‘지나’식의 자존적(自尊的) 병심리(病心理: 심리적 질병)를 발휘한 글이니, 그 글의 전부를 덮어놓고 믿을 수는 없으나 ‘신한’, ‘불한’을 당시 ‘조선’에서 ‘진한’, ‘마한’, ‘변한’으로 음역한 이외에, ‘신한’은 혹 의역하여 ‘진왕(辰王)’, ‘태왕(太王)’이라고 하였으니(다만 ‘辰王’의 ‘辰’은 음역), ‘신한’은 한자로 쓰면 ‘조선왕(朝鮮王)’이라 하였을 것이요, ‘말한’, ‘불한’은 의역하여 ‘좌보(左輔)’, ‘우보(右輔)’라 하였으니, 한자로 쓰면 ‘조선후(朝鮮侯)’라 하였을 것이므로, ‘기자’가 이때에 ‘불한’의 지위에 있었으니 ‘조선후’라고 일컬음이 또한 옳다.


3. ‘3조선’이 분립한 뒤에는 ‘신한’이 셋이 되었다

‘불한’의 ‘조선후’ ‘기씨’가 ‘신한’의 ‘조선왕’ ‘개씨’를 배반하고, 스스로 ‘신한’이라 일컬어서 ‘3조선’ 분립의 판국을 열었는데, ‘불한’이 ‘신한’을 일컬은 것이 ‘연(燕)’이 스스로 왕을 일컬은 뒤다.
‘연’이 왕을 일컬은 것은, ‘사기’에 ‘주(周)’ ‘신정왕(愼靚王)’ 46년, 기원전 323년이니, ‘신’, ‘말’, ‘불’ ‘3조선’의 분립이 기원전 4세기경임을 확증하는 것이고, ‘대부례’는 대개 ‘불한’의 유력한 모사(謀士)니, ‘불한’을 권하여 ‘신한’을 배반하고 역시 ‘신한’이라 일컫게 하고, ‘연’과 결탁하여 동, 서 두 새 왕국을 동맹하게 한 이가 또한 ‘대부례’이니, ‘대부례’는 ‘3조선’ 분립을 주동한 중심인물일 것이다.
‘3조선’ 분립 이전에는 ‘신한’이 하나였는데, ‘3조선’이 분립한 뒤에는 ‘신한’이 셋이 되었다. 곧 ‘신조선’의 ‘신한’이 그 하나요, ‘말조선’의 ‘신한’이 그 둘이요, ‘불조선’의 ‘신한’이 그 셋이니, 곧 대왕(大王)이라는 뜻이다.


제5장. ‘3조선’ 분립 후의 ‘신조선’





1. ‘신조선’의 왕 ‘모갑’이 ‘불리지’의 옛 땅을 회복하다
 
‘삼조선’이 분립한 뒤 오래지 않아서, ‘신조선’의 왕 ‘모갑(某甲)’이 영특하고 용감하여 마침내 ‘말’, ‘불’ 두 ‘조선’을 다시 연합해, 지금의 ‘동몽고(東蒙古)’ 등지를 쳐서, ‘선비’를 정복하고, ‘연’을 쳐 ‘우북평(右北平: 지금의 永平府)’과 ‘어양(漁陽: 지금의 北京)’ 부근과 ‘상곡(上谷: 지금의 山西省 大同府)’ 등지를 다 차지하여 ‘불리지(弗離支)’의 옛 땅을 회복했다.


2. ‘연’나라의 장군 ‘진개’가 ‘조선’을 침략하다

‘연왕(燕王)’이 크게 두려워서 세폐(歲幣: 해마다 바치는 예물)를 ‘신조선’에 바치고, 신하를 일컫고, 태자를 보내서 볼모로 삼게 하였는데, ‘모갑’이 죽고 ‘모을(某乙)’이 왕이 된 뒤에는, ‘연’의 태자가 돌아가서 ‘연왕’이 되어, 장군 ‘진개(秦開)’를 왕자라 속여서 볼모로 보냈다. ‘모을’이 그 속임수를 깨닫지 못 하고, ‘진개’의 민첩하고 지혜로움을 사랑하여 가까이 두었다.
‘진개’는 나라의 모든 비밀을 탐지해가지고 도망해 돌아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 ‘신조선’을 습격하여, ‘신’, ‘말’, ‘불’ 세 나라의 군사를 깨뜨리고, 서북 변경 곧 전자에 ‘신조선’ 왕 ‘모갑’이 점령한 ‘상곡’, ‘어양’, ‘우북평’ 등지를 빼앗고, 나아가 ‘불조선’의 변경을 습격해 ‘요서(遼西: 지금의 盧龍縣)’와 ‘요동(遼東: 지금의 遼陽)’ 부근을 함락시켜,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의 5군을 두고, 2천리 장성을 쌓아 ‘조선’을 막았다.


