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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06일 (월)

[한국사] 북에서 나오는 낙랑 유물 조작설.

올만재가입 조회 : 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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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낙랑국과 한나라 낙랑군의 토론글을 보고 구글링으로 일제 낙랑 유물 조작설 몇개를 찾아봤습니다.
주장자 이름이 밝혀진 몇개만 올립니다.
중국쪽 조작으로 가면 지명이 나와서 어디인지 이해가 안가네요.

* 참고로 북한 역사학계에서는 평양을 한나라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으로 본다네요. 우리 학계에서 말하는 평양은 한나라 낙랑군 = 낙랑국이라는 것과 의미가 틀리네요.

1. 점제현 신사비 조작.
위당 정인보:
[통상적인 비석보다 낮고 작고 얇은 점, 테두리 바깥을 전혀 다듬지 않았다는 점, 비석 뒷면이 울퉁불퉁하여 암벽에서 떼어 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 모서리 글자들이 비스듬하게 떨어져 나갔다는 점” 등을 근거.]

북한 역사학계:
[1. 점제현 신사비 기초에 시멘트를 사용한 흔적이 있고, 돌의 성분이 인근지역의 화강석과 큰 차이가 나며, 그것은 요하지방의 것과 유사하다.
2. 방사성 동의원소 측정 결과 인근 지역과는 2~3천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을 들어 점제현 신사비는 조작 또는 위조해서 용강으로 옮겨 놓은 것.]

문성재 박사:
[
일제가 평안도 용강을 점제현으로 단정한 근거는 위·진대의 투박한 서체로 새겨진 돌 하나뿐인데 이 돌은 한나라 낙랑군과 문헌, 고고, 지리, 과학적으로 관련이 없다.]

2. 낙랑군 호구부(인구조사 명부)
문성재 박사:
가. 낙랑군 호구부와 함께 출토된 유물을 보면 필기구로 추정되는 환두 도자, 관복에 사용될 띠걸이, 무기류, 수레에 설치된 부속물, 여성용 장신구와 도끼, 낫, 굴착도구 등의 농기구 등이다. 고분에서 귀족이나 누릴 수 있는 위세품과 농민들이 사용하는 농기구가 동시에 출토될 수 없다. 지배층이었다면 농기구를, 농군이라면 지배층인 관리가 사용하는 필기구나 관복에 사용하는 띠걸이를 같이 넣어 묻었을 리 없다.

나. 호구부는 보안 공문서로 개인의 무덤에 부장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다. 호구부 조작 근거:
ㄱ. 한나라의 목각에 써 놓은 문서 규격들과 비교할 때, 목각 규격의 크기가 일정하게 맞지 않다.
ㄴ. 서체가 한나라 때 유행했던 예서체와는 상당히 다름.
ㄷ. ‘별’이라는 일본식 접두사 사용.
호구부의 첫 줄에 “낙랑군|초원사년|현별호구|다소□□(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多少□□)”이라고 하였는데 ‘-별’은 ‘-군(君)’처럼, 19-20세기에 일본에서만 쓰던 ‘일본식’ 한자어다. 묵독 “별 존재 자체가 유물이 위조품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다.

3. 북한에서 발군한 낙랑 고분이 2,600기.
문성재 박사:
가. 북한 역사학자 안병찬은 “북한에서 귀틀무덤은 서기전 1세기 말부터 서기 1세기까지 약 100년간 존재했고, 벽돌무덤은 2세기 초에서 3세기 중엽까지 사용되었으며 독무덤은 나무곽무덤 시기부터 벽돌무덤 시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주로 어린이들의 무덤”이라고 <평양일대 락랑유적의 발굴정형에 대하여>(『고조선고고연구』 제 4호 , 1995)에서 밝혔다.

나. 북한 역사학자 안병찬이 밝힌 것 처럼 2,600기는 귀틀무덤, 독무덤, 나무관무덤, 벽돌무덤 등을 포함한 숫자다.

