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아래 한사군 낙랑글에 달린... 없습니다/님의 댓글을 보고
잠원
조회 : 3,623
[몇번 나온 이야기지만, 해방후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 유물이 너무 많아서(수천점) 이제는 낙랑의 중심지가 평양이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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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유물이 많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알만한데... 낙랑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무슨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일까용?
유물에 "한나라 군현 낙랑"이라고 직인이 찍혔다는 것일까? 그런 유물인 한 점이라도 있다는 말일까?
[낙랑군 설립후 60년후에 인구조사한 결과를 보면 중국계 15%에 원주민계 85%정도로 나옵니다. 이때까지는 따로 조사한걸로 봐서 중국계하고 원주민계하고 융합이 안되었다는것을 보여주죠. 하지만 낙랑의 존재기간이 수백년이고 그 후로 중국으로 부터 특별히 대량의 이주가 있었다는 기록이나 증거가 없는걸로 봐서 얼마안가서 두 민족이 통합되었을게 거의 확실합니다. 이럴경우 낙랑이 중국의 역사냐 한국의 역사냐 하는 문제가 남는데, 대부분의 주민들이 원주민계고 그후 고구려에 통합되므로 낙랑 역시 우리 민족의 역사로 보는게 더 타당합니다. 낙랑을 중국이 한반도에 설치한 식민지라고만 보는건 너무 편협한 역사 인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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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동강 유역에 중국계가 15%?
근거는?
한당시대 요동에 중국인 인구가 얼마쯤일까?
15%는 고사하고 1.5%도 어렵것구만..
헌디 요동에서 그만큼 더 먼 지역까지 중국인들이 몰려 왔디야..
천 수백년 후.. 명나라시절 요동의 중국인 인구가 5% 될까 말까일텐데..
당시 황무지가 넘치던 시절인데.. 뭘 먹을게 있다고 험한 북방으로 기어 들어 왔다는걸까?
실크로드가 아닌 노다지 길이라도 있었다는걸까?
실크로드가 열리고서도 신장지역은 여전히 한족 구경하기 어렵고.. 감숙 회랑지역조차 인구의 15%조차 어렵던 시절에..
(감숙 회랑지역을 황무지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텐데.. 여긴 기련산맥 만년설로부터 흘러내린 물과 충척토로 이뤄진 최고의 비옥한토지지역- 무엇보다 한족 밀집지역과 인접)
더구나 원주민과 융합이 안되었다고 덧붙이면서 상상하며 소설쓰고 놀고 있으니..
이리 말한 근거는 과연 뭘까?
공상하면서 쓴 니꼴리는데로 아닌가?
[1. 일제시대때 발굴된 유물은 70여기고, 해방후 발견된 유물이 수천기라고 써놓았는데요. 님이 역사책 해석에만 골몰한 모양이네요. 이런 기초적
낙랑에 관해서 한가지만 더 말하고 샆은건, 평양에서 발견된 유적지가 해방후에 북한에서 발견된것만수천기라서 더이상 평양과 낙랑의 연관성을 부정하는게 불가능하다는것과 함께 낙랑은 엄연히 우리의 역사로 봐야한다는 점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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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유물이 수천기나 된다는걸까?
평양지역에서 한사군 낙랑의 유물이 수천기가 발굴되었다?
사실일까?
한사군 낙랑의 유물인가? 아님 당시 유물인가..
유물들이 한사군낙랑의 것이라는 증거가 함께 나왔나?
수천점의 유물이 출토되는데도..
북한에서는 한사군 낙랑의 평양설을 부정하고.. 점점 많은 학자들이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없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현실인데.. 이들은 사실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한다는건가?
이런 놀고 있는 댓글에..
고대사에 기초에 해당되는 사기치는 주장에 .. 변변한 반론도 못하고 놀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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