3. ‘진개’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연’의 전성시대에, 일찍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고 하였고, ‘흉노열전’에, “‘연’의 어진 장수 ‘진개(秦開)’가, ‘호(胡: 오랑캐)’에게 볼모가 되어, ‘호’가 깊이 믿었는데, 돌아와서 ‘동호(東胡: 동쪽 오랑캐)’를 습격하여 깨뜨리니, ‘동호’는 1천여 리를 퇴각하였다. ‘연’이 또한 장성을 쌓고,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平)’에까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의 ‘군’을 설치하였다.[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東胡, 東胡却千餘里. 燕赤築長城. 自造陽, 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 고 하였으며, ‘위략’에, “‘연’이 장군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滿潘汗)’에까지 이르렀다.[燕及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 고 한 것이, 모두 이 일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진개’가 볼모로 갔던 곳은 ‘신조선’이 아니므로, ‘사기’에는 이를 ‘흉노전’과 ‘조선전’ 두 곳에 나누어 기록하였고, ‘위략’에는 비록 ‘조선전’에 기록하였으나, ‘진개’의 볼모 되었던 사실을 쓰지 아니하였다.
‘만반한’은 ‘조선’의 역사 지리상 큰 문제이므로, 다음 장에서 다시 말할 것이다.


4. ‘연’나라의 장성과 ‘진’나라의 장성

이때 ‘지나’ 북쪽의 나라로서 ‘조선’을 막기 위하여 장성을 쌓은 자는 ‘연’ 한 나라뿐 아니다. ‘조(趙: 지금의 直匠省 서쪽 절반과 河南省 북쪽 끝과 山西省)’의 ‘무령왕(武寧王)’의 장성(지금 山西의 북쪽)이 또한 ‘조선’과 ‘조선’의 속민(屬民)인 ‘담림(澹林)’, ‘누번(樓煩)’ 등 때문에 쌓은 것이다.
‘진(秦: 지금의 陜西省)’나라 ‘소왕(昭王)’의 장성은 ‘의거(義渠)’를 토멸하고 ‘흉노’를 막기 위하여 쌓은 것이지마는, ‘의거’는 원래 ‘조선’ 종족으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에 옮겨가서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의거’는 농사가 발달되었고 병력이 강하여 ‘진(秦)’을 압박하였다. ‘진’의 ‘선태후(先太后: 秦始皇의 高祖母)’는 절세의 미인이었는데, ‘의거’가 ‘진’을 토멸할까 두려워서, ‘의거왕’을 꾀어 간통하여 두 아들을 낳게 하고는, ‘의거왕’을 불러다 쳐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여서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5. ‘장량’이 ‘조선’에 구원을 청하다

‘신조선’이 ‘연’, ‘조’와 격전을 벌이는 동안에, ‘진’이 강성해져서 마침내 ‘한(韓)’, ‘위(魏)’, ‘조(趙)’, ‘연(燕)’, ‘제(齊)’, ‘초(楚)’ 등 ‘지나’의 여러 나라를 다 토멸하니, ‘한인(韓人)’ ‘장량(張良)’이 망국의 한을 품고 ‘조선’에 들어와 구원을 청하였다.
왕 ‘모병(某丙)’이 장사 ‘여씨(黎氏)’를 소개해 주어, ‘진시황’의 순행(巡幸)을 기회로 하여, 120근 철퇴를 가지고서 ‘양무현(陽武縣)’ ‘박랑사(博浪沙)’ 가운데서 그를 저격하다가, 잘못 부거(副車: 임금의 수레)를 부수고 성공치 못 하였다.
‘사기’에 ‘장량’이 ‘창해군(滄海君)’을 보고 장사를 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어떤 이는 ‘창해’를 ‘강릉(江陵)’이라 하고, ‘창해군’을 ‘강릉’의 군장(郡長)이라고 하며, 장사 ‘여씨’를 ‘강릉’ 출생이라 하였지마는, ‘창해’는 ‘동부여’의 딴 이름이다.
‘동부여’ 두 나라는 ‘북갈사(北曷思: 지금의 琿春)’, ‘남갈사(南曷思: 지금의 咸興)’에 도읍했으니, ‘창해’는 이 두 곳의 중의 하나요, ‘강릉’이 ‘창해’라는 설은 근거 없는 말이다.