3. 그 외.
가. 중국계 무덤으로 보이는 양식에서 조차 고조선 표지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대량 발굴 되고 있고, 무덤에서 한대 문화의 흔적이 도드라지지 않아 평양이 낙랑이라고 하는 주장은 어불성설.

나.
일본인과 조선총독부가 중국에서 수시로 낙랑출토류 유물들을 대량 구입한 징후들.
ㄱ. 낙랑계 유물들이 유독 평양 안에서만 발견.
ㄴ. 중국계로 단정할 만한 세기적인 대발견은 모두 일본인이 했다는 점.

★ 중국의 한나라 낙랑군 조작 의심.
1. 낙랑군 갈석산.
ㄱ. 갈석궁과 강녀석의 경우 역사 지리적으로 문제.
ㄴ. 중국의 역사학계는 요녕성 서쪽 발해와 접한 수중현을 갈석궁이라고 비정하는데 역대 역사서, 지리서 어디에도 ‘갈석궁 = 수중현’으로 특지한 기록은 없다.
ㄷ. 전시된 유물들은 진시황의 행궁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고 초라하고, 출토된 유물들과 진시황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도 없다,
ㄹ. 진시황이 갈석산에 올랐다고 했는데 갈석궁으로 비정한 곳은 평지.

2. 임둔태수장 봉니.
가. 봉니가 발견된 요령성 호로도 태집둔을 도하라고 비정하였는데 도화는 태집둔과 상관이 없다.
나. 태집둔은 평양, 부여 출토품과 유사한 춘추대 말기 비파형 단검이 출토되고 와당, 도기 등 전한대의 유물이 다량 출토 되었으며 북방문화적 특징이 강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는 점 등에서 고조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다. 학계에서는 중국계 유물들만 가지고 태둔집을 도하, 요서군 영역으로 비정한다.
라.
도하에 대해서는 《관자》〈소광편〉에 <중원에서는 … 도하를 격파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 당대 윤지장은 주석을 <도하는 동호의 조상이다.> 라고 하였다. 《묵자》〈비공편〉에서 <예전의 도하가 연, 대, 호맥 사이에서 멸망 … 했다>며 이러한 사료적 근거를 종합해 보면 <실제의 ‘도하’는 요령성이 아닌 하북지방에 존재했다>는 의미가 된다. 즉 <도하는 고조선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mymiky 16-11-25 09:40
1. 낙랑군과 낙랑국을 두개를 별개로 보는 입장/ 같은 것으로 보는 입장이 있고
이 2가지 의견은 밑에서 논의한바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만약, 둘의 별개로 보았을 경우 낙랑국의 위치는

-호동왕자가 옥저로 사냥나갔다, 낙랑국왕 최리를 만났다는 기록으로,
낙랑국은 옥저 인근에 있었을꺼라고 보기도 합니다.
-옥저의 위치는 지금의 함경도 지역쯤으로, 동해바다와 접해있습니다.

2. 낙랑군은 중국계 유물+고조선의 유물이 같이 나오는 경우도 이상한건 아닙니다.
이주민 문화와 토착민 문화가 한데 섞이는 것은 문화사에 자주 있는 일입니다.
(남미의 성모 마리아상은 흑인이기도한데, 이렇듯 서양의 카톨릭 문화와 원주민의 문화가 섞인거죠)

밑에서도, 낙랑군의 대부분은 고조선 유민들이라는 점을 썼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일본군+내지에서 온 관료는 소수이고, 대부분은 걍. 살던대로 살던 조선인들이였죠-)

3.삼국지 동이전에,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라는 기록에서, 삼한지역이 한반도의 중남부 일대이므로, 삼한의 북쪽에 대방이 있는걸 알수 있고, 마한의 여러나라중에 하나였던 신분고국이 대방과 싸워 대방태수를 죽인 일이 있는데,

낙랑과 대방이 요서에 있다면, 마한의 소국이 어찌 요서까지 가서 싸울수 있었나?
아니면, 삼한이 아예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땅에 있었다고 보는 것인지?
그렇다면, 한지역에 생긴 백제, 신라, 가야는? 어찌 보아야 하며,
이땅의 한국인들은 또 누구의 후손이라는건지? 

