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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월 27일 (월)

[기타] 아래 한사군 낙랑글에 달린... 없습니다/님의 댓글을 보고

잠원 조회 : 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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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 나온 이야기지만, 해방후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 유물이 너무 많아서(수천점) 이제는 낙랑의 중심지가 평양이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
평양에 유물이 많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알만한데...  낙랑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무슨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일까용?

유물에 "한나라 군현 낙랑"이라고 직인이 찍혔다는 것일까? 그런 유물인 한 점이라도 있다는 말일까?



[낙랑군 설립후 60년후에 인구조사한 결과를 보면 중국계 15%에 원주민계 85%정도로 나옵니다. 이때까지는 따로 조사한걸로 봐서 중국계하고 원주민계하고 융합이 안되었다는것을 보여주죠. 하지만 낙랑의 존재기간이 수백년이고 그 후로 중국으로 부터 특별히 대량의 이주가 있었다는 기록이나 증거가 없는걸로 봐서 얼마안가서 두 민족이 통합되었을게 거의 확실합니다. 이럴경우 낙랑이 중국의 역사냐 한국의 역사냐 하는 문제가 남는데, 대부분의 주민들이 원주민계고 그후 고구려에 통합되므로 낙랑 역시 우리 민족의 역사로 보는게 더 타당합니다. 낙랑을 중국이 한반도에 설치한 식민지라고만 보는건 너무 편협한 역사 인식이죠.]

=>
당시 대동강 유역에 중국계가 15%?
근거는?

한당시대 요동에 중국인 인구가 얼마쯤일까? 
15%는 고사하고 1.5%도 어렵것구만..  
헌디  요동에서 그만큼  더  먼 지역까지 중국인들이 몰려 왔디야..
천 수백년 후..  명나라시절 요동의 중국인 인구가 5% 될까 말까일텐데.. 

당시 황무지가  넘치던 시절인데.. 뭘 먹을게 있다고 험한 북방으로 기어 들어 왔다는걸까?
실크로드가 아닌 노다지 길이라도 있었다는걸까?
실크로드가 열리고서도 신장지역은 여전히 한족 구경하기 어렵고..  감숙 회랑지역조차 인구의 15%조차 어렵던 시절에.. 
(감숙 회랑지역을 황무지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텐데.. 여긴 기련산맥 만년설로부터 흘러내린 물과 충척토로 이뤄진 최고의 비옥한토지지역- 무엇보다 한족 밀집지역과 인접)

더구나 원주민과 융합이 안되었다고 덧붙이면서 상상하며 소설쓰고 놀고 있으니..
이리 말한 근거는 과연 뭘까?
공상하면서 쓴 니꼴리는데로 아닌가?



[1. 일제시대때 발굴된 유물은 70여기고, 해방후 발견된 유물이 수천기라고 써놓았는데요. 님이 역사책 해석에만 골몰한 모양이네요. 이런 기초적
낙랑에 관해서 한가지만 더 말하고 샆은건, 평양에서 발견된 유적지가 해방후에 북한에서 발견된것만수천기라서 더이상 평양과 낙랑의 연관성을 부정하는게 불가능하다는것과 함께 낙랑은 엄연히 우리의 역사로 봐야한다는 점임. ]

=>
무슨 유물이 수천기나 된다는걸까?
평양지역에서 한사군 낙랑의 유물이 수천기가 발굴되었다?
사실일까?

한사군 낙랑의 유물인가? 아님 당시 유물인가..
유물들이 한사군낙랑의 것이라는 증거가 함께 나왔나?




수천점의 유물이 출토되는데도..
북한에서는 한사군 낙랑의 평양설을 부정하고..  점점 많은 학자들이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없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현실인데..  이들은 사실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한다는건가?


이런 놀고 있는 댓글에..
고대사에 기초에 해당되는 사기치는 주장에 .. 변변한 반론도 못하고 놀고 있으니

.

카노 15-06-29 16:41
저런 애들을 보면 그냥 사이비종교 광신도나 다름없죠.
팩트는 무시하고 지가 믿고싶은 것만 닥치고 우겨대는.
Windrider 15-06-29 16:54
식민사관은 1981년하고 2007년도 사건들로 보면 알다시피 점점 힘을 잃고있죠. 저런 주장은 신경도 안씁니다.
왜나라호… 15-06-29 17:26
질문 2007 사건이 뭐죠?
Windrider 15-06-29 20:26
식민사관쪽의 주장은 고조선이 신화다라는것과 청동기 시대가 되어야만 국가로 인정할수 있다라는 주장으로 우리나라 국가가 성립된시기를 최대한 축소하는거였는데 그 주장들이 완전히 부정된 사건이죠. 즉 청동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시기의 고조선은 국가로서 인정할수 없다는 주장을 발라버린겁니다.
밥밥c 15-06-29 19:00
최근 지리서분석으로는 25사의 지리서 전부를 놓고 말한다 하더라도

  진번군, 임둔군의 지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지리서지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애시당초 지리비정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즉, 한사군은 사서의 지리서기준으로 위치비정 자체가 불가능해요.