6. ‘조선’과 ‘진시황’과 ‘만리장성’

얼마 안 가서 ‘진시황’이 동북쪽의 ‘조선’과 서북쪽의 ‘흉노’를 염려하여, 옛날의 ‘연’, ‘조’, ‘진’의 장성을 연결하여 건축하는데, 전 ‘지나’의 인민을 동원하여 부역에 종사하게 하고, 장군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30만 군사를 거느려 감독케 해서 동양 사상 유명한 이른바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기원전 210년에 ‘진시황’이 죽고, 이세(二世)가 즉위하매, 이듬해에 ‘진승(陳勝)’, ‘항적(項籍)’, ‘유방(劉邦)’ 등 혁명 군웅이 봉기하여 ‘진’을 멸망시켰다.
‘이두산(李斗山)’이 이를 논하여 말하기를, “‘진(秦)’의 위력이 태고 이래로 짝이 없도록 팽창하여, ‘만성(萬成: 모든 사람)’이 바야흐로 ‘시황’을 천신(天神)으로 우러러보는데, 난데없이 벽력같은 철퇴가 ‘시황’의 혼백을 빼앗고, 여섯 나라(한, 위, 조, 연, 제, 초)의 유민의 적개심을 뒤흔들어 놓았으므로, ‘시황’의 시체가 땅에 들어가기 전에, ‘진’을 멸망시키려는 깃발이 사방에 날렸으니, 이는 ‘창해’ 역사의 공이 아니랄 수 없다.” 고 하였다.


7. ‘조선’과 ‘흉노’

‘지나’의 ‘항적’, ‘유방’ 등의 8년 동란이 계속되는 사이에, ‘신조선’의 왕 ‘모정(某丁)’이 서쪽으로 출병하여 ‘상곡(上谷)’, ‘어양(漁陽)’ 등지를 회복하고, 지금의 동부 ‘몽고’ 일대 ‘선비’의 항복을 받아서 국위가 다시 떨치더니, 그 자손의 대에 마침내 ‘흉노’ ‘모돈(冒頓)’의 난을 만나 국세가 도로 쇠약해지고 말았다.
‘흉노’는 제1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과 어계(語系)가 같고, ‘조선’과 같이 ‘수두’를 신봉하여 ‘조선’의 속민이 되었는데, 지금의 ‘몽고’ 등지에 흩어져서 목축과 사냥에 종사하였다.
천성이 침략을 즐겨 자주 ‘지나’의 북부를 짓밟고, ‘신조선’에 대하여도 배반과 귀부(歸附: 스스로 복종함)가 무상하였는데, 기원전 200년경에 ‘두만(頭曼)’이 ‘흉노선우(匈奴單于: 흉노 大酋長의 호)’가 되어, 맏아들 ‘모돈(冒頓)’을 미워하고 ‘작은 아들[小子]’을 사랑하다가, ‘모돈’에게 죽고, ‘모돈’이 대신 ‘선우’가 되었다.
‘신조선왕’은 그가 사납고 음흉함을 모르고 자주 물건을 요구하였는데, ‘모돈’은 짐짓 그 환심을 사기 위해, ‘신조선왕’이 천리마를 구하면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주고, ‘신조선왕’이 미인을 구하면 그는 그의 ‘알씨(閼氏: 선우의 妻妾)’를 주니, ‘신조선왕’은 더욱 ‘모돈’을 믿어, 사자를 보내서 두 나라 중간의 천여 리 ‘구탈(甌脫)’을 ‘신조선’의 소유로 달라고 하였다.