4. 평양발굴 유물 중 봉니의 경우엔 일제의 조작설이 따라오기도 하나, 대부분의 유물은 해방후에
북한정권아래 발굴된 것이 많고, 그 많은 유물등을 일제가 파뭍었다는건 음모론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가 그 많은 고분들을(한 3천기정도 발굴되었는데?) 그걸 언제 다 만들었다는건지??
35년동안 그짓만 했다?  그럼 거기에 동원한 인력은? 
그런 대규모 공사를 아무도 모르게 진행할수 있나? 일제치하 평양시민 모르게? 그게 가능함?
평양은 옛부터 한양 담으로 대도시인데 그러고도 평양시내에 소문하나 안났다?
일제시대때도 신문이나 언론은 있었고, 동아일보라든가,, 일제가 요즘 평양시내에서 뭔 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기사가 있을겁니다. (일제시대 경주고분 발굴 기사도 있으니까요..)
감촉같이 이루어졌다는 소린데? 그게 가능한 일인지;; 잘 모르겠군요..

5. 이왕지사 일제가 조작을 할려면, 우선순위는 평양의 낙랑유물이 아니라,
경상도 지역의 가야유물들입니다. 실제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일본이 일제 시대 내내 가장 입증하고싶어 혈안이 된 주제였고, 사활을 걸었으니까요.
히데요시가 왜란을 일으킨 배경에도, 신공왕후가 한반도를 평정했다느니, 하는 찌라시에 혹한 것도 있꼬, 신공왕후가 옛날 일본 화폐에도 그려져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건 제가 정확하게 모르겠네요;;) 하여튼,, 이왕 조작할꺼라면, 가야유물들을 중점적으로 조작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거죠..

6.그리고, 일제의 입장에서도 한반도에 중국유물이 나오는걸 마냥 좋아했을꺼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청일전쟁후, 일본이 가장 먼저 한일은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끊어놓는 일이였습니다. 일제는 내선일체와 괴뢰만주국이 세워진후엔 만선사관으로
오히려, 만주-한반도-일본 영역을 묶을수있는 선전을 내세웠어요.
괜히 조선과 중국과 연관성을 내세워봤자, 자기들에게도 좋을바 없습니다.
당시, 일본은 30년만에 조선을 다시 토해낸다고 생각도 못 했고, 앞으로 천년만년 지들땅이라고 생각했을 때니까요.
실제로 경기도 용인을 새로운 일본수도로 하면 어떨까?하면서 도쿄에서 옮겨올 생각도 했으니까요.
촐라롱콘 16-11-25 10:07
mymiky님 말씀대로 당시 일제로서는 고대일본과도 연관이 깊은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지역에 대한 역사조작 또는 유물-유적조작의

필요와 동기가 컸으면 컸지(임나일본부와 연관지어서....)

뭐하러 고대일본과는 연관성이 거의 없는 낙랑의 유물-유적을 조작하는

헛짓거리를 하고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낙랑유물유적을 일제가 조작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야말로 조작시기로부터 100년이 지난 현대의 고고학-과학을 속일 정도로

100년 전의 일본의 고고학-과학 수준이 넘사벽급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밖에 안되는데....^^
밥밥c 16-11-25 10:48
본문내용과 댓글내용이 정반대로 놓여있네요.

본문내용 자체가 아래의 댓글내용이 틀렸다는 주장이죠.