  일단 한사군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려면 , 먼저 25사지리서에서 진번군,임둔군이 존재한다는 것부터

  말해야 합니다.
없습니다 15-06-29 19:54
그러니까 기본적인 조사도 하지 않고 가슴으로 역사를 하려다보니 이런 상태에 빠지게 되는것임.

1. 1990년 초 평양 낙랑구역 통일거리 건설공사 도중 정백동 364호 나무곽무덤에서 초원4년(기원전 45년)낙랑의 호구조사 결과가 적힌 목간이 나옴. 이걸 '낙랑군 초원4년 현별호구부'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낙랑군 25개현의 인구조사 결과가 세세히 나오며, 이에 따라 학자들의 많은 연구가 이뤄어 졌었음.(내가 아래에 링크한 pdf파일 참조)

이 목간을 분석한 결과 토착민과 중국계 인구를 구별하여 조사하였으며 그 비율은 토착민 85%, 중국계 15%로 나와있음. 중국계 인구는 당연히 한나라가 낙랑을 설치할 당시 유입된 인구들. 당시는 아직 낙랑이 세워진지 60년정도 밖에 안되서 아직 중국계와 토착민을 구분하였다는 뜻임.

낙랑연구에 있어 최대돌파구라고 일컬어지는 이런 유물도 전혀 모르면서 무슨 낙랑을 논하는지..

2. 일제시대에 이뤄진 대대적인 낙랑 발굴 결과 평양에서 70여기의 무덤이 발굴되었으며 여기서 나온 유물이 수천점.. 현재 중앙박물관에 남아있는 낙랑 유물만 해도 수백점이며 중앙박물관 선사고대관에 가면 낙랑의 대표무덤인 석암리 9호 유물을 전시해 놨으므로 관심있으면 가서 볼것.

해방후 북한에서도 대대적인 낙랑유적 발굴이 있은바, 이때 평양에서 나온 낙랑 무덤이 수천기.. 유물을 몇개인지 알려지지도 않았을 정도임. 이게 다 사기라고 생각한다면 정신차리라고 말하고 싶음. 어떤 사기꾼도 이런 대규모의 유물 사기를 친적은 없음.

결론: 정신좀 차려라.
굿잡스 15-06-29 20:27
없습님은 똑같은 소리를 계속하는데 반론을 펴보시라니까요? ㅋ

1. 없습니다 본인 논리대로면 1933년 일본 동대사에서 8세기 중엽의 신라시대의 4개 촌

락 촌적부 발견( 이동 경로 전후 사정없이 동대사 일대는 신라의 촌락??)

2. 짱국 15프로면 4만에 달하는 인구에 고조선 유민과 갈등까지 있었다면 이들

짱국계를 보호해줄 한나라식 행정치소등은 분명히 세계사적으로 봤을때 나올만함에도

전혀 서북한 일대에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그기에 1세대 짱개들이면

무덤이 전형적 한나라식에 부장품이고 전한시대 색채가 어느 정도 농후해야 하는

데 도리어 서북한은 한무제 전한보다 후한시대 것이 더 빈번)

3. 서북한 일대가 목간의 장소와 일치한다면서 황해도 일대는 고작 6천명 정도인데

이건 북한 학계에서도 납득되지 않는 척박함으로 요동일대 어쩌고로 도리어 서북한

이 아니라는 근거로 이야기, 공개한 나름 납득될 사항.

4. 서북한 일대 토성들은 고조선 막쌓기 공법으로 이미

못해도 전국시대에 있던 토성들에 나오는 토기양식도 활성혼입계로 전국시대

연과 교류된 재지세력들것으로 밝혀지고 나오는 고분들의 부장품에도 고조선 재지

화분형토기부터 대표적 세형동검, 고조선에서 보이는 독특한 청동마차 부속품

이고 이미 묘제도 한무제 이전부터 목곽묘등이 조성에 다음 단계인

귀틀묘도 서토식 분묘와 차이를 보이는데 도대체

서북한 고분 유물= 한나라 한사군 증거???

정작 수천기 발굴 당사자 북한은 이를 통해 서북한이 한사군의 낙랑(군)과 멀다고 이야기.


사기꾼 정신 차리기 어쩌고 말하기 전에 반론 펴보시길.
없습니다 15-06-29 20:50
님하고는 예전에 몇번 토론해보다가 상대방의 글은 읽지도 이해도 하려하지 않고 무조건 본인 주장만 줄기차게 상대방이 지칠때까지 하는 무지막지한 토론태도때문에 상대안한건데,  좀 반성해보셈.