8. ‘흉노’가 ‘조선’을 침략하다

‘구탈’이란 당시 중립지대 빈 땅을 일컫는 말인데, ‘모돈’이 이 청구를 받고는 크게 노하여, “토지는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이것을 달라 하느냐.” 하고 드디어 사자를 죽이고, 전 ‘흉노’의 기병을 모두 내어, ‘신조선’의 서쪽인 지금의 동부 ‘몽고’ 등지를 습격하여, 주민을 유린하고 ‘선비’를 수없이 학살하였다.
‘신조선’은 퇴각하여 장성 밖 수천 리의 땅을 버리고, ‘선비’의 남은 무리들은 ‘선비산(鮮卑山: 지금의 내외 흥안령(興安嶺)’ 부근으로 도주하니, 이로부터 ‘신조선’이 아주 미약하여 오랫동안 이웃 종족과 겨루지 못 하였다.
‘엄복(嚴復: 淸末의 학자)’이 말하기를, “‘흉노’는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는 야만족이니, 어찌 토지는 나라의 근본이란 말을 하였으랴? 이는 한갓 ‘사마천’의 과장된 글이 될 뿐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기’, ‘한서’ 등을 참고해 보면, ‘흉노’가 ‘음산(陰山)’의 험한 목을 빼앗긴 뒤엔, 그 지방을 지나는 자가 반드시 통곡하였다 하고, 연지(臙脂: 화장품)가 생산되는 ‘언지산(焉支山)’을 빼앗긴 뒤에는 슬픈 노래를 지어 서로 위로하였으니, ‘흉노’의 토지 수요(需要)가 비록 문화적 민족과 같지 못 하다 하더라도, 아주 토지에 대한 관념이 없다 함은, 편벽된 판단인가 한다.


제6장. ‘3조선’ 분립 후의 ‘불조선’





1. ‘불조선’과 ‘신조선’이 잃어버린 영토

‘불조선’이 ‘신조선’과 합작하다가 ‘연’에게 패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했으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그 잃은 땅이 얼마나 되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위략’에, “‘진개(秦開)’가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에까지 이르렀다.[秦開功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爲界.]” 고 하여, 선유(先儒: 옛 유학자)들은 ‘조선’과 ‘연’의 국경을 지금의 ‘산해관(山海關)’으로 잡고, ‘진개’가 빼앗은 2천여 리를 ‘산해관’ 동쪽의 종선(縱線: 세로) 2천여 리로 잡아서,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찾으려고 하였지마는, 이는 큰 착오요 억지 판단이다.
‘사기’나 ‘위략’을 참조해 보면, ‘진개’가 빼앗은 토지가 분명히 ‘상곡’에서부터 ‘요동’까지이니, ‘만반한’을 ‘요동’ 이외에서 찾으려 함은 옳지 못 하다.
‘한서지리지’에 의거하면, ‘요동군현(遼東郡縣)’ 중에 ‘문(汶)’, ‘번한(番汗)’의 두 ‘현’이 있으니, ‘만반한’은 곧 이 ‘문한’, ‘번한’이다.
‘문현(汶縣)’은 비록 그 연혁이 전해지지 못 하였으나, ‘번한(番汗)’은 지금의 ‘개평’ 등지이므로, ‘문현’도 ‘개평’ 부근일 것이니, ‘반만한’은 지금의 ‘해성’, ‘개평’ 등의 부근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구하려 함은 무엇에 의거함인가?
대개 ‘만반한’은 ‘진개’가 침략해왔을 때의 지명이 아니고, 후세 ‘진(秦)’나라 때 혹은 ‘한(漢)’나라 때의 명칭임을, ‘위략’의 저작자가 이를 가져다가 ‘진개’ 침략 때 두 나라의 국경을 입증한 것일 것이며, ‘번한(番汗)’은 ‘불한’의 옛 서울 부근임으로 하여 이름 한 것이다.
‘사기’의 1천여 리는 ‘신조선’이 잃은 땅만 지적한 것이요, ‘위략’의 2천여 리는 ‘신’, ‘불’ 두 ‘조선’이 잃은 땅을 아울러 지적한 것이니, ‘상곡’, ‘어양’ 일대는 ‘신조선’이 잃은 땅이요, ‘요동(遼東)’, ‘요서(遼西)’, ‘우북평(右北平)’ 일대는 ‘불조선’이 잃은 땅이다.
‘만반한’은 ‘사군(四郡)’ 연혁의 문제와 관계가 매우 깊은 것이니, 이 절은 독자가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2. ‘진’과 ‘조선’의 경계는 ‘패수(헌우란)’다