그렇다면 기존의 이론이 올바르다고 주장을 하려면 윗 본문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하던가 , 아니면

좀더 새로운 것을 제시해야죠.
꼬마러브 16-11-25 16:19
현재 과학수준은 그 유물의 발생년도를 알 수 있을 뿐
그 유물이 낙랑군의 것인지 낙랑국의 것인지 타임머신 타서 확인할 정도의 수준은 안됩니다.
또한 과학수준하여 잡설을 드리자면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이유적은 제주도고산리유적이니
신석기문명은 한국이 중국보다 앞섰다고 보아야할 것이고
청동기 역시 한반도 - 만주의 것이 중국의 것보다 연도가 앞서니
청동기문명 역시 한국이 중국보다 앞섰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의로운자 16-11-25 11:50
저기.. 그러면 삼한이 대방의 아래쪽에있지 대방의 북쪽에 있습니까?
요서는 북쪽이 아닌가요? 사방에 위치중 가장 적합한위치가 아래쪽아닌가요
애초에 삼한이 어디에있던 대방의 아래쪽에있는건 맞는말인데
일본이 우리 동쪽에있지만 고서에도 동쪽에 있다고 했나요? 남쪽에있다했지요
꼬마러브 16-11-25 16:13
1. 낙랑국은 함경도에 위치하지 않았습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가 적힌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기록 중에

그대의 안색을 보니 비상한 사람이구나.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당시 낙랑국과 고구려가 남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료입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태조대왕조를 보면

태조대왕 4년(서기 56년) 가을 7월,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영토를 개척하여 동쪽으로 창해(滄海)까지 이르렀고 남쪽으로 살수까지 이르렀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고구려의 남쪽국경을 살수 즉 현 통설로 '청천강'으로
낙랑국과 고구려는 청천강을 경계로 남북으로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천강 아래의 낙랑국이 있었다고 하니
즉 낙랑국은 평양에 위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은 요서에 위치하였다고 봐야합니다.

3. 삼국지 동이전의 이이기를 들으셨는데
당시 중국은 자국의 군현에 대하여 <군국지>에 별도로 기록했습니다. <동이전>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동쪽이민족에 관한 기록입니다. 따라서 한반도재한반도설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즉 <동이전>에 나오는 낙랑은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이 아니라 평양에 위치하였던 낙랑국으로 보아야 함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이미키님께서 제시한 사료 역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4. 고고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패러다임에 갖힌 채
한반도 중북부에 나오는 유물들을 전부 낙랑군재평양설의 유물로 집어 넣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한반도 중북부에 나오는 한나라양식의 유물들은
한반도중북부세력과 중국세력 간의 교역의 흔적이라고 보아야 함이 타당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매우 많으며
예로 신라에 로마문화의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당시 신라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또한 낙랑군유물에 대하여는 SBS 다큐맨터리로 방영되었을 만큼 매우 많은 오류가 있는데
그 예로 압록강 하류의 단동에서 안평락미앙(安平樂未央)이라는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는 것을 토대로
서안평이 압록강 하류에 있었고 따라서 한사군 역시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이 현 주류사학계의 입장인데
안평락미앙의 글자에서 안평을 지명으로 볼 수 있는지가 의문입니다. 한자를 직역하면
'평안함과 즐거움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로 해석이 됩니다.
또한 글자에서의 안평을 지명으로 본다고 쳐도
서안평은 서쪽의 안평을 뜻하니 서안평을 압록강 하류가 아니라 그 서쪽에서 찾는 것이 옳습니다.

애초에  우리 조상들이 2000년동안 못찾았던 낙랑군 유물을 일본이 세키노 조사를 시작한 이후 한달만에 기다렸다는 듯이 10여개를 찾았았다는 것은 조작이 의심될만한 상황입니다.

6. 그것은 마이미키님의 개인적인 추측이니 저 역시 추측으로 답변을 하겠습니다.

