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백제
감방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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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본부여의 공주이자 과부인 소서노
소서노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
비류와 온조의 아비이자 소서노의 첫 남편은 위구태로 추정
부여를 탈출한 고주몽은 소서노와 결혼함으로써 졸본부여에 의탁, 이를 기반으로 고구려 창업
졸본은 현도군 동쪽 인근, 지금 요하의 상류쯤으로 추정
당시 고구려는 지금의 요동중북부에서 남만주로, 횡적 성장을 하고 있었고 고주몽과 유리왕 당시에는 세력이 크지도 그 체제와 체계가 치밀하지도 않았음
비류ㆍ온조ㆍ소서노의 남하
처음의 이주는 원거리가 아니었음
즉 우리가 알듯이 남만주에서 경기도에 이르는 근 2천리 이주가 아니었다는 말
또 기록에 한국으로 갔다는 말도 없음
준왕세력, 위만조선에서 망명한 세력, 유리왕에 반대하고 망명한 협보(?) 등은 모두 한국으로 갔다거나 남한으로 갔다고 기록돼 있음
그런데 이들 세 모자 세력의 이주에는 한국에 갔다든가 남한으로 갔다든가 왔다든가 하는 기록이 없음
즉 초기 백제의 터전은 한반도가 아니었다는 말, 적어도 우리가 아는 삼한이 차지한 남한이 아니었다는 말
단지 기록에는 최초 패수와 대수를 건너 정착했고 북쪽에 말갈,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돼 있음
즉 이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지금의 요동반도 남부로 추정할 수 있음
또 비류와 온조가 서로 다른 땅에 도읍을 삼았다는 기록에서 보듯 백제 최초기에는 두 거점이 있었을 것으로 보임
나는 이곳을
지금의 요동반도 남부와 서북한 지역에 이르는 지역으로 봄
또한 백제 초기에 요동남부 외에 마한의 동북면에 새 거점을 마련했을 것으로 봄
서북한 지역의 고구려계 무덤들은 초기 백제의 것일 가능성이 있음
또 백제 초기 기록은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의 역사가 혼재돼 승자인 온조에게 유리하게 재편집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이것이 온조왕 대에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에 들어오고
소서노가 죽고
온조가 마한왕에게 도읍(원문에는 도읍이 아니라 나라라고 돼 있음)을 옮기겠다고 하고
이후 영토를 확정하고 마한을 병합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고 생각됨
소서노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
비류와 온조의 아비이자 소서노의 첫 남편은 위구태로 추정
부여를 탈출한 고주몽은 소서노와 결혼함으로써 졸본부여에 의탁, 이를 기반으로 고구려 창업
졸본은 현도군 동쪽 인근, 지금 요하의 상류쯤으로 추정
당시 고구려는 지금의 요동중북부에서 남만주로, 횡적 성장을 하고 있었고 고주몽과 유리왕 당시에는 세력이 크지도 그 체제와 체계가 치밀하지도 않았음
비류ㆍ온조ㆍ소서노의 남하
처음의 이주는 원거리가 아니었음
즉 우리가 알듯이 남만주에서 경기도에 이르는 근 2천리 이주가 아니었다는 말
또 기록에 한국으로 갔다는 말도 없음
준왕세력, 위만조선에서 망명한 세력, 유리왕에 반대하고 망명한 협보(?) 등은 모두 한국으로 갔다거나 남한으로 갔다고 기록돼 있음
그런데 이들 세 모자 세력의 이주에는 한국에 갔다든가 남한으로 갔다든가 왔다든가 하는 기록이 없음
즉 초기 백제의 터전은 한반도가 아니었다는 말, 적어도 우리가 아는 삼한이 차지한 남한이 아니었다는 말
단지 기록에는 최초 패수와 대수를 건너 정착했고 북쪽에 말갈,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돼 있음
즉 이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지금의 요동반도 남부로 추정할 수 있음
또 비류와 온조가 서로 다른 땅에 도읍을 삼았다는 기록에서 보듯 백제 최초기에는 두 거점이 있었을 것으로 보임
나는 이곳을
지금의 요동반도 남부와 서북한 지역에 이르는 지역으로 봄
또한 백제 초기에 요동남부 외에 마한의 동북면에 새 거점을 마련했을 것으로 봄
서북한 지역의 고구려계 무덤들은 초기 백제의 것일 가능성이 있음
또 백제 초기 기록은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의 역사가 혼재돼 승자인 온조에게 유리하게 재편집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이것이 온조왕 대에
늙은 할미가 남자로 변하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에 들어오고
소서노가 죽고
온조가 마한왕에게 도읍(원문에는 도읍이 아니라 나라라고 돼 있음)을 옮기겠다고 하고
이후 영토를 확정하고 마한을 병합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고 생각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