‘연왕(燕王)’ ‘희(喜)’가 ‘진시황’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도읍을 옮기니, ‘불조선’이 지난날 ‘연’에 대한 오래된 원한을 잊지 못 하여 ‘진’과 맹약하고 ‘연’을 토벌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진시황’이 ‘몽념’으로 하여금 ‘장성’을 쌓도록 하여 ‘요동’에 이르렀다.
‘불조선’이 ‘진’과 국경을 정하는데, 지금의 ‘헌우란’ 이남의 연안 수백 리 땅엔 두 나라의 백성이 들어가 사는 것을 금했다. ‘사기’의 이른바 ‘고진공지(故秦空地: 옛날 ‘진’나라의 빈 땅)’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위략’에 의거하며 이때에 ‘불조선왕’의 이름은 ‘부(否)’라 하였으나, ‘위략’과 마찬가지로 ‘관구검’이 실어간 ‘고구려’의 문헌으로 자료를 삼은 ‘삼국지’와 ‘후한서’의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부’를 기록하지 아니하였으니, ‘위략’에서 ‘신조선’ 말엽의 왕 곧 ‘동부여왕(東扶餘王)’이 된 ‘부루(夫婁)’가 ‘부’로 와전됨인가 하여, 여기에 채용하지 아니한다.
기원전 200여 년경에 ‘기준(箕準)’이 ‘불조선왕’이 되어서는 ‘진’의 ‘진승’, ‘항적’, ‘유방(漢高祖)’ 등이 모반하여 ‘지나’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상곡’, ‘어양’, ‘우북평’ 등지의 ‘조선’ 옛 백성과 ‘연(燕)’, ‘제(齊)’, ‘조(趙)’의 ‘지나인’들이 난을 피하여 귀화하는 자가 많은지라, ‘기준’이 이들에게 서쪽의 옛 중립 공지(空地)에 들어가 사는 것을 허락하였다가, ‘한고조’ ‘유방’이 ‘지나’를 통일하자, ‘기준’이 다시 ‘한’과 약조를 정하여 옛 중립 고지는 ‘불조선’의 소유로 하고, ‘헌우란’으로 국경을 삼았다.
‘사기’ ‘조선전’에, “‘한(漢)’이 일어나니, …물러나 ‘패수(浿水)’로 경계를 삼았다.[漢興, …至浿水爲界.]” 고 하고, ‘위략’에, “‘한’이 일어나자 ‘노관(盧綰)’으로 하여금 ‘연왕(燕王)’을 삼고, ‘조선’은 ‘연’과 ‘패수’를 경계로 하였다.[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興燕, 界於湨水.]” 고 한 것(先儒들이 湨는 浿의 잘못이라 했으므로 이를 좇음)이 다 이것을 가리킨 것이니, 대개 ‘불조선’과 ‘연’이 ‘만반한’으로 경계를 정했다가, 이제 ‘만반한’ 이북으로 물러났으니, 두 책의 ‘패수(浿水)’는 다 ‘헌우란’을 가리킨 것임이 분명하다.
선유들이 왕왕 ‘대동강’을 ‘패수’라고 고집함은 물론 큰 잘못이거니와, 근일 ‘일본’의 ‘백조고길(白鳥庫吉)’ 등이 ‘압록강’ 하류를 ‘패수’라고 하니 또한 큰 망발이다.
위의 ‘패수’에 관한 논술은, 앞 절의 ‘만반한’과 다음 절의 ‘왕검성’과 대조하여 볼 것이다.


3. ‘대단군’의 ‘왕검성’은 세 곳이었다

기원전 194년에 ‘한(漢)’의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을 배반하다가 패하여 ‘흉노’로 도망하고, 그의 무리 ‘위만(衛滿)’은 ‘불조선’으로 들어와 귀화하니, ‘준왕(準王)’이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관(博士官)’에 임명해서 ‘패수’ 서쪽 강변(옛 중립 공지) 수백 리를 주어, 그곳에 이주한 구민(舊民)과 ‘연’, ‘제’, ‘조’의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위만’이 이로 인하여 군사를 만들고, 더욱 ‘조선’과 ‘지나’의 망명죄인을 데려다가 결사대를 만들어 그 병력이 강대해지자, “‘한’나라의 군사가 ‘10도’로 침략해 들어온다.” 는 거짓 보고를 ‘준왕’에게 하고, ‘준왕’에게 사자를 보내, 들어와 왕을 시위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얻어가지고, 정병으로 달려와 ‘기준’의 서울 ‘왕검성’을 습격한다.
‘준왕’이 항거해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좌우 ‘궁인(宮人)’을 싣고 패잔한 군사로 바닷길을 좇아, ‘마한’의 왕도(王都) ‘월지국(月支國)’으로 들어가서 이를 쳐 깨뜨리고서 왕이 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마한’의 여러 나라가 함께 일어나서 ‘준왕’을 토멸하였다.
‘왕검성’은 ‘대단군(大壇君)’ 제1세의 이름으로서 그 이름을 삼은 것인데, ‘대단군’의 ‘삼경(三京: 지금의 ‘합이빈’과 지금의 ‘평양’과 앞서 말한 ‘불한’의 옛 도읍인 지금의 ‘개평’ 동북쪽 세 곳이다. 이 세 곳이 모두 ‘왕검성’이란 이름을 가졌었을 것이니, ‘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은 곧 ‘개평’ 동북쪽이다. ‘한서지리지’의, “‘요동군(遼東郡)’ ‘험독현(險瀆縣: 註에 滿의 도읍)”이 그것이요, “‘마한’의 왕도는 지금의 ‘익산(益山)’이다.” 라고 하나, 대개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다음 장에서 논술할 것이다.