일제의 입장에서 한반도에 중국유물이 나오는 것을 마냥 좋아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하셨는데
일제가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으 증명하기 위해 고고학적 유물을 찾은 세키노조사는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후인 1913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합병 후 일본은 합리화를 위하여
조선은 고대에 북쪽은 한나라의 식민지(한사군재한반도설)였고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임나일본부설)였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 역사의 시작이다.
조선 역사의 시작은 단군이 아니라(단군조선 부정) 식민지에 출발했으므로
조선이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식의 논리 당시에 팽배하였습니다.
mymiky 16-11-25 19:46
일제 이전부터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연구에서 비롯한 설이고,
그것은 현대에 많은 낙랑 유물과 유적이 평양에서 발굴됨으로써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일제의 조작이다 음모다 하는 분들도 있지만, 일제 강점기 이후 현재까지 계속 발굴되는 유물의 양과 유적의 범위를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설사 몇몇 유물과 유적을 일제가 조작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전부 조작할 수 없는 법입니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더 유리한 것은 낙랑군보다 임나(가야)인데, 당연히 일제는 가야 지역을 열심히 팠지만, 임나일본부를 증명할 만한 이렇다 할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야를 놔두고 수십 년 동안 발굴될 상당한 양의 낙랑 유물을 평양땅에 묻었다?

그 수많은 낙랑 유물을 날조한 (그럴 재주까지 뛰어난) 일제가
왜? 정작 자기들에게 유리한 임나일본부 유물은 날조를 못했는지?? 
그 이유가 뭘까요? -.-

애초에,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한 것은 사실이고, 위만조선의 중심지에 군현을 설치한 이상 중국 군현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하면 식민지이고,
한반도 밖에 있었다고 하면 식민지가 아니라고 하는 발상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낙랑이 한반도 북부에 없었으면 [남하]하던 고구려가 어떻게 낙랑군을 칠것이며, 
낙랑군을 요서로 본다면,  그렇다면 삼한과 왜의 위치는 어디란 말인지요?

이덕일이 현재 하북성 노룡현 지역을 낙랑군이라고 주장하던데..
이걸 대입해서 세계 지도로 볼때,
그 밑에 발해만 바다나 산동성에 삼한땅이 있다는 말인지?

아무튼,, 이정빈 경희대 교수는 평양+난하설을 주장하는거 같은데.
이분의 주장을 옮겨보겠습니다.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설치한 행정구역인 한사군의 하나다.
대동강 유역에 있다가 고구려에 의해 축출된 뒤 요서(遼西) 지역으로 교치(僑置·땅이름을 옮김)됐고 5세기 전반 다시 난하 유역으로 옮겼다.

후대 문헌에서 낙랑군 또는 관련 지명이 난하 유역에 보인다고 해서 이를 한사군과 직접 연관해 보기는 어렵다며
각종 출토 문자자료, 고고자료가 축적되면서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소재했음이 한층 분명해졌고 결코 역사학계 다수가 식민주의 역사학을 추종해 그리 본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사료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정서를 넓은 국토를 지닌 군사적 강대국, 위대한 고대사를 말해야 한다는 강한 믿음이 오히려 식민사관의 영향이며 대륙 지향의 민족사관이 일제강점기 황국사관과 흡사하다는 점에 주의를 요한다.]]
mymiky 16-11-25 20:00
저의 생각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 근대의 민족주의 사관 입장에서 보면 자존심이 상할 일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고대에는 근대와 같은 민족개념을 대입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당시 여건상 근대같은 제국주의적인 식민지를 건설할 수는 어렵고,
성격도 동일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한나라는 군사력을 계속 투입할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문화적으로 회유하는 방법을 주로 썼습니다.

또한, 워낙 중국 땅에서 떨어져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현지인과 동화되는 현상도 일어났죠.
그래서 [낙랑인]이라는 개념도 학계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낙랑군을 통한 중국 문물의 유입도 주변 종족과 국가들이 성장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 측면도 있고요.

오히려 한사군이 마치 '조선총독부' 라도 되는 마냥 '피식민지인' 들을 수탈하고 강탈한 '식민지' 였다는 것이 일본 식민사학의 해석이지

낙랑이 토착민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고 현지인들과 섞이면서 점차 현지화 되어가는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 한편, 한민족은 자체적인 역량을 키워가며 낙랑과 얽히고 섥히면서 자력으로 물리치는 와중에 발전했다는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당시 시대를 강조합니다(그리고 이게 현재 학계의 정설)

오히려, 식민사학으로 따져보면,
이러한 점을 모조리 배제한 채 일제가 심어놓은 전근대의 식민지 - 정복지 프레임으로 보고

피식민지인들을 가혹하게 때려잡고 도륙하며 영위한 한사군/
그런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은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역사 /
그런 부끄럽고 치욕스런 역사는 당연히 부정해야 맞기 때문에
한사군은 요서에 있었음.(또는 있어야 함!)