내가 아래링크한 pdf파일에 님이 질문한것에 대한 대답이 거의 들어있음.
성에 관련해서는 낙랑군 산하 25현의 남아있는 성과 그게 고조선식 성을 재활용했는지, 중국식으로 새로 쌓았는지까지 분석한 내용이 있으니 읽어보기 바람.

가생이에서는 링크가 이상하게 깨지는데,
연구59낙랑군호구부연구.pdf 로 구글 검색하면 맨 위에 나옴.
잠원 15-06-29 20:51
목간이 나와서.. 자넨 기쁘것구만... 축하한다/


그런다하더라도
곡창 지대인 황해도 중심에 해당하는 군 남쪽 관할(남부도위) 3개현 인구수가 6000여명에 불과한 것 (한국으로치면 호남평야에 6천명..)
인구의 14%인 4만 명을 한족(중국인), 86%는 토착민 .. ( 군인들이라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은 없지만)
이런 내용은 의문이 드는데..

암튼 목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전부터 한4군을 인정하는 이들조차도 낙랑을 제외한 나머지3개군은 거의 유명무실하다고 하였는데
또 목간이 나온 시점은 고구려가 망하고 60년이 지난 시점으로..
낙랑의 존속이 한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존속되어서  4세기까지 이어졌다는 증거는 될 수는 없는 것이지.

목간의 출현은 엄청난 발굴임은 틀림없지만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와..  낙랑의 요서 출현하는 내용등도 같이 따지며 생각할게 많을텐데..
목간이 나왔다고 식민지하에서 소설 쓰던 내용들이 합리화되는건 아니자나?



목간이 나온 이후의 한나라의 정세는 ..
국운이 세퇴하고  요동은 물론  요서의 지배권도 불안정한 상황에서 .. 외따로 만리나 떨어진 평양인근의 낙랑군이 한나라와 별개로  계속 존속되었다는 것은 상식과 맞지 않거든(평양지역이 금덩이가 나오는 땅도 아닐텐데)

따라서 목간이 사실이더라도..    낙랑의 요서설은 유효하지
한나라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낙랑군이 요서로 쫒겨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거든
또 당시 본국과 멀리 떨어진 평양지역에서 한나라의 직접 영향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거지

.
잠원 15-06-29 20:56
평양지역에서 낙랑군의 유물이 많이 나왔다?
과연 낙랑군의 유물일까? (중국보다 한반도 고유의 형식이 많다고 알고 있는데)

.
굿잡스 15-06-29 21:05
연구59낙랑군호구부연구.pdf > ㅋㅋ 없습님 이거 본인 제대로 읽어 보셨음?

이건 그냥 그 관련 연구에요. 이런 데이타 유물이 나온다고

이곳이 바로 낙랑군을 의미하는지는 북한의 주장도 되새겨 봐야지요.

고구려는 이미 태조대왕시기고 요동 서안평 일대를 공략하면서 낙랑태수 처자

를 사로 잡아오거나 포로와 물자를 내지로 계속해서 끌고

왔던 기록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단 말임(그외 각종 전란이나 전후한

혼란기등 계속해서 서쪽에서 사람들의 이동이나 당시 중계무역소로

상업적 거래나 이동이 없었던 것도 아니였고)

본인이야 말로 앵무새같은 소리를 계속해서 하는데 제대로 서북한 일대의

유구나 다른 최근 논문도 제대로 보지 않고 어쩌고 떠들고 있는데

괜히 최근에 이런 서북한 일대의 연구가 활발해지면 요동, 발해만일대에 대한

관심과 답답한 갈증에 연구 확대의 필요성을 느끼는게 아님. 뭔 소리인줄 모르시겠음??

기본적으로 무슨 학문이라는게 반론에 반론을 통해서 깨지거나 보완되거나

전진해나가는거지 무슨 딱 어느 포인트만 잡아서 이거다 이 밖에는 없다??

어디 주 예수?? 교회 단니심??

님처럼 이렇게 밀어부친다고 뭔 다 될 것 같은 세상이면 학문 활동이나

연구를 계속해서 왜 하는가요??(더이상 파헤치고 나올것도 없다는 식인데)

정정-활석혼입계(滑石混入系 )
밥밥c 15-06-29 21:58
어짜피 한나라의 것이라고 지리서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제시 할 수도 없다면, 유물은 아무런 근거가 될 수 없어요.

 원래 유물은 해석여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죠.
바람노래… 15-06-29 22:32
없습니다님의 글을 제가 잘못 읽고 있었나요?
전 없습니다 님이 낙랑국을 이야기 한것으로 보고 있었는데,
지금껏 한사군의 낙랑군을 이야기 하고 계셨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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