제7장. ‘3조선’ 분립 뒤의 ‘말조선’





1. ‘말조선’의 국호를 ‘말한’으로 고치다

‘말조선’의 처음 도읍이 ‘평양’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그 뒤(연대 불명)에 국호를 ‘말한[馬韓]’이라 고치고, 남쪽의 ‘월지국’으로 도읍을 옮겨 ‘불조선왕’ ‘기준’에게 망했다.
그 천도한 원인이 무엇인지 전사(前史)에 보인 것이 없으나, 대개 ‘신’, ‘불’ 두 ‘조선’이 ‘흉노’와 ‘지나’의 잇따른 침략을 받아서, 북방의 풍운(風雲)이 급하매, ‘말조선왕’이 난을 싫어하여 마침내 남쪽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천도하는 동시에, 모든 침략주의를 가진 역대 제왕들의 칼끝에서 빛나던 ‘조선’이라는 명사는 외국인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바라 하여, 드디어 ‘말조선’이란 칭호를 버리고, 지난날에 왕호(王號)로 쓰던 ‘말한’을 국호로 써서 ‘이두’로 ‘마한(馬韓)’이라 쓰고, 새로 쓰는 왕호인 ‘신한’은 ‘이두’로 ‘진왕(辰王)’이라 써서 ‘마한국(馬韓國)’ ‘진왕(辰王)’이라고 일컬었다.


2. ‘마한’은 ‘백제’가 아니다

똑같은 ‘한’이란 명사를, 하나는 음을 따서 ‘한(韓)’이라 하여 국호로 쓰고, 또 하나는 뜻을 따서 왕이라 하여 왕호로 씀은, 문자상 국호와 왕호의 혼동을 피한 것이다.
국호를 ‘마한’이라 쓰는 동시에, 왕조는 ‘한씨(韓氏)’가 세습하여 국민들이 ‘한씨왕’의 존재만 아는 고로, 기준이 그 왕위를 빼앗고는 국민의 불평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본래 성 ‘기씨(其氏)’를 버리고 ‘한씨(韓氏)’로 고친 것이다.
삼국지에는, “‘준(準)’이 …달아나 바다로 들어가서, ‘한(韓)’의 땅에서 살며, ‘한왕(韓王)’이라 이름 하였다.[準 …走入海, 居韓地, 號韓王.]” 고 하였고, ‘위략’에는,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나라에 머물고 있는 자는, 성을 ‘한씨’라 하였다.[準子及親, 留在國者, 冐姓韓氏.]” 고 하였다.
‘월지국’을 전사(前史)에는 ‘백제’의 ‘금마군(金馬郡: 지금의 益山)’이라고 하였지마는, 이것은 속전(俗傳: 민간에 전함)에서 ‘익산군’의 ‘마한’ ‘무강왕릉(武康王陵)’이라는 것을 인하여, ‘무강왕’을 ‘기준’의 시호(諡號)라 하고, 부근 ‘미륵산(彌勒山)’의 ‘선화부인(善化夫人)’ 유적을 기준의 왕후 ‘선화(善花)’의 유적이라 하여, 마침내 ‘기준’이 남으로 달아나서 ‘금마군’에 도읍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무강왕릉’의 딴 이름이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요, ‘말통’은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무왕’의 이름은 ‘마동’이니 ‘삼국유사’의 ‘서동(薯童)’은 그 의역이고, ‘고려사지리지’의 ‘末通’은 그 음역)이요, ‘선화’는 ‘신라’ ‘진평대왕(眞平大王)’의 공주로서, ‘무왕’의 후(后)가 된 아이다.
‘백제’를 왕왕 ‘마한’이라 함은, 역사에 그 예가 적지 아니하니, 이따위 고적(故迹: 옛 소문)은 한갓 ‘익산(益山)’이 ‘백제’의 옛 서울임을 증명함에는 부족할뿐더러, ‘마한’ 50여국 중에 ‘월지국’과 ‘건마국(乾馬國)’이 있으니, ‘건마국’이 ‘금마군(金馬郡)’ 곧 지금의 ‘익산’일 것이고, ‘월지국(‘마한’의 옛 서울은 다른 나라에서 찾음이 옳다. 그 확실한 지점은 알 수 없으나, ‘마한’과 ‘백제’ 사이)’의 국경이 ‘웅천(熊川: 지금의 公州)’이니, ‘월지국’이 대개 그 부근일 것이다.