이것을 부정하면
치욕스런 역사를 받아들이자는 너는 식민사학주의자- 라고 주장하는
논리가 훨씬 식민사학에 경도된 측면이 크겠죠.
꼬마러브 16-11-25 22:41
개인적인 추측의 글에 어떤식으로 대답을 달아야 할지 엄두가 안나느군요
사관 이전에 팩트가 있고
추측 이전에 팩트가 있습니다.
모든 역사는 사료를 근본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개인적인 추측으로 역사를 재단하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팩트로 미루어보아 한사군은 요서에 있었음이 맞습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7912&sca=&sfl=wr_subject&stx=%ED%95%9C%EC%82%AC%EA%B5%B0&sop=and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가정할 시 모순되는 수많은 기록들 가운데
일부를 가져와 옛날에 글을 썼던 것이 위의 주소인데

주소의 글에 대한 님의 의견은 어떠신지?

또한 잡설로
한사군이 이치되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않습니다.
꼬마러브 16-11-25 22:33
한사군재한반도설에 대하여 당시 실학자들의 근거와 현재 주류사학자들의 근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조선시대 때는 금서도 많았고 연구할 수 있는 사료가 현재에 비해서 매우 적고 한정적이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또한 조선후기에 와서는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이 강해졌다는 것)
현재 한사군재한반도설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는 근거는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근거가 아니라 일제시대 때 일본에 의하여 왜곡되어진 역사 사료들을 바탕으로 근거를 내놓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실학자들이 전부 한사군을 한반도에 비정한 것은 아니에요. 이건 분명히 해두시길 바랍니다.
열하일기를 지은 박지원은 낙랑군을 요양으로 보고 한사군 역시 압록강 이북 요동땅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현재 5000원권 화폐의 인물인 이이와 함께 조선시대때 실학자을 대표하였던 이익선생 또한 낙랑은 요동, 진번은 요하 서쪽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한사군 문제에 대하여 실학자들마다 각각 의견이 달랐습니다.
따라서 현재 한사군재한반도설을 조선시대 실학자들과 엮어 합리화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또한 저는 한사군이 한반도 밖에 있었든 말든 딱히 상관이 없다고 봅니다.
나라가 크든 작든 저는 우리나라가 좋습니다.
그리스 아테네의 시민들은 나라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번영을 이뤄왔습니다. 그들이 옆의 페르시아제국의 땅크기를 부러워 했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관의 문제가 아니라 '팩트'입니다.
애초에 사관이라는 것은 '팩트'에 대한 해석입니다.
현재 한국 고대사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팩트의 대한 해석인 '사관'의 문제가 아니라 '팩트'그 자체입니다.
만약 사관에 따라서 팩트를 바꾼다면 그것은 역사와는 거리가 먼 소설일겁니다.
위만조선은 한나라에 멸망하였고 이 위만조선의 위치가 요서지역입니다.
위만조선이 만리장성 옆에 있었다는 것은 중국사료로도 확인이 되는데
현 중국 학계에서는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만리장성의 길이를 고무줄처럼 늘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만리장성의 길이를 가장 처음 늘린 사람은 중국인이 아닌 이병도 라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9432&sca=&sfl=wr_subject&stx=%EB%A7%8C%EB%A6%AC%EC%9E%A5%EC%84%B1%EA%B3%BC+%ED%95%9C%EC%82%AC%EA%B5%B0&sop=and

만리장성과 한사군

또한 일본이 당시 임나일본부를 주장하기 위하여 광개토왕비문과 칠지도에 대한 해석을 역으로 하고 일본식 전방후원분이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된다는 것들과
일본열도에서의 구석기유물의 연도를 조작, 날조하여 임나일본부를 주장한 사실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꼬마러브 16-11-25 22:39
또한 마이미키님께서
남하하던 고구려.. 이야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평양에 있었던 낙랑국과 요서에 있었던 낙랑군을 분별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또한 저는 저입니다. 다른사람과 비교를 하며 그 사람의 단점을 저에게 대입시켜 몰고가는 행위는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식민사학자도 아니고 재야사학자도 아닌 팩트를 쫓는 학생일뿐입니다.

그리고 초기 삼한이 만주지역에 있었다는 것은 저 역시 동의하는 설입니다.
이것에 대하여는 글의 논지와 맞지 않으므로 다음에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촐라롱콘 16-11-25 10:58
본문의 주제와는 상관없지만 한 가지 드는 의문점이....

강단사학의 학설을 따르는 이들도 대부분 한사군 가운데

낙랑 정도만이 한반도북부에 위치했다고 주장할 뿐...

나머지 군들이 한반도내에 소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는데.....

어째서 강단사학을 식민사학으로 몰아붙이는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

강단사학이 한사군 전체가 한반도북부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비난하니~~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네요~~~
의로운자 16-11-25 11:52
아직도 이게시판에 있으시네요 이분은 ㅋㅋㅋ국적이나 밝혀요 연기그만하고
올바름 16-11-25 13:20
한국에서 자란 화교가 유력
흑요석 16-11-26 06:41
한사군 재한반도설에 동의하면 외국인이 돼버리는 거고

한사군 재요서설에 동의하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사람이 되는 건가요???

그럼 마이미키 님도 외국인이고 다른 한사군 재한반도설에 동의하는 모든 사람들도 외국인이 돼버리는 거임? ㅡㅡ;;;;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데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매도해버리는 건 참 유치한 행동 이라고 생각합니다.
호랭이해 16-11-27 13:28
예전부터 발언이 이상하던 사람이라..
창경원이 전화위복
만주국이 만주인을 위해 세워졌다던가..
일본도 내구성 우위...
이외에도 가끔식 이상한 이야기를 푸신분 입니다..
달의왕 16-11-25 12:11
일제 시대 발간된 신문의 정보를 철저히 믿는 분이라
영문은 일제 시대 신문 보고 알아보셨겠네요.
구름위하… 16-11-25 13:05
초기 한사군설 (즉, 내가 학교 다닐 때에 배우던 한사군)은
4개 모두 한반도에 있는 것을 비정한 그림으로 배웠습니다.

그 때 그사람과 지금 그 시람이 그리 다른 사람은 아닐 것으로 생각되네요.
꼬마러브 16-11-25 16:20
낙랑군만 평양에 있었고 나머지 3군은 한반도가 아닌 만주에 있었다고 한다면 이는 더욱 말이 안되는 겁니다.
3 군이 만주에 있었다면 낙랑군 역시 당연히 만주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고작 4개의 군현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통치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당시 군현의 크기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
촐라롱콘 16-11-25 17:17
물론 나중에는 낙랑이 나머지 3개군을 통합하는 형식이 되기는 했지만.....

한사군 설치 후 얼마 안되어 임둔,진번은 폐지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현도가 지도상으로 보면 한반도 특히 현재 평안도 북단과 남만주 일부에

걸쳐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압록강 대안의 남만주일대에서 일어난

고구려의 발생지 또한 옛 현도의 관할지 이내에 속한 것으로 알고 있구요....!!!

물론 그렇다고 한사군이 만주전역에 걸친 것은 아니고 한반도서북부와 이어진

요동일부지역(남만주일대)에 한정한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호랑총각 16-11-25 16:57
가생이 식빵 3대장이 있죠. 주류사학에 반하는 모든글에 따라다니며 댓글다는 인간들인데 에이를 말하면 비를 이야기 하고 비를 이야기하면 에이를 이야기하는 버튼 누르면 말이 나오는 기계인형같은 분들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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