3. ‘신라’의 ‘마립간’은 ‘말한’을 왕의 호칭으로 사용한 것이다

‘말한’이 비록 국호가 되었지마는, 그 5~6백 년 후에도 오히려 왕호(王號)로 쓴 이가 있다.
‘신라’의 ‘눌지(訥祗)’, ‘자비(慈悲)’, ‘소지(炤智)’, ‘지증(智證)’ 네 왕은 다 ‘마립간(麻立干)’이라 일컬었는데,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의 주에, “‘마립’은 말(말뚝)이다.[麻立橛也.]” 고 하였다.
‘궐(橛)’은 글자 뜻이 ‘말’이므로, ‘마립(麻立)’의 ‘마(麻)’는 그 전성(全聲)을 취하여 ‘마’로 읽고, ‘입(入)’은 그 초성(初聲)을 취하여 ‘ㄹ’로 읽고, ‘간(干)’은 그 전성을 취하여 ‘한’으로 읽는 것임이 명백하므로, ‘마립간’은 곧 ‘말한’이요, ‘말한’을 왕호로 쓴 증거이다.


4. ‘북삼한’과 ‘남삼한’을 분별되어야 한다

‘마한’이 ‘월지국’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그 옛 도읍 ‘평양’에는 ‘최씨(崔氏)’가 일어나서, 그 부근 ‘25국’을 통속하여 한 대국이 되었으나, 전사(前史)에 이른바 ‘낙랑국(樂浪國)’이 그것이다.
‘낙랑’이 이미 분리되매, ‘마한’이 지금의 ‘임진강’ 이북을 잃었으나, 오히려 ‘임진강’ 이남 ‘70여국’을 통솔하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북방에서 ‘지나’와 ‘흉노’의 난리를 피하여 ‘마한’으로 들어오는 ‘신’, ‘불’ 두 ‘조선’의 유민이 날로 많아지므로, ‘마한’이 지금의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1백여 리 땅을 떼어, ‘신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자치계(自治稧: 고대의 자치 모임)를 세워서 이름을 ‘진한부(辰韓部)’라 하고,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땅을 얼마간 떼서, ‘불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또한 자치계를 세워서 ‘변한부(弁韓部)’라 일컬었다.
‘변한’에는 ‘신조선’의 유민들도 섞여 살았으므로 ‘변진부(弁辰部)’라고도 일컬었다. 이것이 ‘남삼한(南三韓)’이니 ‘마한’이 구태여 ‘진’, ‘변’ 두 ‘한’을 세운 것은 또한 ‘삼신(三神)’에 따라 3의 수를 채운 것이다.
‘대단군왕검’의 ‘삼한’이 중심 주권자가 되고 ‘말’, ‘불’, 두 ‘한’은 좌우의 보상(輔相: 보좌하는 재상)이 되었는데, 이제 ‘남삼한’은 말한 곧 ‘마한’이 가장 큰 나라, 곧 종주국이 되고, ‘신한’ 곧 ‘진한’과 ‘불한’ 곧 ‘변한’이 두 작은 나라(속국)가 된 것은, 그 이주민의 계통을 좇아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삼한’이 다 왕을 ‘신한’이라 일컬어서(이를테면 ‘마한’의 왕은 ‘말한’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진한’의 왕은 ‘신한’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변한’의 왕은 ‘불한’나라의 ‘신한’이라 하였음) ‘신한’이 셋이 되니, 대개 앞의 것(‘신한’ 셋)은 ‘3조선’ 분립 이후에 세 ‘신한’의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며, ‘진’, ‘변’, 두 ‘한’의 두 ‘신한’은 자립하지 못 하고, 대대로 ‘마한’의 ‘신한’이 겸해 가져서 이름만 있고 실제가 없었으니, 이는 ‘남삼한’의 창례(創例: 비롯된 보기)이다.
‘삼한’은 우리 역사상에 비상히 시비가 많은 문제로 되었지마는, 종래의 학자들이 다만 ‘삼국지’ ‘삼한전(三韓傳)’의 ‘삼한’ 곧 ‘남삼한’을 의거하여, 그 강역의 위치를 결정하려 할 뿐이고, ‘삼한’의 명칭의 유래와, ‘삼한’의 예제(禮制: 예법과 제도)의 변혁을 알지 못 하여, 비록 공력은 많이 들였으나 북방 원유(原有: 원래 있던)의 ‘삼한’을 발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남삼한’과의 상호 관계도 명백히 알아내지 못 하였다.


5. ‘낙랑 25국’은 ‘낙랑군 25현’이 아니다

‘낙랑’의 여러 나라로 역사에 보인 것이 ‘25국’이니, ‘조선(朝鮮)’, ‘감한(邯邯)’, ‘패수(浿水)’, ‘함자(含資: 貪資라고도 함)’, ‘점선(黏蟬)’, ‘수성(遂成)’, ‘증지(增地)’, ‘대방(帶方)’, ‘사망(駟望)’, ‘해명(海冥)’, ‘열구(列口)’, ‘장잠(長岑)’, ‘둔유(屯有)’, ‘소명(召命)’, ‘누방(鎒方)’, ‘제해(提奚)’, ‘혼미(渾彌)’, ‘탄렬(呑列)’, ‘동이(東)’, ‘불이(不而: 不耐라고도 함)’, ‘잠대(蠶臺)’, ‘화려(華麗)’, ‘야두미(邪頭味)’, ‘전막(前莫)’, ‘부조(夫租: 沃沮의 잘못인 듯)’ 등이니, 위의 ‘25국’은 ‘한서지리지’에 ‘한(漢)’나라 ‘낙랑군(樂浪郡)’의 ‘25현(縣)’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한서’의 본문이 아니라,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려고 할 때에, 그 신하와 백성들의 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조선’이 거의 다 ‘지나’의 옛 땅임을 위증(僞證)하고자, 전대 ‘지나’의 역사책 중에서 ‘조선’에 관계되는 것들을 죄다 가져다가 고칠 때, ‘조선’ 고대의 ‘낙랑 25국’을 ‘낙랑군 25현’으로 고쳐 ‘한서지리지’에 넣은 것이니, 이는 제4편에서 다시 자세히 논술하기로 한다.
‘25국’ 중 ‘조선’과 ‘패수’는 다 ‘평양’에 있는 나라인데, ‘조선’은 곧 ‘말조선’의 옛 땅이므로 ‘조선’이라 일컬어서 ‘낙랑’의 종주국이 된 것이고, ‘패수’는 ‘펴라’로 읽을 것이니, ‘24속국’의 하나이다. ‘조선국’과 ‘패수국’과의 관계를 비유하면, 전자는 ‘평양감영(平壤監營)’과 같은 것이고, 후자는 이에 딸린 각 고을과 같은 것이다.
‘소명’은 지금의 ‘춘천(春川)’ ‘소양강(昭陽江)’이요, ‘불이’는 그 뒤에 ‘동부여’가 된 것으로 지금의 ‘함흥(咸興)’이니, ‘낙랑국’의 전체가 지금의 ‘평안’, ‘황해’ 두 ‘도’를 비롯하여 ‘강원도’, ‘함경도’의 각 일부분을 차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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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돌이 17-03-22 15:49
환빠가 아직도 서식하다니...... 멸종된 줄 알았는데,ㅋ
정욱 17-03-22 16:45
무슨 환빠타령. ㅋ 너는 쭝똥족빠냐?
올만재가… 17-03-22 20:33
진짜 조선 상고사를 모르는 건지?, 어그로를 끌려고 하는 건지?
호랭이해 17-03-22 21:10
조선상고사는 환빠와 다릅니다..
서클포스 17-03-23 08:19
가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에휴 ㅋㅋ
스파게티 17-03-23 09:19
탄돌이이런애들 특징- 내가모르는 내용이네 환빠네~
위구르 17-04-29 10:44
논리가 통하지않는 환까 노답
똥개 17-03-23 01:01
없어진 역사 어찌 하면 찾을까요 ㅎㅎ
후안무치 17-03-23 01:06
정독으로 재밌게 읽었네요ㅋ
구름위하… 17-03-23 21:03
세상에...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조선상고사를 환빠로 모는 사람이 있다니...
주류학계에서는 무시당하고 있지만,
이분의 저작은 환단고기와는 그 내용이 다릅니다.
삼조선 가설은 환단고기에도 나오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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